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노정
1968년 2월 8일(목), 전 본부교회.
<말씀 요지>
1960년에서 1963년까지는 외적으로 가정과 종족을 찾아 세우는 기간이었습니다. 그래서 124쌍까지 축복을 완료한 것입니다. 그 이후는 선생님의 가정적인 기준을 세우는 기간이었습니다.
1968년 2윌 8일을 기해 지난 40일간의 활동에 의해 선생님의 가정이 어떤 매듭을 짓고 나가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선생님만이 아는 것입니다.
이번 수련회에는 말씀에 대한 기준 향상과, 기구 개편을 위한 준비라는 두 가지의 목적이 있습니다.
식구들의 지적 수준의 저하를 볼 때 부끄러운 생각과 함께 책임감을 느낍니다.
6월 1일부터는 북한 동포들을 위한 기도를 시작해야 합니다.
아벨은 가인을 굴복시킬 수 있는 실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북은 이길 자신이 있을 때 남한을 치려 할 것입니다. 한국은 축복가정을 중심하고 이것을 영적으로 막아야 합니다. 이북에서 치려는 힘보다 우리가 그들에게 주려는 힘이 더 클 때, 이북은 칠 힘을 잃습니다.
이제 중․소 간에 분쟁이 일어나면 미․중공이 가까워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북한이 곤경에 빠지게 됩니다.
철산의 새주파(김성도)와 허호빈의 복중교는 예수님의 뜻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복중교에서는 예수께서 33세 때까지 고난받은 것을 탕감하기 위하여, 재림주님이 오시면 매일 새 옷을 세 번 갈아입을 수 있는 많은 양의 옷을 준비했습니다. 그때가 일제 말기였습니다. 그들은 일본이 망할 그 시일, 시간까지 알았습니다.
이용도 목사가 여자(유명화)를 주(主)라고 한 후 이단으로 몰렸습니다. 이용도의 뜻을 김백문이 이었습니다.
선생님은 1945년 10월 김백문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 안에서 교인들의 신앙을 지도했습니다. 영계를 통하는 사람들은 백문 씨보다 문 선생을 따르라고 말했으나 그들은 원리를 몰라 선생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김백문은 선생님을 만난 후 6개월 만에 계시를 받고 선생님은 솔로몬 왕과 같은 사명을 받은 분이라고 축복을 했는데, 그는 그 진정한 뜻을 몰랐습니다. 그리고 선생님께 일언반구 묻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선생님이 자진해서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상봉 후 21개월 만에….
그뒤 선생님은 성진과 그의 어머니를 남겨 놓고 서울을 떠나 1946년 6월 6일 이북의 평양에 도착했습니다.
당시 김백문은 이승만 박사와 가까운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그를 세례 요한 입장에 세우고 뜻을 이룰 수 있었으나, 그렇게 되지 못했습니다.
이북에서 자기가 하나님의 부인이라고 하는 인물을 찾았습니다.
이번에는 김백문이 축복한 터전 위에 하나님의 부인이라 하는 여인에게도 축복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 부인이 박○○ 할머니였습니다. 그 남편은 한 씨 성을 가진 지방의 유력자였습니다. 선생님은 당시 박 씨 할머니를 어머니 이상으로 모시는 입장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집에는 10남매가 있었는데, 그들이 좋아하는 동생의 입장에 섰습니다.
이때 박 씨 할머니는 선생님을 처음에는 종으로 증거하다가 그다음에는 양자, 예수님의 동생으로 증거했고, 마지막에는 예수님의 아버지, 즉 하나님의 실체이니 자기 남편이라고 증거했습니다.
이때부터 선생님은 주관성을 바로잡고 박 씨 할머니에게 섬기라고 명령하는 입장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그 할머니에게 경배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이때 갑자기 위치가 바꿔지는 것을 감당하지 못해 그 할머니는 40일간을 영육 아우른 싸움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선생님을 하나님의 역적이라고까지 말하였습니다. 박 씨 할머니가 선생님을 반대하므로 대신 다른 사람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해와는 재창조할 수 있는 원칙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정적인 기준을 세우지 못함으로 인해 평양에서 1948년 2월 22일에 입감되어 옥중에서 2년 8개월간 있었습니다. 그것은 세례 요한이 사명을 못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가신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옥중에는 라헬의 입장인 김○○씨가 같이 입옥(入獄)되어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옥중에서 흩어진 제자들을 다시 만났습니다.
김○○는 라헬의 입장, 박 씨 할머니는 레아의 입장이며, 또한 나○○ 이라는 부인이 있었습니다. 이 세 부인이 선생님을 협조해야 했습니다.
선생님이 옥중에서 출감한 후는 실체로 부활한 입장과 같으므로 원리를 그대로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국가로부터 핍박을 당한 것같이 선생님도 국가로부터 핍박을 받아야 했습니다.
김○○는 선생님과 같이 옥에 들어갔었으나, 재림주가 옥에 갇힐 수 있는가 하는 시험에 걸려 떨어졌습니다. 선생님이 영안으로 볼 때, 그녀의 영인체가 ‘육신이 가니 따라가지 않을 수 없다.’ 하면서 눈물 흘리던 일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잃어버린 딸, 누이, 어머니 이 3대의 심정을 복귀하기 위해서 할머니로부터 20대 연령의 여자에 이르기까지 다 복귀해야 합니다.
옥세현 할머니는 이북에서 연결 짓는 사명을 했습니다. 원래는 옥세현 할머니 가정이 중심이 되어야 했으나, 남편의 반대로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득삼씨가 그 사명을 이어받았습니다.
선생님은 3시대의 여성을 복귀하는 기준을 세워야 되므로, 심정의 십자가를 지는 길을 가야 했습니다. 외적 고난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박 씨 할머니는 영계의 역사를 실체로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전부 재림하여 역사했습니다. 천사장의 실체 역사와 같은 역사도 하였습니다.
원산의 백남주 씨는 스웨덴보르그를 연구하고 그의 책을 번역한 사람으로서, 주님이 한국으로 오신다는 계시를 받고 주님의 역사를 하였고, 그 고난을 탕감하기 위하여 철산의 김성도 씨(정 장로 모친)를 맨발로 걸어가서 만났고, 김성도 집단을 성주교라는 이름으로 총독부에 등록을 해 주었습니다. 그는 한국 최초의 세례 요한 사명자였습니다. 그 뒤로 그 뜻이 이용도, 김 백문에게로 옮겨졌습니다.
1월 18일은 선생님 생애에 잊지 못할 가슴 아픈 날입니다. 그(김백문)가 받건 받지 아니하건 선생님으로서는 충고하여 청산하지 않고는 심정적인 재출발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그에게 열여덟 장의 편지를 썼는데, 이것을 다 찢어버린 날이었습니다. 이것을 찢은 후 선생님은 책임 다한 입장에서 평양으로 떠났습니다. 이날이 없이는 평양에 갈 수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