고방서예[2779]知止止止(지지지지)
知止止止(지지지지)
그칠 줄을 알아서 그칠 곳에서 그친다.
○ 知(알 지)○ 止(그칠 지)○ 止 (그칠 지)○ 止(그칠 지)
지지지지(知止止止)란
지지지지(知止止止)는 그침을 알아 그칠 데 그친다는 말입니다.
이번에도 노자(老子) 어르신의 어록을 좀 살펴 보겠습니다.
아래는 도덕경(道德經) 제44장의 원문(原文)입니다.
名與身孰親, 身與貨孰多, 得與亡孰病.
是故甚愛必大費, 多藏必厚亡.
知足不辱, 知止不殆, 可以長久.
풀어보자면, ‘이름(名)과 몸(身) 중 어느 것이 더 친한가?
몸(身)과 재화(貨)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多)?
얻음과 잃음 중 어느 것이 더 근심(病)인가?
그러니 지나친 탐욕(愛)은 반드시 큰 비용을 치르고,
많이 감추면 반드시 많이(厚) 잃는다.
만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을 알면 위태롭지 아니하니,
길게 오래간다고 할 수 있다.’
하나 더 보고 가겠습니다.
이번엔 도덕경 제32장입니다.
『道常無名 樸雖小, 天下莫能臣也,
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賓, 天地相合,
以降甘露, 民莫之令而自均. 始制有名,
名亦旣有, 夫亦將知止. 知止, 可以不殆
, 譬道之在天下, 猶川谷之於江海.』
‘도(道)는 항상 이름이 없고,
순박하여 비록 가볍게 여겨지지만(小),
천하가 능히 신하로 삼지 못하니,
후왕이 능히 그것을(之) 지킬(守) 수 있다면(若)
만물이 장차 스스로 따르고(賓),
천지가 서로 화합하여 감로를 내리게 되니,
백성은 명령을 쓰지(之) 않아도 스스로 따르게(均) 된다
. (사물의) 시작은 이름을 있게(有名) 만들었으니,
이름은 또한 이미 있었을 뿐이고(亦).
그것은(夫) 역시 마침을 알려고 한 것이다.
마침을 안다는 것은 지치지 않게 한다.
비유하건대 도가 천하에 있음은
냇물과 골짜기가 강과 바다로 가는 것과 같다(猶).
위 44장과 32장에서
노자(老子)가 하고자 하는 말의 핵심은 멈춤이고,
지족(知足)입니다. 나아감과 멈춤을 앎으로
위태롭지 않으며 자신을 보존하며,
이것이 곧 약수지생(若水之生)이라고 합니다.
지족은 곧 지지(知止)이며,
지지는 바로 위 도덕경 44장의 가르침처럼
‘만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을 알면 위태롭지 아니하니,
길게 오래 간다’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고구려 을지문덕(乙支文德)장군이
수(隋)나라 장수 우중문(于仲文)에게 보낸 시(詩)가 있는데요,
우중문은 수나라의 폭군 양제(煬帝)가
612년(영양왕 23년) 제2차 고구려(高句麗) 원정 때
우문술(宇文述)과 함께 30만 육군을 이끌고 쳐 들어 왔으나
그 해 7월 살수(薩水 : 청천강(清川江))에서
을지문덕(乙支文德)에게 참패 당하고 겨우
2천여명이 살아 돌아가 하옥되어
자신의 화를 참지 못하고 옥사한 장수(將帥)입니다.
여기서 하나,
살수(薩水)에 대해서는 주류 사학계에서는
지금의 평양 서북쪽의 청천강(淸川江)으로 말하고 있지만
일부 비주류 학자들 사이에선 요하(遼河)부근,
또는 지금의 중국 요녕성(遼寧省) 심양(沈阳) 동쪽 근방의
지천(支川)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참고하시고요.
神策究天文(신책구천문), 妙算窮地理(묘산궁지리).
戰勝功旣高(전승기공고), 知足願云止(지족원운지).
그대의 신기(神奇)한 책략(策略)은 하늘의 이치(理致)를 다했고,
오묘(奧妙)한 계획(計劃)은 땅의 이치를 다했노라.
전쟁(戰爭)에 이겨서 그 공(功) 이미 높으니,
만족(滿足)함을 알고 그만두기를 바라노라.
제4구의 ‘만족(滿足)함을 알고 그만두기를 바라노라.’라는 구절은
피차간(彼此間)에 도덕경을 알고 있다는 전제(前提)하에 쓴 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시는 언뜻 보면 상대방을 추켜 세우는 듯 하지만
실상은 ‘이제 할만큼 했으니 이 정도에서 돌아가면 봐줄게,
아니면 살아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라는 강력한 경고의 시(詩)이지요.
결국 우중문은 이 시의 진간(眞間)을 알고 심리전에 휘말려 명(命)을 재촉하게 되지요.
고려 무인정권시대 문인(文人)이었던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李奎報)는
자신의 당호(堂號)를 지지헌(止止軒)으로 지었습니다.
사실 이규보는 문인의 측면에서 보면
조선시대의 율곡(栗谷)을 뛰어 넘는 천재이지만
정치인의 측면에서 보면 무인(武人) 최충헌(崔忠獻)의 밑에서
벼슬을 함으로써 후대의 평가(評價)가 극과 극으로 갈리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이규보에 대한 인물평전이 아니니 이쯤 하고요,
지지(止止)는 주역(周易) 간괘(艮卦) 초일(初一)에 그 내용이 있는데,
‘그칠 곳에 그치니 속이 밝아 허물이 없다.
『知于知, 內明無咎』“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규보는 ”지지(止止)라는 말은 그칠 곳을 알아 그치는 것이다.
그치지 말아야 할 데서 그치면 지지가 아니다.“라고 말하며,
이어서 ”천하 만물은 제각기 자기가 처(處)해야 하는 곳이 정해져 있다.
호랑이나 이무기는 깊은 산속에 있어야 하며,
물고기는 물에 있는 것이 지극히 천하의 도리다.“라고
부연(敷衍)하였습니다. 당연한 말을 멋지게 했지요..?
우리는 종종 ’이번만‘, ’한 번만‘, ’나만큼은‘,
이런 생각하면서 삽니다. 이미 선을 넘었음에도
여태 아무 일도 없었으니 이번에도 괜찮겠지 하는 방심(放心)이
결국 큰 화(禍)를 부르는 경우가 있지요.
그침을 아는 지지(知止)도 중요하지만
이를 즉각 행동(行動)으로 옮기는 지지(知止)가 더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칠 수 있을 때 그쳐야지, 나중에는 그치고 싶어도
그칠 수가 없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젊은이들 말에 ’낄낄빠빠‘라는 말이 유행이라지요.
바로 지지(知止)의 통속(通俗)어가 아닌가 합니다.
설 때와 갈 때를 아는 것,
이것이야 말로 가이불태(可以不殆)의 시종이치(始終理致)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이유는 결국 이 분간을 잘 알아채고
결정의 찰나(刹那)를 놓치지 않기 위함입니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 내가 일어서야 할 자리,
내가 떠나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 우리 모두 언제 앉고,
일어서고, 떠나야 하는지를 깊게 고민하고 생각해 보는
그런 하루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주역 건괘(乾卦) 문언전(文言傳)에는 知至至之가 나온다.
‘知至至之 可與幾也 知終終之 可與存義
(지지지지 가여기야 지종종지 가여존의)’,
이를 줄을 알고 이르니 더불어 기미(幾微)를 알 수 있고,
마칠 줄을 알고 마치니 더불어 의리를 보존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 뒤에 ‘그러므로 (군자는) 윗자리에 있어도 교만하지 않고
아랫자리에 있어도 근심하지 않는 것이다’라는 말이 이어진다.
보통 ‘知至至之 知終終之’라고 줄여서 쓴다.
어떤 자리에서 물러날 때 흔히 하던 말이다.
우리말 ‘지지지지’는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나 모양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