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 33,14-16; 1테살 3,12―4,2; 루카 21,25-28.34-36
+ 찬미 예수님
지난 한 주간 안녕하셨어요? 많이 추우셨죠?
때아닌 추위로 고생 많으셨습니다. 벌써 2024년 달력이 한 장 밖에 남지 않았고, 대림 시기를 맞이했습니다. 제대 앞에는 첫 번째 대림초가 켜지고, 사제와 전례 봉사자들은 희망과 기다림을 상징하는 자색 제의와 전례복을 입었습니다.
저의 자색 제의에는 샤를 드 푸코 성인께서 쓰신 글씨와 그림이 새겨져 있는데요, 라틴어로 예수스, 까리따스 즉 예수님의 사랑이라는 글자와, 십자가와 하트 그림입니다.
십자가에서 드러나는 예수님의 사랑을 의미하는데, 오늘 제의를 입으면서, 저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두 단어가 무엇인가, 바로 ‘예수님’과 ‘사랑’이 아닌가 하고 다시 생각하였습니다.
오늘부터 성탄절인 12월 25일까지 우리는 대림 시기를 지내며 예수님의 두 가지 오심을 기다립니다. 첫 번째 오심은 2천 년 전에 베들레헴에서 아기의 모습으로 태어나신 것이고, 두 번째 오심은 세상이 완성될 때, 곧 세상 종말에 다시 오시는 것입니다. 다시 오신다고 하여 ‘재림’이라는 말을 씁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사도신경에서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세상의 심판이 잘못되어 있기에 예수님께서는 다시 오셔서 공정과 정의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키릴루스 교부는 이렇게 말합니다. “구세주께서 두 번째로 오실 때에는 다시 재판받으러 오지 않으시고 당신을 재판정에 불렀던 이들을 심판정으로 부르러 오실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그날과 그때에 내가 다윗을 위하여 정의의 싹을 돋아나게 하리니, 그가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룰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처음 오셨을 때에는 우리가 아직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었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는 우리가 이미 이 세상을 떠났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두 가지 오심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나 자신에게 이루어지는 예수님의 첫 번째 오심과 두 번째 오심을 묵상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 신자로 살아가고 있거나 예비신자로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에게 오신 예수님의 첫 번째 오심은 어떠했습니까? 구약의 예언자들이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예고하듯,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예수님과의 만남을 준비시켜 주었습니다. 그분들은 부모님이나 가족일 수 있고, 친구나 지인일 수 있습니다. 또, 내가 감동적으로 읽은 책을 내게 권해준 사람, 혹은 그 책을 쓴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나를 점차 준비시켜 준 수많은 예언자들로 인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고 있었고, 어느 때에 예수님께서 내 안에 오심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때는 세례나 첫영성체 또는 예수님을 진심으로 깊이 있게 받아들인 어느 순간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에게 예수님의 두 번째 오심은 무엇일까요? 초대 교회의 많은 신자들은 자신들이 살아 있을 때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기원후 50년경, 최초의 신약성경인 테살로니카 1서를 쓸 때,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오늘의 제2독서는 바오로 사도께서, 예수님의 재림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하신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힘을 북돋아 주시어, 우리 주 예수님께서 당신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재림하실 때, 여러분이 하느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흠 없이 거룩한 사람으로 나설 수 있게 되기를 빕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재림은 바오로 사도 때에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왜 교회는 이 말씀을 2천 년 동안 읽고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재림은, 비록 초대 교회 신자들이 기대했던 방식으로는 아니지만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각 개인의 죽음을 통해서입니다. 우리는 죽음과 동시에 이 세상의 시간의 법칙에서 벗어나, 완성된 세상, 영원한 세상에 참여합니다. 지상에 있는 우리의 시간으로 그것은 먼 미래에 일어날 일이지만, ‘영원’이라는 시간의 관점 안에서 그 일은 이미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죽음과 세상 종말은 비록 다른 사건이지만, 우리에게 그 둘은 동시에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라”고 하시며,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세상 종말을 준비하라는 말씀이면서 동시에 죽음을 준비하는 우리의 자세에 대한 말씀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제게는 외삼촌이 세 분 계신데요, 지난주에 큰외삼촌께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큰외삼촌은 제가 어렸을 때 제 이름을 잘 기억 못하셔서 ‘유정이’ 대신에 ‘윤정이’라고 자주 부르셨는데, 제가 신학교에 들어간 이후에는 저를 좀 어려워하셔서 제게도 약간 어려운 분이셨습니다. 명절 때 만나면 항상 겸연쩍게 저에게 인사를 건네셨고, 형제와 친척들로부터 늘 술담배를 줄이라는 핀잔을 들으셨습니다.
그런데 지난주에 빈소에서 외삼촌에 대한 말씀을 들으니, 제가 알던 분이 맞으셨나 싶을 정도로 제가 기억하는 모습과는 다른 모습으로 주위 분들에게 기억되고 계셨습니다.
성당 일에 언제나 열심이셨고, 위령회 활동을 하셨는데, 장례가 나서 위령회원들이 가 보면 언제나 이미 도착해 계셔서 모든 준비를 마쳐 놓으셨다고 합니다. 위령회장님과 두 분이 단짝이셨는데, 두 분이 성당의 궂은 일을 도맡아 하시고, 성인 복사도 함께 서셨으며, 신부님께서 제의를 입으실 때 제의나 영대가 비뚤어져 있으면 항상 외삼촌이 바로 잡아주셨다고 합니다. 본당 신부님은, 다른 사람이 제의 만지는 건 싫어하셨는데 외삼촌만은 예외셨다고 합니다.
빈소에 오신 모든 분들이 한결같이 이 이야기를 하시다가, 위령회장님을 가리키며 ‘아마 저분이 지금 가장 슬플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멀리서 이 이야기를 듣던 위령 회장님은 ‘형님 얘기 그만하라’며 역정을 내셨습니다. 그런데 빈소에서 고인 얘기를 안하면 누구 얘기를 해야 하나요? 저희 외삼촌께서는 항상 조카가 신부인 것을 자랑스러워하시며 제 자랑을 많이 하셨다고 합니다.
다른 형제들보다 뒤늦게 신앙 생활을 시작하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열심히 위령회원과 전례 봉사자로 봉사하고 계신 줄은 잘 알지 못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듣자니,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존경받지 못한다”는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나의 가족과 친척이 다른 곳에서는 무척 존경을 받고 있는데, 어쩌면 나는 그분께 합당한 존경을 드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더불어, 한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빈소에서 가장 잘 알게 된다는 점 또한 깨달았습니다. 미국에서 어떤 부인이 돌아가셨는데 지방 신문에 이런 부고가 실렸다고 합니다. ‘마가렛 여사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한평생 쇼핑을 위해 몸 바친 분이셨습니다.’ 어떤 분의 빈소에서는, 그분이 실천하신 희생과 사랑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분이 얼마나 취미활동에 열심이셨는지에 대해서만 들은 적도 있었습니다.
과연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사람들은 우리의 빈소에서 무슨 이야기를 할까요? 우리는 오늘 2독서의 말씀처럼 “우리 주 예수님께서 당신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재림하실 때” 우리가 빈소에서 듣게 될 나의 삶의 이야기를 주님 앞에서 자랑스럽게 들려드릴 수 있을까요?
다른 형제들보다 늦게 예수님을 받아들이신 외삼촌은, 아마 예수님의 첫 번째 오심을 당신 마음 깊은 곳에 새기시며 예수님의 두 번째 오심을 위령회원으로서, 제대의 봉사자로서 최선을 다해 맞아들이지 않으셨을까 싶습니다.
나에게 오신 예수님의 첫 번째 오심은 어떠했던가요? 내가 기억하는 그분과의 진지한 첫 만남은 언제였으며 그때 그분은 나에게 어떤 의미이셨던가요? 나에게 오실 예수님의 두 번째 오심은 어떠할까요? 나는 “복된 희망을 품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릴 수” 있을까요?
샤를 드 푸코 성인, "예수(IESUS) 까리따스(CARITAS)"
+ 주님, 김용문 대건 안드레아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