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들이 기억해야 할 한국교회 위인들 [18]
구연영(具然英, 1864-1907)➀
구연영은 1864년 8월 20일 서울에서 아버지 구철조의 삼남으로 태어났습니다. 18세 때 변미례와 결혼해서 네 명의 아들(정서, 성서, 완서, 종서)을 두었습니다. 30대에 접어들자 나라 안팎은 급변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1894년 동학동민운동이 일어났고 갑오개혁이 단행되었으며, 곧 이어서 청일전쟁이 일어났습니다. 1895년에는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났습니다. 1895년 말경에는 비록 조선 정부가 단발령을 내렸지만, 그 배후가 일본이라는 사실을 알고 전국적으로 반발이 일어났습니다. 이 시기부터 일본은 조선을 점령해서 지배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때 구연영은 의병장 김하락과 김태원, 조성학, 신용희 등과 함께 경기도 이천에서 의병 1,000명을 조직했고, 그는 간부를 맡았습니다. 이 조직이 전국 최초로 의병항쟁을 시작했고, 첫 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이겼습니다. 두 번째 광주 전투에서는 패배했고, 남한선성으로 옮겨 전투를 이어갔습니다. 그러나 당시 의병대장 박준영의 변절로 인해 이천의 의병조직은 와해되고 말았습니다. 그 후 약 1년이 흐른 1897년 2월 서울 상동교회를 찾아가서 선교사 윌리엄 스크랜튼(William Scranton)을 만났고, 기독교인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이 당시에는 민족운동을 효과적으로 하기위해 기독교를 자신의 종교로 선택한 것입니다. 상동교회에서 만난 전덕기 목사와 엡웟청년회(Epworth League)를 조직했고, 교회조직을 통해서 민족운동을 이어가려고 했습니다. 그가 몇 년 후에 회개하고 세례를 받기까지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보다 나라와 민족을 위한 사명감이 앞섰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