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엔군의 38선 확보와 후방지역 작전
제 1 절 개요
전선 절단작전(리퍼작전)으로 중부의 제9군단이 춘천을 확보하고 서부의 제1군단이 문산을 점령하는가 하면 동부의 국군 제1, 9군단이 양양까지 진출하자, 제8군사령관은 서부의 진출 통제선인 벤튼선과 중부의 카이로선을 연결하고 전선 절단 작전의 최종 목표를 전군이 이 선까지 진출하는데 두기로 한다.
이 선은 서부의 문산에서 임진강 상류지역을 지나 동두천-춘천-현리를 거쳐 양양 북쪽의 조산리에 이르는 선으로 38도선을 통제할 수 있는 전술적 지형을 연하는 선이다.
이 무렵 적은 이미 38도선 북쪽으로 후퇴하여 부대를 정비 중이였으므로 아군은 별다른 저항없이 3월 말까지 이 선에 도달하였다. 즉 절단작전('51.3.7~31)을 통하여 서울을 재수복하고 최초 계획처럼 적의 병력과 물자에 크게 피해를 가하지는 못했지만 적의 사상자는 상당한 것으로 추정되고 4,800명의 포로를 획득하였다.
이와같은 상황에서 유엔군측은 국군과 유엔군이 38도선에 도달할 무렵 이후 작전과 관련하여 새로운 전략을 모색하고 38도선을 확보하기 위한 작전을 전개하였다.
특히 4월 11일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한 맥아더 장군의 해임은 전선에도 영향을 미쳤다. 중공군 제4차 공세(2월공세) 이후 유엔군의 반격으로 후퇴만 하던 공산군은 대규모의 공세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신임 유엔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은 임명되기 전에 이미 공산군의 공세가 임박했음을 예견하고 지휘관들에게 충분한 대비를 지시하고 있었다. 때문에 공산군의 공세는 전처럼 기슺ㅂ효과를 발휘할 수 없없었다. 더욱이 리지웨이 장군의 후임으로 제8군사령관에 임명된 밴플리트 장군은 전임 사령관과 같은 전투지휘관이었으며, 1948년 그리스 군사고문단장를 지내면서 그리스의 공산 게릴라를 소탕하는데 결정적 역활을 수행하는 등 대비정규전에도 탁월한 지휘력을 발휘한 인물이다.
신임 밴플리트 미 제8군사령관은 취임사에서 " 중공군이 공격해 오면 물러나고 멈추면 반격해 나가는 방식의 전투는 이제 텅산되어야 한다고 하며, 유엔군은 수세가 아닌 공세로 나가게 될 것"이라고 공격 제일주의를 지향했다.
밴플리트 장군은 부임 후 철의 삼각지대를 완전히 장악하는 것을 첫번째 작전 목표로 삼았다. 돈틀리스 작전의 연장이기도 한 이 작전은 주로 미 제1군단과 미 제9군단이 협조하여 4월 21일 개시될 예정이었다. 이에 더하여 제8군사령관은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3군단, 제1군단으로 하여금 화천호에서부터 간성으로 이어지는 선을 확보하여 동부전선의 주요 보급로인 간성-인제 간 도로를 점령토록 하였다.;
이 계획에 따라 4월 21일 국군과 유엔군은 전 전선에서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다음날 유엔군의 공격을 예견하고 ㅇ있던 중공군은 방어에서 공격으로 전환, 이른바 "중공군의 4월 공세"가 시작되었다.
한편 이 시기에 후방지역에서는 국군 제11사단이 지리산과 호남지구에서, 제2사단이 안동지구에서, 제9사단이 전선지구에서 각각 게릴라 토벌작전을 수행했다. 그리고 공산군 후방지역에 부대와 병참시설에 관한 정보를 획득하고, 이를 파괴. 교란하여 공산군의 작전에 혼란을 초래할 목적으로 국군과 유엔군이 통제하는 유격대가 적의 후방지역에 파견되어 광범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제 2 절 38도선 확보 작전
1. 개 요
유엔군의 38도선 확보작전은 1951년 4월 1일부터 21일까지 국군과 유엔군이 캔사스선과 철의 삼각지대로 진출하기 위해 전개한 공격작전이었다.
리퍼작전으로 국군과 유엔군이 문산-춘천-양양 선까지 진출하자, 한국과 미국 정부는 38선 돌파 문제가 다시 중요한 관심사항으로 부각되었다. 일찍이 북진통일을 주장해 온 이승만 정부는 재북진을 당부하였지만, 이는 미 제8군사령관의 권한에 속하는 문제로 미국 정부의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는 중요한 사안이었다.
당시 미국은 협상을 통한 문제해결을 추구하려고 하였음며, 그러나 충분한 병력을 보유한 공산군이 유엔군이 38도선에서 전면 휴식에 들어간다면 이 틈을 이용해 재공세를 할 공산이 컸다. 이에 미 정부는 북한의 전지역을 목표로 하는 북진작전을 바람직하지 않지만 단순히 전술적 목적을위해 38도선을 넘는 것은 유엔군사령관과 제8군사령관이 판단하여 결정할 문제라고 하였다.
리지웨이 장군은 맥아더 장군의 승인하에 재북진작전을 계획하였다. 그는 제한 목표 공격의 방식으로 적에게 계속적인 압력을 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취지에서 계획된 것이 "러기드 작전과 돈틀라스 작전"이었다. 이 작전의 목표는 각각 캔사스선과 철의 삼각지대였다.
국군과 유엔군은 '51.4.3일 러기드 작전을 개시하였다. 제9군단은 수리산 줄기의 험준한 산악지대를 통과하여 화천을 향해 진격하고, 중공군은 화천댐의 수문을 열어놓는 수공작전으로 대응하였다. 이에 따라 화천댐을 놓고 유엔군과 공산군은 이곳에서 격전을 벌였다. 그동안에 미 제1, 미제10군단과 국군 제1, 제3군단은 계획대로 진격하여 캔사스선에 도달하였다.
러기드 작전에 이어 미 제8군은 4월 11일부터 미 제1군단과 제9군단을 주축으로 하여 돈틀라스 작전을 개시하였다. 돈틀라스 작전은 철원.김화.평강으로 둘러싸인 철의 삼각지대에 집결한 공산군의 대병력을 무력화시키고 유엔군이 이곳을 장악하다는 것이었다. 이 때 공산군은 유엔군을 유인하여 공세로 전환한다는 계획하에 유엔군과의 격전을 피하면서 공세준비를 갖추어 나갔다.
국군과 유엔군은 4월 21일 돈틀라스 목표지역인 철의삼각지대에 근접하였다. 그러나 그 다음날 4월 22일 국군과 유엔군은 이른바 중공군의 4월공세에 직면하게 되었다.
2. 상황평가 및 의도
1) 공산군측 상황평가 및 의도
(1) 작전기도 및 방침
국군과 유엔군이 러기드 작전과 돈틀라스 작전을 수행하고 있는 동안에 공산군은 대규모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조.중연합사령부는 4월 초까지 장연리-청석두리-백천리-삭녕-대광리-지포리-화천-양구-인제-양양을 잇는 선에 부대배치를 오나료한 상태였다.
유엔구이 공격을 개시하자 4월 5일 조.중연합사령부는 예하 부대에 "적은 계속하여 캔사스선을 넘어 철원.평강.김화.금성.토산지구에 중점을 두고 공격을 하고, 일부는 원산,통천에 상륙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유엔군을 피로하게 하여 유리한 전역을 조성하여 작전의 주도권을 쟁취하여 적의 공격계획을 조기에 분쇄하도록 하라"고 명령한다
이 명령에 따라 공산군은 38도선 일대에서 저지와 반격으로 유엔군을 타격하기로 하였다. 4월 12일 조.중연합사령부는 최후 저지선을 "서쪽에서부터 금천-위천리-삭녕-장거리-문혜리-산양리 선"으로 하였다. 그리고 팽덕회는 4월 15일 유엔군이 보충을 하지 못하고 매우 피로한 상태에 있다고 진단하고 4월 하순, 전역 반격을 실시하는 것이 좋겠다고 한다. 이 계획에 따라 4월 17일 저녁을 기해 자신들이 설전ㅇ한 최후 저지선으로 철수한 후 유엔군을 유인하는 작전으로 전환하였다.
(2) 작전 계획
조.중연합사령부는 유엔군의 공격을 조기에 분쇄하고 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38도선에서 유엔군의 주력을 격멸한 후 그 여세를 몰아 1차로 서울을 점령하고, 그 후 한강 이남으로 공격할 것을 결정하면서 다음과 같은 작전명령을 하달하였다.
[작전명령 용약]
서부전선의 문산에서 동부전선의하천에 이르는 지역내에서 유엔군 주력 수개 사단을 격멸하여 유엔군의 공격계획을 조기에 본쇄하고 작전의 주도권을 쟁취한다.
공격시기는 유엔군이 계속된 공격작전으로 매우 지쳐 있을 뿐만 아니라 병참선의 신장과 산악지대에서 기동이 크게 제한되어 보급이 불충분하며 에비 병력이 부족한 상황을 고려하여 즉시 반격을 개시하나, 아직 전략 예비대가 전방에 집결하지 못한 관계로 유엔군의 주력이 김화-문등리-간성 연하는 선으로 유인하여 반격할 것이다. 따라서 빠르면 4. 20일 전후나 5월 초순이 될것이다.
공격형태는 전선분할과 포위전술을 병행한다. 일부 병력으로 취약지역인 김화-가평 축선을 공격하도록 하여 유엔군 전선을 분할하여 동서쪽에서의 증원을 차단함과 동시에 정면공격과 양측방에서 포위공격을 실시한다.
후방지역에서는 유엔군의 상륙 및 공정작전에 대비하며 반격계획을 수립한다.
작전지역의 정찰을 강화하고 5일분의 야전식량을 휴대한다.
2) 유엔군측 상황 평가 및 의도
(1) 작전기도 및 방침
유엔군측은 '51년 1월 하순 국군과 유엔군이 반격을 개시하여 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공격작전을 펼치자 지난 12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심각하게 고려하였던 철군문제 논의는 일단락되었다.
이에 따라 미 행정부와 합참은 한국전쟁 문제를 정치와 군사 두 가지 노선에 따라 구분하여 단계적으로 해결하되 정치적으로는 통일 국가를 이룩하고 군사적으로는 침략을 격퇴하고 평화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였다.
따라서 유엔군은 계속하여 적에게 최대의 손실을 가하여 38도선 남쪽의 영토의 통제를 회복하고 대한민국의 방위력도 증강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를 위해 공세적 방어작전을 허용하여 아군이 군사작전으로 38도선에 도달하면 '50. 12월에 유엔 휴전위원회에 통보한 그 선에 따라 휴전을 추구하려 하였다.
결국 유엔군은 군사적으로는 전쟁전의 현상을 확보한 후 휴전에 의거 전쟁을 해결하며 통일 국가 수립은 그후 정치적으로 해결한다는 것이였다. 이것은 유엔 회원국 대다수가 참여하는 내용이였으며 이를 맥아더 사령부에 조언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맥아더 사령관은 3월 24일 미 행정부에 아무런 통보도 없이 전쟁의 종식을 위해 중공을 공격할 수도 있다는 위협성 성명을 발표했다. 이로써 맥아더 원수와 미 대통령 트루먼과의 트러블의 단초가 공식화 되고 확산되어 갔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3.24일) 이승만 대통령도 유엔군이 38도선에서 정지해서는 안되며 북진해서 통일을 이륙해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즉 인위적으로 또 다시 분단은 정치, 경제적으로 존속과 번영이 불가하며 남북간에 전쟁은 계속되리라 강조하였다.
이때 미 제8군은 개성 지역을 확보하기 위하여 임진강을 도하하여 철수 중인 인민군 제1군단을 공격하여 예성강으로 진출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미 적은 예성강 북쪽으로 철수하였고 동측의 중공군으로부터 포위될 우려가 있어 이 지역의 작전은 수색과 전투 정찰대의 활동으로 제한하기로 한다.
철의 삼각지라는 용어는 당시의 기자들이 좀더 극적인 표현을 하고자 이름붙인 것이고 원산과 서울의 중간 지점으로 철도와 도로망이 발달한 교통의 요지였다.
당시 이곳은 적의 전방지역 병참 중심지였으며, 적은 이곳으로 병력과 물자를 집중적으로 수송하고 있었다. 따라서 미 제8군사령관이 관심사항은 철의 삼각지로 아군의 계속적인 진출을 보장할 수 있고 또 적의 공격준비가 명백해 지고 있는 싯점에 양호한 방어진지로 발전시킬 수 있는 중요지형이었다.
이때 선정된 방어선이 임진강 남쪽 제방을 연하여 동쪽으로 뻗어, 화천저수지로 연결된 후 동해안의 양양으로 이어지는 선으로 이를 "캔사스"선이라 명명 하였다. 이 선은 서부에서는 38도선 북쪽으로 3.2km, 동쪽에서는 대체적으로 16km 정도 위치하여 38도선을 전술적으로 방어할 수 선으로 지난 절단작전간 38도선으로 진출한 부대가 이 선으로 진출하는 작전을 "러기드작전"이라 이름 붙였다.
그 후 군은 다음 단계로 미 제1, 제9군단이 철의 삼각지대를 위협할 수 있도록 "우타선과 와이오임선"을 설정하고 철원-김화까지 공격할 계획이었다.그리고 만일 이 작전간 적의 공격을 받으면 캔사스선으로 철수하도록 하고 이 작전을 불굴작전(돈트러스작전)이라 명명 하였다.
(2) 작전 계획
전쟁 전의 상황을 유지ㅏ면서 휴전을 모색한다는 정책목표와 이를 지원하기 위한 작전지침은 전술적 상황에 의한 38도선 북쪽으로의 공격을 부분적으로 허용하였다.
이 지침에 의거해 캔사스선을 확보한 미 제8군사령관은 1951년 4월 9일 공산군의 공세준비가 집중되고 있는 전략.전술적 요충지인 철의 삼각지대를 제압하기로 결심하고, 연천-고대산-와수리-대성산-화천저수지를 연하는 새로운 통제선인 와이오임선을 설정하였다.
이 곟획에 의거해 공격준비를 완료한 서부전선의 미 제1군단과 중서부전선의 미 제9군단은 4월 11일을 기해 제1단계 통제선인 유타선을 목표로 공격하게 되었다.
이 무렵 전선에서는 그동안 접적을 단절하고 후퇴만 하던 중공군의 활동이 눈에 띄게 증가하였을 뿐 아니라 항공정찰에서도 중공군의 공세 징후가 포착 되었다. 이에 신임 미 제8군사령관은 서울을 고수한다는 방침아래 공산군에게 최대한의 손실을 강요하면서 축차적인 철수를 실시한다는 계획을 마련한다.
이와 같이 공격과 방어계획을 동시에 마련한 상황에서 4월 19일 미 제1군단과 미 제9군단이 제1단계 작전 목표인 유타선을 점령하는데 성공하자, 미 제8군사령관은 공격의 여세를 몰아 공산군의 전략적 요충지인 철원. 김화를 위협할 수 있는 와이오밍선으로 공격을 계속하도록 명령하였다. 이 공격개시일은 4월 21일 07시로 정해졌다
3. 공산군의 전력 증강
공산군은 '51년 초에 유엔군의 재반격으로 38도선으로 후퇴하고있었지만 만주에서 재편성한 인민군이 전방으로 진출하고, 중공군이 추가로 압록강을 도하하여 전력을 보강하게 된다.
인민군 제6군단(제18, 제19, 제36)이 '51. 1월에 압록강을 건너 청성진으로 입북하여 2월 중순경 해주 지역 방어임무를 인계받는다. 뒤이어 제7군단(제13,제32,제37)은 압록강을 건너 사단별로 남하하여 2월 말경 원산지역에 도착하여 해안 방어지역을 제3, 제24사단으로부터 인수받았다. 같은 시기에 제8군단(제42,제45,제46)도 만포진으로 들어와 군단 주력을 흥남지역으로 이동하여 제41사단과 제63여단을 흡수하였다. 그리고 제45사단은 인제로 남하하여 제3군단에 합류하였다.
이와같이 북한군의 원한-흥남 간의 예비 병력이 2개 군단 8개 사단 1개 여단이었으나 미 제8군은 적병력을 2개 사단, 1개 연대에 불과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서부전선에는 민주에서 복귀한 제6군단과 지난 연말 동북부에서 평양으로 이동하여 진남포-신안주의 서해안 방어임무를 수행중인 제4군단(제4,제5,제104기갑사단,제26여단)도 주둔하고 있었는데 미 제8군은 3월 중순까지도 이들의 위치나 병력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중공군도 '5년 1~2월에 만주로부터 압록강을 건너기 시작하여 2월 하순에는 중공 제19병단(제63,제64제65군)이 신의주로 들어와 3월 초순에는 예성강과 임진강 사이의 곡산-신계=이천 지역ㅇ로 집결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9, 제11포병연대도 들어왔다.
이 무렵 원산지구에서 재편성 중인 제9병단이 어느정도 전력이 보강된 제26군을 38도선 중부전선으로 진출시키게 되는데 이는 유엔군이 조기에 이동상황을 포착하였으나 제19병단의 압록강 도하는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
중공군 제26군은 3월 10일, 미 제24, 미 제25사단과 대치하고 있던 중공군 제38군, 제50군과 임무 교대를 하였다. 유엔군의 절단작전이 개시 되기전에 홍천지역에 집결돼 있던 제39군, 제40군은 제42, 제66군과 교대하여 전선의 중앙부로 투입되었다. 이러한 부대 교대 외에도 중공군 제47군이 3월에 들어와 제13병단에 배속되어 비전투부대로 순안, 순천, 남양리의 비행장 건설에 투입되눈데 이 당시에 노새로 장비를 운반하여 "노새 사단"이라 호칭된 제5포병 사단도 들어왔다.
중공군의 이러한 병력 중강으로 총병력이 3개 병단 14개군 42개 사단, 4개 포병사단과 2개 독립 포병연대였으나 유엔군 정보 당국은 제9병단의 제26군을 제외 하고는 3월 말까지 이동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가볍게 판단했다.
중공군 지원군사령부는 이미 3월 14일 반격개시선을 "장연-신원리-백천리-주천리-삭령-화천-양구-인제-양양 선으로 결정하였다. 이를 위해 전선의 각 부대는 의정부-주금산-청우산-홍천강 북쪽-풍암리를 연하는 제2방어선과 38도선 사이에 4월초까지, 38도선과 공격개시선 사이에서 20~30일 동안 국군과 유엔군을 저지하도록 명령하였다.
4. 피아의 전투편성
가. 공산군측 전투편성
(1) 중공군의 전투편성
서부전선의 중공군 제19병단은 제63군, 제64군, 제65군이었고, 중서부와 중동부 전선은 제3병단과 제9병단이 담당하는데 제3병단은 제12군, 제15군, 제60군으로 편성되고 제9병단은 제20군, 제26군, 제27군, 제40군으로 편성되었다.
(2) 북한군의 전투편성
서부전선의 제1군단은 제8, 제17, 제19, 제47사단으로 중공군 제19병단에 배속되어 있었고, 중동부 전선에 제2군단(제2,제9,제27,제31), 3군단(제1,제3,제115)과 제5군단(제6,제7,제10,제12,제13)이 방어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나. 유엔군측 전투편성
(1) 서부전선 전투편성
미 제1군단예하에 미 제3사단, 미 제24사단, 미 제25사단, 미 제187공정연대전투단, 국군 제1사단, 영 제29여단, 터키여단으러 로 편성 되었다.
(2) 중서부 전선의 전투편성
미 제9군단 예하에 미 제1기병사단, 미 제1해병사단, 국군 제6사단, 영 제27여단, 태국대대, 그리스대대가 편성되었다.
(3) 중동부 전선의 전투 편성
미 제10군단 예하에 미 제2사단, 미 제7사단, 국군 제5사단, 네덜란드대대, 프랑스대대가 편성 되고, 국군 제3군단은 제2사단, 제3사단, 제7사단으로 편성되었다.(국군 제1해병연대는 주로 미 제1해병사단에 배속되어 운용됨)
(4)동해안 지역 밒 후방지역 전투 편성
동해안 지역은 국군 제1군단은 수도사단, 제9사단으로, 제8사단이 육본 직할로 호남지구에 위치하고 있었다.
5. 전투 경과
가. 캔사스선 진출 작전
국군과 유엔군은 캔사스선 진출을 위한 러기드작전을 개시하기에 앞서 군단간의 전투지경선을 조정하고 주요 전투 부대도 대폭적으로 이동 또는 교체하였다.
서부의 미 제1군단은 국군 제1사, 미 제3사(영 제29여 배속), 미 제24사와 미 제25사단을 전선에 배치했다. 중부의 미 제9군단은 국구 ㄴ제6사, 미 제1기병사 및 영 제27사단을 중동부의 미 제10군단은 미 제2사, 국군 제5사, 미 제7사를 배치하고 국군 제3군단은 제2사, 제3사를 공격제대로 그리고 제7사를 예비로 확보 하였다. 국군 제1군단은 수도사단을 공격제대로 제9사단을 예비로 확보하였다. 공격준비를 완료한 각 군단은 4월 3일 캔사스선 진출을 위한 러기드 작전을 개시하였다.
(1) 중서부전선 진출전
평강
김화
화천댐
연천 철원 화천
개성
판문 장파리 전곡
광덕산
임진각(문산) 동두천 운천 명성산
불무산
국망봉
파주 영평천 관음산 사향산
덕정
금촌
의정부 포천
러기드작전에서 미 제1군단과 미 제9군단은 임진강과 화천 저수지 사이를 공격하게 되었다. 미 제1군단은 이미 캔사스선으로 진출한 좌전방 국군 제1사단과 중앙의 제미 제3사단은 임진강을 따라 방어에 전념하고 우전방 미 제24사단과 미 제25사단은 3번도로(의정부-포천-김화-김화)를 따라 북쪽으로 진격토록 하였다.
'51.4.3일 도로 서쪽의 미 제25사단이 영평천과 한탄강 사이 계곡으로, 동쪽의 미 제24사단이 관음산, 국망봉으로 진격을 개시한다. 4월 6일 별다른 저항없이 군단은 율우리-운산리-야미리-장암리를 연하는 캔사스선으로 진출했다.
그리고 미 제9군단도 좌전방에 영 제27여단, 중앙에 국군 제6사단은 6일 캔사스선에 도달한다. 그러나 우전방의 미 제1기병사단이 중공 제39군이 강력한 저항으로 캔사스선 남쪽 화천 저수지 부근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여기서 화천댐 진출작전에 군단과 사단의 공병이 견해차이가 발생한다. 군단 공병참모는 저수량이 절반도 못되고 실제 이걸 재래식 무기로 폭파하기란 쉽지않으므로 작전에 영향이 적을 것이라 판단한 반면 사단의 공병대대장은 댐의 수위가 최고일 때에 수문을 개방하면 제9군단의 주보급로인 가평-춘천-화천 도로 사용이 불가능해진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미 제8군사령관은 화천댐을 제9군단의 작전지역에 포함시키고 특수훈련을 받은 미 제4유격대를 7일 군단에 배속시켰다. 그러나 미 제1기병사단장은 유격 중대를 기습공격에 포함시키지않고 댐 확보에만 전념하게 된다.
결국 우려했던대로 중공 제39군은 8일 자정에 4개(총 18개)의 수문을 개방하고 일부는 부분 개방하므로써 북한강 상류 수위가 2m 높아진다. 이러써 춘천 일대의 일부 가교들이 떠내려 가는 상황이 발생하고 9일 아침에 중공군은 주력이 범람으로 인한 고립을 고려하여 철수하게 됨으로써 미 제1기병사단의 제7, 제8기병연대는 용이하게 캔사스선에 진출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곧바로 미 제해병사단에 진지를 인계하려 했으나 군단장이 기필코 화천댐을 확보할 것을 명령하여 11일까지 3차에 걸쳐 공격했으나 실패하였다.
군단장은 12일 곧 있을 예정된 불굴작전(돈틀리스 작전)으로 댐을 탈취하기로 하고 미 제7기병연대와 미 제1해병사단에 배속되어 이곳으로 투입된 국군 제1해병연대의 교대를 승인하였다.
이로써 미 제9군단은 석룡산-화악산-지암리-신포리-용화산을 연하는 캔사스선을 점령하게 되었다.
(2)중동부전선 진출전
제1요도 북한강
파로호
풍산리
월명리 양구 인제
화천 화천저수지
사명산(1198)
간동 죽엽산(859)
간무봉(556) 남면
용화산(878)
춘천댐
--------------------------------------------------------------------------------------------------------------------------------
제2요도
광치령
가아리 칠성고개 봉화봉
서호리
양구 원통
940고지 923
493
742고지 서릿골
인제 덕산리
712고지 725 601
아미산(493) 내린천
637고지
관대리 가로리
신월리 480 개운리
소양호 남전리 원대리
부평리
미 제10군단은 작전지역내 도로망이 제한되고 지형이 험준하여 진출이 다소 지연되었다. 4월 7일 부대 배치를 조정하여 조공인 미 제2사단이 화천 저수지 남쪽을, 중앙의 미 제7사단이 양구를, 주공인 우전방 국군 제5사단이 인제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국군 제5사단은 태기산 전투를 종료하고 부대정비와 위력수색에 주력하던 중 4월 7일 소양강 남쪽의 남전리-원대리로 진출하여 인제 공격을 준비했다. 당시 사단 정면의 적은 인민군 제12사단이었으며 이를 증원하기 위하여 제15사단과 제45사단의 1개 연대가 소양강변에 배치되어 있었다.
국군 제5사단은 좌전방에 제35연대로 먼저 도하하여 교두보를 확보하면 제36연대가 도하하여 인제를 공격할 방침이었다. 제35연대는 4월 9일 23:00시에 제26포병대대와 미 제7사단 포병대대의 강력한 화력에 힘입어 청구리에서 소양강을 도하하여 관대리 부근의 적을 격퇴하여 교두보를 확보했다.
이때 제36연대의 선봉인 제6중대가 은밀히 기동하여 10일 01:00시에 가로리로 도하하였다. 중대는 소양강변에 인제로 통하는 도로를 통제하고 있는 490고지를 공격했으나 실패하자 연대는 제2대대 주력을 투입하여 490고지와 인제를 감제할 수 있는 539고지를 확보하도록 하여 인제와 서쪽 고지군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좌전방 제35연대는 도하 이후에 양구와 인제로 통하는 도로를 감제할 수 있는 개운리 서쪽의 542-637-711-742고지의 종격실 능선을 따라 공격했으나 적의 강력한 저항으로 13일까지도 확보하지 못했다.
우전방 제36연대가 14일 원통을 목표로 공격하자 원통 도로를 통제할 수 있는 합강리 서쪽의 548고지와 664고지에 강력한 방어거점을 구축하고 연대의 진출을 저지하고 하였다. 반면 제35연대 지역은 의외로 경미하여 목표선으로 진출한다.
15일 하루종일 인제 북방의 640고지 548고지 664고지 일대에서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계속하는 가운데 제36-2대대가 인민군 1명을 생포 하여 그날의 암구호를 알아내 540고지의 100여명을 사살하면서 사기가 진작되었다.
사기가 오른 사단은 제35연대가 최고봉인 940고지를 탈취하고 양구-인제 산간 도로인 548-664고지를 확보하고 서호리로 진출함으로써 캔사스선 확보를 목전에 두게 된다. 우전방 제36연대는 공격개시 7일 만인 17일 원통 북쪽 481고지와 봉화봉을 확보하여 결국 캔사스선으로 진출했다.
한편 국군 제5사단이 인제부근에서 적과 치열한 격전을 벌이는 동안 미 제2사단은 화천저수지로, 미 제7사단운 양구를 점령하기 위해 북한군과 격전을 벌이며 북쪽으로 진출하여 두번째로 전쟁이전의 상태를 회복하게 되어 대부분의 부대가 임진강-전곡-화천저수지-양구-양양을 연하는 이른바 캔사스선을 확보하였다.
이 전쟁전 상태로 회귀는 국군으로서는 잃었던 영토를 되찾았다는 의미도 중요하지만, 국군 과 유엔군이 중공군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었고 그들과의 전투에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도 갖게 되었다.
나. 철의 삼각지대 공격
중서부전선의 국군과 유엔군이 캔사스선으로 진출하자 미 제8군사령관은 지상 및 항공정찰결과 포로 심문을 통하여 공산군의 공세징후가 전 전선에서 현저하게 증가하고 있음을 간파하였다.
따라서 공산군의 병력과 물자 보급이 집중되고 있는 전략적 요충지인 철의 삼각지를 점령하여중부전선의 캔사스선의 방어종심을 강화하고 공산군의 공격준비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전곡-철원-김화-화천"을 연하는 와이오임선을 확보하기 위한 선제공격을 하게 된다.
이 목표선에 이르기 위해 1단계 목표선인 "우타선"은 캔사스선 전방 임진강-금학산-광덕산-백운산으로 연결되며 활처럼 굽어진 선이다. 이 작전에는 미 제1군단의 미 제3, 재24, 제25사단이 공격하며 제9군단의 좌전방 영 제27여단도 단거리 공격을 실시할 계획이었다.
"'51. 4. 11일 맥아더 장군의 해임과 리지웨이 장군의 유엔군 사령관, 벤플리트 장군의 미 제8군사령관 부임"
이 계획에 의거 공격제대들은 4월 11일 "불굴작전"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이날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을 직위에서 해임하고 미 제8군 사령관 리지웨이를 그 후임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4월 14일 벤플리트 중장이 새로운 제8군사령관으로 부임하였다.
제1단계 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14일 리지웨이는 한국에서 마지막 회의를 주재하여 적의 징후로 보아 아군이 캔사스선 남쪽으로 철수시 적용할 3개의 통제선을 설정하였다. 이 선은 중공군의 신정공세때 국군과 유엔군이 점령하였던 B선(문산-화천-양양), C선(서울 남쪽-홍천-원포리), 서울 교두보선과 흡사하였다. 첫번재 선인 델타선은 춘천을 중심으로 동서해안에 이르는 선이며, 두번째선은 네바다선으로 서울 남쪽의 강변을 따라 북동쪽으로 뻗어 양양에 이르는 선이다. 그리고 서울 방어를 위한 골든선은 서울 서북쪽 10km의 행주에서 네바다 선상의 양평을 반원형으로 연결한 선이었다.
리지웨이는 불굴작전에 투입된 부대들이 유타선 이북으로 진출할 경우 통보하고 또 와이오밍선 이북으로 대부대를 이동시킬 경우에는 사전에 승인을 받도록 통제하고 한국을 떠났다.
이때 전선에서 제1단계 불굴작전(돈틀러스 작전)을 개시한 부대들은 철의 삼각지대로 접근할수록 적의 저항이 강화되고, 또한 폭우로 인하여 도로상태가 불량하여 진출이 매우 느렸다. 이런 상황에서 20일을 전후 하여 미 제3사단이 연천을 , 미 제25사단이 금학산을 , 미 제24사단이 문혜리를, 그리고 영 제27여단이 사창리로 진출하여 우타선을 점령하였다.
국군과 유엔군이 우타선과 캔사스선에 위치하거나 그 부근에 도달함에도 적의 공격이 즉각 개시될 조짐이 없자 벤플리트 장군은 4월 21일 와이오밍선을 목표로 불굴작전 2단계를 개시하도록 하였다.
이에 좌전방 미 제1군단의 미 제24사단과 미 제25사단이 철원-김화를, 우전방의 미 제9군단의 국군 제6사단과 미 제1해병사단이 김화-화천을 목표로 각각 공격을 개시하였다. 미 제9군단의 2개 사단은 접적이 미미하여 캔사스선 북쪽으로3~8km를 진출하였다. 그러나 좌전방의 미 제1군단의 우전방인 광덕산으로 진출한 미 제24사단은 우인접의 국군 제6사단과 연결을 위하여 의도적으로 적과의 접적을 회피하였지만, 좌전방 미 제25사단(배속:터키여단)은 적의 포격으로 오전 중에 공격이 돈좌되었다. 미 제1군단과 제9군단은 22일 공격을 재개하였으나 적의 강력한 저항으로 진출이 불가하였다.
중공군의 4월 공세가 시작되었다.
6. 전투 결과
국군과 유엔군은 38도선을 기준으로 서부에서는 3.2km-9.6km, 동부에서는 16km까지 북상하였다. 캔사스선은 38도선 북방에 위치한 방어선인 가닦에 유리한 입장에서 미래의 군사분계선으로 선정될 수도 있는선이다. 미국의정책입안자들은 이 점에 더욱 큰 의미를 두고 있었는지 모른다.
국군과 유엔군은 철의 삼각지를 눈앞에 두고 4월 21일 공격을 멈추게 된다. 이제는 약 2개월 간의 공격준비를 마친 중공군이 언제 어디로 공격해 올 것인가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게 되었다.
중공군 제5차공세, 4월공세에 대해 중공군의 공간사에 나타난 구체적인 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북한군 제1군단이 먼저 개성,장단지구의 적을 섬멸한 후 1개 사단은 연안, 백천선의 해안방어를 담당하고, 군단 주력은 임진강을 건너 문산의 적을 섬멸한 후 고양을 경유 서울을 향해 공격 전진하고, 서울을 ㅈㅁ령한 후에는 서울수비를 담당한다. 제6군은 1개 사단으로 해주-옹진반도에 위치하여 해안방어 임무를 맡고 주력은 사리원, 재령지구를 장악하고 상륙과 공수 강하하는 적을 타격할 준비를 한다.
중공군 제19병단은 1개 군으로 신속하게 임진강 서안의 한국군 제1사단 방어선을 돌파한 후 고랑포리 부근에서 임진가을 급속 도하하여 신속하게 의정부로 전역우회하고, 적 퇴로를 차단하여 적 증원을 저지한다. 성공 후에는 일부가 서울을 향해 전진하고 ,기회를 보아 서울을 점령한다. 병단 주력은 고랑포리, 마저닐, 무등리 지역에서 도강하여 먼저 감악산지구의 영 제29여단을 섬멸한 후 동두천리, 왕방산, 포천 방향으로 공격 전진하여 서남족에서 동북쪽을 향해 돌격하고, 제3, 제9병단과 협동하여 영평, 포천지구의 미 제24, 제25사단을 섬멸한다.
중공군 제9병단은 먼저 우세한 병력과 화력을 집중하여 신속하게 영 제27여단을 섬멸하고, 일부는 미 제24사단을 견제하여 미 제24사단과 영 제27여단의 연결을 차단한다. 성공 후에는 기산리, 만세교리, 포처느로 직진하여 동남쪽에서 서북족으로 공격하고, 제19, 제3병 주려과 협동하여 미 제24, 제25사단을 섬멸한다.
중공군 제39, 제40군은 제9병단이 지휘한다. 제40군은 가평으로 돌진하여 한국군 제6사단을 섬멸하고 전역 돌파구를 열고, 춘천에서 가평에 이르는 도로를 차단하여 동.서부전선의 미군 연결을 차단한다.아룰러 일부는 하천.춘천 간의 마평리 지구로 진출하여 적 퇴로를 차단하고, 제39군과 배합하여 도주하는 적을 섬멸하고 증원을 저지한다. 제39군은 일부 병력으로 화천 이북에서 적을 견제하고, 주력은 논미리, 원천리, 방향으로 돌격하여 미 제1기병사단, 미 제1해병사단의 서쪽 증원을 견제하고 병단 좌측의 안전을 보장한다.
중공군 제3병단은 먼저 절대 우세한 병력과 화력을 집중하여 연천지구의 미 제3사단 주력과 터키여단을 섬멸하고, 성공 후에는 초성리와 종현산을 향해 돌격하고 제19, 제9병단 주력과 협동하여 미 제24, 미25사단을 섬멸한다.,
북한전선지휘부 소속 부대는 동부전선에 위치하여, 제3, 제5군단은 일부병력으로 양구 이북지구에서 지원군 제39군과 배합하여 미 제2, 미제7사단을 적극 견제하고, 주력은 한국군 제3, 제5사단 접합부인 서호리, 인제 지구를 향해 돌진먼저 한국군 1,2개 연대를 섬멸하고, 성공 후에는 평창, 강릉 방향으로 발전 공격한다. 북한군 제2군단은 회양, 화천지구에 머무르다 일부로 해안 경계를 담당하고 통천, 양양 일선에서 상륙하는 적을 타격할 준비를 한다"
이러한 계획 하에 중공군은 4월 22일 이른바 "춘계공세"를 대대적으로 감행하였다.
7. 유해발굴을 위한 탐사 및 탐문결과
가. 화천댐 부근의 전투 흔적과 중공군 땅굴
전사의 기록은 어디까지나 기록일 뿐이고 실제는 많은 괴리가 있다. 이곳 화천댐은 아닌 말로 중공군 1개 군단이 수장되었다고 "파로호"라고 실제 이승만 대통려이 현장에 와서 명명한다. 물론 이 시기는 중공군 춘계 1.2차공세가 끝난 후의 현장 순시로 당시는 대붕호(큰 봉황새가 앉아 있는 형국)였다.
화천댐은 일제시대에 건설된 댐으로 당싱에 서울에 전기를 공급하던 가장 중요한 시설의 하나로 김일성은 어떻게든 이곳을 확보하라고 강분하여 마지막 휴전시까지 이곳 금성지구 전투는 가장 치열하게 전투가 진행되었다.
화천에서 동쪽으로 북한강 줄기를 따라 달리면 불과 5분거리에 댐이 위치하고 까망다리(현재 통행은 불가, 관광코스임) 못미쳐서 우측으로 돌아가면 오음리로 가게 되는 도로다. 이곳으로 접어들자 마자 우측으로 도로 접한 부근에 당시 중공군이 사용했다는 굴이 있고, 주변은 밭으로 남아있다. 이곳 주민들의 제보는 전후에 들어와 보니 사실 아무것도 엾었고 지금 발전소에서 우회도로를 개설하는데 인력으로 참가하여 많은 유해나 유품들이 있었지만 모두 훼손되어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종전 후에 포로와 유해 교환시 국군 유해 처리반이 이곳에서 중공군 유해를 일부 수습하여 중공군측에 넘겨주었다는 실제 담당자의 증언을 청취하였다.(서울 이화동 참전용사회관과 내 살던 신길동 아파트에서 2회 증언청취)
당시 중공군은 임시 유해매장지에 관한 기록을 유지하여 찾아가려 노력했다는 증거이고, 실제 마을 분들이 푯말에 이름과 간단한 주소가 적혀 있었다는 이야기는 수없이 들었다.
그러니 이곳은 엄청난 중공군 유해나 우리 해병대와 제6사단, 미 제1기병사단의 유해가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주변 산악지대를 모두 탐사한 결과로는 아니다. 따라서 판단하건데 아마도 대부분 화력전투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고 대부분 현장에서 화장처리 되던가 아니면 일부는 북한강 물에 던져짐으로서 유해 처리가 이루어졌다고 본다.
나. 인제 개운리 서쪽 종격실 능선(전사에 기록)과 그 우측 725고지군 종격실 능선(실제 유해가 대규모 발굴됨)의 비교
전사 기록에는 "국군 제5사단은 좌전방에 제35연대로 먼저 도하하여 교두보를 확보하면 제36연대가 도하하여 인제를 공격할 방침이었다. 제35연대는 4월 9일 23:00시에 제26포병대대와 미 제7사단 포병대대의 강력한 화력에 힘입어 청구리에서 소양강을 도하하여 관대리 부근의 적을 격퇴하여 교두보를 확보했다.
이때 제36연대의 선봉인 제6중대가 은밀히 기동하여 10일 01:00시에 가로리로 도하하였다. 중대는 소양강변에 인제로 통하는 도로를 통제하고 있는 490고지를 공격했으나 실패하자 연대는 제2대대 주력을 투입하여 490고지와 인제를 감제할 수 있는 539고지를 확보하도록 하여 인제와 서쪽 고지군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좌전방 제35연대는 도하 이후에 양구와 인제로 통하는 도로를 감제할 수 있는 개운리 서쪽의 542-637-711-742고지의 종격실 능선을 따라 공격했으나 적의 강력한 저항으로 13일까지도 확보하지 못했다."고 한다.
물론 그 이후에 생포된 포로로부터 암구어를 알아내 북한군을 섬멸한다고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곳 계곡의 좌우측 산악지형을 모두 정밀 탐사하고 지역 주민의 제보를 받아보았다. 또한 유해발굴 작전도 실제 올라가 실시한 결과 전투는 전사의 내용보다는 북을 바라보고 계곡의 우측 능선에서 더 격전이 벌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북한군이 강력한 저항을 하였다면 능선에 많은 전투호가 구축되어 있어야 하지만 개운리 서쪽 능선은 우측 725고지 능선에 비해그렇게 많은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물론 발굴된 유해도 좌측에서는 20여구 이면 우측은 100구의 유해가 발굴되어 실제 전투는 우측 725고지 남북 능선에서 벌어졌다고 볼 수 있다.
다. 인제 남북리 전투전적비 부근의 유해와 아미산 전투의 허와 실
상기 위의 전사 내용에서 " 제36연대의 선봉인 제6중대가 은밀히 기동하여 '51. 4월10일 01:00시에 가로리로 도하하였다. 중대는 소양강변에 인제로 통하는 도로를 통제하고 있는 490고지를 공격했으나 실패하자 연대는 제2대대 주력을 투입하여 490고지와 인제를 감제할 수 있는 539고지를 확보하도록 하여 인제와 서쪽 고지군을 확보하였다."고 한다.
지금 이곳은 신남 부평리에서 인제로 들어가는 터널이 구축되어 있는 곳으로 터널 위가 해당 전투지역이고, 종전 후에 구도로를 따라 인제로 들어가다 보면 우측 주도로 옆에 전투전적비(국군 제5사단)가 있었고 그 옆에 몇 구의 유해를 가맹장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 가매장된 유해는 발굴단이 발굴하였다. 물론 부분 유해로 일부가 남아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아미산의 흔적이다. 전사기록은 북한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합강 서쪽으로 진줄하는데 어려움을 격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아미산 전체를 2~3화 정밀 탐사했지만 주요 전투흔적을 찾아내지 못했다. 지형적 위치는 분명 중요위치는 맞다고 보는데 전투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은 이유는 뭘까?
라. 땅벌이 유해속에 살고 있다(인제 북쪽 600고지군)
우리는 바람이 심하게 불던 날 이 고지군에 대한 유해발굴 작전을 실시했다. 그동안 많은 전투진지 공사가 진행되었지만 6.25전쟁 당시의 흔적은 거의 보존되어 있었다. 그 이유는 6.25전쟁 당시에 일반적으로 8부이상에 개인호를 구축하는 모습이었다. 또한 부분적인 구축보다는 고지군 위주 주변에 분대나 소대 중대규모로 구축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곳 600고지군도 그런 전형적인 모습으로 중대규모로 굴토되어 있었는데 전후 국군이 진지공사간 식별된 유해를 가매장한 곳에서 철모와 다량의 유품과 함께 유해를 발굴했다.
하지만 갑작스레 어수선해지면서 위생병을 부르는요란한 소리에 뛰어가다 보니 모두가 능선 소로 길에 엎드려 있다. 나는 무슨 불발탄이 곧 터지는 상황인줄 알고 얼른 엎드리며 상황을 알아보니 굴토하던 개인호에 땅벌집이 있어서 이걸 건드려게 되어 수많은 벌이 달려들어 병사 몇 명이 소여서 1명이 실신하는 사태가 벌어져 그 고지에서 밑으로 응급으로 옮겨지는 사태가 벌어졌던 것이다. 다행히도 해당 병사는 깨어났고 우리는 강력한 살출제를 공수하여 벌들을 퇴치한 후 발굴작전을 게속하였다.
마. 광치령 남단 가아2리지역 대규모 유해발굴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사실 이곳에서 우리는 거의 3년여에 걸쳐서 150구 이상의 유해를 발굴했다. 유해들은 개인호에 있는 것이 아니라 평평한 산속에 한구 한구씩 매장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곳은 밭에서 일하는 동네 아저씨 한분이 나에게 직접 제보하여 발굴작전이 시작 되었다. 원래 지금은 밭이지만 6.25당싱에 그곳에 아저씨의 집이 있었는데 전쟁이 나면서 북한군의 지휘부가 들어섰다고 한다. 이곳은 서북쪽의 940고지군 밑에 위치하여 비행기나 포병으로 쉽게 공격할 수 없는 위치였다.
아저씨가 나이 8살에 많은 군인들이 마당에 꿇어앉아 있고 그러다 어떻게 하면 몇이서 단가에 죽은 시신을 들고 나가고가 반복 되었다. 어린나이라 북한군이 주는 먹을 것을 얻어 먹으며 구경아닌 구경을 하게 되었고, 뭔가 다그치는 모습과 권총을 찬 계급높은 사람이 소리를 지르고 하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였다.
그러다 갑작스레 북한군이 바로 뒷산으로 해서 사라지고 있고, 함께 가자고 하여 아버지와 가족들 모두가 따라나서 가아리 백암산 지역 계곡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고 얼마 후에 비행기 폭격이 집에 가해지고 불폭탄이 떨어져 집은 다 타버렸고, 산계곡에서 나중에 내려와서는 들어가지 않고 길가의 사촌 집에서 살게 되었다 한다.
나는 이 어른을 모시고 직접 현장을 탐사하고 발굴작전을 개시하였다.
바. 가아리 90세 할아버지의 고백 "또 5사단이야!"
양구에서 광치령 터널을 통과하여 인제방향으로 내려서다 보면 주유소 못미쳐 바로 우측에 집 몇 채가 있다. 그곳의 한집에 연세가 엄청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고 계셔서 집에 찾아가 목적을 이야기 하니 바로 이 노부부는 이곳이 고향으로 전쟁전부터 살고 있었다. 전쟁시에 군에 갈 나이였지만 키가 작다보니 북한군이 안잡아갔고, 국군이 들어와서는 당시에 병에 걸려 있어서 국민방위군도 안들어가고 살아났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집에서 백암산 방향으로 계곡에 들어가 거의 3개월을 숨어서 지냈고, 할머니가 밥을 가져다 주었다고 한다. 당시에 북한군들은 국군 제5사단을 보급대로 인식하여 무기와 식량을 획득했다고 한다.
그런 사실을 어떻게 아느냐고 물으니 몇번은 북한군 부역자로 산 고지로 지게에 보급품을 지고 올라가 북한군에 전달하게 되엇고, 키가 작다보니 욕도 안먹고 오히려 먹을 것을 주며 칭찬도 해 주었단다. 그때에 그 군인들이 큰소리로 웃으며 "또 5사단이야!"
하더란다. 본인이 지고 올라간 보급품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는데 5사단에서 획득한 것이라는 말이었다.
제 3 절 공비토벌 작전
1. 개 요
국군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가 차단된 패잔병들이 지방공비들과 합세하여 호남지역과 경북 내륙지역에서 아군의 병차선 차단, 식량 약탈, 관공서 습격, 살인, 방화 등 온갖 만행을자행하였다.
이에 군이 '50.10월 중순부터 11월 말까지 대대적인 소탕작으로 일부 공비만 지리산으로 도주하였을 뿐 대부분 소탕되었다.
그런데 '51. 1월초에 중공군의 신정공세로 제천남쪽으로 진출했던 인민군, 특히 안동으로 진출한 인민군 제10사단 패잔병들이 주변 산악으로 도주하여 지방공비들과 합류하면서부터 이들에 의한 후방지역 교란활동이 재연되기 시작하였다.
2. 작전 경과
가. 호남지역 소탕전
(1) 작전 개요
호남지구 게릴라 토벌작전은 1950.10월 4일부터 1951. 5월 11일까지 국군 제11사단과 제8사단이 지리산을 중심ㅇ르ㅗ 호남지역에서 활동하던 게릴라를 토벌한 작전이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지리산을 중심으로 백운산, 덕유산, 회문산, 불갑산, 화학산, 일대의 은거한 공비들이 '51. 1월 말에 이르러 대대적인 조직을 완료하고 유격활동을 기도하게 된다.
이들은 2월 8일 인민군 창설 기념일을 계기로 지하조직을 강화하고 살인, 방화, 약탈, 등 만행을 자행하면서 치안을 교란하고 2월 중순부터는 100명 이상이 대규모 병력으로 집단적으로 출물하였다.
이에 따라 이 지역의 소탕작전을 전개해온 국군 제11사단(사단장 최덕신 준장)은 제9연대를 전남, 제13연대를 전북, 제20연대를 지리산 부근에 두고 있었으며, 배속된 일부 경찰 및 청년방위대가 주보급로와 통신망 확보에 임무를 부여받고 있으면서 공비 소탕작전을 벌이게 된다.
세칭 거창사건도 동작전기간에 일어난다. 이는 1951.2월 10~11일 간에 거창군 신원면에서 제11사단의 제9연대 제3대대가 신원지서의 협조를 받아 게릴라들과 내통하였다고 판단되는 주민들을 살상함으로서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었던 사건이었다.
한편 육군본부는 거창사건으로 사기가 저하된 국군 제11사단을 2월 횡성 전투 이후 대구에서 재편성을 완료한 제8사단으로 교대시켰다. 국군 제8사단 주력은 4월 3일 전주로 이동하여 제1경비대, 제18전투경찰대대, 충남 경찰토벌대대, 청년방위대 제153지대를 배속받아 금산. 정읍. 부안 등지에서 게릴라 토발작전을 전개하였다.
(2)작전 경과
(가) 호남지역 게릴라 형성과정
1) 북한군의 호남지역 강점과 점령정책
1950. 7월 초 한강을 도하한 북한군은 온양-예산-장항-군산을 경유하여 광주와 목포를 점령한다는 계획으로 7월 11일 공주-대전 축선으로 남진하던 북한군 제6사단을 호남지역을로 우회시키는 명령에 따라 13일 예산을 출발하여 공주 금강을 건너 호남지역에 진입하여 10여 일 만에 호남지역을 장악했다.
북한군의 호남지역 남하계획을 접한 육군본부는 시급히 국군 제5사단을 재편성하여 서해안지구 전투사령부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기간 병력이 대부분 전방으로 차출된 상황에서 잔여병력과 신병, 그리고 학도병으로 편성된 서해안지구 전투사령부는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을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서해안지구 전투사령부는 7월 22일 장성지구에서 퇴각하고 23일 광주에서 퇴각하여 26일 여수를 거쳐 부산으로 향했다.
이렇게 되자 북한군은 조선노동당의 지역당 조직과 인민위원회의 복구 작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당조직의 재건은 북한정권이 점령지역에서 가장 역점을 두고 진행한 사업이었다. 이를 위해 조선 노동당 중앙위원회는 월북하여 북한에서 교육받은 대부분 이전에 남로당원으로 활동하던 인물들이다.
북한군 점령지역 내에서의 당조직 체계는 당중앙위원회(평양)-당중앙위원회 서울지도부(서울)-서울시 및 각도당위원회-시.군당위원회-읍.면당위원회-리.동 세포로 조직을 강화하고 시.군당위원회에눈 도당학교, 읍.면당위원회에는 대규모 직장세포, 리.동 세포에는 소규모 직장세포로 인원을 확충하였다. 각 도당학교에서는 약 100명 가량을 수용해 1주일간 단기 강습을 실시한 후 당원으로 배출하였다. 당 간부의 인선은 대부분 중앙당 지시에 이해 이루어졌으며 군당까지도 중앙당에서 당책을 임명하였다.
이에 따라 군인민위원회는 108개 균에 3,878명, 면인민위원회는 1,186개 면에 22,314명, 리인민위원회는 13,654개 리에 77,716명이였다.
당시 인민위원회 선거에서는 북한에서 파견돈 공작원들이 상당수 선출되어 실권을 행사하는 서기장직을 맡고 지역출신자들이 위원장직을 맡았다.
전라남도의 경우 전쟁 발발 직후 국군에 의해 광주형무소에 수감되었던 국기열이 석방되어 도인민위원장에 부임하였다. 그러나 국기열은 해방직후부터 "종파주의 활동과 분파주의 활동을 했다는 것과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한 적이 있다는 이유로 임명된 지 4일 만에 해임되고 김백동이 후임 위원장이 되었다. 보성출신이었던 김백동은 해방 후 남로당 전남도당의 핵심인물로 정부수립 후 검거를 피해 월북했다가 북한군이 광주를 점령하자 정식으로 전라남도 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부임했다. 이러한 도인민위원장 교체는 토착세력보다는 북로당계로 북에서 파견된 자나 남로당계로서 월북한 자를 중요 간부로 인선하고자 했던 북한정권의 간부충원방식에서 비롯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동시에 전남 서남해안의 도서지역에도 인민위원회가 결성된다. 이 도서지역의 인민위원회는 내륙의 인민위원회와는 또 다른 구성상의 특징을 보였다. 그것은 도소지역 인민위원회가 전적으로 토착 좌익세력에 의해 형성 되었다는 점이다. 당시 북한군 정규군 중 단 한 명도 도서지역에 정식 퍄견된 적이 없으며, 지역 출신의 "게릴라" 또한 인민위원회 구성에 직접 관여한 흔적이 없었다.
인민위원회의 복구와 함께 민청, 농민동맹, 부녀동맹 등 옛 남로당 산하조직이 복원되고 북한군 지원을 위한 조국보위후원회도 결성되었다.
이렇듯 당조직과 인민위원회의 구성이 1950년 7월 말경 완료되자 8월부터는 우익인사에 대한 철저한 검거령이 내려졌다. 그 대상에는 낙오된 군경이나 우익정당 및 단체의 임원, 재산가 등이 포함되었다.
이러한 우익인사에 대한 검거와 탄압은 북한 내무성 산하의 경찰조직인 정치보위부와 북한군 점령지역의 주민들로 구성된 자위대가 담당하였다.
정치보위부에서는 북한에서 교육된 요원들을 시,도,군 단위가지 파견하여 도에는 내무성 지도부, 시.군에는 내무서를 설치하고 면 단위에는 그 분소를 설치하였다.
이 내무서와 자위대(혹은 치안대)에 의해서, 상부에서 내려온 대상자 선정기준과 그들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우익인사 등을 검거하여 인민재판이나 즉결처분 등의 형태로 학살을 자행하게 된다.
일례로 전북 옥구에서는 9월 27일~29일 사이에 소위 반동분자 및 그 가족 574명을 학살하였다. 전남 광주에서는 광주형무소에 수감된 2,000명 중 500여 명이 북한군 후퇴시에 학살한다. 목포에서는 산전동에 있던 구형무소 목포역에 있던 미곡 창고 등에 감금된 1,000여 명중 300명 이상이 학살되고, 무안에서는 우익 인사로 분류된 80여 명이 불에 타 죽기도 한다
2) 북한군의 후퇴와 게릴라부대로의 전환
1950년 8월 15일을 "제2해방의 날"로 정하고 낙동강 선까지 파죽지세로 남진한 북한군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전세가 불리하자, 9월 23일을 기해 전 전선에서 전면적인 후퇴를 시작하였다. 북한정권은 9월 중순경 각 지방당에서 산악지대로의 이동과 게릴라전 준비를 골자로 하는 다음과 같은 지시사항을 하달했다.
"전세가 불리하여 후퇴한다. 당을 비합법적인 지하당으로 개편하라. 유엔군 상륙 때 지주가 되는 모든 요소를 제거하라. 군사시설로 이용할 수 있는 것은 파괴하라. 산간지대 부락을 접수하여 식량을 비축하라. 입산경함자 및 활동이 가능한 자는 입산시키고, 기타 간부는 일시 남강원도까지 후퇴케 하라"였다.
이 지시로 각 도당위원회는 각 군당에 조치를 취하게 하는 한편 9월 28일을 기해 모든 조직을 산악지대로 이동시켰다. 여기서 입산자들을 규합하여 게릴라 부대를 조직하게 되는데 게릴라부대는 지방민청원과 자위대원이 주가 되지만, 북한에서 파견된 내무서원.정치보윕원.정치공작대원과 후퇴하지 못한 북한정규군이 포함되었다.
이러한 북한군 제2전선 형성은, 10월 2일자 모텍동이 스탈린에게 보낸 서신에서" 지금은 군대를 파견치 않고 차후의 전투에 대비하여 준비를 하는 갓이 좋을 것으로 보입니다. 북조선은 패배를 겪은 당분간 투쟁방식을 빨치산 전투로 전환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밝힌 것이 입증된다.
이에 따라 전북도당위원장에는 방준표, 부위원장에는 조병하가 임명되고, 전남도당위원장에는 박영발이, 부위원장에는 김산우.김향선이 각각 임명되었다.
김일성은 10월 11일 방송 연설을 통해 유격대의 조직과 도당지도부의 지도 밑에 활동을 전개할 것을 지시한다. 이 지시에 따라 전북 도당 위원장 방준표의 지휘하에 회문산으로 도내 당조직을 집결시켜 전북도유격대를 편성하고, 휘하에 이택부대.백학부대.학도부대.전주유격대.부안유격대 등이 결성된다. 전남에서는 북부는 백운산, 남부는 월출산으로 입산시켜 지역별로 전넘도당유격대를 결성하고 백아산에 도당지휘부를 두고 활동한다. 전북지구는 칠보유격대.담양유격대 등 무장 1,800명 비무장 1,800명이 지리산지구는 백운산유격대 105부대 지리산유격대등 무장 1,330명 비무장 370명이 전남지구는 고아주유격대 화순유격대 영광유격대 남해여단 등 무장 1,300명 비무장 1,300명이 활동하였다.
이렇듯 호남지역 내의 게릴라들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백운산.회문산.불갑산.화학산 일대의 험준한 산악지대에 근거를 두고 지리산 부근의 운봉과 곡성. 하동 등지에 출현하며 식량약탈. 지서습격. 유엔군의 보급로 차단. 통신망 절단 등의 투쟁을 실시한다.
(나) 국군 제11사단 창설과 게릴라 토벌작전
1) 개 요
1950년 9월 이후에 유엔군과 국군의 총반격으로 북으로 전선이 올라가자 퇴로가 차단된 북한군의 패잔병이 후방 산악지역에서 지역 게릴라와 합세하여 아군의 병참선을 습격하고 전투근무지원 시설을 파괴하는 등 위협이 증가되었다.
그 당시에 미 제8군은 원활한 북진작전을 위해 군예비로 후방지역에서 활동하던 미 제9군단을 청천강 전선에 투입하게 된다. 이에 육군은 '50. 10월 15일 후방지역 작전을 전담할 제3군단을 창설하고 6개의 유격대대로 구성된 유격군사령부와 제2사단, 5사단, 그리고 신편 중인 제9사단과 제11사단을 배속하였다. 이중 호남지구 게릴라 토벌작전을 제11사단이 전담하게 된다.
제11사단(사단장 준장 최덕신)은 '50. 9. 25일부로 편성을 완료하고 육본 명에 따라 '50. 10. 10일 대구를 출발하여 10. 14일 남원에 도착하였다. 당시 제11사단은 제9연대(김희준 대령), 제13연대(유흥수 대령), 제20연대(박기병 대령)를 비롯하여 제3,5,6,7,8경비대대 등 5개의 경비대대를 배속받았다.
제9연대는 9월 30일 대구에서 총병력 2,979명으로 창설되고, 제13연대는 9월 26일 진해에서 3,000명으로 창설되었다. 제20연대는 9월 25일 삼랑진에서 제6훈련소를 개편하여 창설한 후에 10월 1일 제주도 제5훈련소로부터 장교 87명, 사병 1,500명을 보충받았다.
이렇게 하여 호남지구 공비토벌작전 임무를 부여받은 사단은 제9연대가 전남에, 제13연대가 전북에, 제20연대가 지리산지구에 분산 배치되었다. 배속된 경비대대와 경찰, 그리고 청년방위대는 주보급로 및 주요시설 경계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게릴라들의 주요활동은 적이 후퇴하고 있을 당시는 산악지역에 은거하여 있다가 중공군의 압로강 도하 시기에 맞추어 아군이 후퇴하게 되자 지역별 연대를 이루며 약탈, 방화, 기습 등의 활동을 전개하게 된다. 그 한 일례로 1월 16일 약 800명의 게릴라가 광양읍을 공격하여 경찰관 4명과 민간인 11명이 죽고, 같은 날 군산에서는 미 공병대대 4명이 습격으로 전사한다. 22일에는 약 300명의 게릴라가 정읍 운암발전소를 공격하게 된다.
그 당시 주한미군 군사고문관 정보보고에 의하면 1월 20일 유엔 공군이 게릴라들의 활동 근거지인 전남 장흥의 유치면 일대에 항공 폭격을 가하여 511명의 게릴라가 사살되고, 제11사단의 지상작전으로 123명이 추가 사살되었고, 1월 31일에는 회문산 일대에서 총 429명을 사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2) 작전 경과
국군 제11사단은 견벽청야 작전개념에 의해 산간벽지에 있는 민간인들을 소개하고 게릴라의 보급로를 차단해 적을 기아 상태에몰아넣는 한편 유리한 거점을 확보하여 게릴라 소탕에 주력한다. 제9연대가 1월 초순 지리산 남동부의 내외공리와 덕산 일대에서 활동중인 약 700명의 공비들을 추격하자 이들이 지리산으로 도주하였으며 35명을 사살하고 70여 명을 생포하였다. 지리산으로 도주한 이들은 2월 초에 지리산 북동부 함양 마천면 가흥리, 산청군 냉동면 사동, 함양 유리에 나타나 13일간의 투격으로 12명을 사살하고 180명을 생포하여 이 지역은 대부분 소탕되었다.
한편 담양, 순창, 화순, 장성, 나주 일대에서 공비 토발작전 중인 제20연대는 회문산에 1,350여 명의 공비집단이 거점을 확보하고 준동한다는 첩보를 입수하여 2월 13일부터 대대적인 소탕작전으로 이들을 재기불능 상태로 만들었으며, 2월 20일 함평 불갑산에 공비 350명을 포착, 섬멸하였다. 이들의 일부가 영광 대청산으로 잠입하자 3월 3일 격퇴하고 회문산작전을 완료하였다.
제13연대는 정읍 칠보, 운암발전소를 경찰과 합동으로 경계하였고 2월 하순 공비활동이 감소하자 대전으로 이동하였다.
한동안 뜸하던 공비들의 활동이 3월 중순부터 다시 활발해졌다. 이 지역 일대에 공비는 약 23,000여 명으로 추정되었다.
공비들의 활동은 주로 제9연대 지역으로 3월 13일 화순 백아산에 160여 명이 출몰하여 74명을 사살하고 21명을 생포하였다.
3월 17일에는 화학산 일대에 잠복중인 공비 250여 명을 식별하여 86명 사살에 16명을 생포하였다. 3월 22일에는 공비 500여 명이 순천을 급습한다는 제보에 긴급 출동하여 시가전을 통해 이들을 격퇴하였다.
제11사단은 '50. 10. 4일부터 실시한 공비토벌 임무를 4월 6일자로 제8사단에 인계하고 전방으로 투입된다. 기간동안 공비 사살 1,950명(추정), 생포 및 귀순 2,178명이고 전사는 531명, 실종 85명, 부상 843명이었다.
세칭 거창사건도 동 작전기간 중에 일어났다. '51. 2. 10~11일 간에 거창 신원에서 제9연대 제3대대가 신원지서의 협조를 받아 공비들과 내통했다고 판단되는 주민들을 집단으로 처형한 사건이다. 이에 관련된 지휘자들은 국회조사단의 현지 조사를 통하여 의법 처리 되었다.
한편 육군본부는 거창사건으로 사기가 저하된 제11사단을 2월 횡성지구전투 이후에 대구에서 재편성한 제8사단과 교대시켰다. 제8사단의 주력은 4월 3일 전주로 이동하여 제1경비대대, 제18전투경찰대대, 충남 경찰토벌대, 청년방위대 제153지대를 배속받아 금산, 정읍, 부안지구에서, 제16연대는 진주로 이동하여 제2경비대대를 배속받아 백운산과 중산리 일대에서 공비토벌 작전을 시작하게 된다.
최영희 사단장(준장)은 대둔산에 은거지를 둔 1,380여 명의 충남 빨치산 소속 공비들이 논산 금산지역에 출몰하자 제21연대 1대대, 공병대대, 제18전투경찰 대대, 충남 경찰토벌대를 투입하여 4월 16일부터 대둔산, 운암산, 원등산 지역에서 토벌작전을 수행하였다.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던 공비들이 5월로 접어들어 국사봉 ,회문산일대에서 준동하여 5월 4일 국사봉과 회문산을 포위하여 1,200여 명의 공비들을 일망타진하게 되며 그 일부가 백양산, 내장산, 변산반도로 분산 도주하였다.
한편 진주로 이동한 제16연대는 거창, 산청, 하동에 배치하여 덕유산, 지리산, 백운산지역 공비를 토벌하였다
(다) 제8사단의 호남지구 작전
국군 제8사단(사단장 최영희 준장)은 '51. 2월 횡성지구에서 중공군의 기습으로 사단이 와해되어 대구로 이동하여 전력을 보강한 후 육본 직할로 후방경계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사단은 '51. 4. 3일 대구에서 전주로 이동하여 4. 6일 제11사단과 임무교대하였다. 사단은 4월 16일 금산지구에서 게릴라 토발작전을 시작으로 5. 11일까지 금산, 국사봉, 부안 등지에서 작전을 수행하게 된다.
제21연대는 4월 16일 사단 공병대대와 논산 벌곡 662고지(대둔산 동쪽)와 그 남쪽 외일양리에서 게릴라 100명을 격퇴한다. 17일부터는 제18전투경찰대대(차일혁 경감)와 대둔산 일대를 공격하고 사단 공병대대는 원등산과 운암산으로 도주한 게릴라 250여 명을 추격하였다. 4.16-19일까지 금산지구 토벌적전에서 제8사단은 38명의 게릴라를 사살하고 37며을 생포하였으며, 전사 10명 부상 16명의 피해를 입었다.
4월 19일 금산지구 전투를 종료한 사단은 5월 4일 지휘소를 시산리(국사봉 북쪽 5km)에 설치하고 국사봉지구 토벌적전에 들어간다. 제10연대 제1대대는 장성군 백학산 일대에서, 사단 공병대대는 장군봉과 내장산일대에서, 사단 수색대는 ㅈㄴ북도당 유격대 사령부가 위치한 회문산과 여분산, 백학산 일대에서 , 제1경비대대(대위 강차완)는 무성리에서 내장산 방향으로 수색정찰을 실시하고 칠보발전소의 경계임무를, 제18전투경찰대가 투입되어 목남에서 용추봉 일대까지 게릴라의 남쪽 퇴로를 차단하였다. 제8사단은 5월 9일 토볼대가 내장산과 백학산의 수색을 종료한 상황을 확인한 후 국사봉지구 게릴라 소탕작전을 종결지었으며 기간 중 410명의 게릴라를 사살하고 573명을 생포하였으며 반면에 피해는 전사 1명, 부상 2명이었다고 기록된다.
5월 10일부터는 부안지구 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5월 11일까지 백련리 변산 주변에서 87명을 사살하고 17명을 생포하고 임무를 종료한다.
제8사단은 4월 15일부터 5월 11일까지 1개월 동안 호남지구 공비토벌 작전에서 사살 535명, 생포 624명의 전과를 올린 반면 전사 12명, 부상 21명의 피해를 입었다.
이 무렵 중공군의 계속적인 압박(중공군 4월공세와 5월공세)으로 전선 상황이 긴박함에 따라 사단은 명에 의거 5월 19일 충북 제천으로 이동한 후 전선에 투입되었다. 따라서 공비들은 다시 산속에 은거한 채 활동하기에 용이한 녹음기를 기다리며 재편성의 시간적 여유를 확보하게 되었다.
나. 태백산지구 게릴라토벌적전
(1) 개요
태백산지구 게릴라 토벌작전은 '51. 2. 13일부터 4월 8일까지 국군 제2사단이 태백산지역에서 북한군 제10사단 패잔병과 남파 유격대를 섬멸한 작전이다
태백산지구 공비들은 '50. 12월 말부터 동부 산악지형을 따라 침투한 인민군 제10사단 패잔병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들은 '51. 1월 중순 태백산맥을 연하는 안동, 의성까지 남하하였으나 아군의 공격으로 퇴로가 차단되어 철수가 불가하게 되자 주변 산악지역에 거점을 확보하고 게릴라부대로 전환하였다.
이들은 이미 남한 후방에서 행동 중인 남부군, 경북도당의 안동 영덕, 영주, 봉화군당 유격대 등과 합세하여 태백산, 일월산, 속리산을 위시하여 형제봉 보현산, 동대산을 연하는 산악 일대에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이에 따라 국군은 지난 중공군의 신정공세에서 피해를 입고 미 제10군단의 예비가 되어 풍기에서 정비 중인 국군 제2사단을 육본 직할로 전환시켜 2월 13일 안동으로 이동시켰다.
제2사단은 육군 전방 지휘소로부터 제5, 6, 7경비대대, 국민방위군 제1사단 제1연대, 전투경찰 2개 대대를 배속받아 1개월 동안 영천-포항, 영천-안동, 안동-영덕간의 주보급로를 확보하면서 보현산 일대의 적 제10사단의 잔적을 소탕하게 된다.
(2) 작전 경과
사단장 함병선 준장은 2월 16일 제31연대 안동-영주-단양 간의 주보급로를 경비하고 제17, 제32연대는 보현산 일대의 공비를 소탕하도록 했다. 3월 1일 제31연대가 일월산 남쪽의 장갈령을 차단하여 새벽에 북상 중인 적 1,500여 명을 기습하여 많은 피해를 주었다. 이 무렵 보현산 일대의 제17, 32연대도 일원산 남쪽으로 이동하여 적을 포위하여 400명과 800명으로 나누어 이 일대를 통과하려했던 이들을 일월산-통고산으로 추격하여 사살 460명, 포로 40명을 획득하였다. 반면 사단은 일월산 소탕작전을 지휘하던 제31연대장 박노규 대령과 제3대대장 이오렬 중령이 전사하는 등 전사 4명 부상 25명의 손실을 입는다
인민군 제10사단이 분산하여 도주 함으로서 이 일대의 공비토벌 작전이 일단락되는 듯하였으나 북한이 3월 초순에 유격전에 능숙한 11,700여 명으로 편성한 제1지대와 제3지대를 다시 이곳에 남파하였다.
이들은 후일 판명된 바에 의하면 적 제1, 3지대는 '50. 11월 초에 맹산에서 인민군 직할 3개 여단으로(2,500명)으로 창설된 후 11월 동부전선의 인민군 제2군단의 엄호하에 양구-인제-오대산으로 침투 중에 정선 북쪽에서 제2여단이 괴멸되어 제1, 3여단으로 재편성하였다. 이들은 단대호를 조선 인민군유격대 제1, 3지대로 개칭하여 중앙당의 직접 통제하에 팔공산에 거점을 확보할 목적으로 침투하였다.
이에 따라 육군은 3월 14일 봉화군 소천면 일대의 인민군 제10사단의 추격임무는 제1군단에 배속 중인 국군 제9사단에 인계하고 제2사단이 제1, 3지대 격멸에 주력하게 된다.
국군 제2사단장은 20일 제17연대는 통고산 일대의 적 제1지대를, 제32연대는 양구동에서 적 제3지대를 격멸하고, 제31연대는 안동-영주-풍기-단양 간의 도로를 경계하도록 명령하였다.
제17연대는 태백산에서 오미산을 경유하여 남하하는 적 400여 명을 발견하여 통고산, 오미산, 석포리일대에서 정밀 탐색하였고, 이 적을 추격하여 정선 동쪽 고양산까지 추격하여 26일 고양산과 낙동리 일대에서 제1지대 주력을 격멸하였다.
적 3지대 격멸에 나선 제32연대는 18일 새벽 배속된 제7경비대대가 영양 남서쪽 양구동 일대 정찰 중에 808고지에서 적 제3지대를 발견하여 대대장 강영훈 소령은 야간 공격으로 적 25명을 사살하고 7명을 포로로 하였다.
연대장은 제1대대를 신령, 제3대대는 군위를 경계토록 하고 제2대대는 삼의동으로 이동하여 격멸토록 하였다. 적은 제7경비대에 기습을 당하여 남쪽의 포도산으로 잠입하였다. 연대가 이들을 추격하는 동안 배속된 국민 방위군 제3연대도명동산을 공격하여 제3지대 참모장과 제1중대장을 사살하였다.
이들은 명동산 남쪽에서 350명으로 재편성하여 구양동 서쪽의 주산으로 이동하였다. 이로써 이들은 대구 팔공산 점령을 포기하고 금장산-통고산으로 북상 철수 하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연대는 국민방위군 제3연대, 제7경비 대대와 주산의 공비들을 격멸하는 작전을 전개하였으며 적은 150여 명으로 통고산-오미산-연화산을 따라 북상도주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제1단계 작전을 종료하였다.
이 후 사단은 3월 30일부터 4월 8일까지 제17연대를 주축으로 제2단계 작전을 전개하여 통고산 북쪽의 평전 지구에서 120명을 사살, 36명을 포로로 하고 작전을 종료 하였다.
다.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가. 회문산과 불갑산, 장흥 유치면 공비토벌 숫자의 진실성여부
전사의 기록에, 유치면 511명, 123명 사살, 회문산429명 사살, 불갑산 350명 섬멸 등, 국군 제11사단이 '51.1.1~4.6까지 6,921명 사살했다고 한다. 물론 피해는 별로다.
그러면 장흥 유치면 일대의 전투흔적이나 회문산, 불갑산 등지의 전투 흔적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나는 관심을 가지고 탐사 및 탐문을 실시했다.
유치면은 당시에 국군이나 전경이 들어오지 못하고 자체적으로 학교와 병원도 운영되고 정말 빨치산들이 활개를 치고 활동하였다. 아닌 말로 비행기 폭격까지 감행되었으니 그 저항 정도를 알 수 있다. 이곳의 경로당에 들러 간담회를 실시하여 그 정황을 알아보려 했으나 결론은 신통치 않다. 지역 일대가 모두 빨치산이 장악하고, 또한 지역 주민들도 그들에게 동조하지 않으면 목숨이 떨어지는 상황이라 대다수가 부역역활을 해야만 했기에 누가 누굴 고자질하고 손가락질 할 그런 상황이 아니였다.이러다 보니 고지위주 어떤 특정지역의 전투사례는 없이 지역 일대가 전투현장이었고 많은 피해가 났지만 대부분 자체적으로 쉬쉬하고 처리하였다.
[지역 주민들이 산에서 죽었는데 빨치산으로 전과가 되는지 아니면 민간인 피해현황이라 해야 하는지...]
회문산에서 장군봉 국사봉 일원은 3회에 걸쳐 탐문과 탐사를 해보았지만 그리 전투 흔적이 없다.지역 주민이 말하기 회문산에 도당 사령부가 있었다고 하지만 실체는 장군봉에 있었고 이곳에 아지트가 만들어져 겨울에 구둘장이 놓여지고 불을 지피고, 방앗간이 계곡에 있었다고 한다. 실제 그곳에서 잠도 잤다는 어른 한 분을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는 들었지만 빨치산이 결국은 지역 주민이 산에 들어간 사람들이고 많이 사살했다고 하는데 대부분 지역 연고자들이 시신을 수습해 갔다고 한다. 그래서 별로 없다고 한다.
불갑산 또한 그 서북쪽 영광 삼학리에서 경찰병력 50여 명이 전사한 유해를 그동안 야산에 가매장 상태로 방치(?)하다 발굴한 결과가 엄염한 사실이다. 발굴결과 유전자 감식으로 20여 명이 신원확인까지 되었다. 나는 현장을 선정하고 발굴을 직접 통제한 장본인이다. 하지만 불갑산 주변에는 민간인 피해현장과 그 곳을 발굴하여 공개하는 진실과 화해 위원회의 민간인 피해현장은 메스콤을 타고 국민 감정을 부츄키는 역활을 한다. 하지만 군이나 경찰이 전사하여 발굴되는 현장은 조용하게 지나갔다. 그리고 불갑산 일대는 그렇게 전투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나. 정선 고양산에서 사살됐다는 제주도 4.3사건의 주범 간첩 김달삼의 진실공방
결론부터 말하면 고양산은 말이 없다. 어디 기록에는 김달삼이 울산 신불산지구에서 소탕되었다고도 한다. 영천 보현산까지 침투하여 유격대를 규합하여 활동한 것은 맞는 모양이다. 그런 그가 토벌작전에 밀리어 계속 북으로 후퇴하다 결국 정선 고양산에서 사살되었다고 한다.
차후 그 근거 확인하여 실어야 함 ?
다. 일월산과 통고산, 주산의 전투 흔적
전사의 기록에는 많은 빨치산들이 은거하여 저항한 곳으로 기록된다. 그래서 실제 올라서 보았다. 하지만 산악지역에 전투 흔적은 별로 없다. 당시에 빨치산들은 거점을 점령하여 전투시설을 구축한 것이 아니라 주로 산속 마을 단위를 이용하여 주식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몰려다니는 꼴이었다.
북한군 제766부대원들도 전부가 무장한 것도 아니라고 한다. 일부 인원만 무장하고 산악지형을 이용하여 침투, 보급로 교롼과 통신시설 파괴, 지역 요인 테러 등의 임무를 수행하다보니 말이 군인이지 실제는 군인같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을에 들어와 먹을 것을 조달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지역 프락치와 연계하여 인민재판도 관여하고 그러다 북한군이 북으로 퇴각한 후로는 패잔병과도 합세하여 북으로 이동하며 제2전선부대원이 되었다.
이러다 보니 민간인이지 빨치산인지 구분이 잘 안되는 행태로 산악이나 산속 마을을 은거지로 활용하여 활동하다 보니 국군이나 경찰이 일망타진하는데 어려움이 많았고 결국은 견벽청야와같은 방식으로 굶어죽이기 위해 다 주변을 불태워버리는 방식이 적용되었다. 공비토벌작전시 전 국토의 대부분이 그 피해로 불타버렸다. 산속의 주요사찰들이 그 피해를 고스란히 받았다. 대부분 그곳이 아지트며 그들의 지휘소였기 때문이다.
라. 원등산 일대의 전투 흔적, 죽어있는 자는 지역주민이었다?
원등산(713)은 전북 완주군 동상면에 있는 산이다. 남북으로 길게 회랑이 굴곡진 면소재지에 대아 저수지가 크게 자리한다. 우리 어렸을 적에 라디오 방송에 나왔던 공비토벌작전 실제 지역이다. 나는 이곳에 2~3화 탐사를 진행했다. 전사에 나오는 주요 등장지역은 거의 내 발로 걸어가 확인하였다. 물치라는 재에서 오르면 쉽게 접근이 가능하고 고지 우측 소양면 해월리에서는 차량으로 고지 바로 밑에 있는 원등사까지 접근도 가능하다고 한다.
이곳이 왜 중요하냐면 금산 대둔산 지맥을 이용하여 남으로 기동하면 바로 완주 대아리의 왕사봉(718)-장군봉(724)-운장산(1126)-연석산-원등산(713)으로 달린다. 바로 빨치산 대장 이연상의 기동로인 것이다. 또한 여기서 남서쪽으로 회문산(830)-장군봉(780)-매봉(488)-매죽리-좌측에 국사봉(655)-쌍치면. 칠보면-내장산일원(정읍복흥지역)이다.
회문산은 전북도당 유격대사령부가 위치했다는 곳으로 이곳도 정상까지 차량이 기동한다. 회문산 능선을 따라 북쪽방향으로 올라서면 장군봉이 있고 더 나가면 산내 매죽리가 있고 전북에서 가장 빨치산들이 활동했다는 쌍치와 내장산 일대로 통하는 곳이니 당연히 그 당시에 공비들이 넘나들던 루트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전후에 이곳 일대는 잦은 산불이 발생하여 대부분 불타버려 그 흔적이 별로 남아 있지 않다. 장군봉은 밖에서 들여다 보이지 않는 곳으로 실제 지휘부가 이곳에 구둘장을 놓고 기거하며 겨울나기도 하고 방앗간도 운영되었다고 하는데 지금 그 흔적은 어디로 갔는지 없다.
마을 어른들 이야기로는 말이 빨치산이지 대부분 동네 사람들이고 몇명의 북한군 패잔병이나 노동당원이 조직을 통제하며 국군이나 전경과 맞서 싸웠다고 한다. 따라서 어디서 죽어쑈다 하면 바로 알게 되고 소문없이 대다수가 야밤에 가족이나 친지들이 수습하여 현장에는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당시의 빨치산들이나 국군이 어떤형태로 산악지형의 주요 거점을 확보하고 지키려했는지 사실 의아한 경우가 많다. 동네에 가서 이야기를 들어도 산 고지군에는 그리 오르지 않고 주로 계곡이나 산악 주요 목에 일부 거점을 만들어 은신하다 때가 되면 마을로 내려와 보급문제를 해결했다 한다.
물론 내장산의 까치봉에서 반월형으로 지맥이 형성되는 곳은 개인호가 수없이 굴토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은 빨치산이 굴토한 것이 아니고 토벌군이 굴토하여 주로 기다리던 곳이라 한다. 내장산 고지군이 내가 올라 본 후방지역 빨치산 토벌작전의 실체로는 가장 많은 개인호가 남아 있다. 전남 화학산도 주변 사람들의 제보와는 다르게 그리 많은 전투흔적은 없다.
마. 국군 제8사단의 공비토벌 작전간 전사 12명의 허구
화순 이양초등학교 뒷산의 국군 전사
제8사단은 4월 15일부터 5월 15일까지 1개월 동안 호남지구 공비토벌 작전에서 사살 535명, 생포 624명의 전과를 올린 반면 전사 12명, 부상 21명의 피해를 입었다고 전사에 기록되고 있다. 정말일까?
나는 화순 이양에서 이발소에 들렸다가 증언을 청취했다. 고아주에서 너릿재를 넘어서 화순에 들어오는 입구에 이십곡리가 있는데 그곳에서 발굴작전 초기인 2001년도에 26구의 국군 용사를 발굴한 적이 있다. 이곳의 선정은 당시 광주에서 한약방을 운영하는 강동원이란 분이 제보하여 현장 조사와 지역 관공서와 협조하여 발굴했다. 발굴 결과 모두 국군 제8사단 제10연대 3대대 10중대 소속으로 밝혀졌다. 유해도 모두가 완전유해였으며 전투화에 철모를 다 쓰고 계셨다.
혹시나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유해인지 등 많은 관심속에 발굴되는데 사실 이미 그 당시에 국군 유해라는 사실을 알았고 매장지역에 나무로 푯말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전후 노숙자들이 그 푯말을 다 뽑아다 불소시개로 사용해 버렸다고 한다. 그럼 왜 이곳에 남겨져 있을까?
반복되는 이야기지만 그 당시에 해당 중대장이 허위보고와 작전실패로 사형을 당하게 된다. 너무 어처구니 없는 피해를 총 한방도 못쏘고 당했기 때문이었단다.
그 사실을 숨기려 중대장이 당시 이양역에서 화차를 이용해 화순역까지 유해를 옮기고 화순역에서 쓰리코터로 이곳 이십곡리로 옮겨 가매장하고, 보고는 공비들과 교전 중에 전사했으나 유해를 찾지 못한 것처럼 보고가 올라가고 그것이 누구의 제보로 들통이 나서 중대장이 사형되었다. 이 사건은 육군 재판 기록에 남아 있다.
[중대 부하를 실제는 가매장으로 처리하고, 유족에게는 가짜 유골(나무 재 등)을 유골함에 담아 유족에게 보냈다]
그럼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기에 사실대로 보고하지 못했을까, 여러 의문속에 나는 경기 여주 처리에서 자가봉송된 유해 5구를 발굴하여 현충원에 이장하는 일을 상부의 승인을 받아 유가족을 돕고 있었는데 이곳에 유석오 형제가 있었고 결국 유전자 감식으로, 사실은 화장되지 않고 이십곡리에 남아 있었던 결과로 유해를 찾는 엉뚱한 일이 벌어졌다. 오열하는 유가족이 그려진다.
발굴된 26명 중 20여 명이 유가족을 유전자 감식으로 찾고 신원이 확인되었다. 전시라는 이유로 엉터리로 처리한 것이다.
이런 상태를 알면서도 그 당시는 쉬쉬하고 지났고, 이어서 전방으로 추진되면서 그후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동료는 대부분 전사함으로서 묻혀진 것이다. 하지만 진실은 살아있기에 누군가에 의해서 이 사실은 전해져 내려왔고, 나중에 제5사단에서 보안대장을 하다 대대장이 월북하는 사건이 벌여져 전역한 황00란 문학박사가 화순재향군인회장을 하면서 이곳에 비석을 세우고 그 내용을 간단히 기록하였다.
나 는 이 건을 조사하기 위해 백방의 노력으로 실제 당시 같은 중대의 일원인 당시 소위(이후에 대위로 예편하여 문공부에서 공직자를 함) 박안신씨를 충남 예산에서 만나 사실관계를 들었다. 그 분은 대구에서 온날 학교 뒤 공터에 천막을 치고 잠들다 보초가 제대로 근무하지 않아 잔당들이 들이닥쳐 천막안에 수류탄을 투척하여 발생한 피해 대상자라 한다.그래소 본인은 말은 못하고 한번씩 이곳에 들러 들꽃을 꽂아놓고 갔다고 한다.
[빨치산의 지시로 마을사람들이 막걸리를 준비했다...]
그러나 이양역 옆 이발소 아저씨는 다른 말을 했다. 국군 제8사단이 오기 전에 누군가가 막걸리를 준비하여 잔치를 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병력이 도착하여 환영행사를 하여 국군이 술을 마시고 막사를 준비를 했다. 비는 부슬부슬 내리는데 텐트가 학교 뒤 공터에 처지고 4월초의 변덕스런 날시 속에 밤이 찾아왔다. 그리고 보초를 여기저기 배치하고 모두를 깊은 잠에 빠지는 순간 잔당들이 들이닥쳐 보초를 죽이고 바로 텐트에 수류탄으로 공격하여 1개 소대가 모두 전사했다는 것이다.
[내아들 용구 용구...]
이유야 어떻든 나는 유해를 발굴하였다. 그리고 26구의 완전유해를 글대로 발굴했다. 그런데 맨 처음 가매장지에서 나온 유해가 키가 장신이었다. 박안신씨가 소대장 육사 8기 박용구 소위라 한다. 평양에서 월남한 군인이란다. 나는 그 유족을 추적하여 군포에서 어느 90의 할아버지를 찾았다. 아버지로 추정되는 분이다. 그런데 연세가 많아서 거동이 어렵고 침대에 누워계시고 간병인이 옆에 붙어 있었다. 너무 연로하시고 쇼크가 있으면 큰일이 날 수도 있다하여 우린 아들을 찾았다는 이야기는 못했다. 관련상황을 들어보려 했으나 의사소통은 어려웠다. 대신 간병인이 말하길 평양에서 내려 왔고 전쟁전에 평양에서 택시사업을 하다 월남했으며 아들 외에 딸도 어딘가에 있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이 어르신은 자식을 기다리며 재혼도 안하고 오직 자식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을 해준다. 하지만 ㄷ아시는 유전자 감식법이 공식적으로 아직 없어서 다음에 와서 감식위한 시료채취를 하기로 하고 일단 자리를 떠난는데 나중에 연락해 보니 그 사이에 돌아가셔서 화장하여 자연으로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저 틀니는 안만수다...]
나는 영현소대(당시 1개 소대가 편성되어 있었다)를 찾아 6.25 당시 매화장 보고서를 찾았다. 만명 분이 조금 안되는 분량을 전수 조사하였다. 그랬더니 이곳 이양의 26명분이 그대로 발견되었다. 도대체 화장해서 자가봉송한 것은 무엇이고 여기 남아 있는 매화장 보고서는 무엇인지...
여기서 유가족 상황을 이용하여 김해 안만수 유족과, 백옥칠중위(부관장교) 유족을 찾았다. 안만수 용사님의 여동생이 생존하고 있었고 백중위 용사님은 동생분이 살아 있었다. 그래서 우린 발굴현장으로 모셨다. 그런데 안만수 용사님의 작은 아버지되시는 분이 틀니가 앞니에 4개 되어 있는 분을 보더니 바로 "만수"라고 소리친다. 당시 일제 시대에 많은 돈을 들여 했다는 것이다. 유족들이 당당히 많이 왔는데 울음바다가 되었다. 그 여동생이 부산 말투로 "여기 있으면서 그래 꿈에도 안찾아왔나, 에이 정 없다..."한다. 이 분은 더이상 군대는 싫다고 유해를 선영으로 모셔갔다.
[50년간 모셨으면 형님이다]
백옥칠 용사님 동생은 본인 아들을 형님 앞으로 양자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서울 동작동 현충원에 형님 묘비가 있다고 하신다. 도대체 무엇이 진실인지... . 우린 그 당시에 막 도입된 유전자 감식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맞질 않다. 과학이 입증한다니 할 말이 없다. 발굴 당시에 수첩에서 식별된 것인데 어찌하랴. 매화장 보고서에도 나와 있다. 가족사에 무슨 변고는 없었는지 우린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 동생분은 동작동 묘비에 대해 "비록 형님이 아니라 할지라도 50년간 형님으로 모셨으면 이분도 형님이다"라고 하신다. 우린 아직 진행형으로 남겨두고 기다리기로 하였다.
이렇게 26명의 발굴 유해중 신원확인이 된 유해는 20명이 넘었다.
바. 국군 제11사단의 오명
제11사단은 '50. 10. 4일부터 실시한 공비토벌 임무를 4월 6일자로 제8사단에 인계하고 전방으로 투입된다. 기간동안 공비 사살 1,950명(추정), 생포 및 귀순 2,178명이고 전사는 531명, 실종 85명, 부상 843명이었다.
세칭 거창사건도 동 작전기간 중에 일어났다. '51. 2. 10~11일 간에 거창 신원에서 제9연대 제3대대가 신원지서의 협조를 받아 공비들과 내통했다고 판단되는 주민들을 집단으로 처형한 사건이다. 이에 관련된 지휘자들은 국회조사단의 현지 조사를 통하여 의법 처리 되었다
다. 유격대의 편성과 활동
(1) 개요
중공군의 참전과 1.4후퇴로 한대 잠잠하던 공비들의 활동이 다시 고개를 쳐들어 군이 후방지역 공비토벌 작전을 벌일 무렵 국군 과 유엔군도 유격대를 조직하여 적 후방지역에 투입하기 시작했다.
이는 적 게릴라 및 공비들의 줁동으로 아군의 후방이 교란되고 전투병력이 전선에서 후방으로 분산되어 전투력이 약화된 것처럼, 적의 후방을 교란하고 적 전투력을 분산하여 전선으로 집중되는 적의 충격력을 조금이라도 완화시켜 중공군의 공세로 맞은 위기상황을 극복하는데 그 주 목적이 있었다
국군은 적 주력에 대한 견제 전략으로 주전선의 후방을 교란하는 제2전선 형성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명유격대대","백골병단", 백봉부대"., "육군 을지병단" 등을 운용했다.
미군은 서해안에 존재하는 많은 의용군들을 유격대로 활용하기 위해 '51년 1월에 "에이블 게획을 수립했다. 특히 미군은 ㅁ기.통신장비.보급지원을 통해 민간인 유격대를 북한지역에서 적을공격할 수 있는 요원으로 발전시켰다. 이들은 서쪽으로는 압록강 하구에 있는 대화도, 동쪽으로는 뤈산 앞바다를 장악해 북한 지역에 대한 정보를 획득했다.
유격대원의 이러한 전투와 정보수집 활동 결관ㄴ 미 제8군의 서족 측면방ㅇ를 지원해 주저항선에 있는 북한군과 중공군을 분산시키는데 기여했다.
(2) 작전 경과
(가) 육군 통제 유격부대
국군이 중공군의 침략을 받아 새로운 국면을 맞아 유격대를 편성한 것은 전선이 38도선으로 다시 남하한 1950년 12월 중순이다. 육본 정보참모부 공작과가 중심이 되어 극비리에 유격대를 편성하였다.
이 유격대는 주로 청년단체의 협조를 얻어 황해도, 평안도의 피난 청년 중 인원을 선발하여 대규모의 부대를 편성하여 훈련을 시켜 적의 복장과 장비를 지급한 다음 12월 말경 적지에 투입하였다. 이들은 문산에서 임진강을 건너 적지에 들어가 활동을 시작했으나 중공군의 신정공세로 1.4후퇴를 맞아 전선이 후퇴하여 통신소통의 결여로 통제가 불가능하여 작전에 크게 기여할 수 없었다
(1)육군본부 결사유격대
설악산 대청봉
용대 백담사
인제 한계령
가라피 양양
오색약수터
필례약수터 박달령
귀둔리
주문진
현리
구룡령 약수산
응복산
강릉
오대산 퇴곡리
월정사
두일리
진부 대관령
청옥산
평창 정선 삼척
고양산
대구로 이동한 육본의 정보참모부 공작과와 작전참모부의 편제과 협조하에 "육군본부 통제 직할 결사 유격대"를 편성하였다.
이 무렵 국민방위군 설치법과 국민 총동원령 선포에 따라 대구의 육본 보충대에는 많은 애국청년, 학생, 의용경찰관, 철도경비 경찰관, 현역병 낙오자 등이 몰려들고 있었다.
이들 중에 애국심이 강하고 신체조건이 우수한 인원 700여 명을 제1차로 선발하여 '51. 1. 4일 육군 정보학교에 입교시켜 2차에 걸친 3주간의 유격 특수교육을 실시하였다. 육군은 이들에게 정규군과는 다른 별도의 임시 계급과 군번을 부여한 후 결사유격 제11연대, 제12, 제13연대 순으로 편성하였다.
결사유격대가 교육훈련을 받을 무렵 1951년 하순 중동부전선에서는 제1, 제3군단이 영월-삼척 선에 방어선을 구축하였으나 안동일대에서는 퇴로가 차단된 채 후방지역을 교란하는 인민군 제10사단의 패잔병 소탕작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1951년 1월 30일, 먼저 교육을 마친 결사유격 제11연대가 연대장 채명신 중령의 지휘하에 363명이 영월로 이동하여 청옥산-가리왕산-박지산-하진부로 침투하기 시작하였다.
이어서 결사유격대 제12연대는 2월 6일 연대장 이두병 임시소령의 지휘하에 330명이 묵호에서 양구 사명산-신고산-회양을 경유 통천을 목표로 침투하였다. 그리고 결사유격 제13연대도 2월 15일 횡계리에서 중부내륙을 목표로 연대장 김한철 임시대위의 지휘하에 횡계리에서 침투를 개시하였다.
이때 제11연대는 주문진 서쪽의 퇴곡리로 진출하였으나 후속으로 진출한 제12연대는 하진부 북쪽의 두일리에서 적에게 노출되어 인민군 제15사단의 공격을 받아 월정사로 이동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아군 공군기의 오폭으로 다수의 피해를 입고 퇴곡리로 진출하여 제11연대와 합류하였다. 이로 인하여 제13연대는 적의 경계가 강화되고 대관령 일대의 월정사 부근으로 이동하여 20일 퇴곡리에 도착하여 3개 연대가 집결하였다.
결사유격 3개 연대는 이곳에서 채명신 중령의 지휘하에 통합하여 백골병단을 창설하였다.
이 무렵 중동부전선에서는 중공군의 2월 공세로 일시 후퇴하던 국군 제1군단과 제3군단이 제천 북쪽-정선-묵호 선에서 반격을 개시하고 있었다.
재편성을 한 백골병단 660명은 2월 23일 제13연대를 선두로 서쪽으로 이동하여 험준한 오대산맥을 넘어 노두봉 북쪽의 조개동으로 진출하였다. 휴식 중에 24일 오전 아군기의 오폭을 받아 제12연대 일부가 분산되었으나 주력은 공습을 피하기 위하여 구룡령으로 이동하여 고개를 장악하였다. 적의 복장으로 위장한 병단은 이 고개를 통행하는 적을 검문 검색하던 중에 2월 28일 인민군 제69여단의 전투상보를 입수하여 해. 공군 작전으로 인민군 제69여단을 격멸하는게 기여하였다.
병단은 약수산 일대에서 재정비를 하고 3월 14일 인제군 귀둔리로 이동하였고, 이곳에서 남조선 낙하산부대 토벌군으로 위장한 이들은 계속 북상하여 16일에 군량전에 도착하여 각 연대별로 수색작전을 펼치게 되었다.
이때 필례마을을 수색하던 제13연대가 3월 18일 적 13명을 생포하였는데 이들을 심문한 결과 대남 빨치산 사령관겸 제5지대장 길원팔 중장과 참모장인 강칠성을 포함한 지휘부 요원들임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이날 적의 공격을 받는 상황에서 모두 사살하고(백골병단 동지회 회장 전인식 회장이 당시 작전과장으로 직접 사살했다고 증언) 적의 추격이 계속되어 망대암산, 장수대-안산-매봉-용대리를 경유 백담사로 철수하였다. 이 과정에서 배고픔과 적의 계속으로 다수의 병력이 전사 또는 낙오되었다.
채명신 중령은 병력을 대청봉으로 철수하기로 하고 이동 중에 소청봉과 박달령 부근에서도 다수의 피해를 입었다. 철수를 계속한 병단은 3월 30일 현리부근에서 국군 제7사단 제3연대 수색대와 접선하여 복귀하게 되는데 이 때 인원이 260명에 불과 하였다.
이후 백골병단은 강릉의 육군 전방사령부로 이동한 후 동해안의 을지제1병단에 흡수되었다.
(2) 육군 을지병단
육군본부는 육군 결사유격대 편성과는 별도로 작전참모부 심리전과 주관하 후퇴작전시 이북으로부터 서해안과 동해안에 탈출하여 자생적으로 유격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무장치안대, 반공청년대의 조직을 체계화 하여 그들의 활동을 지원하는 형태로 "을지병단"이라는 이름의 유격대를 편성했다.
먼저 육군본부는 동부전선의 국군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동해안 지역에 을지제1병단을 창설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강원도 북부 지역의 활동하던 인원들이 1.4후퇴시 대부분 대구, 부산 방면으로 월남하여 인적자원이 부족하였다. 이때 바로 전선에서 복귀한 백골병단과 지역내 치안대원, 청년조직 등을 규합하여 유격사령부로 발전시키려 했으나 작전 통제권이 미 제8군으로 전환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자 육군은 을지제1병단에 이어 1951년 3월 27일에 강화도에서 서해안 도서를 중심으로 활동주인 자생유격대 조직과 청년들을 규합하여 을지제2병단을 편성하였다.
그러나 울지제2병단은 챵설된 다음날 3월 28일, 앞서 백령도에 창설되어 동일지역에서 활동 중인 미 제8군의 표부대(Leopard)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이때 을지제2병단은 제21, 22, 23, 25, 26, 특별연대로 편성되었다.
병단은 기초훈련을 마친 다음 연백군과 개풍군 일대 작전지역으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이에 당황한 인민군은 2개 전투 사단을 황해도 해안지역에 전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병단의 활동은 미 제8군의 격찬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보급 문제와 지휘 통제 문제로 표부대와 마찰을 빚자 3개 연대로 축소되는 등의 우여곡절을 격게 된다.
이와 같이 문제점이 제기되자 육군은 미 제8군에 유격대의 지휘통제와 군수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을지병단을 미 제8군에 인계하게 된다. 이 조치에 따라 동쪽의 을지제1병단은 "커클랜드 기지"로 흡수되고 서해안의 을지제2병단은 '51.8. 10일 에 옹진반도 동남부 지역의 작전을 통제할 목적으로 강화도에 창설된 "울프팩기지(Wolfpack) 예하로 전환되었다.
그 밖에도 같은 시기에 국군 제1사단은 사단 직속의 제5816부대를 강화도에서 잠정 편성하여 운용하여 한강 북쪽의 개성까지 정찰 및기습작전을 펼쳐 사단의 임무 수행에 일조하였다.
(나) 유엔군 통제 유격부대
미 제8군은 유격대가 적 후방지역에서 공공연한 전투활동을수행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통제한다는 방침에 1951년 1월 15일에 미 제8군사령부 작전참모부 예하 기타 업무처에 유격대 업무를 관장하는 지구전과를 신설한 다음유격대 조직에 착수하였다.
우선 미 제8군은 1951년 2월 15일에 부산 동래에 "베이커기지(Baker Section)"를 창설하였다. 이 곳에서는 장차 예상되는 유엔군의 반격작전과 연관하여 공수 특수임무부대를 적 후방에 투입시킬 목적으로 당시 대구에 집결해 있던 사관후보생 중에서 대원들을 선발하여 공수 및 특수훈련을 교육시킨 후 제1기생을 배출하였다.
다음으로 2월 15일 백령도에 "월리엄 에이블기지(William Able)"를 창설 하였다. 이 기지는 3월에 "표부대(Leopard)"로 공식 명명 되었다. 4월까지 무장치안대를 유격연대로 개편하고 "동키부대(Donkey)"라는 명칭이 부여 되었다.
동키부대는 6월 말에는 15개 연대로 증편되어 평안북도에서 황해도까지 전 서해안의 도서를 중심으로 해안과 내륙으로 침투히여 작전을 전개히였다.
그리고 1951. 4월 15일에 국군 으로부터 울지 제1병단을 인수하여 주문진에 "커클랜드유격기지(Kirand)"를 창설하여 주로 공성 앞바다의 난도와 솔섬을 중심으로 해안과 내륙으로 침투준비를 하였다.
(3)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가) 북한군 게릴라 부대장 길원팔 중장 관련 진실 공방전(채명신 연대장과 당시 작전 과장 전인식(현 동지회 회장)
국방부 편찬 한국전쟁사 제8권 417~418페이지 없는 내용(그러나 구 한국전쟁 중권 486페이지에는 있는데~)이고, 홍학지 중국인민군 지원사령부 부사령관의 회고록에도 없다' 일본인이 쓴 한국전쟁에도 없다
그러나 당시에 백골 연대작전과장을 한 전인식(당시 대위)대위가 직접 연락을 받고 심문에 참여하여 마지막 방아쇠를 당겼다고 수없이 증언했다(생전에 10회 이상 찾아뵙고 증언 청취). 그런데 먼저 채명신(당시 백골병단 연대장 중령) 예비역 중장은 본인이 쏘았다고 하는데 누가 진실일까?
그리고 채명신 중장은 사후에 왜 월남참전 용사 묘역 앞에 묻형야 했는가?. 제주도 4.3 사건부터 중요한 순간에 명암을 바꾸며 생존한 위대한 장군(?) 님이 어찌 백골병단 참전유공자들의 전공심사에 냉정히 외면해야 했는지 등 의문점이 많다.
나) '51. 3. 30일 현리에서 국군 제7사단 제3연대를 만나 복귀했다는 것의 의문점(제8권 418페이지 등 기록)
제3사단 제18연대(백골부대)의 수색중대 출신 참전용사 전기풍님은 본인 들이 설피밭에서 조우하여 북한군으로 오인하여 집중사격으로 많은 인원이 희생되었다고 증언 했다. 알고 보니 복장을 북한군용을 착용하여 발생한 사건이었으며 우린 그 희생된 유해를 10여 구 발굴하였다. 어느 내용이 맞을까
다) 동래부대(베이커부대) 유격대원들의 소망
지금도 매년 기념행사가 진행되고 있다. 생존자들이 얼마 계시다. 나는 그 행사에 3회 참가하여 보았다. 교육받던 지역에 지금 묘지가 몇 분 있다. 이름도 있다. 문제는 이 분 들이 군적에는 없다는 사실이다. 대다수 유격대원들이 군적에 없다. 군적에 없으면 신원확인에 절대 불리하다. 참전용사로 인정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확인하려면 유족을 찾아야 되고 그 유족이 현재 유족으로 등록이 되어 있지 않으면 우린 찾기가 어렵다. 더우기 감식조차 할 수가 없다.
라) 서해 도서의 피난민의 실태와 유격군의 관계
전쟁 전에 볼음도 섬에는 500명이 거주하는데 피난민이 5,000명이 들어와 난리가 나다보니 먹을 것이 없어서 풀 뿌리까지 다 캐어 먹어서 섬 전체가 벌겋게 벗겨지고 말았다. 이 속에 자생 유격대가 만들어 지고 분파가 생기어 암투를 벌이기도 했다. 그러니 이 사람들이 총을 들고 무법천지가 되어 버렸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는지 모른다. 북한군이나 귿르의 세포조직과 연결되었다고 올가미가 씌워지면 그저 죽는 경우가 많았다.
그 많은 피난민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돛배로 다시 다른 섬으로 옮겨 다니며 끼니를 해결하는 해상 마적단과 같았다 한다.
마) 서해 도서지역에 이름 모를 유격대원들의 유해가 흩어져 잠들고 있다(간하도, 대청도, 교동도 등)
충남 서산에 사시는 한 분이 본인의 형님 유해를 찾아달라는 민원을 들고 왔다. 사연을 들어보니 연백에서 형제가 남하하여 형은 유격대원으로 들어가고 본인은 집에 남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형이 돌아오지 않았고 함께 들어갔던 친구분으로부터 햊지역 침투중 전사하여 배가 싣고 대청도에 들어와 묻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당시는 너무 어려운 시절이라 배를 타고 대청도에 들어간다는 것이 쉽지는 않했고 그러나 차일피일 많은 시간이 지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면 대청동 어디에 가매장되었는지 아느냐고 물으니 본인이 얼마 전에 그곳에 들어가 노인회장을 만나보니 그당시에 동키부대원들이 모여서 묻고 경례하는 모습도 보았다고 하여 그 위치를 알아놓았다고 한다. 우린 동네 이장과 파출소 등의 소정의 확인서를 받고 어느날에 발굴 팀을 데리고 직접 현장으로 가서 발굴작전을 시작했다.
그런데 발굴하다 보니 너무 정교하게 형태가 있어 정밀 안면 진단을 해보니 여성의 형태였다. 머리카락도 일부 길게 보였다. 노인회장은 사라지고 엉터리로 알려준 것이다.
이렇듯 서해 도서에는 말이 무성한 가매장지역들이 많이 분포되어 있다. 그 진위여부는 확인하기가 쉽지않다. 너무 많은 세월이 지나고 그 당시를 기억하고 있는 분들도 이제 없다.
사) 연평도 주민들의 뼈아픈 6.25전쟁 기억들
우리가 서해 도서지역에 대한 탐사 및 탐문 활동을 하는 동안에 연평도에 사시는 80이 넘어가신 분이 "저 멀리 전함으로 끌려가 선상에서 사살, 바다로 떨어져 숨져간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하느냐"고 물어왔다.
이런 질문은 수없이 받아왔다. 막연하게 대답을 할 수 밖에 없다. 군인이었느냐, 아니면 경찰 학도병 등 전쟁관련 대상자였느냐고 질문하고 우린 그 분들을 찾는다고 답변해야 한다.
그러면 그 분들은 군인들이 사람을 데려가더니 그렇게 죽어갔으니 군인들이 아니면 국가가 찾아줘야 한다고 강변하다. 참 난처한 경우가 많다. 아마도 주변에서 누군가가 북한군 내통자거나 심하게 부역한 분이라고 고자질(?)된 분들일 거다. 여기에는 일부 감정도 개입되고 지금 우리가 그 실체를 밝히기에는 한계가 있다. 분명한 것은 전쟁 당시에 그렇게 해서 많은 사람이 죽어간 것만은 사실이다.
이곳 섬사람들은 우리의 질문에 나서서 답변하지 않는다. 언제 서로의 입장이 바뀔지 모르는 현실이고 그 피해는 어떻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전쟁의 비극이다. 전쟁은 다시는이땅에서 없어져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지구는 전쟁터라는 것이다.
아) 일제 강점기부터 서해 도서에 먼저 들어와 있는 미군 첩보부대와 자유중국 첩보대(?)
나는 볼음도나 백령도 대청도에 탐사를 나가서 좀 의미있는 이야기를 들었고 실제 자유중국 첩보대가 들어와 있었다는 현장도 가보았다. 미군은 세계 경찰국가랍시고 도처에서 정보수집활동을 해 왔다는 것은 공론할 필요없다. 아마도 중국내전(장개석 군대와 모택동 군대간 전투)상황에서 활동하던 첩보대의 일부가 이곳 우리 서해 도서지역에도 들어온 모양이다. 우리도 사실 전쟁 전에 이미 서울 복판에 켈로부대가 은거하며 정보수집활동을 했다.
미군 입장에서 조선을 신탁통치하려는 소련과 상호 견제의 입장에서 지금 북한지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야 할 것이고, 아직 국공내전이 끝나지 않은 장개석 군대의 입장에서는 모택동의 일거수 일투족을 알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니 미 군의 정보기관이 극동지역에서 광범위하게 활동했고 한반도를 둘러싼 미소공동위원회 활동 등과 관련한 북쪽의 실태파악이 매우 중요하게 필요했다고 본다. 마찬가지로 장개석 군대의 일원을 활용하는 것도 그 해법을 찾고, 장개석의 국민당 군대는(모든걸 본토에 남겨주어 모택동의 군대가 한반도에 무력 개입하는 무기로 활용되게 한 장본인) 어떻게든 모댁동 일당의 내부 문제를 파악하여 본토로 진입하기 위한 단초를 얻으려 했을 것이니 본토에 남아 있는 그들의 핵심조직원(정보획득)과의 연락이나 접선에 서해 도서지역이 필요했다고 보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