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헌윤봉길월진회는 2024년 생생국가유산 ‘룰루랄라 충의사에서 놀아보자! <윤봉"길"따라 동네한바퀴>를 8월 17, 24, 31(토) 11:00~18:00까지 충의사 일대에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 사업은 국가 유산의 가치를 재조명하고 군민들의 문화 향유 기회를 확대하기 위한 것으로 국가 유산에 내재된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지역의 인적·물적 자원과 결합해 문화유산 향유하기 위함인데요. 예산군에서는 독립운동가 매헌 윤봉길 의사가 조직한 월진회와 함께 ‘매헌 윤봉길 의사’의 삶과 업적을 쉽게 이해하고 경험할 수 있도록 놀이·체험형 프로그램을 구성했습니다.
윤봉길의사의 영정이 모셔진 사당에 도착해 해설사의 해설을 들었는데요. 충남 예산에 위치한 충의사는 45,000평이 넘는 넓은 부지에 만들어진 충의사는 윤봉길 의사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충의사는 크게 4개 구역으로 구분되어 있다고 해요. ‘본전지역’은 윤봉길 의사 영정을 모신 사당과 충의 문, 홍살문 등이 있고, 기념관 지역은 윤봉길의사기념관, 어록탑이 있다고 합니다. 윤봉길의사기념관에는 유품(보물 제568호) 27종, 51점이 전시되어 있으며, 윤봉길 의사의 짧은 일대기를 매직 비전 11대와 각종 영상, 디오라마로 보여주고 있다고 해요. 현재는 재개관을 위한 공사 등 정비작업이 한창이라 방문한 날은 이용할 수 없다고 해 아쉬웠답니다. 역사를 놀이로 즐길 수 있다는 매리트가 있어서 어린이 친구들이 프로그램에 많이 참석했네요. 어린이 친구가 대표로 향을 올리고 다같이 기념사진을 찍고 배용순 여사 묘소로 향했습니다.
배용순 여사는 매헌 윤봉길 의사의 부인으로 1922년 16세에 김구 선생의 주선으로 결혼했으며,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고 1988년에 작고하셨다고 해요. 23살에 윤봉길의사가 중국 상하이로 망명할때 목마르다고 부엌에서 일하던 아내에게 물 한그릇 달란 말이 마지막 인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배여사는 윤봉길 의사 사후에도 시부모와 시동생, 자녀들을 돌보며 생전에 남편 윤봉길 의사의 명예로운 죽음 앞에 혹시 누가 될까봐 늘 말을 아끼며 조용히 사셨다고 해요. 윤봉길의사가 순직할 당시 어린아들 윤종이 3세였고 둘째 윤담은 복중에 있었는데요. 윤담은 태어나서 2세를 넘지 못하고 영양실조로 사망했다고 합니다.
배용순여사는 1982년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여받았는데요. 1982년부터 배용순 여사를 기리기 위한 ‘배용순 효부상’ 등 각종 시상식이 제정되어 열리고 있다고 합니다. 1985년 장남 윤종이 사망하고 며느리와 손자들과 함께 노년을 보내던 중 1988년 서울 동작구 자택에서 숙환으로 향년 82세에 별세하셨습니다. 이에 윤봉길 의사가 안치된 효창공원에 안장하려고 했으나 윤봉길 의사가 머물던 곳을 지키고 싶다는 유언에 따라 사회장으로 영결식 후 현재 위치인 예산 충의사 후록에 안장되었다고 하네요. 독립운동가 아내로 살아온 배용순 여사의 파란만장하지만 강인한 삶에 가슴이 먹먹해 집니다. 현재 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에서는 '배용순여사 효부상'을 제정하여 매년 시행하고 있다고 해요.
매헌 윤봉길 의사 사적지 입구에는 '윤봉길의사의거 기념탑'과 윤봉길의사 조형물이 있어 기념촬영을 할 수 있도록 조성되어 있습니다. 윤봉길 의사는 1908년 6월 21일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농민이었던 아버지 윤황과 어머니 김원상의 장남으로 태어났다고 해요. 본관은 파평으로 고려 명장 윤관의 28대손이라고 합니다. 윤봉길 의사의 본명은 우의이며, 호는 매헌, 봉길은 윤의사가 스스로 지은 별명이라고 합니다.
저한당은 윤봉길 의사가 4살 때부터 중국으로 망명했던 1930년 이전까지 살았던 곳인데요. '저한당'이라는 이름은 '한국을 건져 내는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저한당은 초가지붕과 나무 문으로 지어졌으며 내부 방바닥에는 짚을 엮어서 만든 돗자리가 깔려 있어 당시 가난했던 윤의사 가족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고 해요.
1926년 윤봉길은 건너편 공동묘지에서 여러 묘표(墓表)를 뽑아들고 선친의 무덤을 찾아달라고 간청하는 무지한 청년을 만나게 됩니다. 이에 윤봉길은 묘표를 뽑아 무덤의 위치조차 알 수 없게 만든 그 청년의 무식이 나라까지 잃게 한 적(敵)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농촌계몽운동에 뜻을 두게 되는데요. 당시 윤봉길의 나이는 19세였다고 합니다. 윤의사는 자신의 집 사랑방에서 인근 학동들을 가르치다가 학생들이 늘어나자 야학당을 개설하여 한글 교육 등 문맹퇴치와 민족의식 고취에 심혈을 기울였다고 해요.
윤봉길 의사는 1908년에 시량리 도중도(島中島)에서 태어났습니다. 생가인 광현당(光顯堂) 사방으로 냇물이 흐르는 모습이 섬과 같다고 하여 윤봉길 의사가 이곳을 한반도 가운데 위치한 섬이란 뜻의 ‘도중도’라고 불렀다고 해요. 또한 일제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라 하여 이곳에서 독립운동의 앞날을 설계했다고 합니다. 공사 중이라 가까이서 볼 수는 없었지만 큰 시냇물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서 광현당을 사진에 담아 보았어요.
근처 맛집에서 점심을 먹고 윤의사 일대기 체험이 이어졌습니다. 원래는 저한당 일대에서 체험할 예정이었으나 폭염으로 인해 '윤봉길의사 일대기 체험관'에서 진행했는데요. 첫번째 순서로 그림으로 가족을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먼저 팀명을 정하고 가족들을 그린 다음 우리 가족을 체험객들에게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는데요. 참가한 팀들 모두 각자 재미있고 개성있게 가족소개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윤봉길 의사 생애 관련 영상을 시청하는 시간도 가졌는데요. 윤봉길 의사는 11살이 되던 1918년 덕산공립보통고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이듬해 12세가 되던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덕산 시장에서도 700여 명이 모여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는데요. 윤봉길이 다니던 학교의 일본인 교장은 수업을 중단시켰고, 만세운동의 광경을 직접 본 윤봉길은 일제 식민지 교육을 시키는 학교를 자퇴했다고 합니다. 이후 1921년 매곡(梅谷) 성주록(成周錄)의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한학을 수학했다고 해요. 윤봉길 의사가 19세가 되던 해, 스승 성주록은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으니 세상에 나가 더 깊은 공부를 하라”고 권유했다고 합니다. 또한 자신의 호인 매곡(梅谷)과 평소 윤봉길이 존경하던 성삼문의 호 매죽헌(梅竹軒)을 따서 매헌(梅軒)‘이란 호를 수료 선물로 주었다고 해요. 그 의미는 “한 겨울 추위 속에서 향기를 내뿜는 매화의 고고한 기품과 충의정신을 간직하라”는 의미였다고 합니다.
오치서숙을 나온 후에도 홍성의 유교부식회에 가입하여 홍주의병의 항일정신을 배웠는데요. 윤봉길은 전통교육을 받으면서도 '동아일보'와 민족잡지인 '개벽(開闢)'등을 구독하며 민족운동의 방향을 정립해 갔다고 합니다.
윤봉길 의사는 처음부터 독립운동을 했던 건 아니라고 합니다. 윤봉길 의사가 19세때 농촌을 계몽하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월진회를 조직해 농촌계몽운동을 했는데요. 농촌계몽운동을 가지고는 식민지 노예의 삶을 벗어나기 힘들다는 것을 깨닫고 독립운동의 길을 찾아 나섰다고 합니다.
1932년 4월 29일, 거사 당일 백범 김구 선생과 시계를 맞바꾸고 난 후 홍커우공원에서 수통형 폭단을 투척하여 일제의 상하이 총 사령관 등을 처단하는데 성공하는데요. 아이들과 함께 윤봉길 의사처럼 '투척물폭탄 던지기' 체험을 했습니다. 실제거리의 1/10도 안되는 거리지만 물폭탄 던지기가 생각처럼 쉽지 않았는데요. 윤봉길 의사는 거사 성공을 위해 수없이 많은 연습을 했다고 합니다.
윤의사는 거사에 성공한 후, 모진 고문을 받았지만 배후를 밝히지 않았고, 군법회의 결과 사형을 선고 받았는데요. 상하이 의거 직후에 국내는 물론 중국, 일본, 미국과 유럽 등 세계 각국의 주요 신문에 관련 사실이 보도되었고, 일제 강점기에 있는 우리 민족이 독립을 열망하고 있다는 사실이 전 세계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어서 윤봉길의사의 일대기를 지명으로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는 사방치기 게임도 하고 그림판 놀이도 했는데요. 그림판 놀이는 농민독본과 연관된 내용을 담은 자석 그림판 놀이로 같은 짝 2개를 맞추어 뒤집으며 반복적으로 단어를 보면서 농민독본 관련 단어를 숙지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퍼즐 맞추기는 윤봉길 의사의 유서 중 동포에게 보내는 글 중에 '백 년을 살기보다 조국의 영광을 지키는 이 기회를 택했습니다. 안녕히, 안녕히들 계십시오'라는 글귀를 맞추는 게임인데요.
'1930년 3월 6일, 윤봉길 의사는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장부가 집을 나가니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라는 말을 남기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떠났습니다. 윤의사는 출가하기 전날 어머니가 친정을 가신다고 하셔서 삼거리까지 따라가서 마지막 효도라고 생각하고 가게에서 목을 두르는 큰 수건과 과자를 사주셨다고 해요. 또한 출가 당일날 네 살 난 아이의 얼굴에 볼을 부비고 아내를 보고 목이 메어 집을 나섰다고 합니다. 학창시절 역사시간에 윤봉길 의사의 일화를 배울땐 막연하게 그 마음을 짐작했는데요. 아이를 키우는 부모가 되고 나서 윤의사의 일화를 듣고 있으니 어떤 심정을 가지고 집을 나섰을지 상상하는 것조차 힘들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N행시 짓기, 윤봉길 캐릭터 만들기, 윤봉길 의사에게 엽서쓰기를 하고 발표하는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윤봉길의사의 일대기(출생-중국망명-한인애국단 입단-상하이 의거)를 교실에서 이론으로 공부하는 방식을 벗어나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풀어내서 그런지 어린 학생들이 지루해 하지 않고 쉽고 재미있게 역사를 배우며 까르르 웃고 있는 모습들이 보이네요. 더불어 역사가 살아 숨쉬는 문화재에서 놀이와 체험 학습을 통해 자연스럽게 사회성, 협동심도 키우며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집니다.
체험관에서 윤봉길의사 일대기 체험을 마치고 저한당 일대에서 윤봉길풍물단의 길놀이(쾌지나칭칭나네) 관람을 했습니다. 윤봉길 풍물단 공연팀은 월진회 회원들로 평균 연령 70세 이상이라고 해요. 매주 한번씩 모여서 연습을 하며 관객들에게 역량과 기량을 선보인다고 합니다.
북과 장구를 이용한 풍물 가락을 배우는 시간도 가졌는데요. 우리가 흔히 휘모리 장단이라고 부르는 이채 장단을 배워 보았습니다. 이채장단은 제일 빠른 장단인데요. 궁채를 왼손에 가볍게 쥐고 열채는 오른손에 가볍게 눌러 잡은 후 덩~ 덩~ 쿵덕쿵~ 덩덕덕 ~쿵덕쿵~ 쿵더덕덕~ 쿵덕쿵~ 딱구궁덕~ 쿵덕쿵~ 박자에 맞춰 장단을 맞추니 흥이 더해집니다.
오늘 마지막 체험은 현지농장에서 탄소중림 실천 공기정화식물 심기인데요. 식물심기체험을 하기 전 주인장이 내어준 꽃차도 시음하고, 천일홍으로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나만의 꽃팔찌와 꽃반지를 만들어 착용해 봅니다.
양말목으로 화분걸이를 만들어 보았는데요. 양말을 만드는 과정에서 버려지던 양말목으로 화분걸이를 만든다고 하니 참 좋은 생각입니다. 강사님이 알려준 방법대로 양말목으로 화분걸이를 만드는데 생각처럼 쉽지 않은데요. 아이들의 도움을 받아 양말목 화분걸이를 완성했습니다. 이제 화분에 식물을 식재하면 되는데요. 친환경 토분에 마사토를 깔고 공기정화 식물을 식재한 후 식물 이름표를 꽃아 주니 나만의 멋진 공기정화식물이 완성됐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처럼 광복을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신 독립운동가들을 우리 후손들이 절대 잊지 않고 기억해야겠지요. 오늘 하루 자랑스러운 윤봉길의사의 독립운동 이야기 체험을 통해 유적이 갖는 문화유산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올해로 광복 79주년, 시간내어서 한 번 ‘충의사’에 방문해 보길 추천합니다.
◇충의사◇
● 주소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덕산온천로 182-10
● 전화 : 041.338.9514
● 운영시간
- 하절기(3월 ~ 10월) 오전 9시 ~ 18시
- 동절기(11월 ~ 2월) 오전 9시 ~ 17시
※ 입장은 종료 30분 전까지 가능
주차 : 무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