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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청결한
信天함석헌
우리 마음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예수님의 산상수훈에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요” 그랬다. 그럼 마음이 청결하다고 하는 건 무언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건가? 동양의 『주역』에 있는 말로는, 성인이란 마음을 씻어서 깨끗한 데 이르는 분이라 하였다. 그래 그럼 마음을 씻는다면 어떻게 씻을까? 그럴 때 한 가지 할 수 있는 말은 “마음을 가라앉힌다” 그런다. 잡념이 여러 가지 있지만 마음을 가라앉혀서 명상을 하면 하나님을 접할 수가 있다 그러는데, 가라앉힌다는 건 그럼 뭐냐. 그럴 때는 모든 말에서 다 마음을 물과 비겨서 하는 말이 공통된 점입니다.
마음이 청결하다 하는 것도 물에 비겨서 하는 말이고, 마음을 가라앉힌다 할 때도 물에 여러 가지 섞여있는 것, 떠 있는 것, 맑은 물로 있지 않고 다른 것으로 인해서 물이 든 것, 그런 것을 가라앉힌다 하는 뜻이다. 그래서 노자는 ‘상선약수’(上善若水)라, 마음을 참 바르게 가지는 것 그것이 착한 마음이고, 선은 물과 같다 그렇게 말했다. 그걸 설명하면서 물이 만물에 잘 이롭게 해주어서 풀을 살리는 것도 물이요, 동물을 살리는 것도 물이요, 우리 지구상의 적어도 3분의 2는 물이고, 우리의 몸속에도 제일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것도 물이다.
그런데, 물 없이는 살수가 없고 물이 만물을 이롭게 해주는데 자기는 늘 다른 사람이 좋아 아니하는 낮은 데로 내려간다. 그렇게 물의 특성을 말하고 있다. 그래 그걸 들어서 ‘상선약수’라고 그런 말을 했다.
그런데 물이란 이상한 게 돼서, 어딜 갖다놔도 물이 스며든다. 침투 하는 힘을 가진다. 침투하는 힘이 강하다는 것은, 자기로서는 아주 한 없이 부드럽다, 약하다 그 말이다. 돌을 다른 흙 속에 갖다놔도 그대로 있지 다른 데로 녹아버린다든지 그러질 않는다. 물속에서도 안 녹는 건 돌이다. 그래 돌만은 제외가 되지만, 그 밖의 것은 대개 물에 녹는다. 아주 강한 풀로 붙여서 떨어지지 않는 것도 물에 장시간 두면 떨어진다. 그 두 사이의 틈틈이에 물이 침투해 들어가기 때문이다. 물이야말로 아주 침투력이 강한 것이다. 쇠나 돌 같은 것은 못 뚫지만 그런 것 몇 가지를 내놓고는 못 들어가는 곳이 없다. 그것은 자기주장이 없다. 자기네끼리, 물들끼리는 떨어지지도 않는다. 그러면서도 어디엘 갖다 넣어도 유연해서 자기 몸을 그냥 가지고 있으려고 안한다. 틈틈이 남의 속으로 들어간다. 흙속에도 나무속에도 배어들어간다. 그래 노자는 지극히 부드럽다고 하는 걸 물의 특성으로 든 것이다.
그런데 아까 말했던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요”라는 말은 실제로는 거꾸로 생각해보면 좋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났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하나님을 보지만, 청결한 마음이 도대체 어디 있느냐? 처음에 날 때는 어떤지 몰라도 썩 나자마자 물이 들지 않을 수가 없어. 어머니라는 분도 본래 청결한 마음은 못되고, 아버지라는 분도 청결한 마음이 못되고, 만나는 사람은 다 제대로 있는 마음이 못 되니까, 사람이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마음이 더러워지지, 성인 같은 사람을 만나면 다소 낫겠지만 그래도 성인을 만나도 마음이 걸리는 데가 많아요.
그러니까 아까 그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란 것은 청결할래야, 이 세상엔 청결한 마음이 있을래야 있을 수가 없어요. 이 세상 물치고 다 오염돼 있지, 물이 아주 참 순수한 그런 물이 없듯이, 아주 참 청결한 마음이 있을까? 증류수가 아닌 다음엔 그럴 수가 없는데, 증류라는 특별한 방법, 물을 끓여서 아주 수증기로 만들어서 다시 식히면 깨끗할 수도 있지만, 그건 참 놀라운 것이고. 그래 지금 내가 생각을 하다가,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와서 말할 때에 “영으로 날 수가 있습니까?” 그렇게 물으니까 예수님이 그거 안 된다 하시고, 물과 바람으로 나지 않으면 안된다고 그러셨는데, 다른 데는 물과 바람이라고 한 데도 있고, 물과 불이라고 성령을 불에 비긴 데도 있는데, 물에 녹이려다가 안되는 거는 가열을 하는 수밖에 없어요. 물을 붓고 끓일 수밖에 없어. 끓이면 아까 들어가지 못하던 데도, 심지어는 돌도 불에 들어가면 열로 인해서 녹아버려요.
요새 물리학에서 실험하는 것도 결국은 전기를 가지고 어떻게 고열을 낼 수 있느냐 하는 것과, 분자 속에까지 틈틈이 스며들어가 있는 것을 증류법을 써서 물만을 분리시켜서 뽑아내는 방법인데, 그러니까 여간 놀라운 보통방법이 아닌데, 그걸 사람의 심리에서 애기한다면 마음이 청결한자는 하나님을 본다고 그러지만, 그러다가는 누가 하나님을 볼 사람이 있겠느냐? 그런데 그 하나님을 부족한 이 마음을 가지고도 바라보노라면 거꾸로 내 마음이 청결해져. 거꾸로 그런단 말이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물론 하나님을 보지만 부족한 이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보려고 거기만 전심하노라면 내 마음이 언제든지 가라앉어. 거기서 내 마음이 뜨거워져가지고 증류가 돼요. 교잡물이 섞였던 것이 제거가 되는 그런 기적적인 현상이 일어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을 볼 수 있다 그러지만, 또 한편 뜻을 바꾸어 생각하면 청결치 못한 마음을 가지고라도 하나님을 보려고 힘을 쓰노라면, 하나님 생각을 하노라면 하나님이 무언지 모르지만 하나님이라는 그것 때문에—하나님은 물질도 아니고 그 무어라고 이름 할 수 없는 분이지만—하나님이라고 하는 그분 때문에, 그러니까 말을 하자면 마음 중에 아주 순수한 것, 다시 없이 순수한 마음, 모든 마음의 근본이 되는 마음, 성경에 “하나님은 우리 양심보다도 크시다” 그런 말이 있어요. 사람의 마음에는 가장 순수한 마음이 양심인데, 그 양심보다도 하나님은 크시다—사실 양심이라 그래도 완전히 선하다고 할 수가 없어요. 그래 “하나님은 양심보다 크시다”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그야말로 물 중의 근본, 성령, 마음 중의 근본 마음, 초월한 마음, 그 마음을 접해보려고 노력하노라면 나 자신이 언제든지 맑아지는 걸 우리가 느낄 수가 있지 않나—물과 비교해서 그런 생각, 또 물로 안될 경우엔 바람, 불을 넣어서, 즉 성령으로 마음을 청결케 하는 그런 애기가 있는걸 앉아서 생각하노라면 어느 정도 우리가 체험을 하지 않나……그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그거는 다 어디서 나오는고 하니, 물이란 본래 큰물 작은 물이 없는 거지만, 아주 큰물이란 본래 깨끗한 거지요. 그 담에 소위 더러워졌다는 물은 작은 물들이에요. 물이 크면 클수록 깨끗해요. 바다엘 가면 바다에는 더럽단 말이 들어가질 않아요. 어느 부분이 더럽다 어떻다 할 수 있지만 거길 들어가면 한탕치고 다 깨끗한 것으로 우리가 보지 않아요? 그게 왜 그러냐 하면, 물이란 것의 근본 성격이 당초에 자기는 변해 버리질 않아. 물에 들어가면, 물에 들어가서 다 퍼졌다는 건 기계적으로 틈틈이 남의 분자 속에 들어가서 물이 녹여버렸지, 물 자신이 변화하진 않았다 그 말이에요. 그러니까 사람이 믿음으로 인해 구원받는 가능성이 거기에 있어요.
그러니까 행동을 하면 행동은 벌써 잘못야. 행동하는 그 일에 나 자신이 벌써 잘못 끼여들어오지만, 마음속엔 했다는 게 남의 말을 들었다든지 보았다든지 그러는 가운데 그걸로 인해서 무슨 붉은 물이나 꺼먼 물이 물속에 녹아드는 모양으로, 그래서 마음이 그렇지, 기실 마음의 본체는 변동이 안된다 그 말이에요. 그야말로 그거는 본래 하나님에게서 나는 거고, 내 마음이라고 하는 것과 하나님이라고 하는 자리가 딴 자리가 아니고 근본이 같은 건데, 그것이 이 세상에 오면 작아졌기 때문에 어느 틈에 들어가서 어느 무엇에 끼었기 때문에 더러워진 거니까, 그 근본에 돌아가려고 그러노라면 그 본성을 찾아서 맑은 지경엘 가나봐. 아마 그런 걸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하나님을 볼 수가 있다” 그렇게 한 말 아닐까?
물은 남을 침투해 들어가서 부드럽긴 또 한없이 부드러워 늘 낮은 데만 있으면 또 내려가요. 얼마든지 갈라지고 또 갈라져 가능한 한도까지 갈라져. 그러니 세상에 겸손한 것이 물이고 세상에 부드러운 것이 물인데, 그런 고로 못 녹일 것이 없는데, 그러면서도 내 성격은 변하지 않는다 그 말이에요. 강도질을 했다고 그래도 마음은 본래 마음대로 있는 깨끗한 마음이지 거기 다른 것, 들은 것이 잘못 들어갔고 본 것이 잘못돼서 그래서 강도까지 갔지, 그 사람 속에도 마음은 언제든지 살아날 수 있는 마음의 가능성이 남아 있다 그 말이야.
그러니까 그게 참 무섭다면 무서운 거예요. 우리 속이, 우리의 마음이라는 게 본래 그런거. 그러기 때문에 행함으로 구원 얻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 그러는 거예요.
그러면, 본래 내가 해서 능치 않던 것 할 수 없던 것이 내 속의—(이 세상에 있을 때 다른 것이 섞여 들어와서 내 본래 연약하다고 하는—그 성격이 참 좋은 성격인데)— 연약하다고 하는 것을 기회로 삼아 내 속에 틈틈이 끼여 들어와서 내가 약한 사람처럼 됐지만, 내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 그러면 내 물이 가라앉아 버리고 분리돼서 나하고 섞였던 게 위에 맑은 물이 있고 나를 변동시켰던 것 같은 색깔은 저 밑으로 처져서 가라 앉아 버리고.
이런 시대에 있어서 어떡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 마음이 깨끗해져야 한다. 그럼 어떡하면 깨끗해질까? 하나님은 보아도 보이질 않지만 다른 건 모르지만 그 하나님을 전적으로, 이유를 설명할 것 없이 그 하나님을 보려고 노력하면, 그러노라면 도리어 내가 보려고 하는 그 하나님의 크신, 말하자면 그 물이 작용을 해서 내가 언제든지 맑은 마음이 되는 것 아닐까? 그게 죽은 사람 다시 그 영혼이 살아난다는 거 아닐까? 그러니까 어떤 잘못한 사람도 낙심할 필요는 없다. 낙심할 까닭이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아까 생각하다 곁들여 난 생각이 “우상 만들지 말라” 나를 무슨 형상으로 만들지 말라 그거예요. 손으로 조각을 해서 만드는 것만이 아니라 마음 안에서도 무슨 형상을 조각해서는 안돼요. 그런데 사람이 형상 없이는, 표상 없는 생각을 할 수 있냐 그러면 그렇지 않아요. 생각은 표상으로 하게 마련이지 표상 없는 생각은 없어요. 이게 참 기막힌 일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라고 하면 무슨 흰 수염이 난 할아버지 생각을 해내고, 나이가 많다든지, 키가 한없이 크다든지, 붉었다든지, 묽었다든지 어쨌거나 생각한다는 건 표상 없인 안되는데, 그럼 그 표상이란 대체 무어냐! 그러니까 순수한 생각은 있을 수가 없어요. 표상 때문에, 표상이 거기 없어야 참 생각인데.
그러니 내가 지금 앉아서 실지로 해봤는데, 표상 없이 하나님을 아무리 가까이 생각한다 그래도 글자가 나타나도 나타나고 무슨 음성이 들려도 들리고 어떤 형태로든지 표상이 있는데, 표상이 있는 한은 그건 순수할 수가 없단 말이야. 그러니까 그러고 있는 동안에 내가 하는 것 아니고 언젠지 모르게 그 하나님을 뵙고자 간절한 마음이 들어가면 어느 순간에 그게 변화가 생겨. 표상은 떨어져나가. 그렇게 되기 전에는, 그런 체험을 하기 전까지는 하나님을 봤다고 할 수가 없어요. 의심할 거 없어요. 근본이 다 그런 거니까. 그런 점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다 그런 자리엘 갔던 사람은 무아의 지경에 들어갔다고 그러지 않아요? 나고 뭐고 다 잊어버리는 거예요. 그래 하나님을 접하는 거기 들어가면 가사상태에 들어갔다고 그래요. 옆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어도 알질 못해요. 누가 왔다 갔는지도 모르고.
그런 데 비하면 우린 아직도 건천에서 놀아! 저 마음의 공부란 그렇게 힘이 드는 건데.
1984. 4. 1 퀘이커서울모임 감화말씀(정리 조형균)
퀘이커서울모임 월보 6
저작집30; 15- 119
전집20; 15- 21 19-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