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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사(雲門寺)는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호거산(虎踞山, 운문산)에 있는 사찰. 대한불교 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이다.
운문산(1,200m)은 하늘에 있는 구름의 세계란 뜻이 담겨있다. 이 산이름에서 운문면의 행정구역이 생겼고, 운문사(雲門寺)의 이름이 생겼다. 운문사는 고려조의 국존(國尊)의 지위에 있었던 일연 선사(一然禪師)가 삼국유사를 집필한 곳이며, 임진왜란 때에는 박경전(朴慶傳) 일가가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물리쳤던 호국의 장소이다.
현재 비구니의 수행 도량이며 오염되지 않은 청정지역으로, 청도(淸道)라는 군 이름의 발생 근원이 되기도 한다. 남쪽은 운문사, 북동쪽은 호거산, 서쪽은 억산과 장군봉이 돌아가며 절을 감싸고 있다. 이 모양이 연꽃 같다고 해서 흔히 운문사를 연꽃의 화심(花心)에 비유하기도 한다.
사찰의 역사는 신라 진흥왕 21년(560년)에 신승(神僧)이 창건. 대작갑사大鵲岬寺라고 이름지은 사찰의 중심으로 동쪽에는 가슬갑사, 서쪽에는 대비갑사(현재 대비사), 남쪽에는 천문갑사, 북쪽에는 소보갑사를 지으면서 이를 오갑사(五岬寺)라고 불렀다. 그중 대작갑사가 지금의 운문사이다.
608년 원광국사(圓光國師558~638)가 중건. 원광국사는 만년에 가슬갑사에 머물며 일생 좌우명을 묻는 화랑 귀산과 추항에게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주었다고 한다.
고려 태조 20년(937년) 보양국사(寶壤國師)가 중건하여 작갑사(鵲岬寺)라고 하였다. 당시 오갑사는 신라의 부흥기를 맞아 화랑도 수련장으로 역할하였으며 부근 일대는 신라의 중요한 군사적 거점으로 역할하였다고 전해진다. 태조 왕건과 인연이 깊었는데 왕건이 고려를 개국하는데 일조하였다.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후삼국의 통일을 위해 왕건을 도왔던 보양(寶壤)이 오갑사(五岬寺)를 중창하였다. 태조 왕건이 고려를 세우면서 대작갑사에 운문선사(雲門禪寺)라는 사액과 500결의 땅을 하사하여 이후 운문사(雲門寺)라고 불리게 되었다. 운문이라는 이름은 당시 중국 선종의 유명한 스님으로 그의 법명에서 따온 것이다.
1105년(고려 숙종 10) 원응국사가 송나라에서 천태교관을 배운뒤 귀국하여 운문사에 들어와 중창하고 전국 제2의 선찰로 삼았다. 임진왜란 때 당우 일부가 불탔다. 조선 숙종 16년(1690년) 설송(雪松)이 중건하였다. 현재는 비구니 사찰이다.
운문사는 앉음새가 특이하다. 모든 건물이 돌아앉았다. 산을 등지고 앞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산을 바라보며 등을 내보이고 있다. 산세를 따르다 보면 모든 건물을 북향으로 앉혀야 하기 때문이다. 찾아가는 사람은 운문사의 뒷모습부터 보게 되는 셈이다. 풍수적으로 풀면 호거산(虎踞山)을 마주할 때 생기는 재앙을 피하기 위한 것이란다. 호거산이 호랑이가 쭈그리고 앉아 머리를 운문사로 향하고 있는 형상이라는 것이다. 또 북향하면 골짜기의 물이 흘러나가는 것을 지켜보게 되어 재화나 부와는 인연이 멀게 된다고도 한다. 풍수에서 물은 곧 재화를 뜻하니 항상 물이 빠져나가는 것이 보인다면 낭패라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남향한 집이 사람 살기에 좋은 것이다.
숙종 44년(1718) 채헌(彩軒)이 지은 경상북도청도군동호거산운문사사적(慶尙北道淸道郡東虎踞山雲門寺事蹟)에 의하면 운문사는 560년에 한 도승이 대작갑사로 창건한 뒤, 591년에 원광법사가 이곳에 머물면서 제1중창을 하였고, 그 뒤 후삼국시대에 보양선사가 주석하면서 고려태조의 귀의를 받아 “운문선사”라는 사액을 받고 제2중창을 이루었으며, 1129년에 고려 원응국사 학일(學一)이 이곳을 하산소로 삼아 내려온 이래 옛 절을 크게 중창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고려후기에 운문사 주지로 재임(1277년)하면서 삼국유사를 집필하였던 일연선사는 .삼국유사. 권 4 원광서학(圓光西學)과 보양이목(寶壤梨木)에서 보양선사를 운문사 개산조(開山祖)로 밝혀 보양선사의 운문사 개창 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 후 임진왜란으로 당우 일부가 소실되었고, 2006년 대웅보전 해체수리 때 발견된 상량문의 내용을 통해 순치(順治) 10년(1653)에 화재로 대웅전 등이 손실되어 순치 12년(1655)에 대웅전이 복원 중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1105년(고려 숙종 10) 원응국사(圓應國師, 1052~1144)가 운문사를 중창하면서 사찰이 가장 번성했던 시기를 맞이하였다. 운문사에는 당시 사찰의 중창과 내력을 기록한 원응국사비가 남아있다. 그리고 1277년에는 일연선사가 운문사에 머물면서 삼국유사를 집필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조선시대 들어서 불교가 쇠퇴하고 임진왜란 때는 사찰의 건물들이 불에 타 소실되었다.
노동과 정진은 수행이라는 일주문을 받치는 두 기둥이다. 그만큼 노동은 수행에 불가결하다. 때문에 중국의 백장선사(百丈禪師)는 “일하지 않으면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는 가풍을 후대에 전했다. 절집 안에서 면면히 이어지던 이런 가풍은 오늘날 대부분 없어졌으나 몇몇 절에서 어렵사리 지켜가고 있을 따름이다. 운문사가 그 가운데 하나에 든다. 1958년 비구니 전문강원이 개설되었고 1987년 승가대학으로 발전하였으며 1997년 승가대학원이 개설되었다.
운문사는 일주문도 사천왕문도 없다. 절 동쪽으로 길게 이어진 담장의 중간쯤, 범종이 걸린 이층누각의 아래가 정문이며 첫문이자 마지막문이 된다. 이만한 규모의 절에 문이 하나뿐이라는 것도 이상하고 그것조차 앞도 뒤도 아닌 허리쯤에 위치한 점도 의아스럽다.
현재 당우는 대웅보전(보물 제835호)·작압전(鵲鴨殿)·미륵전·오백나한전·금법당(金法堂)·만세루(萬歲樓)·관음전·요사채 등이 있다.
경내에는 보물 제193호인 금당 앞 석등, 보물 제208호인 동호(銅壺), 보물 제316호인 원응국사비(圓應國師碑), 보물 제317호인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318호인 사천왕석주(四天王石柱), 보물 제678호인 삼층석탑, 천연기념물 제180호인 운문사의 처진 소나무가 있다. 비로전에 봉안되어 있는 「청도 운문사 비로자나 삼신 불회도」[보물 제1613호] 등 8개의 보물과 1개의 천연 기념물이 있다.
관음전(觀音殿) 1105년 원응국사가 중창한 것이라고 전하나, 건축 양식으로 볼 때 조선 초기 건물로 추정된다. 정면과 측면 모두 1칸씩인 정사각형 공간에 팔작지붕을 이고 있으며 사방의 기둥에 각각 2개씩의 주련을 걸었는데, 관세음보살의 공덕을 찬탄하는 두 가지 게송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건물 안팎에 『묘법연화경』「관세음보살보문품」에서 부처님께서 설하신 관세음보살의 공덕을 벽화로 표현하고 있다.
관세음보살은 일체 중생들을 고통에서 건져 즐거움을 주겠노라 서원을 세운 대자대비의 상징으로, 운문사 관음전에는 1816년에 제작한 수월관음도가 후불탱화로, 1871년에 제작한 신중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금당 운문사 요사채 중 가장 오래된 건물로, 금당이란 ‘부처님을 모신 전각’을 뜻한다. 비로전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비추어 보아도 금당은 과거에 법당으로서의 역할을 가졌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현재의 건물은 1105년 운문사 3차 중창 당시 원응국사가 괴목으로 건축하였던 것을 꾸준히 유지 보수하여 사용하고 있으며, 운문승가대학의 사교과(3학년) 스님들의 수업공간이자 요사다. 후원과 한 건물이어서, 아직도 아궁이에 불을 때는 구들장을 사용하고 있다.
대웅보전(大雄寶殿) 1994년 건립되었으며, 대중 스님들이 조석 예불을 모시는 주법당이다. 상단에는 과거․현재․미래의 삼세불(三世佛)과 대세지, 문수, 보현, 관세음보살 등 사대(四大) 보살을 모셨으며, 좌측에는 신중탱화, 우측에는 53 선지식 탱화를 모셨다. 상단 뒤편에는 500나한도와 관세음보살 보문품 변상도를 모셨으며, 2001년 상단의 좌우에 윤장대를 설치하고 경전을 봉안했다.
1.과거 연등불(燃燈佛) 연등불(燃燈佛·)보광불(普光佛)·정광불(錠光佛)이라고도 한다.
과거세에 수행하는 보살이던 석가모니에게 성도(成道)하리라는 수기(授記)를 준 부처님으로, 〈수행본기경 修行本起經〉에 따르면 제화위국(提和衛國)을 다스리던 성스러운 임금이 임종 때에 태자 정광(錠光)에게 나라를 맡겼다. 그러나 태자는 세상이 무상함을 알고서 동생에게 나라를 물려주고 출가하여 사문(沙門)이 되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수행하여 부처가 되었으니, 그가 바로 연등불이다.
그때에 유동(儒童)이라는 수행자가 있었다. 그는 부처가 세상에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서 직접 만나 가르침 듣기를 원했으며, 마침내 편력하며 교화하는 연등불을 만나게 되자 연꽃으로 부처에게 공양하고, 머리털을 진흙에 깔아 부처가 밟도록 했다. 연등불은 그에게 후세에 성도하여 부처가 되리라는 수기를 주었는데, 이 수행자가 바로 석가모니불이다.
운문사 연등불은 왼손으로는 법문을 하고 있는 수인(手印)을, 오른손으로는 가사 자락을 쥐고 있어서, 법을 전하는 모습을 상징하고 있다.
2.현재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약 2500여 년 전, 현재의 네팔 타라이 지방에 있었던 카필라 성에서 정반왕(淨飯王)과 마야부인의 왕자로 태어났으나 생로병사의 고통을 목격한 뒤, 출가하여 부처를 이룬 고타마 싯다르타를 이른다.
운문사 대웅보전에 모셔진 석가모니불은 오른손은 어깨까지 들어 손바닥을 보이는 시무외인(施無畏印: 무외-진리를 깨치고 나면 더 이상 두려워할 것이 없음을 설법하는 수인)을, 왼손은 여원인(與願印: 중생이 원하는 바를 모두 이루어주겠노라 선언하는 수인)을 맺고 있어서, 현재까지도 고구정녕한 가르침을 설하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3.미래 미륵불(彌勒佛)
메시아로서 널리 알려진 미래불(未來佛)이 곧 미륵불(Maitreya)이다. 자씨(慈氏)이며 이름은 아일다(阿逸多)라 하는데 인도의 바라내국 바라문 집에 태어나 석가모니불이 열반하신 후 56억 7천만년이 지나서 이 세상에 강림할 미륵은 현재는 도솔천 내원궁(內院宮)에서 보살로서 존재해 있으나 이미 수기를 받은 부처님이시다. 그러므로 미륵은 도솔천을 주재하고 그 곳에서 항상 설법하고 있는 입장으로 볼 때는 미륵보살이라 함이 타당하고, 또 그의 하생(下生)의 입장에서는 이미 미륵불로 불리운다. 미륵불은 석가모니불이 미처 제도하지 못한 중생들을 모두 구제하기 위하여 용화수라고 해서 따로 미륵불을 봉안한 법당을 용화전(龍華殿)이라고 부른다. 운문사 대웅보전에 봉안한 미륵불은 선정인(禪定印)을 맺고 있어서, 그가 아직도 수행중임을 알 수 있다.
4.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범어로 마하스타마프라프타(Mahasthamaprapta)라 하는 대세지보살은 그 지혜광명이 모든 중생에게 비치어 삼악도(지옥, 아귀, 축생)를 여의게 하며, 위없는 힘을 얻도록 하겠노라는 원력을 세운 보살이다. 또한 그가 발을 디디면 삼천 대천 세계와 마군의 궁전이 진동하므로 대세지라 한다. 서방정토 아미타불의 오른쪽 보처(補處) 보살로 아미타불이 지닌 자비와 지혜 방편 가운데 지혜를 상징한다.
운문사 대웅전 상단에 모신 사대 보살 가운데 가장 왼쪽에 모신 대세지보살은 그 지혜의 힘을 상징하는 금강저를 쥐고 있다.
5.보현보살(普賢菩薩)
하얀 코끼리를 타고 석가모니 부처님의 오른쪽을 협시(脇侍)하는 보현보살은 부처님이 가진 행원력(行願力)을 상징하는 보살이다. 〈화엄경 華嚴經〉에서 설하는 보현의 10대원(十大願)을 살펴보면, ① 부처를 예배하고 공경함, ② 부처를 찬탄함, ③ 여러 가지로 공양함, ④ 업장(業障)을 참회함, ⑤ 남의 공덕을 함께 기뻐함, ⑥ 설법해주기를 청함, ⑦ 부처가 이 세상에 오래 머물기를 청함, ⑧ 부처를 본받아 배움, ⑨ 항상 중생의 뜻에 따라 응함, ⑩ 널리 모든 것을 회향함 등이다.
운문사 대웅전의 보현보살 입상(立像)은 활짝 핀 연꽃(실천 수행을 상징)을 오른손에 들고 있다.
6.문수보살(文殊菩薩)
사자를 타고 석가모니 부처님의 왼쪽을 협시하는 문수보살은 부처님의 지혜를 상징하며 중생의 모든 번뇌를 끊어주리라 서원한 보살이다. 보통 석가여래의 왼쪽에 있으며 지혜로 중생의 번뇌를 끊어준다. 문수사리(文殊師利)·만수시리(滿殊尸利) 또는 만수실리(曼殊室利) 등으로도 음역되는데, 문수와 만수는 묘(妙), 사리·실리는 두(頭)·덕(德)·길상(吉祥) 등의 뜻이므로 지혜가 뛰어난 공덕이라는 말이 된다.
운문사 문수보살 입상은 왼손에 연꽃봉오리를 들고 본존인 석가모니 부처님을 협시하고 있다.
7.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 줄여서 관음·관세음·관음보살이라고도 하는 관세음보살은 ‘모든 곳을 살피는 분’이라는 뜻을 가진 대자비의 화신이다. 『묘법연화경』 가운데 「관세음보살보문품」을 통해 모든 중생을 고통에서 건져주리라는 관세음보살의 원력을 엿볼 수 있다.
운문사 대웅보전에 모셔진 관세음보살 입상은 오른손에는 중생의 갈증을 덜어줄 자비의 감로수가 담긴 정병을, 왼손에는 시원한 그늘로 중생들의 쉼터를 제공할 버드나무 가지를 들고 있다.
8.윤장대(輪藏臺)
윤장대는 불교경전을 넣은 책장에 축을 달아 회전하도록 만든 일종의 장경각으로 윤장대를 돌리면 경전을 읽지 않아도 공덕을 쌓을 수 있다고 한다. 보물 제 684호인 용문사 윤장대를 본 따서 조성한 운문사 윤장대는 80권 화엄경을 봉안하여 대웅보전 불단 좌우에 안치하였다.
만세루(萬歲樓) 신라 원광국사가 초창하여 고려의 보양국사가 중창하였으며, 지금의 건물은 1105년 원응국사가 3차 중창할 때의 것이다. 사찰에서의 누각건물은 큰 법회시에 대웅전에 들어가지 못한 대중들이 대웅전을 향하여 법회에 참석할 수 있도록 만든 건물로, 운문사 만세루는 200여 평의 넓은 공간을 누각으로 조성하였다. 만세루의 건립시기를 최근 대웅전 해체수리 시 발견된 기와명문(康熙十七年戊午三月雲門寺万歲樓尾...)과 상량문을 비롯한 명문 중에 순치십이년대웅전중건시가람현상등본(順治十二年大雄殿重建時伽藍現狀謄本)과 소화십년 사월 일대웅전중집시가람현상표(日大雄殿重緝時伽藍現狀表) 등을 분석해 보면 이 건물은 적어도 17세기에는 건립된 것으로 짐작된다.운문사 내에서도 건축적.역사적 내용이 풍부한 건물이며, 17세기를 전후한 시대적 건축표현을 담아내고 있는 점, 그리고 이익공형식 무고주 7량가구의 독특한 가구수법 등을 높이 평가하여 유형문화재로 지정
현재는 어린이 여름불교학교의 주요 활동공간으로, 어린이들이 발우공양을 체험하고 합반 수업 및 율동 등의 놀이공간으로 이용하고 있다.
명부전(冥府殿) 신라시대 원응국사가 건립하였고 나말려초의 보양국사가 중창한 운문사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맞배지붕을 한 건물로 조선 중엽의 건축양식을 보이고 있다. 지옥 중생을 남김없이 제도하겠다는 원력을 세운 지장보살과 십대왕을 모신 전각이으로 지장보살을 모신 전각이므로 지장전(地藏殿)이라고 하기도 하며, 십대왕을 모신 전각이라 하여 시왕전(十王殿)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또한 명부전이라는 명칭은 지장보살과 시왕이 머무르는 곳이 저승세계 즉 명부이므로 이런 명칭을 사용한다.
십대왕(十大王) 저승을 관장하는 열 명의 대왕으로 진광(秦廣)대왕, 초강(初江)대왕, 송제(宋帝)대왕, 오관(伍官)대왕, 염라(閻羅)대왕, 변성(變成)대왕, 태산(泰山)대왕, 평등(平等)대왕, 도시(都市)대왕, 전륜(轉輪)대왕 등을 일컫는다. 망자가 저승에 다다르면 이들 열 명의 대왕에게 심판을 받아 각각의 업식에 따른 과보를 받는다고 한다.
절에서 망자를 위해 지내는 재(齋)의식 가운데 대표적인 49재는 망자가 열 명의 대왕에게서 심판을 받고 윤회하여 다음 몸을 받기까지 걸리는 시간인 49일 동안 그의 업식이 맑아지고 보다 부처님의 세계에 가까워지길 발원하는 추모의식이라 할 수 있다.
범종루(梵鐘樓) 1층의 문이 운문사의 정문이기도 한 범종루는 2층 누각으로, 법고(法鼓)·범종(梵鐘·大鐘)·목어(木魚)·운판(雲版)의 사물(四物)을 안치했다. 사물은 조석 예불 시에 울리는 것으로, 법고는 네발 달린 축생, 운판은 허공에 날아다니는 중생, 목어는 수중의 모든 생명, 대종은 지옥과 천당 등을 모두 아우르는 일체 중생들의 성불을 발원하며 울리는 것으로, 이 소리가 각각의 인연 닿는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법음으로 전해진다고 한다.
비로전(大雄寶殿·毘盧殿) 보물 제 83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대웅보전”이라는 현판을 걸고 있으나, 통칭하여 비로전이라고 부른다. 현재의 대웅보전을 짓기 전, 운문사 신앙 공간의 중심적 역할을 하였으며 문화재청 등록 당시 “운문사 대웅보전”으로 등재되었기 때문에 옛 현판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조선 후기 불전. 임진왜란 때 불탄 이후, 1994년 현재의 대웅보전을 신축하기까지 대웅보전의 역할을 하였던 건물로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두고 있는 불전이다. 정면 3칸·측면 3칸의 9칸 규모의 다포계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1985년 1월 8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운문사 내 만세루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다. 전각의 이름은 비로전이다. 비로전 앞에는 운문사 동·서 삼층 석탑 2기와 석등이 동서로 배설되어 있고 전정을 이루고 있다. 비로전의 북쪽에는 1994년 건립된 대웅보전이 자리 잡고 있다.
1105년 (고려 숙종 10년) 원응 국사가 건립하였다고 전하며, 발견된 상량문에 藏次 順治 十年 癸巳 九月이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1653년(조선 효종 4년)에 중창한 것으로 보인다.
정면 어간(御間: 법당의 중심축이 되는 부분. 주불을 봉안한 법당의 가장 가운데 부분을 일컫는다. 또한 불상이 바라보고 있는 직선상의 공간을 모두 어간이라고 한다.) 에 꽃살문을 새겨 부처님께 시들지 않는 법의 꽃 공양을 올리고 있음을 상징하고 있다.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을 모셨으며 좌측에는 신중탱화, 우측에는 삼장탱화를 봉안하였다.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Mahāvairocana)은 산스크리트어로 ‘두루 빛을 비추는 자’라는 뜻을 가진 부처님이다.
대일여래(大日如來)라고 한역하기도 하므로 비로자나불을 모신 전각을 대광명전(大光明殿), 대적광전(大寂光殿), 비로전(毘盧殿)이라고 한다.
『대방광불화엄경』에서 시방세계의 모든 부처님을 포괄하여 대표하는 법신불(法身佛: 부처님이 깨친 진리, 그 정신적인 부분을 인간의 모습으로 형상화 한 부처)로 등장하는 비로자나불은 지권인(指拳印·智拳印)을 맺고 있어서 여타의 불상에 비해 알아보기 쉽다.
지권인은 이치(理致)와 지혜(智慧), 중생과 부처, 미혹함과 깨달음이 둘이 아님을 설하는 수인이다. 양손을 가슴 앞에 올리고 치켜 세운 왼손 검지를 오른손이 감싸는 형태와 좌우 엄지를 속에 넣고 다른 손가락으로 감싸 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는데, 운문사 비로전의 비로자나부처님은 첫 번째 형식을 띄고 있다.
악착보살 비로전 서쪽 천장에 종을 매단 반야용선이 보인다. 반야용선(般若龍船)이란 피안의 극락정토에 갈 때 탄다는 배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법당 자체가 지혜의 세계로 나아가는 반야용선과 같다고도 하는데, 운문사 비로전 내에 형상화 되어있는 반야용선에는 밧줄이 하나 걸려 있고, 그 밧줄을 잡고 매달려 있는 동자상을 일명 악착보살이라고 한다.
청도 운문사 원응 국사비 淸道雲門寺圓鷹國師碑보물 제316호
운문면 신원리 운문사에 있는 비석으로 정확한 건립 연대를 알 수는 없으나 고려 인종 때인 1145년경에 건립으로 추정된다.1105년(고려 숙종 10) 원응국사(圓應國師, 1052~1144)가 운문사를 중창하면서 사찰이 가장 번성했던 시기를 맞이하였다. 운문사에는 당시 사찰의 중창과 내력을 기록. 그의 유덕을 받들기 위하여 고려 인종의 명으로 1145년경에 건립하였다. 비문은 금강 거사 윤언이[1090∼1149]가 지었고 글씨는 대감 국사(大鑑國師) 탄연(坦然)[1069∼1158]이 썼다. 탄연은 글씨를 잘 써서 신품사현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원응 국사(圓應國師)[1051∼1144]는 고려 숙종 대에 활동한 고승으로 속성은 이씨이고, 속명은 학일(學一)이다. 11세에 진장 법사(眞藏法師)를 따라 출가하여, 희함 선사(喜含禪師)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1106년에 삼중 대사(三重大師)가 되었고 1122년(예종 17) 7월 22일 왕사로 책봉되었다. 1144년(인종 22) 12월 9일 93세로 입적(入寂)하였다. 인종(仁宗)은 대사의 업적을 찬양하여 국사로 책봉하였으며, 원응(圓應)이란 시호를 내리고 많은 전답과 노비를 하사하고 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청도 운문사 석조 여래 좌상과 사천왕 석주 淸道雲門寺四天王石柱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운문사 작압전에 있는 청도 운문사 석조 여래 좌상과 사천왕 석주이다. 중간에 석조 여래 좌상이 있으며, 양 옆으로 사천왕 석주가 두개씩 놓여 있다.
(보물 제 317호 석조석가여래좌상)
운문사 작압전(鵲鴨展)은 보량 국사가 초창하고 원응 국사가 제2 중창을 할 때 건립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그 후 재건되었다. 작압전에는 보물 제317호로 지정된 청도 운문사 석조 여래 좌상(淸道 雲門寺 石造 如來 坐像)이 모셔져 있는데, 조성 연대는 신라 후기로 추정하고 있다. 불상은 살상투(육계)가 뚜렷하며, 네모진 상체와 하체에 법의가 수직으로 무겁게 흘러 내려져 있다. 연꽃무늬가 새겨진 6각 연화대좌의 특이한 형태는 다소 딱딱한 느낌을 보여준다. 가사는 통견이고, 손 모양은 항마촉지인으로서 다소 어색한 감이 있고 결가부좌한 양 발 사이에는 부채꼴의 주름이 잡혀있다.
이 불상은 부피감이 없고 불상 자체가 나약하고 위축된 점과 조각에서 형식화가 많이 진전된 점으로 보아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작압전에 봉안된 통일신라 말기의 작품으로 화강암으로 조성되었다. 항마촉지인(부처님께서 정각을 이루신 뒤 마왕 파순에게서 항복을 받을 때 취하신 수인으로, 地神이 부처님의 깨친 바를 증명하며 진동을 일으키도록 명하신 자세를 일컫는다.)을 하고 있다. 부처님을 봉안한 좌대와 광배가 모두 갖추어진 완전한 불상으로 불상 높이 63CM, 대좌높이 41CM, 광배 높이가 92CM에 이른다.
(보물 제 318호 사천왕 석주)
청도 운문사 석조 여래 좌상 옆에는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 신장으로 사천왕(四天王)인 동방 지국천왕(東方 持國天王), 남방 증장천왕(南方 增長天王), 서방 광목천왕(西方 廣目天王), 북방 다문천왕(北方 多聞天王)이 모셔져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측되는 운문사 사천왕 석주는 그 예가 드물어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탑의 기단부를 장식하기 위해 조각되었던 것이 파편으로 남은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석주 네 기가 각각의 높이가 달라서 정확한 추정으로 인정받고 있지는 않다.
사천왕은 사방에서 불법을 수호하겠노라 서원을 세우고 수미산의 동서남북에서 악을 물리치는 천신(天神)으로 동방 지국천왕(비파), 서방의 광목천왕(용과 여의주), 남방의 증장천왕(칼), 북방 다문천왕(보탑)을 통칭한다.
청도 운문사 사천왕 석주는 운문사 작압전 안에 석조 여래 좌상과 함께 봉안되어 있다. 작압전 중앙의 석조 여래 좌상 좌우에 각기 2구의 사천왕상을 배치하고 있으며, 오른쪽에 다문천왕과 지국천왕이 자리하고, 왼쪽으로 광목천왕과 증장천왕이 자리하고 있다. 사천왕 석주는 신체는 장대하지만 양감이 줄어든 섬약한 체구, 비교적 부드러운 얼굴 등 양감은 뚜렷하고 세련된 수법을 보여준다. 591년(신라 진평왕 13)에 조성된 것으로 추측되나 정확한 연혁은 알 수 없다.
청도 운문사 금당 앞 석등淸道雲門寺金堂-石燈
운문사 금당 앞에 자리하고 있는 통일 신라 때 석등이며, 1963년 1월 21일에 보물193호로 지정되었다. 석등이란 불전 앞에 설치하여 부처의 광명이 중생에게 두루 비치라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
청도 운문사 동·서 삼층 석탑淸道雲門寺東-西三層石塔
운문사 비로전 앞에 서 있는 동서로 서 있는 통일 신라 때 석탑으로 1980년 9월 16일 보물 제678호로 지정되었다. 2단의 기 단위에 3층의 탑신을 올렸으며, 규모와 양식이 동일하다.
청도 운문사 동호淸道雲門寺銅壺(보물 제 208호), 고려시대의 구리 항아리. 청동으로 만든 항아리 모양의 불교 용기로 임진왜란 때 분실된 것을 운문사 우측에 위치한 약야계(若耶溪)에서 1632년(인조 10)에 발견되었다.
운문사 삼층석탑. 보물 제678호, 소재지 : 경북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1789 높이 5.4미터인 쌍탑으로 9세기 통일신라시대 3층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이다. 상층기단에는 팔부중상이 조각되어 있고, 한 개의 돌로 된 탑신에는 모서리기둥(우주)이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 옥개석(지붕돌)의 층급 받침은 5단이며, 추녀 밑은 수평을 이루고, 모퉁이에 이르러 전각만 살짝 올라가 있고, 전각 끝에는 풍탁을 달았던 작은 구멍이 있다. 상륜부에는 노반, 복발,연꽃 모양의 보주가 남아 있으며, 기단의 일부는 새로운 돌로 보수하였다.
청도 운문사 처진 소나무
천연기념물 제 180호로 지정된 운문사 처진 소나무는 주변의 인공적인 압력 없이도 늘어져서 넓게 자라는 나무로 유명하다.
늘 푸른 기상은 수행자로서의 청정함을 상징하고, 넓게 자라서 큰 그늘을 만들어주는 것은 처음으로 스님이 된 학인들에게 널리 중생의 고통을 덜어주는 보살정신을 가르쳐 준다.
수령 500년에 이르는 언제 심었는지 그 유래는 명확하지 않지만 삽목 전설이 전하고 있다. 이 전설에 의하면 옛날 호거산(虎踞山) 운문사 뜰 평탄한 곳에 한 대사가 지팡이를 꽂아 소나무가 자랐다고 한다. 또 어느 스님이 절에 잠깐 머물면서 시든 소나무 가지를 땅에 꽂아 두고 생명을 불어 넣는 주문을 외워 살려냈다는 이야기도 있다. 임진왜란과 6·25 전쟁 때에도 수차례 방화로 많은 건물들이 소실되는 피해를 입었으나 이 처진 소나무만은 재앙을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나무에 칡덩굴이 감겨 있어서 불길의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삽목 전설은 이곳 이외에도 용문사 은행나무, 송광사의 쌍향수 등에 전해진다. 한편 운문사는 1,400년 전에 지어졌다고 하고, 임진왜란 때 청도 운문사 처진 소나무는 상당히 컸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운문사 비구니 스님들이 매년 봄·가을에 뿌리 둘레에 막걸리를 물에 타서 뿌려 주는 등 정성을 다해 가꾸고 있다.
오백전(五百殿)
주불로 석가모니불과 좌보처 제화갈라보살, 우보처 미륵보살과 오백나한상을 모신 전각이다.
나한이란 아라한(阿羅漢)의 줄임말로, 응공(應供)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공양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 존경 받을 만한 사람을 의미한다. 이 외에도 살적(殺賊).불생(不生).응진(應眞).진인(眞人).성자(聖子) 등으로 의역한다. ‘고귀한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산스크리트어 arhan의 음역이다. 부처님과 같이 깨달음을 얻어 열반에 이른 사람으로, 인간이 가진 욕망의 사슬을 완전히 벗어나 생사의 윤회에서 벗어나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 경지에 이른 수행자를 이른다.
부처님을 부르는 열 가지 명칭(十號) 중의 하나가 응공(즉 아라한)인 것을 볼 때도 아라한은 부처님에 대한 별칭이었다. 그 뒤 부처님과 아라한이 구별돼, 부처님의 제자가 도달하는 최고 깨달음의 경지를 의미하게 됐다. 즉 아라한이란 시대적으로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께 가르침을 받아 깨침을 얻은 제자들을 이르는 말로, 부처님 입멸 후 깨침을 얻은 이들을 일컫는 보살과 구별하는 명칭으로도 사용한다. 이는 교리적으로 소승에서 깨침을 얻은 이를 일러 나한이라 하고, 대승에서 깨침을 얻고 중생 교화에 뜻을 둔 이를 일러 보살이라 칭하는 것으로 발전하였다.
나한 신앙은 중국으로 건너오면서 신앙의 대상으로 전환되어, 16, 500, 1200 등으로 다양하게 규정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16나한과 500나한이 일반적이다. 500이라는 숫자는 『묘법연화경』「오백제자수기품」에 등장하여 다음 생에 성불할 것을 부처님으로부터 수기 받은 제자 500인 또는 불멸 후 바라나시에서 열린 첫 결집에 모인 500인 등에서 연유하였다.
운문사 오백전에 모신 오백나한은 자유분방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오백나한 한 분 한 분께 각각 마지(공양)을 올리는 오백미 공양이라는 독특한 전통이 있다.
한편 통도사 구하 스님이 86세에 쓰신 현판 글씨가 일품이다.
응진전(應眞殿)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성자’, ‘번뇌를 끊고 불생(不生)의 경지에 도달한 성자’, ‘진리에 상응하는 이’ 등의 뜻을 가진 응진(應眞), 즉 16 아라한을 모신 전각으로, 대웅전 오른편에 위치하고 있다. 아라한은 처음 불교가 시작되던 당시 수행자를 일컬었으나, 이후 불교에서 깨달음을 이룬 이를 뜻하는 말로 규정되었다.
16나한은 4명의 나한이 확대된 것이다. 『미륵하생경』에 따르면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에 들 때 대가섭, 군저발탄, 빈두루, 나운이라는 이름의 아라한에게 열반에 들지 말고 미륵불의 출현을 기다리며 정법을 수호할 것을 부촉하였다고 한다.
이들 네 아라한의 법수가 네 번 반복되어 16이라는 숫자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삼명(三明), 육통(六通), 팔해탈(八解脫)의 무량한 공덕을 갖추고 있어서 삼계의 오탁에 물들지 않으며 경율논 삼장에 능통하여 중생을 위한 참된 복전이라 일컬어진다.
조영당(祖影堂)
운문사에 주석하였던 원광국사·보양국사·원응국사 등 3대 중창주와 운문사에 주석했던 열한 분 조사의 영탱과 운문사 수호에 공이 많은 손 장군과 김 장군의 영정을 봉안한 공간이다.
부처님을 모신 전각이 아니므로 당(堂)이라 하였으며, 해마다 음력 9월 9일에 여러 조사와 두 장군을 위한 합동 제(祭)의식을 거행한다.
1원광국사 (558~638) 신라 중기의 스님. 중국 구법승으로 성은 박씨, 진한 사람이다.
579년(신라 진평왕 1) 25세에 출가하여 30세에 경주 안강의 삼기산(三岐山)에 들어가 수도하였다. 589년 중국 장안에 가서 담천(曇遷)의『섭대승론』강의를 듣고, 혜원·영유등에게『열반경』을 비롯한 여러 경전을 배워 600년에 귀국했다. 이후『 여래장경사기』, 『 대방등여래장경』등을 지어 불교의 새로운 지식을 신라에 도입했다. 또한 가슬갑사에 주할 때 화랑도인 귀산과 추항이 찾아와 교훈을 청하므로 세속오계를 주었다. 황룡사에서 나이 84세, 법랍 59세로 입적했다. 명활산(明活山)에 장사 지내고 삼기산 금곡사(金谷寺)에 부도를 세웠다.
2보양국사 (생몰연대미상) 신라말 고려초의 스님. 중국 구법승으로 운문사를 중창한 스님으로 운문사에서 입적했다. 일명 지식(智識)이라고도 한다.
당나라에 가서 법을 전해 받고 귀국하다가 서해에서 용왕의 영접으로 용궁에 들어가 경을 설하고 금라가사(金羅架娑)한 벌을 받았다.
처음 당나라에서 들어와 밀양 봉성사(奉聖寺)에 있을 때, 고려 태조가 군사를 거느리고 청도에 이르니 산적들이 견성(犬城)에 모여 항복하지 않았다. 태조가 국사에게 항복 받을 도리를 묻자 '개는 밤만 지키고 낮은 지키지 않으며, 앞만 지키고 뒤는 지키지 못하니 낮에 북쪽을 치라'고 가르쳐 주었다. 태조가 이 말대로 하여 산적을 항복받았다고 한다.
얼마후 후삼국을 통일한 태조가 작갑사가 지어진 내력을 듣고 밭 500결을 봉납했다.
937년 고려 태조는 '운문선사雲門禪寺'라는 사액을 내렸다.
3.원응국사 (1052~1144) 고려 숙종 때 승려로서 성은 이씨이고 속명은 학일(學一)이며, 자는 봉거로 11세에 진장법사에 의해 입산하여 희함선사(喜含禪師)에게 학문을 배웠다. 33세 때 송나라에 건너가 종전삼장과 천태교를 배워 34세에 귀국하였다. 그후 삼중(三重)대선사라는 칭호를 받았고, 예종 2년에 국사가 되었다.
93세로 입적하자 업적을 찬양하여 '원응'이란 시호를 내리고 많은 전답과 노비를 하사하고 비를 세워 공덕을 추모하였다. 비문은 윤언이가 지었으며, 서체는 대감국사 탄연이 썼다고 전한다.
4.성파당 현척 대선사 부도는 1791년(이조영조 27년)에 건립하였으며 운문사 동편 부도전에 위치해 있다. 가로 77cm, 세로 112cm
5.도봉당 유문 대선사 전기는 미상이며 부도는 본사 동편에 있으며 1751년(이조영조 27년)에 건립하였다. 가로 74.5cm, 세로 114.5cm
6.연파당 대선사 전기는 미상이고 부도는 본사 동편에 있으며 비명은 마멸되어 판독할 수 없다.가로 79cm, 세로 154.5cm
7.운문보익정암당 효원대사 전기는 미상이나 1845(헌종 11년)사리암을 중창하였다.가로 74cm, 세로 114cm
8.운악대사 조선말기의 고승으로 속성은 김씨요. 이름은 두안이고 자는 운악이며 본군 신원동사람이다.
만일회를 창건하여 선과 염불을 쌍수하고 1851년(조선 철종2년)에 응진전을 초창하였으며 전각과 내원암, 북대암등을 중수하고 대종을 조성하였다.
부도와 본사 중수 후의 행적은 미상이다.가로 74cm, 세로 113..5cm
9.설송대사 조선중엽의 고승으로 속성은 백씨요, 호는 설송이며 자인현 사람이다. 13세에 삭발하고 운문사에 입산한 후 선교에 통달하여 강설함에 많은 학승들이 따랐다. 1690년(조선 숙종 16년)에 본사를 제 4차 중창하고 1694년(조선 숙종 20년)에 입적하시니 통도사와 운문사 두곳에 사리탑이 있다. 부도는 본사 동편에 있다.가로 74.5cm, 세로 113.5cm
10.동호당 대선사 선교양종 동호당 대선사는 전기 미상이다.가로 76cm, 세로 112cm
11.진계당 대선사 전기는 미상이고 부도는 본사 동편에 있으며 건립년대는 미상이다.가로 73.5cm, 세로 112.5cm
12.김식희 대장군 본관은 강릉 김씨이며, 신라말, 고려초의 사람이다. 태조 왕건의 선봉장으로 많은 공훈을 세운 문무를 겸비한 장군이다.
두 장군이 유언하시기를 우리는 죽은 후에도 운문사의 수호신이 되겠다는 말에 따라 조영당에 모시고 있다.
13.손긍훈 대장군상 본관은 밀양 손씨이다. 나말여초 고려 태조 왕건의 선봉장으로 많은 공훈을 세운 무관이다.
두 장군이 유언하시기를 우리는 죽은 후에도 운문사의 수호신이 되겠다는 말에 따라 조영당에 모시고 있다
작압전(鵲鴨)·
운문사의 전신인 대작갑사의 유래를 알게 하는 유일한 건물인 작압전은 전면 측면이 모두 한 칸에 불과한 작은 건물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한 신승(神僧)이 중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신비로운 새 떼가 날아오른 것을 본 자리에 이르러 암자를 짓고 수행하여 큰 도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가 처음 새를 보고 이른 터에는 무너진 석탑이 있어서, 무너져 있는 석조물로 다시 탑을 쌓으니 파편이 모자라지도 남지도 않는 것을 보고 좋은 징조로 여겼다고 한다.
그가 깨달음을 얻은 뒤 절을 짓기 시작하였는데, 동쪽에 가슬갑사·남쪽에 천문갑사·서쪽에 대비갑사·북쪽에 소보갑사를 짓고 중앙에 대작갑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이 다섯 사찰을 두고 오갑사(五鴨寺)라고 하였다.
작압전은 신승이 발견한 석탑터에 지어진 전각으로, 나말려초의 보양국사가 전탑형식으로 초창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된 이후 현재의 목탑형식으로 재건되었다. 내부에는 보물 제 317호 석조여래좌상과 318호 사천왕 석주를 봉안하고 있다.
청풍료
대중이 운집하여 발우공양을 하고 자자·포살 및 차례법문 등의 행사를 열 수 있을 만큼 큰 요사채가 청풍료다. 이곳에는 평상시 사미니과(1학년)와 사집과(2학년) 스님들의 방사이기도 한데, 상주인원이 약 120여 명으로 수행과 대중생활에 필요한 하심과 화합을 체득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칠성각(七聖閣) 독성(나반존자), 칠성, 산신 등 세 성현을 모신 전각이다. 삼성각은 우리나라 재래의 수(壽), 복(福), 재(財)의 삼신 신앙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전각이다. 독성이라는 불교적 성현 외에도 칠성·산신과 같은 전통신앙의 대상을 불교로 흡수하여 불교가 가진 원융의 성격을 드러내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전통적인 부처님을 모신 전각이 아니기 때문에 전(殿)이라 하지 않고 각(閣)이라 이름한
청도 운문사 관음보살·달마대사 벽화」淸道雲門寺觀音菩薩-達摩大師壁畵
「운문사 관음보살·달마대사 벽화」는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후불벽 뒷면에 수려한 자연 경관을 배경으로 화면 좌측에 백의 관음보살, 우측에는 깊은 산속에서 면벽 수행하는 달마대사를 배치하였다. 2014년 3월 11일 보물 제1817호로 지정되었다.
운문사 설송 대사비雲門寺雪松大師碑
운문사 일주문 안 좌측에 있는 3개의 비각 중 가운데에 설송 대사비가 있다. 경내에 있는 비석이다. 설송 대사를 기리는 비석으로 설송 대사의 제자인 남붕(南鵬) 등이 1754년(영조 30)에 건립하였다. 모양은 비 몸체의 윗부분이 둥근 호패 모양 비석으로, 네모 모양의 비 받침 위에 고정되어 있다.
조선 후기 청도 운문사에 머물면서 휴정의 두 계보를 하나로 통합한 설송 대사를 기리기 위하여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1754년(영조 30) 청도 운문사에 건립하였다. 비문을 지은이는 이천보(李天輔)이고, 해서체의 글씨는 이정보(李鼎輔)가 썼으며, 이익보(李益輔)가 전액(篆額)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