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를 깨달았다고 해도 오히려 지혜를 깨달은 그 자체가 바로 지혜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듯이....
그런데 불교의 교리는 부분적인 견성(見性)인 만큼 교리가 사실상 불완전하기도 하지만 즉 깨달음과 지혜와 관상과 명상도 교리를 넘어서 있는 것은 아니고 10계명을 지키고 7덕을 지켜서 완덕(의 경지)에로 이끄는 깨달음과 지혜와 관상과 명상이 아니라면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듯이 어떤 것을 깨달은 부분은 인정하지만 깨달았다고 해도 교리적인 부분을 다 대신할 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솔로몬이 석가모니 부처님이 지혜를 깨달았다고 해도 오히려 지혜를 깨달은 그 자체가 바로 지혜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듯이....(424-425, 466-475페이지 참조) 즉 그러니까 삼위일체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유위법(有爲法)의 교회를 세우신 무위법(無爲法)의 실체(實體)로써 즉 한마디로 자연적인 2차원과 초자연적인 3차원의 세계가 공존하는 것으로써 즉 그러니까 계율이나 八正道의 경지란 복음을 지키고 10계명과 완덕인 7덕(신덕, 망덕, 애덕, 지덕, 의덕, 용덕, 절덕)을 잘 지켜서 정결, 청빈, 순명은 절덕에 포함되는 덕으로써 10계명과 완덕인 7덕을 지키기 위한 견성(見性)이나 계시(啓示)가 아니라면 그런 견성(見性)과 계시(啓示)는 (거짓) 사상으로써.... 그러니까 보리달마의 저작《혈맥론》에서도 즉 견성(見性)을 해야 생사윤회를 벗어난다고 근본적으로 가르치고 예수님은 “윤회는 없다”고 피타고라스의 학설은 오류라고 근본적으로 가르치시니 창조와 윤회 둘 중의 하나는 당연히 진리가 아니겠지만.... 견성(見性) 체험과 깨달음(완덕)을 구분하지 못하는 등....(439-444, 449-455, 460-472, 497-502페이지 참조) 즉 그러니까 교리적으로 지키는 정결과 청빈과 순명의 절덕의 경지는【‘성모성심 메시지’에서 ‘천당문 열고 들어가니 9층이 보이고’ 단테의 ‘神曲’에서 연옥, 지옥, 천국도 제10천 하늘까지 여행하듯이....(486페이지 참조)】천당에서는 초보적인 완덕 성인의 단계라고 이제는 파악해 볼 수가 있듯이 즉 송담스님께서《《《인터넷 다음 백과사전「화두(話頭)」: 공안(公案)·고칙(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의 ‘화(話)’는 말이라는 뜻이고, ‘두(頭)’는 머리, 즉 앞서 간다는 뜻이다.
따라서 화두는 말보다 앞서 가는 것, 언어 이전의 소식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따라서 참된 도를 밝힌 말 이전의 서두, 언어 이전의 소식이 화두이며,… 염화두(念話頭)를 놓치지 않고 계속 하게되면 일을 하거나 말을 하면서도 화두가 또렷하게 들리는 간화두(看話頭)를 할 수 있게 되고, 간화두가 되었을 때 거듭 대용맹심을 불러일으키면 참의심(眞疑)이 생겨나서 산을 보아도 산이 아니고 물을 보아도 물이 아닌 대무심(大無心)의 경지에 들게 되는데, 이때의 화두를 참화두(參話頭)라고 한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게 되면 며칠이 지나지 않아 도를 깨치게 된다고 한다. 즉, 화두가 또렷하게 잡혀서 놓아지지 않는 경지, 밤이나 낮이나 잠을 자나 꿈을 꾸나 항상 참화두가 되는 경지에 이르면 7일을 넘기지 않고 확철대오(廓徹大悟:확연히 꿰뚫어 크게 깨우침)하게 된다.》》》화두를 자주 말씀하시듯이 즉 그러니까 ★깨달았다고 말을 해도 초보적인 깨달음은 성숙된 깨달음이 오면 ‘아차! 그때 잘못 깨달았구나!’ 하고 나도 이렇게 여러 번 바뀌었듯이 바뀔 수가 있는 것이지만 교리가 바뀌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즉 그러니까 교리대로 살지 않고 10계명을 지키지 않는다면 참된 도(道)도 아닌 것이며 10계명과 7덕(신덕, 망덕, 애덕, 지덕, 의덕, 용덕, 절덕)을 지키면 정결, 청빈, 순명은 절덕에 포함되는 덕으로써 완덕(깨달음)을 이루는 것이고 즉 화두를 들고 선정삼매에 이르는 깨닫음(완덕)도 있어왔고 즉 7덕을 닦아서 완덕(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도 있어왔듯이 즉 이것이 (‘조그마한 번뇌도 묻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참된 지혜를 상징한 것’)이라는 즉 이것이【계시(啓示)의 완성자이신】삼위일체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모든 우상을 쳐부수시고 십자가의 구속 사업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교리적인 지혜 자체의 가르침이 아니겠습니까?(417-424, 439, 455-475, 475-501, 501-509페이지 참조)【(영성시집 ‘216. “하나는 하나요 둘은 둘이다「견성(見性)과 계시(啓示)」③”’ 편 507-509페이지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