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에 관한 소묘 (1)
【시 전문】 - 문덕수(文德守)
선(線)이
한 가닥 달아난다.
실뱀처럼,
또 한 가닥 선(線)이
뒤쫓는다.
어둠 속에서 빛살처럼 쏟아져 나오는
또 하나의, 또 하나의, 또 하나의
또 하나의
선(線)이
꽃잎을
문다.
뱀처럼,
또 한 가닥의 선(線)이
뛰쫓아 문다.
어둠 속에서 불꽃처럼 피어나오는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꽃이
찢어진다.
떨어진다.
거미줄처럼 짜인
무변(無邊)의 망사(網紗),
찬란한 꽃 망사(網紗) 위에
동그만 우주가
달걀처럼
고요히 내려앉다.
- [사상계](1965.3) -
인연설因緣說 / 문덕수
어느 연둣빛 초봄의 오후
나는 꽃나무 밑에서 자고 있었다.
그랬더니 꽃잎 하나가 내려와서는
내 왼 몸을 안아 보고서는 가고,
또 한 잎이 내려와서는
입술이며 이마를 한없이 부비고 문지르고,
또 한 잎이 내려와서는
손톱 끝의 먼지를 닦아 내고,
그리하여 어느덧 한세상을 저물어
그 꽃나무는 시들어 죽고,
나는 한 마리 나비가 되어
그 꽃이 가신 길을 찾아 홀로
아지랑이 속의 들길을 꿈인 듯
날아가고 있었다.
-시집<수로부인의 독백>1991
침묵 1 / 문덕수
저 소리 없는/ 청산이며 바위의 아우성은/ 네가 다 들어버렸기 때문이다// 겹겹 메아리로 울려 돌아가는 정적 속/ 어쩌면 제 안으로만 스며 흐르는/ 음향의 江물!// 천 년 녹슬은/ 鍾소리의 그 간곡한 응답을 지니고/ 恍惚한 啓示를 안은 채/ 일체를 이미 비밀로 해버렸다//
종이 한 장 / 문덕수
죽음과 삶의/ 사이에/ 잎사귀처럼 돋아난/ 흰 종이 한 장/ 무슨 예감처럼/ 부들부들 떠는 성난 종이의/ 언저리에 불이 붙고,/ 말씀이 삭아서 떨어지는/ 십육(十六)절지 반(半)의 백지./ 죽음과 삶의/ 사이에/ 잎사귀처럼 돋아난/ 흰 종이 한 장.//
시는 어디로 / 문덕수
시는 어디로 갔나/ 앞에서는 높은 빌딩들이 줄줄이 막아서고 뒤에선/ 인터넷의 바다가 출렁이고/ 머리 위를 번개처럼 가로지르는 핵탄두 미사일// 인도의 새끼코끼리 귀만한/ 광화문 네거리 플라타너스 새 잎사귀에 머물었나/ 백화점 에스컬레이터 3층 완구점에서 내려/ 파란 스웨덴 인형의 눈알 속에 숨었나/ 핸드폰 뚜껑 속 번호의 유령/ 리모컨으로 조종하면/ 스크린에 알록달록 빈 그림자들이 뜬다/ 시는 어디로 갔나/ 서울역 앞 지하에서 너끈히 사흘을 굶은/ 풋내기 노숙자들의 체중에 휴지로 밟혔나//
손수건 / 문덕수
누가 떨어뜨렸을까/ 구겨진 손수건이/ 밤의 길바닥에 붙어 있다/ 지금은 지옥까지 잠든 시간/ 손수건이 눈을 뜬다./ 금시 한 마리 새로 날아갈 듯이/ 발딱발딱 살아나는 슬픔.//
선에 관한 소묘 1 / 문덕수
선이/ 한 가닥 달아난다./ 실뱀처럼,/ 또 한 가닥 선이/ 뒤좇는다,/ 어둠 속에서 빗살처럼 쏟아져 나오는/ 또 하나의, 또 하나의, 또 하나의/ 또 하나의/ 선이/ 꽃잎을/ 문다./ 뱀처럼,/ 또 한 가닥의 선이/ 뒤좇아 문다./ 어둠 속에서 불꽃처럼 피어나오는/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꽃이/ 찢어진다/ 떨어진다/ 거미줄처럼 짜인/ 무변(無邊)의 망사(網紗),/ 찬란한 꽃 망사 위에/ 동그만 우주가/ 달걀처럼/ 고요히 내려앉다.//
선에 관한 소묘 2 / 문덕수
영원히 날아가는 의문의/ 화살일까./ 한 가닥의/ 선의 허리에/ 또 하나의 선이 와서/ 걸린다/ 불꽃을 품고/ 얽히는/ 난무(亂舞),/ 불사(不死)의 짐승일까./ 과일처럼 주렁주렁 열렸던/ 언어는 삭아서/ 멀어지고,/ 일체가 불타버리고 남은/ 오직 하나/ 신비한 매듭.//
선에 관한 소묘 3 / 문덕수
은빛 실날을 뽑으며/ 그물을 짜는/ 한 올의 바람,/ 이윽고/ 환상처럼 걸리는 조롱(鳥籠),/ 천사의 손도 얼씬 못하는/ 조롱./ 그 속에/ 지구는 무한의 구석을 울리는/ 쓸쓸한 새./ 금빛 구름을 뿜으며/ 그물을 짜는/ 한 가닥의 지푸라기,/ 이윽고/ 허무의 가지 끝에 걸리는 초롱.// 신의 눈도 얼씬 못하는/ 초롱./ 그 속에/ 우주는 영겁의 모서리를 밝히는/ 호젓한 불꽃.//
선에 관한 소묘 4 / 문덕수
그것은/ 18세기의 내장 속을/ 기생하는, 한 마리/ 세균(細菌)./ 그것은/ 벽(壁) 뒤로/ 폭동과 군중을 거느린/ 하나의 점(點)./ 그것은/ 침묵의 축축한 밑바닥을/ 핥는/ 파편./ 그것은 실패한 지도의 꿈./ 아니/ 지구를 둥근 3각형으로/ 변조하려다/ 들킨/ 미충(微虫).//
선에 관한 소묘 5 / 문덕수
한 가닥/ 선이/ 여윈 내 손목을 묶어 보고,/ 몇 번이고 내 모가지를 묶어 금빛으로/ 졸라 보고,/ 벽 못에서/ 풀려 내려온 노끈이/ 누나의 모가지를 졸라 죽였다./ 그 때의 눈알/ 그리곤/ 퀴퀴한 냄새가 풍기는/ 창녀의 치마끈이 되었던/ 한 가닥/ 선이,/ 경부선(京釜線) 레일로/ 시장댁(市長宅) 뜨락의 살의(殺意)의 나뭇가지로/ 십년 전의 누나 얼굴로 돌아갈 수 없는/ 한 가닥/ 선이,/ 지중해 연안(沿岸)을 구석구석 더듬은,/ 내 누나 같은/ 낫세르 중령(中領)의 눈동자 속에/ 지중해의 윤곽으로 들어앉아/ 쉬고 있었다.//
내 침실 / 문덕수
신발 밑바닥을 털지 않아도 신장은 투덜대지 않는다/ 낡은 TV만이 한 대 오롯이 앉은 거실의/ 벽시계 밑을 탈 없이 지나서/ 내가 없는 내 방을 들어간다/ 아무도 말리지 않는다/ 천장은 어제 그대로의 높이여서 안전하고/ 벽은 10년 전의 그 높이로 날 안아준다/ 등산모 운동모 맥고모자는 모자걸이에 걸려 있고/ 오늘은 벗어 걸 아무 것도 없다/ 내 생일 선물의 빨쁘레질리 카운티스마라도 있지만/ 사흘 전의 구겨진 와이셔츠도 그대로다/ 침대 머리맡 탁자 위의/ 그리스도의 비밀, 붓다의 입문/ 아직 못 읽은 신간이 천장을 받치고 있다//
새벽바다 / 문덕수
많은/ 태양이/ 쬐그만 공처럼/ 바다 끝에서 튀어 오른다/ 일제히 쏘아올린 총알이다./ 짐승처럼/ 우르르 몰려왔다가는/ 몰려간다./ 능금처럼 익은 바다가/ 부글부글 끓는다./ 일제 사격(一齊射擊)/ 벌집처럼 총총히 뚫린 구멍 속으로/ 태양이 하나하나 박힌다./ 바다는 보석 상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