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거나 마시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옷을 입거나 자리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살아있는 누구나 먹고 마시고 입고 자리를 차지 합니다.
그리고 가족을 이끌고 세상 속에 살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가 다 그렇게 합니다.
물론 누구나 다 그렇게 하는 것. 그렇게 사는 것. 그렇게 살다가 가면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동물들 새들, 한갖 생물 가운데 미물(微物)들도 그렇게 합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당신의 모습으로 창조하셨고(창세 1,27), 하느님은 인간이 동물이나 새들에게 이름을 붙여주게 하셨다. 인간을 사랑하셔서 인간에게 협력자를 만들어주기 까지 하셨습니다(창세 2, 24).
인간은 창조의 자연 생물처럼 세상에서 살기는 하되, 그 자연생물과 똑같지 않습니다.
그것들 처럼 먹고 마시고, 살고 있지만,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하느님을 닮은 만물의 영장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에게 숭고(崇高)함이 있습니다. 그 숭고함이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물이나 새 등은 그것들의 운명에서 살아가지만 인간을 그것들을 부릴 수 있고, 그것들을 새롭게 창조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을 하느님께로 부터 받았습니다.
인간은 하느님께로부터 창조의 길을 부여받음 만큼, 그 존재가 위대하고 숭고합니다. 그런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단지 먹고 마시고, 입고, 자리하고 활동하는 동물이나 새 등의 생활의 차원을 넘어야 합니다.
특히 하느님을 알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사는 우리은 세상 사람들의 삶과 또 다른 차원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먹고 마시고 자리잡고 누리고, 자기 자신과 자녀나 가족만을 위해서 모든 에너지를 쓰는 그런 가치와도 좀 다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실상 누구나 먹고 마시고 자리잡고 누리고 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하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복을 내리시고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다스리라(창세 1,28)고 하신 것은 짐승이나 새와 같은 생태 환경의 가치에 머물지 말라는 것을 뜻하고 인간에게 또 다른 삶의 환경과 하느님의 가치를 닮은 가치를 추구하라는 것을 말합니다.
단지 우리는 먹고 마시고 자리하고 즐기는 가치에 머물러서는 않됩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다스림, 그 숭고한 가치에 열려있고, 그것에 관심과 곧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 숭고한 가치는 그리스도 신자인 우리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리스도를 일생 그리스도를 희망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들과 몸이 불편한 이, 마귀들린 이들을 고쳐주시고 그들을 살리셨습니다. 그것은 하느님 나라의 해방에 관계되는 것으로, 사람들의 영육을 살리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숭고한 일은 생명의 길에 멀어져 있는 이들을 살리는 것이었습니다. 또 그 하느님 나라의 숭고한 일 때문에 해방과 자유의 일, 고치고 쫓아내고 살리는 일을 하고 나서도, 그 기쁜소식의 일이 올바른가?를 식별하기 위해서 하느님께 기도하였습니다(마르 1, 35). 숭고한 일은 기도와 깊을 성찰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은 반드시 세상 구원을 위해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에게 배척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또하 사흘 만에 되살아 난다고 하셨습니다(마르 8,31). 이때 베드로가 예수님께 반박하자 예수님은 그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32)하고 꾸짖으셨습니다.
예수님에게나 제자들에게 있어서 숭고한 일은 하느님 나라의 일,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고 실천하는 것이었습니다.
단지 그들이 어부나 세리로서, 일꾼이나 품삯인으로 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직업을 가지고 있었고, 각자의 필요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어느 시기에 주님의 명령과 주문대로 그분의 제자가 되었고, 하느님 나라의 기쁜소식을 전했습니다.
인간은 숭고한 인생을 사는 존재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창조하였습니다. 그 숭고한 일을 할 때 즐겁고 행복하고 희망이 있습니다. 그렇게 숭고한 삶을 살지 않으면 그 즐거움과 기쁨, 행복과 희망이 그리 오래가지 못하고 소멸되고 맙니다. 하느님이 창조한 재물과 조물에 집착하여 그것을 행복의 지수로 생각하면 그런 것들을 궁극적 숭고한 행복을 얻지 못합니다.
내가 나 자신을 되돌아 보고, 성찰하고, 회상하는 것. 내가 하느님의 숭고한 길을 얼마나 어떻게 갔느냐?를 생각하는 것은 내가 하느님의 자녀이고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창조 목적에 부합하여 살면서 그 은혜와 사랑을 듬뿍받았음을 알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을 헤아립니다. 내가 오늘 주님이 기뻐하시는 그 숭고한 일을 했는가? 하고.
그래서 오늘 나를 헤아린는 것. 곳 용서의 의미, 화해의 의미를 갖는 것은 내가 숭고한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숭고한 일을 위해서 되돌아보고,회상하고, 헤아리며 성찰합니다.
주님의 일, 하느님의 일. 그 일을 위해서 용서의 의미, 성찰과 헤아림을 가집시다.
"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았을 것이다."
요한 20,22-23
오늘의 숭고한 주님의 일을 위해서 나를 성찰하고, 되돌아 보는 날 되기를 바랍니다.
이재을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