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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원문보기 글쓴이: 하늘호수♡마리아
+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지금은 목요일 저녁, 이 시간에 내일 유튜브에 올라갈 강의를 녹음하고 있습니다.
요즘 날이 참 좋습니다.
오늘은 바람이 많이 불었지만, 그 바람도 와닿는 느낌이 좋았습니다.
다만 매괴 장미와 꽃들이 너무 흔들리다가 떨어질까, 걱정돼 자꾸 창밖을 내다보면서 꽃들을 확인하곤 했습니다.
지금 그야말로 매괴 장미가 어떤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아름답게 피었습니다.
오늘 카페에도 제가 사진을 찍어서 몇 장 올린 것이 있습니다.
유튜브에만 들어오시는 분들은 카페에 올려 있는 제 사진을 아마 보시기가 어려울 겁니다.
카페에 가입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다음(Daum)으로 들어가셔서 ‘주님의 느티나무’라는 카페에 가입하면 됩니다.
본인이 어려우면 하실 줄 아는 분께 카페에 가입 좀 시켜달라 하면 해줄 겁니다.
가입만 하면 ‘준회원’이기 때문에 ‘등업신청방’에 등업을 부탁하십시오.
그러면 운영자들이 바로 정회원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그래야만 저에 관련된 것들을 전부 다 보고 듣고 읽으실 수가 있습니다.
오늘 찍어 올린 사진은 제 포토방에 따로 있죠.
그리고 또 저 어릴 때부터 살아온 것을 쭉 담아놓은 ‘타임머신’이라는 방도 있고, 또 제가 글 쓴 것들도 있고,
아무튼 여러분들에게 유익한 영적 카페입니다.
들어가시면 아마 진작 들어올 걸 왜 이제야 들어왔나 싶으실 겁니다.
지난 수요일에는 ‘다윗의 타락’에 대해서 얘기했죠.
왕궁 옥상을 거닐다가 밑에 목욕하고 있는 한 여인을 보고 그 여인이 자기 부하 장수의 부인인 것을 알면서도 불러들여 잡니다.
간음합니다.
제가 지난번에 얘기했듯이, 그 밧세바라는 여인도 내가 볼 때는 의도적이었다.
상식적으로 빤히 보이는 데서 누가 목욕을 합니까? 더군다나 여자가 홀딱 벗고.
아마 다윗 왕이 옥상에서 거니는 시간을 알고 있었던 밧세바라는 여인의 속셈, 한마디로 유혹한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리숙한 다윗은 그 순간에 신앙이고 하느님이고 다 잊어버리고, 임신까지 됐죠.
그래서 그 임신을 어떻게 덮어버리려고 별짓을 다 하다가 결국에 밧세바의 남편 우리야까지 죽입니다.
다시 말하면 음란죄가 자라고 자라서 살인죄까지 이르게 됩니다.
바로 그때 나탄이라는 예언자, 또 다윗의 어떤 멘토인 나탄이라는 선지자가 다윗이 하는 꼬라지를 보다가,
다윗 앞에 나타나서 엄하게 꾸짖는 얘기가 나옵니다.
다윗은 근본적으로 하느님 말씀을 무서워하는 사람임에는 분명합니다.
나탄이 나타나 다윗을 꾸짖자 부들부들 떨면서 그 죄를 깊이 참회합니다.
참회하면서 읊었던 저 유명한 시가 바로 시편 51편입니다.
시편 51편, 꼭 읽어 보기 바랍니다.
나탄의 얘기를 좀 상세히 드리면 이렇습니다.
어느 날 선지자 나탄이 다윗 왕에게 옵니다.
선지자 또는 예언자라고도 말하고요.
선지자는 자기 말을 얘기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지시하신 말씀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나탄 선지자는 다윗 왕이 상담하는 사람, 즉 고문격 역할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있었기에, 나탄을 통해 하느님 말씀을 듣던 일이 많았을 겁니다.
나탄은 다윗 인생의 스승이었죠.
그런데 스승 같은 나탄이 분노해서 다윗에게 온 겁니다.
나탄은 분노를 애써 참으면서 태연하게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왕이시여, 세상에 이런 기막힌 일이 다 있습니까? 한번 들어보시겠습니까?
어떤 성에 두 사람이 있었는데 하나는 부자고 하나는 아주 가난뱅이였습니다.
그런데 부자는 양과 소가 굉장히 많았지만, 가난한 자는 아무것도 없고 자기가 사서 기르는 작은 암양 새끼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는 암양 새끼를 자식과 함께 키웠고, 또 자기들이 먹는 것을 같이 먹였죠.
또 자기들이 먹는 잔에 같이 물을 먹으면서 자기 품 안에서 암양을 마치 딸처럼 키웠죠.
그런데 그 부잣집에 어떤 손님이 오자, 그 부자는 손님에게 무언가를 대접하기 위해서 자기 양과 소를 잡은 것이 아니라,
자기의 많은 양과 소에는 벌벌 떨면서 가난한 사람이 기르고 있던 양 새끼를 빼앗아다 대접했다고 합니다.
왕이시요, 이 얘기를 들으시고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다윗은 그 얘기를 듣고 그 가난한 자가 불쌍한 나머지 크게 분노하면서 말했죠.
‘그렇게 가난한 자의 양을 뺏어다가 손님을 대접하는 그 부자는 마땅히 죽어 마땅하다.’
그 얘기를 듣자마자 선지자 나탄이 어떻게 했습니까?
언성을 높이면서 날카롭게 다윗에게 외칩니다.
‘왕이시여, 당신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어찌해서 당신이 야훼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악을 행했습니까?
당신이 우리야를 죽이고 그의 처를 빼앗아 당신의 처로 삼지 않았습니까?
야훼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네 집에 재난을 일으킬 것이고,
내가 네 처들을 내 눈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주어 그가 네 처들과 백주에 동침하게 할 것이다.’’
이렇게 나탄 예언자가 호통을 치니 사색이 된 다윗은 뭐라고 그럽니까?
딱 한 마디 합니다.
‘내가 야훼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렇게 통회하며 빕니다.
이 이야기는 사무엘기 하권 11장, 12장에 상세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시편 51편은 이때 다윗이 참회하는 마음을 애타게 읊은 시라는 얘기죠.
제가 여기에서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무엇이냐?
왕의 지위에 있는 다윗에게 두려움 없이 하느님의 말씀을 계시하고 견책하는 선지자 나탄의 당당한 태도입니다.
여러분들 우리나라 역사를 뒤돌아보면 해방된 이후 오늘날까지 이렇게 민주주의 국가로 자리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긴 독재의 세월이 있었습니까?
또 군사 쿠데타에 의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까?
한국 정치 역사는 그 어둠의 역사를 결코 지울 수 없습니다.
우리의 역사 안에 그 어둠도 고스란히 녹아져 있습니다.
독재 시절에 말 한마디 잘못하면 어디로 끌려가고 쥐도 새도 모르게 실종되고,
나중에 시체로 발견되기도 했던 일들이 참 비일비재했습니다.
여러분들 그거 아시죠? 독재를 계속하려면 세 가지를 잡아야 한다.
첫 번째가 종교, 두 번째가 학생, 세 번째가 언론을 잡으면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독재자들은 이 세 가지를 먼저 손아귀에 줘야만 독재를 시작할 수도 있고, 또 독재의 장기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보면, 글쎄요, 종교를 다 확 잡을 수 있었을까?
물론 다는 아니지만, 불교도 ‘호국불교’라고 정치에 빌붙은 모습을 보였던 사람들도 있었죠.
또 개신교도 보면 ‘조찬 기도회’라고, 그것을 통해 정권에 기대는 거짓 목자들도 있었습니다.
물론 불교고 개신교고 의롭고 정의로운 분들은 많은 고초를 겪으면서 자정 노릇, 정화 노릇을 하려고,
자기반성의 목소리를 크게 외치다 왕따도 당한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의로운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보편적으로 볼 때 가장 독재자들한테 눈에 가시는 천주교였습니다.
천주교 실제로 많은 사제가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탄압을 당했죠.
가톨릭이 지금의 민주화에 끼친 공헌을 정치사적으로 볼 때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신부님들 가운데는 이 나탄 예언자처럼 정의를 외쳤던 사제들도 많이 있습니다.
물론 목사님들도 많죠.
또 스님들도 몸 바쳐서 이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있었던 분들도 너무너무 많습니다.
아무튼 종교와 학생과 언론을 잡지 못하면 독재는 얼마 가지 못합니다.
이야기가 조금 다른 방향으로 흘렀지만,
나탄 예언자가 아무리 다윗의 멘토라 하더라도 다윗이 하는 짓을 나탄 예언자만 봤겠습니까?
그 궁궐에 있는 사람들은 다 알았던 겁니다.
‘참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자기 부하를 죽이면서까지 부하의 아내를 부인으로 맞아들이네, 부인이 지금 한둘도 아닌데.’
그렇지만 수군수군 댈 뿐이었지 감히 그 얘기를 꺼낼 수 없었던 겁니다.
그렇지만 나탄 예언자는 부자와 가난한 자의 예를 들면서 다윗에게 ‘이 이야기 듣고 왕이시어 어떤 생각이 듭니까?’
그러니까 ‘가난한 자의 양을 빼앗은 그 부자, 그놈은 죽일 놈이다.’
바로 ‘당신이 그런 사람이요.’ 하면서 호통을 칩니다.
나탄 예언자는 조금도 두려움 없이 목소리를 높여서 죄를 꾸짖습니다.
아마 전 세계 모든 나라에서 이스라엘만큼 이렇게 강한 목소리를 내는 종교인들이 있었을까?
사실 이스라엘에는 나탄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죠.
모세를 비롯해 예레미야, 아모스, 엘리야 등등, 어떤 왕의 모든 권력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 말씀에 순종한 선지자가 수도 없이 나타나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신자들도 각자가 진정으로 목숨을 걸고 하느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 전하는 자가 되지 않으면 아니 될 겁니다.
저는 이 강론을 하면서 사제생활 41년 동안 두려움 때문에 그리고 힘 앞에서
그것 때문에 사제의 예언직을 내가 포기한 적이 있었던가 한번 뒤돌아봤습니다.
그런데 정말 감사에게도 저는 군종 신부 때도 정말 거대한 권력의 맞서 억울한 우리 교우를 지키려고 애를 무지하게 썼고,
무섭고 꼬리를 내려야 하는 순간에도 저는 움츠리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예언자 노릇을 했다고 하는 것에
하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들 교리적으로 세례를 받으면 세 가지의 지위에 오른다고 그러죠?
그리스도의 사제직, 예언직, 왕직의 품위에 오릅니다.
이 세 가지를 다른 말로 ‘만인제사장’이라 그럽니다. 제사장이 되는 것이죠.
권력자를 두려워하지 않고, 세간의 눈초리도 두려워하지 않고,
때로는 직장의 상사도 겁내지 않고 하느님 뜻에 맞는 발언을 한다는 것, 자기 소신을 표현한다는 것,
이것은 자기만 알고 살아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행동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욱더욱 하느님을 의뢰하고 경외하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아멘
다윗은 선지자 나탄의 견책에 따라 곧 하느님 앞에 죄를 참여합니다.
다윗이 우리야를 살해하고 그의 처를 탈취한 짓은 물론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선지자 나탄에게 질책받은 그때, 다윗의 태도는 갸륵할 정도로 솔직해 보입니다.
딱 한 마디 합니다.
‘내가 야훼께 죄를 범했습니다.’
오직 다윗은 이렇게 말할 뿐이었죠.
그는 전혀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과오를 저질렀을 때 오직 ‘내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이렇게 이 말 한마디만 하면 될 터인데 여간해서는 그렇게 말하질 않습니다.
사람을 죽여도 도둑질해도, 무엇인가 자기가 몽땅 나쁘지 않고 상대방이 나빴다 변명합니다.
‘저놈이 나를 괴롭혀서 내가 죽였습니다.’
‘문이 잠겨 있지 않아 들어갔던 겁니다. 왜 문을 안 잠가놓아서 나 같은 도둑이 들어가게 만듭니까?’
이렇게 변명합니다.
또 ‘죄를 범한 내가 왜 나쁩니까? 죄를 짓게 하니 사회가 나쁘죠.’ 이렇게 얘기합니다.
인간은 참 쉽사리 두려워할 줄 모릅니다.
‘다른 사람이 내 입장이었다면 이런 죄는 범하지 않았을텐데.’ 하며 겸손하게 생각하려 하질 않습니다.
누군가 나를 괴롭혔기 때문에 내가 그를 죽였다는 사람보다 훨씬 더 심하게 괴롭힘을 당했어도
다른 사람을 죽이지 않는 사람이 훨씬 더 많습니다.
‘변명’이라는 것은 결국엔 자기중심적인 생각에서 나오게 되어 있죠.
자기를 정당화하려는 생각, 나에게도 이유가 있다는 생각, 나는 나쁘지 않다.
‘나는 옳다’는 생각이 늘 앞서기 때문에 변명이 나오는 겁니다.
그렇기에 과감하게 ‘잘못했습니다.’ 이렇게 말하지 못하는 거죠.
그렇지만 다윗은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훌륭한 겁니다.
왕 위에 앉아 있는 그는 권력으로 흑을 백이라고 할 수도 있는 위치에 있었죠.
또 그렇게 직언하는 나탄을 말살시킬 수도 있었습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선지자의 질책 앞에 고개를 숙인 겁니다.
1급 정치가가 될 수 있는 자격 중 하나가 비판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정치가 중에 허심탄회 겸손하게 비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 것 같습니까?
아마 굳이 정치인만이 아니라 우리도 각자 자기에 대한 비판에 솔직하게 귀 기울이고 살아가고 있는가 생각해 볼 때, 그렇질 않죠.
우리는 권력을 가진 자가 자기를 비판하는 자를 투옥하고 또 자기를 반대하는 자를 부당하게 처형하는 일을
역사상에서 수도 없이 많이 봐왔습니다.
소위 공포 정치인 거죠.
소련의 숙청부터, 이북에 김일성이 정권을 잡을 때, 또 한국도 그런 어두운 역사가 있습니다.
다윗은 왕이면서도 나탄에게 권력을 휘두르지 않고 오히려 두려워했습니다.
이 태도는 역시 우리가 진심으로 배워야 할 태도일 겁니다.
저는 이 강론을 하면서 다시금 새삼스러운 생각이 듭니다.
시편 51편은 다윗이 바로 그런 마음 상태에서 읊었기 때문에,
다윗이 고백한 이 시편을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당연하단 생각을 다시 새삼스럽게 하게 된다는 뜻이지요.
이 시편을 처음 봤을 때 사실 다윗을 잘 몰랐습니다.
그렇지만 몹시 감동되었고 강하게 마음이 끌렸죠.
상하고 상한 겸손한 영혼의 부르짖음은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시편은 참회의 노래로 유명하죠.
사제들의 성무일도에도 이 시편은 자주 등장합니다.
자기 죄로 울면서 사죄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큰 공감과 위로를 받지 않을 수가 없을 겁니다.
제가 한번 읽어드리겠습니다.
시편 51편
하느님, 선한 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어지신 분이여, 내 죄를 없애주소서.
허물을 말끔히 씻어주시고 잘못을 깨끗이 없애주소서.
내 죄 내가 알고 있사오며 내 잘못 항상 눈앞에 아른거립니다.
당신께, 오로지 당신께만 죄를 얻은 몸, 당신 눈에 거슬리는 일을 한 이 몸, 벌을 내리신들 할 말이 있으리이까?
당신께서 내리신 선고 천번 만번 옳사옵니다.
이 몸은 죄 중에 태어났고, 모태에 있을 때부터 이미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마음속의 진실을 기뻐하시니 지혜의 심오함을 나에게 가르쳐주소서.
정화수를 나에게 뿌리소서, 이 몸이 깨끗해지리이다. 나를 씻어주소서, 눈보다 더 희게 되리이다.
기쁨과 즐거움의 소리를 들려주소서. 꺾여진 내 뼈들이 춤을 추리이다.
당신의 눈을 나의 죄에서 돌리시고 내 모든 허물을 없애주소서.
여기까지가 9절까지고 51편 전체는 19절까지 이어져 있습니다.
내가 최초에 이 시편을 읽었을 때는 참 많은 공감을 했습니다.
왜? 전부 다 내가 하느님께 들려드리고 싶은 내 마음이었기 때문에 그랬죠.
참 공감이 많이 갔습니다.
그리고 이 시편을 읽고 난 후에 하느님이 우리의 죄를 정결하게 씻어주신다는 큰 기쁨을 갖게 되었죠.
이렇게 참으로 은혜롭고 또 성령스러운 시편이 많습니다.
우리는 신앙의 횟수가 거듭할수록 순진했던 신앙에 손때가 묻게 됩니다.
‘불감증’이라고 하는 병에 걸리게 되죠.
그래서 우리의 심령과 통회하는 마음이 차츰 엷어지고 없어지게 됩니다.
그전에는 작은 아픔에도 하느님의 뜻을 찾으려고 했던 순진했던 마음이,
또 내가 저지른 작은 잘못에도 눈물을 흘리면서 통회했던 그 겸손했던 마음이,
세월이 지나면서 점점 두껍게 두껍게 각질이 쌓이듯이 우리의 양심을 무디게 합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이 시를 읽습니다.
그리고 이 시를 읽으면서 무뎌진 내 양심을 다시 정화시키고, 부끄럽지 않다고 여겼던 것들이
얼마나 부끄러웠던 것인가를 깨달으면서 주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래서 이 시편 51편은 평생 내가 사랑하고 애송하는 시편이 될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도 마음속 깊이 스며드는 이 시편을 읊은 다윗을 내가 진심으로 좋아하지 못하는 것은 웬일일까?
아마 그것은 우리야를 살해한 짓을 용서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느님이 용서하신 다윗을 용서하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히 불손한 행동입니다.
어쩌면 다윗을 용서하지 못하는 심정이 있다는 것은,
나의 지인이라든지 또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이와 같은 판단의 마음을 항상 가지고 있다는 증거인지도 모릅니다.
진정으로 내가 이 시를 이해하는 날은 다윗을 용서할 수 있는 날이고,
다윗을 용서하지 않는 한 이 시를 좋아할 자격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성 어거스틴을 비롯해서 많은 돈독한 신앙의 선배들이 이 시편 51편을 사랑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임종의 자리에서 이 시편을 암송하면서 죽었다고 합니다.
여러분들도 하루는 성서의 심장이라 불리는 시편을 펼쳐놓고 좋아하는 시를 찾아보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이상 ‘시편과 다윗에 관련된 이야기’를 이것으로 끝을 내겠습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잠언을 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윗의 이야기가 어디 나오는지 제가 아까 말씀드렸고요.
그리고 참회하면서 읊었던 시편 51편을, 우리들의 마음이 무뎌질 때마다
그리고 잠자기 전에 한 번이라도 천천히 낭송해 본다면 두 눈에 아마 뜨거운 눈물이 흐를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들 하늘의 별만큼 사랑합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이들에게 축복을 내려주소서. 아멘
♣청주교구 원로 사목자 김웅열(느티나무) 신부님
출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