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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주님을 기다리는 신부들 원문보기 글쓴이: 쿰란
[역경의 열매] 심재덕 (18~23·끝) “누린 은혜는 하나님 선물, 그 모든 영광도 하나님 것”
심재덕 선수가 지난 9월 전북 장수에서 열린 장수트레일레이스 38k 부문에서 1위로 결승선을 통과한 뒤 손을 모아 기도하고 있다.
[역경의 열매] 심재덕 (18) 19년전 세운 MMT100 최고기록 아직도 깨지지않아
한 러너의 ‘MMT 100’ 실패기 읽은 후
다음 대회 동행 약속하고 미국서 만나
세계 최강 트레일 러너 칼 멜처와 경쟁
‘17시간40분45초’ 대회 최고 기록 우승
심재덕 선수가 2006년 미국 MMT 100 대회에서 거친 산길을 달리고 있다.
정보가 부족하던 시절, 한 마라톤 온라인 게시판에서 필명 소나무님의 ‘MMT 100’(Massanutten Mountain Trails 100mile run) 실패기를 읽었다. “여기다.” 본능적으로 느꼈다. 내 연락을 받은 그는 흔쾌히 다음 동행을 약속했다. 911 테러 이후 미국 입국이 어렵던 때다. 비자 인터뷰 줄만 300명이었고, 여권 첫 장을 꿰맨 실밥이 훼손됐다는 이유로 재발급받아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손에 쥔 미국 비자, 국가고시 합격보다 기뻤다.
출국 전 한 달은 전쟁이었다. 대회 공지를 번역해 체크포인트(CP)와 기후, 장비, 영양 계획을 표로 정리했다. 울트라를 다녀오면 근력이 줄어들기에 주말엔 10㎞부터 풀코스까지 섭렵하며 스피드를 끌어 올렸다. 출국 일주일 전에 받은 종합검진 결과는 ‘이상 없음’. 달린 거리만큼 연골이 닳는 건 아니었다.
어렵게 도착한 워싱턴 DC 공항 대합실에서 소나무님과 비닐 두 장 깔고 밤을 새웠다. ‘내가 왜 이 고생을….’ 새벽 비행기였는데 조식은 없었다. 주린 배를 안고 다음 날 대회장 인근 숙소로 향했다. 숙소 주인은 “첫 한국인 손님”이라며 라면을 끓여줬다. 힘이 났다. 임마누엘 하나님의 섭리를 느끼며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날 밤 침대 맡에 성경을 펴고 시편 한 구절을 읽었다. “주는 나의 힘이요, 나의 산성이시라.”(시 18:2)
새벽, 출발선에서 기도했다. “오늘도 주의 영광을 위해 안전하게 달려가게 하옵소서.” 엔트리 159명이 잔디를 박차고 어둠 속으로 달려나갔다. CP2에서 3위, 누적 1시간19분. MMT 100은 900m급 봉우리 16개를 넘는 코스다. 오르막에서는 내가 강했다. 하지만 바위에 허벅지를 찧으며 멍이 번졌다. 진통제를 삼키며 버텼다.
일명 ‘지옥의 오르막’에선 세계 최강 선수 칼 멜처와 나란히 뛰었다. 그는 내리막의 제왕이었고 나는 오르막의 사나이였다. CP7에서 맡겨둔 장비 가방을 찾아 헤매다 시간을 잃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땀에 젖은 손으로 배낭에 새긴 익투스 물고기를 한 번 더 쓸어내렸다.
CP14에서 다시 선두에 올라섰다. 허벅지 통증이 치밀었다. 포인트에 들어서면서 “타이레놀”을 외쳤다. 약을 먹고 약효가 돌자 에너지가 솟구쳤다. “이제는 굴러가도 완주한다.” 마지막 CP17, 급경사 낙엽길을 기어오르며 마무리 시간을 계산했다. “15분.” 주먹을 쥐고 내리막을 내질렀다. 17시간40분45초. 대회 최고기록이었다.
시상식에서 완주자는 은 버클을, 우승자는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우승자는 재덕 심!” 지금까지도 18시간 이내 완주자는 나와 칼뿐이다. 전설 같은 이름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고 그를 넘었으니 그토록 간절했던 첫 번째 꿈, 세계 최고의 트레일 러너가 된 날이었다. 이 우승으로 미국 잡지 ‘울트라러닝’ 표지 모델이 되고 또 다른 무대 웨스턴 스테이츠 초청장을 받았다.
날 향한 박수가 멎은 뒤 다시금 배낭의 익투스 표시를 쓸어내렸다. 끝까지 달리게 하신 손길. 그 은혜가 기록보다 값졌다.
***[역경의 열매] 심재덕 (19) “나의 한계는 내가 정한다” 24시간 RUN 극한 도전
세계 상위 12명 초청한 ‘24시간 주’
한 번도 24시간 경주 뛴 적 없었지만
각종 울트라 대회 성적 덕에 초청받아
누적 거리 211.6㎞, 종합 3위로 완주
심재덕 선수가 2016년 중국 광저우에서 열린 24시간 울트라 러닝 대회에서 달리고 있다.
달리기에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 동시에 나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한계는 없다. 나의 한계는 내가 정한다.’ 그 좌우명을 가슴에 새기며 아직 가보지 않은 세계로 한 걸음 더 들어가기로 했다.
5주 연속 대회에 나서며 몸은 이미 한계에 닿아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24시간 주(走)’라는 이름의 극한 대회에 마음을 빼앗겼다. 세상에는 별의별 대회가 다 있다. 국제 울트라러닝협회(IAU)에서 감독하는 최장거리 대회, 온종일 쉬지 않고 달리는 경기. 도대체 어떤 맛일까. 궁금했다. 그 해답을 얻기 위해 2016년 여름, 나는 다시 훈련을 시작했다. 풀코스와 울트라, 산악마라톤까지 잇따라 우승하며 ‘폼’은 최고조였다. 연습을 제외하고 대회만 496㎞를 달렸다. 몸이 고통을 기억할 틈도 없었다.
문제는 회복이었다. 1주일 전 TNF100(100㎞ 트레일런)에서 우승한 직후였다. 겉보기엔 멀쩡했지만 속은 텅 비어 있었다. 그러나 나는 멈추지 않았다. 목적지는 중국 광저우, 섭씨 35도와 습도 90%의 열대 도시였다. 해가 져도 공기가 식지 않았다. 숨이 턱 막히는 더위 속에서 24시간을 달린다는 건 미친 짓이었다. 하지만 내겐 또 하나의 실험이었다. 최악의 조건에서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지 그 끝을 보고 싶었다.
세계 상위순위자 12명을 초청한 제1회 국제 24시간 대회였다. 나는 한 번도 24시간 경주를 뛴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초청장을 받았다. 각종 울트라 대회에서의 성적 덕분이었다. 주최 측에는 예상 기록을 260㎞로 제출했다. 실제로는 240㎞ 이상을 목표로 삼았다. 초청선수에게는 항공권과 숙소 식사 통역이 제공됐다. 비용 부담은 없었지만 그만큼 책임이 따랐다.
코스는 광저우 영화세트장 안에 마련된 1.2㎞ 콘크리트 트랙이었다. 단조로운 순환코스를 수백 바퀴 돌아야 했다. 통역을 맡은 한국어 전공 대학생이 “파이팅”을 외칠 때마다 힘이 났다. 하지만 몸의 열기와 피로는 예상을 뛰어넘었다. 새벽이 와도 기온은 내려가지 않았고 신발 속에서 땀이 쏟아졌다. 한 바퀴를 돌 때마다 분무기로 물을 뿌려주고 물을 마셔도 갈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신약 누가복음 속 부자가 ‘나사로를 보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할 만큼 목은 타들어 갔다.
정신력도 흔들렸다. ‘지금 멈춰도 아무도 뭐라 할 사람은 없다’는 유혹이 반복됐다. 그러나 나는 마음속으로 ‘할 수 있다’고 되뇌었다. 단순한 근성이 아니라 믿음의 고백에 가까웠다. 인간의 힘이 다한 자리에서 주의 손길이 내 발을 밀어주셨다.
결국 24시간 동안 멈추지 않고 한계를 넘었다. 누적 거리 211.6㎞, 종합 3위. 목표했던 240㎞에는 못 미쳤지만 경기장을 떠나는 순간, 나는 또 하나를 배웠다. 인간의 한계는 정해진 값이 아니라 믿음으로 다시 써 내려가는 방정식이라는 것을.
그해 나는 잡지 ‘사람과 산’이 제정한 ‘탐험대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상보다 값진 건 깨달음이었다. 한계는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보여주신 또 하나의 기도 자리다.
***[역경의 열매] 심재덕 (20) 알프스 산악 코스 오르내리며 “살아서만 돌아가자”
세상에서 가장 험한 울트라 대회
이탈리아 ‘토르 데 지앙’에 도전
8월의 산, 눈까지 내리는 악천후
함께하시는 하나님만 믿고 전진
2011년 이탈리아 토르 데 지앙 대회 체크포인트에서 파이팅을 외치는 심재덕 선수.
이탈리아에는 세상에서 가장 험한 울트라 대회가 있다. 토르 데 지앙(Tor des Geants, TDG), 대회 이름의 뜻은 ‘거대한 바위들의 산’이다. 이름 그대로, 알프스 몽블랑 일대를 무대로 2000m급 봉우리 25개를 넘어야 하고 34개 마을과 30개의 호수를 지나 333㎞를 150시간 안에 완주해야 한다.
대회 정보는 거의 없었다. 홈페이지는 영어조차 지원되지 않았고 소개 영상 몇 편이 전부였다. 매일 밤 모니터 앞에서 영상을 돌려봤다. 선수들의 장비와 복장, 구간별 지형을 노트에 옮기며 머릿속에 지도를 그렸다.
경기는 7개 구간으로 나뉘었다. 하루 1구간씩 50㎞를 달리면 제한시간 내 완주가 가능하지만 선두권에 들려면 하루 100㎞ 이상을 달려야 했다. 나는 첫 구간 48.6㎞를 7시간54분16초에 통과했다. 10위. 체크포인트에서는 구간 이름이 새겨진 배지를 받았다. 7개를 모두 모아야 완주다.
1위와 50분 차이. 마라톤으로 치면 불과 5㎞ 정도였다. 하지만 산에서는 아득한 간극이다. 대부분의 선수가 등산용 폴을 짚고 오르막을 버텼다. 나는 거추장스럽다며 맨몸으로 올랐다. 그 오만함을 곧 뼈저리게 후회했다. 오르막에서 폴은 단순한 장비가 아니라 생명줄이었다. 다음 구간부터 폴을 손에 쥐었다. 완만한 코스에서는 선두를 따라잡겠다며 트레일화 대신 마라톤화를 신었다. 부드러운 밑창은 바위와 자갈에 무너졌다. 알프스는 도로가 아니었다. 빠른 속도를 택한 대가로 발가락 뼈마디로 통증이 스며들었다.
밤이 찾아왔다. 천둥 번개를 동반한 비가 내릴 거라는 예보가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했다. 고산지대 날씨는 변덕이 아니라 폭력에 가까웠다. 3000m급 봉우리를 잇달아 넘어야 하는 이 구간에서 선두권 10여명 중 절반이 포기했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꺾였다. 나도 잠시 하늘을 올려다 봤다. 어둠 속에서 흰 구름과 먹구름이 뒤섞였다. 발아래로는 끝이 보이지 않는 협곡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79.1㎞ 지점, 자정 무렵이었다. 앞에는 3299m의 콜 로손(Col Loson)이 버티고 있었다. ‘여기서 날이 밝기를 기다릴까, 아니면 계속 오를까.’ 망설였다. 그때 잠시 하늘이 열리며 별이 보였다. 그 별을 보고 희망을 노래하며 주님 손 잡고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발걸음을 내디뎠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정상까지는 10㎞. 혼자였다. 바람은 살을 베고 빗방울은 얼굴을 때렸다. 안개 속에서 길을 잃었다. 랜턴 불빛이 눈발에 흩어지며 방향을 삼켰다. 8월의 산에 진눈깨비가 내렸다. 장갑 위로 하얗게 쌓이는 눈꽃을 보며 중얼거렸다. “살아서만 돌아가자.” 숨이 끊길 듯 가빴다. 천둥소리가 산을 찢었다.
끝없는 바위 언덕을, 더는 오를 곳이 없을 때까지 기어올랐다. 비로소 하늘이 낮아지고, 희망이 보였다. 그러나 안도할 틈도 없었다. 이제 13㎞ 내리막이 기다리고 있었다. 고산증에서 도망치려면 빨리 벗어나야 했다.
***[역경의 열매] 심재덕 (21) 마지막 구간서 움직이지 않는 몸, 내려놓자 눈물이 핑
3구간부터 완주 어려운 몸 상태였지만
고통 참으며 오직 의지로만 6구간 달려
7구간 초반 고산증으로 결국 주저앉아
심재덕 선수가 2011년 이탈리아 토르 데 지앙 대회에서 산길을 달리고 있다.
조급함이 문제였다. 랜턴이 번개를 끌어들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서둘렀다. 내리막길을 미끄러지듯 달리다 넓적다리 근육에 통증이 왔다. 마라톤화가 앞으로 쏠리며 발톱이 들썩였다.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능력 이상의 힘을 쏟은 탓이었다. 아차 싶을 때는 이미 늦었지만, 자연의 섭리를 거스를 수 없었다.
제3구간 시작점인 코네(Cogne·102.1㎞)에 도착했을 땐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기록은 7시간18분, 순위는 8위였다. 그러나 몸 상태는 최악이었다.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워 매니저로 동행한 여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더는 못 하겠어. 이쯤에서 그만둬야 할 것 같아.”
포기를 말했지만 속으론 아직 항복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워 잠시 눈을 붙였다. 잠에서 깨어나니 거짓말처럼 몸이 개운했다. 아직 대회 초반이고 8위라면 선두권이다. 여기서 포기하면 모든 게 끝이다. 나를 믿고 도와준 사람들에게 뭐라 말할까. 그 뒷감당이 더 괴로울 것 같았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이제 우승이 아니라 완주가 목표였다. 꺼져가던 심지가 살아나자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그러나 내리막은 지옥과도 같았다. 허벅지가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차라리 오르막이 백배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4구간 돈나스(Donnas·148.7㎞)까지 평소라면 2시간 걸릴 거리였지만, 7시간이 걸렸다. 순위는 23위로 떨어졌다. 5구간, 6구간으로 이어지는 바윗길에서는 영혼까지 갉아먹는 듯한 고통이 찾아왔다.
이른 새벽, 6구간의 마지막 오르막을 오를 때 허벅지는 이미 내 것이 아니었다. 손끝의 감각도 발끝의 힘도 사라졌다. 산은 여전히 냉정했고 고통은 감정을 잠식했다. 네 번째 밤이었다.
마을 근처 완만한 경사길에 닿자 달리기는커녕 걷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주저앉아 스트레칭을 해도 허벅지는 회복되지 않았다. 새벽의 찬 공기가 피부를 파고들었다. 좀비처럼 한 걸음씩, 오로지 의지 하나로 걷다 보니 제7구간 시작점 올로몬트(Ollomont·283.5㎞)에 도착했다.
‘아름답게 마무리하자’는 마음으로 마지막 코스에 돌입했지만, 몸은 끝내 버텨주지 않았다. 출발한 지 1.5㎞ 만에 다리가 굳어버렸다. 그대로 길가에 주저앉았다. 일어설 힘조차 남지 않았다. 고산증이었다.
컷오프까지 56시간이 남았다. 하루를 푹 쉬면 완주할 수 있겠는데 귀국 비행기 시간은 23시간 뒤였다. 한 번만 더 문제를 일으키면 귀국도 불가능한 상황. 산에는 구급 차량이 오지 못하고 야간엔 헬기도 뜨지 못한다. 최악의 시나리오도 생각해야 했다. 결국, 출발했던 체크포인트로 돌아섰다.
눈물이 핑 돌았다. 그렇게 283.5㎞에서 멈췄다. 우승은커녕 완주도 하지 못했다. 나도 연약한 피조물일 뿐이었다. 오래 쌓아 올린 의지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도리가 없다. 끝까지 버티는 것이 언제나 옳은 건 아니다.
거침없는 도전들도 하나님께서 이미 이뤄 주심을 믿었기에 가능했다. 내려놓음이 필요할 때도 있다.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더 좋은 길을 예비하심을 믿으며 다음을 기약했다.
***[역경의 열매] 심재덕 (22) 공식 모델 된 대회 재도전, 마스터스 베테랑 부문 우승
동남아 최대 축제인 싱가포르마라톤
GROE 한국 대표로 좋은 성적 완주
다음 대회서 모델 되는 뜻밖의 선물
아마추어 러너로 세계 언론에 조명
심재덕 선수가 2009년 싱가포르 마라톤 공식 포스터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포스터엔 2008년 싱가포르 마라톤 대회에서 결승선을 통과하는 심 선수의 모습이 담겼다.
싱가포르 마라톤은 1982년에 시작된 동남아 최대의 달리기 대회다. 세월이 흐르며 단순한 경기가 아니라 선수와 자원봉사자 10만명이 참여하는 축제로 성장했다. 도시 전체가 응원의 함성으로 들썩인다.
2008년 12월 나는 GROE(the Greatest Race On Earth) 한국 대표로 그 무대에 서기 위해 싱가포르로 향했다. 그곳은 밤에도 숨이 막힐 만큼 더웠다. 한국 장마철 같은 공기. 습도 80% 기온 32도. 달리기도 전에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괜히 온 게 아닐까 겁이 났지만 즐겨보기로 마음을 다졌다.
GROE는 2005년부터 시작된 이어달리기 방식의 국제 마라톤 이벤트로 각국을 대표하는 4명의 선수가 케냐 나이로비, 인도 뭄바이, 홍콩 침사추이, 싱가포르 중 한 곳을 달린다. 나는 싱가포르 대회를 맡았다.
새벽 5시 30분, 총성이 울렸다. 무엇이 이 꼭두새벽에 이 많은 사람을 거리로 불러낸 걸까. 누구는 기록을 위해, 누구는 자신을 이기기 위해, 또 누구는 단지 이 순간을 사랑해서 뛰는 것이다. 도시는 뜨거운 심장의 리듬에 맞춰 흔들렸다.
달리기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권자가 속출했다. 온도와 습도는 인간의 체력을 순식간에 녹여버렸고 그 속에서 나는 오히려 차분해졌다. 인내하며 뛰다 보니 어느덧 골인 지점에 가까워졌다. 결승점 아치의 시계가 2시간39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40분 이내로 들어가겠다는 생각 하나로 온 힘을 짜내 결승선을 통과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만세를 불렀다. 나는 전체 엘리트 29위, GROE에 나선 22개국 중 9위로 예상외 좋은 성과를 거뒀다.
대회 1년 뒤. 지인이 내게 링크 하나를 보내주었다. 클릭해보니 싱가포르 국제 마라톤 홍보 포스터와 대회 배너 사진이 있었다. 두 주먹을 하늘로 뻗은 세상을 다 가진 듯 평화로운 내 모습이었다. 2008년의 내가 2009년 대회 공식 모델이 돼 있었다.
모델이 된 김에 다시 대회에 나섰다. 이번엔 1만7500명이 새벽어둠을 박차고 빌딩 숲속으로 뛰어들었다. 컨디션은 최상. 10㎞부터 선두로 달렸다. 결승선이 가까워질수록 내 얼굴이 담긴 현수막이 사방에서 펄럭였다. 나는 또 한 번 결승선을 통과했다.
배너 모델이자 마스터스 베테랑 부문 우승자가 돼 기쁨은 두 배였다. 그날의 환호와 빛, 그리고 뜨거운 땀은 내 인생 가장 순도 높은 기쁨이었다. 몇 해가 지나 2013년 11월 8일 자 뉴욕타임스 아시아판에 내 이야기가 실렸다. 아마추어 러너가 세계 언론에 오를 줄 누가 알았을까. 이후 국내는 물론이고 영국 BBC, 노르웨이 매체에서 차례로 나의 달리기 인생을 조명해 줬다.
감자를 캐듯 한 줄기 삶을 들어 올리면 크고 작은 결실이 함께 따라온다. 굵은 감자도, 작고 미숙한 감자도 있다. 때로는 줄기에서 떨어져 흙 속에 남은 알이 나중에 가장 귀한 선물로 돌아오기도 한다. 내게 달리기가 그렇다. 어떤 대회에서는 우승했고 어떤 대회에서는 완주조차 못 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다 내 삶의 수확이었다. 나는 오늘도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은혜의 열매를 맺으며 최선을 다해 달려가고 있다.
[역경의 열매] 심재덕 (23·끝) “누린 은혜는 하나님 선물, 그 모든 영광도 하나님 것”
손동준2025. 11. 4. 03:05
나의 목표는 언제나 끝까지 최선
모든 역량을 쏟아부었다면 충분해
결과 상관없이 행복, 주님께 감사
심재덕 선수가 지난 9월 전북 장수에서 열린 장수트레일레이스 38k 부문에서 1위로 결승선을 통과한 뒤 손을 모아 기도하고 있다.
낯선 길을 나설 때 인간은 본능적으로 두려움이라는 벽을 세운다. 특히 울트라 러닝처럼 온종일, 때로는 며칠 동안 이어지는 경주가 주는 공포는 상당하다. 어둡고 낯선 곳에 홀로 남겨진 듯한 그 느낌은 겪어 본 사람만 안다.
높은 산을 오를 때는 처음부터 정상을 목표로 두지 않는다. 끝이 보이지 않을 때 마음이 먼저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목표를 잘게 쪼갠다. 1000m 오르막이라면 200m씩 나눈다. 첫 구간을 오를 때 거기까지가 목표라고 스스로 최면을 건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다시 짧은 목표를 세우고 또 한 걸음을 내디딘다. 이건 단지 달리기 요령이 아니다. 인생의 고비를 넘는 방법이기도 하다. ‘토막 난 희망’이라도 붙잡고 달리다 보면 결국 길이 열린다.
사람들은 달리기에서 다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도 처음엔 그랬다. 하지만 세월이 쌓이자 어깨의 중요성을 알게 됐다. 달리기의 중심은 상체, 특히 어깨다. 어깨가 강건해야 호흡이 깊어지고 바른 자세가 나온다. 나는 매일 턱걸이로 어깨를 다듬었다.
신앙도 비슷한 것 같다. 많은 이들이 주일 예배를 신앙의 중심이라 여기지만 실제 중심은 주중의 삶 속에 있다. 어깨가 온몸의 균형을 잡듯 삶의 예배가 믿음의 본질로 각인돼야 한다.
다시 어깨 이야기로 돌아가자. 턱걸이가 쉽지 않다면 끌어올리기 대신 팔을 쭉 펴서 매달려만 있어도 좋다. 차근차근 자신의 능력에 맞춰 횟수를 늘려 가되 절대 무리하지 말아야 한다. 무엇이든 과하면 부족한 것만 못하다. 우리 목표는 턱걸이 달인이 아니라 건강하고 안전하게 오래 달리는 것이다.
사람들은 나더러 건강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호흡기 질환을 앓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약함이 나를 달리게 했다. 건강했다면 이 길을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약함은 내 달리기의 출발점이었고 그 약함이 오히려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했다.
힘들고 지쳐서 주저앉고 싶을 때면 악마의 속삭임이 들리는 것 같다. 이제 충분하다고. 멈춰도 된다고. 그때마다 묻는다. “정말 멈추고 싶은 건 몸인가 마음인가.” 300번 넘는 마라톤을 달렸지만 고산지대에서는 수없이 무너졌다. 모든 멈춤이 패배는 아니다. 다음을 위한 용감한 포기도 있다.
달리는 사람마다 목표가 제각각이다. 누군가는 기록을, 누군가는 완주를, 누군가는 그 길 자체를 사랑한다. 나의 목표는 언제나 같다.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 결과는 신의 영역이다. 우승하지 못해도 원망하지 않는다. 결승선에 닿는 마지막 순간까지 모든 역량을 쏟아부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결과와 상관없이 감사하고 행복하다. 부끄럽지 않을 만큼 진심으로 달렸기 때문이다.
그동안 누린 모든 은혜는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이었고 그 모든 영광은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임 받는 마라토너가 되기를 기도하며 오늘도 두 손 모으고 달려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딤후 4:7~8)
정리=손동준 기자 sdj@kmib.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