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날 내가 찍어놓은 발자국들이 쏟아지는 소나기에 게 눈 감추듯 매일화랑 뒷골목으로 사라지고 없다
다리 아픈 줄 모르고 그림을 감상하던 예비 숙녀가 오늘은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를 만나기 위하여 두근두근 계단을 오른다
구순의 엔니오 눈빛에서 흘러나온 음악은 맑은 호수 콩나물 다듬으려 펴놓은 흰 종이 위에 맑게 일렁이는 호수의 악보를 옮긴다
찾아간 아카데미 CGV 영화관에서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사람들은 늙어버린 동성로를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간다
우두망찰 구름 씹고 있는 내가 속 팍팍한 만두에게 길을 묻는다
◇권순우= 경북 의성 출생. 계간 ‘인간의 문학’ 등단. ‘글로벌 경제신문’ 시니어 신춘문예 당선. 형상시학회 회원. 시집 ‘꽃의 변신’, ‘춤추는 캐리커처’가 있음.
<해설> 젊었을 때 걸었던 길을 오랜 세월이 흘러간 뒤 시인은 다시 걷고 있다. 어떤 밀려오는 소회를 담담하게 써 내려간 시다. 옛날의 예비 숙녀가 오늘은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를 만나기 위하여 두근두근 계단을 오른다. 영화음악 거장의 생애를 만나기 위해 영화관을 찾아간 것이다. 시인은 동성로 거리에서 과거와 현재가 혼재된 채 시간의 계단을 넘나든다. 오버랩되는 시간의 개념은 시가 가지는 시간 예술로서의 장점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다. 장소는 그대로 둔 채 짧은 한 편의 시 안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다 담고 있다. 길 위의 나이는 그 길 위를 걷고 있는 화자는 같은 사람이다. 단지 과거에는 다리 아픈 줄 모르고 그림을 감상했다면 지금은 우두망찰 구름을 씹으며 속 팍팍한 만두에게 길을 묻고 있다. -박윤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