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37-45 바로와 그 모든 신하가
모세는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요셉의 의견을 좋게 받아들여서 마침내 바로가 요셉의 의견만 받은 게 아니고, 그를 애굽의 총리대신으로 삼은 사실을 기록합니다.
1. 본문 37-39절은
"(37) 바로와 그 모든 신하가 이 일을 좋게 여긴지라
(38) 바로가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 을 수 있으리요 하고
(39)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있는 자가 없도다" 입니다.
여기서 필요는 최상의 교사라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장관이나 치안관을 두기로 했다면 그 사람의 자격을 고려하지도 않고 총애를 받는 사람이 그 명예직을 맡을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무자격한 자가 공직을 맡는 수가 생깁니다.
그래서 정치 질서는 교란되고 인간은 여러 가지 불편을 겪습니다.
그 모든 것은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술수를 써서 사건을 처리해 나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보면 야심이 개가를 올리어 공평을 전복시키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필요는 건실한 판단을 가져옵니다.
바로는 모든 사람들 마음 속에 본래부터 새겨져 있는 것, 바로 그것을 말했습니다.
유능한 사람이 명예를 차지해야 하며 하나님이 필요한 자격을 구비해 준 그런 사람이 명예를 차지해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러나 경험은 훌륭히 가르쳐 줍니다.
인간은 이 자연스런 이법(理法) 을 잊어버렸고 함부로 그러한 원리에 도전하고도 거리낌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현명하게도 바로의 교만은 놀랍도록 전복되어 야심을 물리치고 방금 옥에서 나온 외국인을 자기 모든 신하들보다 앞세울 수가 있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요셉이 실제로 그들 모두보다 유능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그 필요성이 그 나라의 고관들을 자제시켰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전처럼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싸우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것은 공공의 복리를 거역한다는 것을 그들이 부끄럽게 생각했기 때문에 나온 어쩔 수 없는 겸양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이 그들 심중에 공포감을 심어 주시사 만장일치로 요셉이 그 나라 주재가 되게 하신 게 분명합니다.
한편 바로가 자기 점장이들을 무척 사랑해 왔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요셉이 가지고 있는 성령의 은사를 존중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것은 사실 하나님께서 비록 희미하게나마 하나님의 전능을 못 느낄 만큼 그렇게 야수처럼 되도록 사람에게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 아무리 불경한 사람일지라도 신(神)에 대한 한 가닥 의식은 남아 있는 법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 같은 지식은 별로 쓸모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 자식들이 인간의 과거의 우매를 바로잡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자는 자기 입으로 말한 하나님을 경멸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실상 올바른 하나님을 참으로 모르고 있고 지속적으로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지식이 때로 불경건한 자를 일깨우나 회개에 이를 정도로 밝게 비추지는 못합니다. 따라서 아무리 작은 가치를 지닌 원리라도 거기서 확실한 신앙심이 우러나오는 것이라면 존중해야 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2. 본문 40-45절은
"(40) 너는 내 집을 치리하라 내 백성이 다 네 명을 복종하리니 나는 너 보다 높음이 보좌뿐이니라
(41) 바로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로 애굽 온 땅을 총리하게 하노라 하고
(42)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사슬을 목 에 걸고
(43) 자기에게 있는 버금 수레에 그를 태우매 무리가 그 앞에서 소리 지르기를 엎드리라 하 더라 바로가 그로 애굽 전국을 총리 하게 하였더라
(44) 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나는 바로라 애굽 온 땅에서 네 허락 없이는 수족을 놀릴 자가 없으리라 하고
(45) 그가 요셉의 이름을 사브랏바네아라 하고 또 온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을 그에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하니라 요셉이 나가 애굽 온 땅을 순찰하니라" 입니다.
1) 이제 요셉은 애굽 총독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왕의 훈장으로 장식하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요셉을 존경하게 되고 그의 명령에 복종하게 되었습니다.
인장 반지가 포고령 인준을 위해서 그의 손에 넘어와 있습니다.
그는 세마포 옷을 입었습니다. 세마포 옷이란 당시에는 화려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웬만한 돈으로는 구입할 수가 없는 옷이었습니다.
그는 가장 영예로운 병거를 탔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이 그렇게 화려한 모습을 해도 좋은가 하는 질문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호화는 어느 때고 비난을 받습니다. 또 외형적 장식을 절제하는 것이 최상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군왕들에게는 아무리 호화스런 것이라도 그들이 지나치게 사치를 탐내지만 않는다면 정죄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런 것을 자랑해서는 안됩니다.
참으로 절제란 언제나 좋은 미덕입니다.
그러나 요셉으로서는 자기 복장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할 권한이 없었습니다.
왕권이 또한 요셉이 관습적인 위풍당당한 모습을 하지 않는 채 지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터이며 그럴 경우 요셉은 거절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들에게 선택권이 있다면 그들은 외부적 위풍 따위는 할 수 있는 한 벗어버리는 것이 안전합니다.
그들이 공중 관습에 적용해야 할 필요가 있는 곳이면 일체 허례허식을 조심해야 합니다.
본문 말씀 해석에 관심을 가져봅시다.
우리는 온 백성이 그대의 입에 "입을 맞추리라": (칼빈 역본)고 해석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무장하게 되리라'고 또는 '그대의 뜻에 따라 먹게 되리라' 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나샤크)라는 동사의 본 뜻은 '입맞추다' 입니다.
따라서 다른 해석은 외곡된 것이라고 봅니다.
이 말에 어떤 특별한 존경의 표시가 들어 있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문구는 상당히 은유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요셉의 입에서 어떤 명령이 떨어지든지 거기에 충심으로 따라 주기를 바란다는 내용을 말한 것입니다. 바로의 말은 '그가 무엇을 명령하든지 모든 백성이 그에게 입을 맞추듯이 일치 단결하여 수락하는 것이 나의 뜻이니라' 는 방식의 말입니다.
'둘째 병거' 란 히브리인들 해석은 왕 다음 자리를 차지하는 부왕의 병거를 뜻합니다.
그러나 그 분명 뜻은 요셉이 애굽 모든 대신들을 통할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2) (아브레크)란 단어의 뜻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다른 견해가 있습니다.
요셉의 나이가 아직 젊은 시기이므로 그것을 '연소한 아버지' 라고 해석하는 자들은 자기들 생각 때문에 억측을 한 것입니다.
요셉은 나이가 어렸어도 성인의 신중성과 지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왕의 아버지'로 해석합니다.
마치 그 단어가 히브리 명사 (아브: 아버지)와 아랍어 명사 (라크: 왕)와 혼합 명사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별로 신빙성이 없습니다.
실제로 그 단어가 히브리어라면 '무릎을 꿇다' 라고 해석하는 자들이 더욱 타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그리고 잠시 후에 모세가 애굽 말들을 번역했을 것이라고 봅니다.
따라서 애굽말들을 헛되이 외곡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구속주' 혹은 '비밀의 해설자' 라고 해석하는 자들도 있는데 그것도 역시 우스꽝스러운 장난입니다.
오히려 헬라 해석자들의 견해를 따르고 싶습니다. 그들은 두 단어를 그대로 두면서 외국어에 속하는 것으로 입증하려는 것이 그들의 해설입니다.
흔히 믿는 바대로 요셉의 장인은 '제사장' 이었습니다.
이것은 믿고 싶진 않지만 논박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코헨)이란 단어가 '군주'와 '제사장'을 다같이 뜻하는 이상 요셉의 장인은 조정의 고관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그는 온(On) 시(市) 의 태수나 장관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3) 우리가 여기서 보는 대로 바로가 요셉을 애굽 총리대신으로 등용하였습니다.
(1) 너는 내 집을 치리하라(40절) 이것은 애굽 나라를 다스리라는 뜻입니다.
"인장 반지"란 말은 권세의 훈장이었습니다(에3;10, 8:2).
"세마포 옷"은 애굽의 교관들이 입는 옷이었습니다.
"금사슬"은 나라에 공적 있는 자에게 주는 장식품이었습니다.
"버금 수레"는 바로가 타는 수레 다음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엎드리라"란 말은 요셉에게 순종하라는 뜻입니다.
(2) 요셉은 극도로 낮은 자리에서 이렇게 갑자기 높아졌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낮은데서 갑자기 높아지는 것은 흔히 하나님의 역사로 되는 일입니다.
극히 낮아진 자를 가장 높은 자리로 올리실 수 있는 이는 하나님뿐이십니다.
삼상2:6-8 상반에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3) 바로는 요셉에게 권세를 주고 이름을 "사브낫바네아"로 고쳐 주고 결혼을 시켰습니다.
"사브낫바네아"란 말은 "생명의 풍성함"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도"신(神)께서 말씀하시고 또 사신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물론 여기서 말한 "신"은 애굽 여신(女神) 네이드(Nieith)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다신론(多神論) 사상과 관계된 이름입니다.
"온"이란 땅은 애굽 카이로의 동북쪽으로 7마일 가서 있는 히에로플리스인데 라(Ra)라는 태양신(太陽)神)을 공경하는 중심지였습니다.
"보디베라"는 "라(Ra) 곧 태양신이 준 사람" 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아스낫"은 "태양신에 속한 자" 란 뜻입니다.
(4) 요셉 자신이 다신론과 관련된 애굽식 이름 '사브낫바네아'를 받았고 또 다신론과 관련된 이름을 가진 이교(異敎) 제사장의 딸 "아스낫"을 아내로 취하였습니다.
그 아내도 역시 다신론과 관련되었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에 우리에게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것은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만 공경하는 요셉이 다신론에서 유래된 이름을 받았을까?
또한 다신론과 관계된 아내를 취하였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생각하면 이런 일들이 그에게 문제될 것 없었겠습니다.
그 이유는 요셉이 받은 애굽식 이름이 어원적(語源的)으로 다신론과 관련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 이름의 어원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원이란 흔히 우리 일용 생활에 큰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 나라에서도 신자들의 이름을 가지고 어원 풀이를 한다면 진리에 합당치 않은 이름도 많을 것입니다.
또 요셉이 이교(異敎) 제사장의 딸을 취한 일도 우리는 크게 문제 삼을 것 없습니다.
그 제사장의 딸이 요셉이 섬기는 하나님께로 개종(改宗)하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에 바로 자신이 요셉의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38-39).
때문에 모든 고관들까지도 그의 종교적 지도를 받을 만큼 분위기가 형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