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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히신 예수님(2024년 1월 21일 오후예배)
성 경 : 요한복음 18:1-14(신약 178)
지난 목요일 저녁 기도회를 마치고 집에 가서 SBS '과몰입 인생사' 라는 프로를 보는데 비틀즈에 대한 이야기와 존 레논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노래는 좋아하지만 외국 가수들이나 그룹들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비틀즈가 유명하고 존 레논이 유명하다는 것을 아는 정도였습니다.
배철수 씨가 존 레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서 존 레논의 음악과 그가 추구했던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의 노래 가사 중에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와 전쟁이 아닌 사랑으로 살아가자는 가사들이 있었고 사랑으로 국경을 없애자는 가사가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존 레논이 썼다고 소개된 그런 가사를 들으면서 저런 이야기는 교회가 해야 할 이야기이고 설교자들이 해야 할 이야기들인데 예술가들이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사랑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고, 하나님이 주신 사랑을 세상에 전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세 시대에는 십자군의 전쟁이란 것을 통해서 사랑이 아닌 무력을 추구했던 기독교의 과거의 모습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오늘 교회는 어떤 모습일까요?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모습일까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시면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살아가고 있을까요?
사랑으로 시작된 믿음이 어느 순간부터 율법주의화 되어서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나는 의로운 믿음의 사람이란 교만한 자세로 믿음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교회가 교회다워야 하고, 성도가 성도다워져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고, 민족 복음화와 세계 복음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을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최후의 설교를 하셨고 그리고 제자들과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사역을 하시기 위해서 잡히시고 재판에 넘겨져서 빌라도의 심문을 받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예수님께서 잡히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해서 “잡히신 예수님” 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1. 예수님을 잡으러 온 무리들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서 그리고 제자들로 인해서 예수님을 믿게 될 모든 지구상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기도하시고 성육신하셔서 마지막 만찬 자리를 떠나셨습니다. 예수님은 곧 잡히실 것을 아시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습니다. 1-2절을 보면
18: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그 곳에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니라”
18:2 “그 곳은 가끔 예수께서 제자들과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 곳을 알더라”
요한은 예수님께서 가신 곳이 기드론 시내 건너편에 있는 동산이라고 소개했습니다. 마태복음은 겟세마네라고 하는 곳이라고 기록했고, 마가복음에는 감람산 겟세마네라고 기록했고, 누가복음에는 감람산이라고 기록했습니다.
감람산은 올리브 나무가 많은 지역이란 의미로 현대의 표현으로 하면 올리브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람산의 어느 한 언덕이 겟세마네 언덕이라고 볼 수 있는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실 때 이 동산에서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기 위해서 제자들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최후의 만찬을 하신 다음에 하신 기도는 제자들과 이 땅에 살아갈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기도였다면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성육신하신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하실 사역인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하신 개인적인 기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러 가셨는데 유다도 그곳을 알았습니다. 2절을 다시 보면 “그 곳은 가끔 예수께서 제자들과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 곳을 알더라”
공관복음은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러 겟세마네 동산에 가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곳은 예수님이 자주 오시는 곳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파는 유다도 이곳을 알았습니다.
가룟유다는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나갔습니다. 그러니까 마지막 설교를 듣지 못했고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도 그곳에 없었습니다. 유다는 그 시간에 대제사장과 종교지도자들을 만나서 예수님을 넘겨주기로 하고 예수님을 잡는 사람들을 데리로 예수님을 잡으로 오는 상황이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께서 그 밤에 어디에 계실지를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실 때는 종종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셨기 때문에 최후의 만찬이 끝나고 나서 겟세마네에 계실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유다는 먼저 최후의 만찬 장소로 갔을 수도 있습니다. 그곳에 예수님이 안 계신 것을 알고 그러면 자주 가셨던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는 무장한 무리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3절을 보면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유다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돈을 받고 넘겨주기로 약속을 하고 예수님을 잡기 위해서 사람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잡기 위해 데리고 온 사람들은 무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군대와 유대 지도자들이 보낸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왔는데 횃불과 무기를 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한 사람을 잡기 위해서 군인들과 하인들을 보냈는데 무기를 들고 왔습니다. 평소에 예수님은 무기를 들고 다니시는 분이 아니었고 제자들도 역시 무기를 들고 예수님을 경호한 것이 아닙니다. 유다는 이런 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능력을 행하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가룟 유다도 그렇게 예수님을 잡으러 온 사람들은 내심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갑자기 어떤 기적이나 능력을 행하면 어떻게 하지 그런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무기를 들도 무장을 한 채로 예수님을 잡으로 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다가 데리고 온 무장한 무리들에게 잡혀서 끌려가시게 되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2. 이 사람들을 가게 하라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제자들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시고 제자들을 염려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곤경에 처하게 되면 다른 사람을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끝까지 제자들을 걱정하고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잡으러 온 사람들에게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고 물으셨습니다. 4절을 보면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7절에서도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그들이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예수님은 그들이 왜 왔는지를 아셨습니다. 그러나 한 밤 중인데다 거기에는 제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혹시라도 불상사가 일어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셨을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잡으로 온 사람들이 횃불을 가지고 왔기 때문에 한 밤 중이라고 해도 사람을 알아 볼 수 있는 상황이긴 하지만 예수님을 잡으러 온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기는 했어도 한 밤 중에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는 것이 쉽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것까지도 고려해서 물으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너희가 누구를 찾으냐? 이 질문은 너희가 찾는 사람은 나이고 나는 여기 있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 예수님은 내가 그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5-7절까지를 보면
18:5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
18:6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18:7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그들이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예수님은 그들이 왜 왔는지 아시기 때문에 누구를 찾느냐고 질문을 하셨고 그들은 나사렛 예수님을 찾는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가 그 사람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 때에 유다도 거기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잡으러 온 사람들은 예수님이 내가 그 사람이라고 대답하시자 뒤로 물러서 땅에 엎드렸습니다. 예수님을 잡으러 오긴 했지마 그동안 예수님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고 그 중에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거나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본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혹시 어떤 일을 하실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왔는데 갑자기 내가 나사렛 예수 그 사람이라고 대답하시자 잡으러 온 사람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신적 권위를 느끼고 두려워하면서 떨고 엎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 모세가 엎드린 것처럼 그들은 예수님의 영적 권위 앞에 엎드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신적 권위 앞에 엎드린 무리들에게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은 가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8-9절을 보면
18: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
18:9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예수님은 잡으로 온 사람들이 제자들까지 잡아서 끌고 가거나 아니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할 때 제자들이 혹시라도 반항을 하면 죽임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잡아서 끌고 가기 전에 제자들을 먼저 가게 해 달라고 요청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잡으러 온 무리들은 여차하면 난폭한 행동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걱정하시면서 제자들이 안전하게 내려가게 해 달라고 요구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될 때 나보다 먼저 남을 생각하고 내 안전보다 다른 사람들의 안전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주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제자들을 염려하셨습니다. 그리고
3. 예수님께서 잡히셨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참 허무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년 공생애를 통해서 놀라운 일을 하셨는데 잡히실 때는 무기력하게 아무런 저항도 없고, 아무런 일도 없이 잡히셨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신 그 순간의 상황을 보면
베드로가 말고의 귀를 베었습니다. 10절을 보면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누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라가실 때 검 없는 자는 옷을 팔아 검을 사라고 하셨고 제자 들 중에서 우리에게 검 둘이 있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베드로가 꺼내서 말고의 귀를 자른 칼은 이 때 얘기했던 검 두 개 중에 하나 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게 해 달라고 했지만 갑자기 예수님을 잡으려고 몰려든 무리들을 보고 베드로는 자기에게 있는 칼을 빼어 들고 말고라는 종의 귀를 잘랐습니다.
베드로가 성령을 받기 전에 완전히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적인 본성이 종종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 앞에서 호언 장담을 하기도 하고 칼을 빼서 말고의 귀를 자르기도 하고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완전히 변화되지 않으면 우리 안에 인간의 본성이 여러모 양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 중에서도 베드로 같이 칼이 있다면 용감해서 빼 들고 휘두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가 말고의 귀를 자르자 예수님은 그의 귀를 다시 붙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마셔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1절을 보면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예수님은 칼을 들고 설치는 베드로를 향해서 칼을 도로 집어넣으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에게 마시라고 주신 잔을 마시지 않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26:53-53절을 보면
26: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26: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예수님은 하늘의 군대를 동원하면 나를 잡으러 온 무리들을 물리칠 수 있지만 천사들을 동원해서 잡히지 않으면 이런 일 즉 예수님이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으실 것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렇게 해서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하시는데 내가 고통스럽다고 해서 이 일을 거부하면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언한 성경의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계획하신 일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의 우선순위는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섭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 우선될 때 고통도 있을 수 있고, 어려움도 있을 수 있지만 그 결과는 부활이고 기적이고 축복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잡히게 된 것에 대해서 당시 대제사장은 한 사람이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말한 사람이었습니다. 12-14절을 보면
18:12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18:13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
18:14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권고하던 자러라”
예수님은 천사들을 동원해서 잡히시지 않으실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고 제자들을 안전하게 보내 달라고 하고 잡히셨습니다. 잡히신 예수님은 안나스에게 끌려갔는데 안나스는 그해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었습니다.
원래 대제사장은 아론의 후손으로 종신직이었는데 왕이 대제사장을 갈아치우기도 하고 로마제국이 지배를 하면서 로마 정부가 입김을 작용해서 대제사장이 바뀌기도 했습니다. 안나스도 로마 총독에 의해서 대제사장에서 강제로 물러난 사람입니다.
안나스가 대제사장은 아니지만 여전히 힘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는 당시 대제사장의 장인이었기에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는 한 사람이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말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전에 살펴보았는데 11:50-52절까지를 보면
11:50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11:51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11:52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가야바는 예수님이 죽는 것이 유대 민족을 위해서 유익하다고 말했지만 예수님의 죽으심은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을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무 죄도 없으시지만 우리를 위해서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집히셨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나와 내 집이 잘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우선순위가 아니라 나로 인해서 많은 사람이 유익을 얻게 되고 나로 인해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아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이 우선순위가 되어야 합니다.
존 레논이 노래한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사랑으로 전쟁을 이기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국경을 없어서 모든 나라와 민족이 하나 되어 주님의 나라가 우리의 삶속에 임하는 역사가 일어났으며 좋겠습니다.
참빛 가족의 모든 가족이 주님을 믿어 구원에 이르는 가정이 되어 주님의 평화와 사랑안에서 하늘의 복을 누리는 삶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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