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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눈먼돈’ 최종 향방(向方)
이원우 아우구스티노
‘요동시(遼東豕)’는 황보농(皇甫農) 씨의 아호다. ‘황보’가 성씨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여기서 잠깐! 요동시라니, 누구든 처음엔 의아해 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릴지도 모를 일. 그 설명부터 먼저 하자.
요동(遼東)에 옛날 바깥출입과 담을 쌓고 사는 한 농부가 살고 있었단다. 외딴곳이지만 곡식도 재배하고 돼지도 길렀던 모양이다. 어느 해 어미돼지가 새끼를 낳았는데, 그 중 한 마리가 흰색이 아닌가?
그는 그놈을 대한한 길조(吉兆)로 여겼다. 해서 그놈이 어느 정도 자랐을 때, 임금에게 갖다 바친다면서 집을 나선다. 그는 넘고 물을 건너 대궐로 향해 부지런히 걸었다. 몇 날 며칠 동안 지칠 줄도 모르고, 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강행군을 계속했다. 지칠 법도 했겠지. 하나 그의 머릿속은, 임금을 알현하여 그 돼지새끼를 진상하고 큰상을 받는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그는 가끔씩 겪는 풍찬노숙(風餐露宿) 자체까지 즐거움으로 여길밖에.
닷새가 후딱 지났을 무렵 그는 서른 가구 안팎이 사는 것으로 짐작되는 마을에 들어섰다. 그런데 이상하다. 온 마을이 떠들썩한 분위기고, 사람들의 얼굴마다에 웃음꽃이 만발해 있는 게 아닌가? 어떤 노인을 붙잡고 물어봤더니, 그가 말한다.
“아 나그네군그래. 오늘 이 마을에 결혼 잔치가 열린다오. 젊은이도 나중에 그 집에 들르구려. 돼지고기나 실컷 먹고 말일세…. 한데 젊은이는 왜 돼지를 안고 여길 지나가는가? 이상하기도 하이.”
하여튼 그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나서 군침부터 삼켰다. 이거 얼마 만인가? 네 발 달린 짐승 고기를 먹어 본 지가 말이야.
이윽고 잔치가 열리는 모양이었다. 농부는 헛기침을 하고 그 집 안으로 들어섰다. 한데 사람마다 그를 보고 킥킥대며 웃지 않은가? 돼지가 자식이라도 되는 줄 착가하느냐며 손가락지로 했다. 그는 정색을 하고 그 사연을 설명을 해야만 했다.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그제야 딱하다는 듯 혀를 찬다. 쯧쯧! 그들이 덧붙이는 말은 그를 절망으로 놀아 넣는다.
“저런! 나그네가 몰라도 너무 세상을 모르는구려. 이 세상에 흰 돼지가 얼마나 많은데…. 이 집에서만 해도 오늘 잡은 세 마리 돼지가 모두 흰색이오.”
이하는 생략하자. 이와 같이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을 ‘요동시’(혹은 遼東之豺)라 했다고 전해진다. 사실 첫머리에 나오는 황보농 씨도 그런 축에 들어간다. 자타가 공인한다고 공통분모를 내세워 설명해 보자. 황보 씨 자신 그 농부를 닮아도 너무 닮았으니, 행여나 비유가 될까 봐 하는 소리다.
황보농 씨가 이 ‘요동시’를 자기 명함에 박아 넣게 된 것은 40대 중반부터였으니, 거의 마흔 개 성상을 넘겼다. 그는 까닭 없이 몸이 아파 이 병원 저 병원 전전한 시절이 있었다. 좀체 낫질 않았다. 물이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법이다. 마침내 그는 ‘민약(民藥) 따라 삼천리’라는 <스포츠 신문> 기획 시리즈 기사를 읽고선, 혼자서 몹시도 추운 날 불원천리 거기를 찾아가기도 했다. 요컨대 그에게는 정상에서 벗어난 행동거지가 많았다는 반증이다.
그 무렵 그는 학교 동기인 경재 조영조 선생을 가끔씩 만나게 된다. 그는 황보농 씨보다 공부를 많이 해서 대학원도 졸업한 친구다. 한학이 깊어서 부산시 문화재 전문위원으로 있었다. 경재 선생은 여자상업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쳤으며, 워낙 빼어난 서예 솜씨를 바탕으로 여기저기 많은 문하생을 두고 있었다.
경재 선생의 처방으로 황보 씨는 병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서식 건강법이라 해서 한창 유행하던 생수 마시기, 풍욕, 냉온욕 등을 생활화하기 2년 만에 정상인으로 돌아온 거다. 이승을 먼저 뜬 경재 선생을 황보농 씨가 못 잊는 까닭이다.
이런 거짓말 같은 실제 이야기도 경재 선생이 아니면, 황보농 씨가 세상에 회자시키지 못했으리라. 둘이서 어느 해 여름 방학에 양산군 원동면 배냇골이라는 산 높고 물 맑은 곳으로 들어가게 된다. 경재 선생이 거기 집을 하나 사 놓고 가끔 들어가 서예 공부를 했던 것이다. 사흘째 아침 경재 선생이 말했다. 참 경재 선생이 홍보농 씨보다 두 살 연장이다.
“이보오, 황보 형. 이제 당신 몸도 많이 나아졌으니, 마지막 고삐를 죄어 보는 게 어떨까?”
“아냐 뭐 형 시키는 대로 할 거니 주문이나 하세요.”
“‘백초유형(百草有靈)’이란 말이 있어. 백 가지 약초를 먹으면 분명히 영험을 볼 수도 있다는 뜻이야,”
“좋지요. 따라 하리다.”
둘은 그날 저녁부터 음식량을 점점 줄여 나감으로써 새로운 시도에 대비했다. 며칠 동안은 냇가에 나가서 천렵을 해서 피라미와, 경상도 사투리로 ‘뿍지’라는(표준말 동사리) 고기를 잡아 어탕을 끓여 먹기도 했고. 일주일 되는 날부터 경재 선생이 일러 주는 대로 산야의 풀만 뜯어 먹는 기이한 일을 시작한 거다.
몸이 가벼워지는 걸 느낀 둘은 외관부터 달라지는 걸 보고 웃음을 주고받았다. 한데 이윽고 일찍부터 ‘만개’했던 황보농 씨의 얼굴 저승꽃(검버슷)이 사라지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불가사의한 일이 연거푸 일어났다. 그 중 하나. 경재 선생과 인근 암자에 갔다 내려오는 길이었다. 도중에 경재 선생니 신기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이보오, 황보 형. 다섯 살 때 내가 평촌 댁 할머니 밭가에 서서 오줌 누던 생각이 나는데? 민들레꽃이 세 송이 피었었어. 동네 사람들이 덫을 놓았었지. 거기 호랑이가 걸렸지 뭔가? 밤낮으로 그 덫을 달고 어흥, 어흥 포효하던 소리가 지금 생생하게 들리기도 하고…. 잊고 있었던 추억(?)이오. 이거 기억이 완전히 되살아나는 게 아니오.”
간이 좀 나빴었던 경재 선생은 완치된 후 몇 년을 호기롭게 이승에 머물다가, 예순 한 살 되던 해 한겨울 사고사를 당하고 말았다. 오호통재라! 그를 생각하면 황보용 씨의 눈가에 이슬이 맺힐밖에.
경재 선생은 생전 황보용 씨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바로 그 ‘요동시’란 고사성어에 부연 설명을 한 거다.
“황보 형, ‘요동’은 우리나라 신의주 북쪽의 중국 땅이야, 삼각형으로 바다를 향해 튀어나온 반도. 시(豕)는 돼지 시요, 돼지는 한자로 豚으로 쓰기도 하지. 또 다른 돼지는 저(猪). 아, 이건 멧돼지를 가리키는 거고요. 요동시는 해석하기 나름이지. 돈은 살진 어린 돼지이고, 시는 조금 자란 놈. 고기 육(肉) 변이니, 가장 맛있는 놈이 돈(豚)이지. 식당에 돈육(豚肉)이라고 써 놓은 까닭이 자명한 셈이랄까? 반면에 ‘저육 볶음’이라던데, 멧돼지 고기일 턱이 없으니, 그건 얼토당토 않는 말이오. ”
“나도 한 얘기 할까? 우리 수필가 협회 회지가 있어요. 어떤 회원이 아들을 결혼시키게 되었어. 청첩장을 보낼밖에. 그 혼주는 김태길 교수나 차주환 교수 등 당대의 이름난 수필과도 교유하는 사람이라, 많은 하객들이 몰려들었답디다. 축의금이 상당히 많이 들어왔던 모양이야. 그래서 다시 감사 인사장을 돌리는데….”
“얘기해 보소.”
“(전략) 돈아(豚兒)의 결혼식을 성황을 이루고, 더구나 과분한 축하의 뜻을 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하략), 뭐 이런 문장으로 말이야. 한데 이 양반이 ‘돈아’ 다음 괄호를 안 하고 그냥 보냈더라나? 얘기의 압권(?)은 거기서 비롯됐다오. 인사장을 접한 사람이 전화를 건 거야.”
“뭐라고 했는데?”
“돈아의 결혼을 다시 한 번 축하드립니다. 새 가정에 축복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저런! ‘돈아(豚兒)’는 자기 자식을 남 앞에 낮추어 지칭할 때 쓰는 말인 줄 몰랐다는 말 아닌가?”
“한데, 당시만 해도 드문 국제결혼이었다오. 신부 이름은 마리아!”
그러니 둘은 배꼽을 잡고 허공에 고소(苦笑)를 날릴밖에.
둘의 대화는 계속되었다. 끝자락에 이르러 조영조 씨가 황보농 씨에게 쓰도록 권한 아호가 ‘요동시’였다. 우물 안 개구리 식으로 오해를 받을 수 있지만, 그래도 세상사와 타협하거나 휘둘리지 않는 그의 성정을 함의하고 있다는 까닭에서였다 하자. 한데 그걸 받아들인 황보농 씨는 약간 그 결을 달리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압축하면 이렇다. 그래 나 못났으니 남과 다른 삶을 살 수밖에!
물론 아호가 무슨 기속력(羈束力)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지만, 황보농 씨 아니 요동시는 그로부터 외롭지만 더욱 별난 인생 역정을 보내는 게 일상화되었다고 하자.
요동시는 도무지 동료들과 어울리는 그런 자리에 불참하기 일쑤였다. 특히 술과는 담을 쌓았으니, 외톨이로 따돌림을 받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래도 그는 경재 선생의 이 말을 항상 떠올렸다. 우물 안 개구리와는 달라요. ‘요동시’! 시야를 넓히기에 따라서 다른 성취동기를 갖고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있다는 시사점을 내포하고 있어. 당신이 그 주인공이 도어 보란 말이지.
자세하게 소설 같은 이야길 펼쳐 나간다.
그는 기박(碁博)조차 손에 대지 않았으나 유일한 어울림의 매체는 화투? ‘고스톱’ 말이다. 그런데 행인지 불행인지 하여튼 파장을 줄러 올 씨앗은 거기서도 잉태되었는지 모른다. 그는 잃어 본 적이 거의 없으니까. 머리 회전이 빨라서가 아닌데, 하여튼 그는 적어도 고스톱 판에서는 백정백승, 따기만 했으니 그를 좋아할 이 누가 있으랴. ‘운칠기삼’? 아서라, 말이 쉬워 ‘운’이 칠 할(割)이지 요동시에게는 기(技)가 십(十)이다. 그가 가끔 하는 말이다.
“마흔여덟 장이 갖고 있는 수백 수천 가지의 오묘한 경우의 수를 꿰뚫지 못하는 아마추어들의 푸념에 지나지 않는다. 그걸 조어(造語)라고 내세워? ‘운칠기삼’ 말이야.”
그는 개평을 안 주고 안 받기로 이름나 있었다. 상대가 손을 내밀기라도 할라 치면 그는 구시렁거렸다. 내 노동의 대가야, 더 열심히 연구해서 후일을 도모하지 그래.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도 못 들었어?
그러니 듣는 이로 하여금 혀를 내두르게 하는 고스톱에 얽힌 기가 막히는 얘기가 없을 수 없다. 열달아 털어 놓으려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수두룩하지만, 딱 한 개만 들먹여 본다.
여름 방학 중인 어느 날 그는 시내 어느 본당 주임신부의 전화를 받는다.
“찬미 예수님! 요동시 아우구스티노 형제님, 오는 주일(主日) 저녁, 아니 밤에 시간 좀 낼 수 있겠습니까?”
“주임신부님, 당연하지요. 어떤 일이 있으십니까?”
“이런 말씀 드리기가 퍽이나 쑥스러운데, 제가 다음 월요일부터 두 주일 동안 휴가거든요. 물금읍 변두리에 천년 고찰이 있는데, 거기 좀 다녀올까 합니다.”
“따라가야지요. 저는 주임신부님 팬 아닙니까?”
“한데, 그날 거의 철야를 하다시피 해야 하는데….”
주임신부는 잠시 머뭇거렸다. 이윽고 다시 말을 잇는데, 진짜 경천동지할 내용을 털어 놓는다. 그동안 가끔 하느님 말씀을 거역하고 사찰에 가서 주지스님과 고스톱을 치고는 했다고 고백을 하다더니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난 늘 잃는 편이거든요. 대가(?)인 형제님과 같이 가서 따고 싶습니다. 스님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 드리고 싶어요. 하느님과 부처님의 진검승부? 허허. 그리고 새마을금고 이사장도 동행합니다.”
“까짓 거를 갖고 망설이시다니, 주인신부님답지 않습니다. 제가 가서 원수(?)를 갚아 드리겠습니다. 한데 주임신부님, 진검승부(眞劍勝負)란 말씀은 삼가셔야지요. 일본말 찌꺼기라….”
“하하, 또 요동시다운 말씀을 하시네요.”
정말 주임신부가 고마웠다. 무심결에 성호경을 긋고 말았다. 기왕지사, 그는 부르짖었다. 천하의 요동시, 살맛이 나게 되었다며 부르짖었다. 솜씨를 발휘할 절호의 기회를 주신 하느님 감사합니다!
세속인들은 성직자들의 그런 풍습 내지 문화를 잘 모른다. 하지만 고스톱의 달인 요동시의 안테나엔 그 정도 정보야 쉽게 잡힌 지 오래 아니던가? 더구나 그의 ‘신앙 고백집’ <천주교야 노올자> 창작 때 정말 많이 도와 준 주임신부임에랴.
나흘이 지나고 드디어 약속 날짜가 되었다. 세면도구며 간이복 따위를 대충 챙기고 도박(?) 자금(큰돈과 5백 원 동전)을 넉넉하게 챙긴 요동시는, 가족들에게 천년 고찰에 간다고 둘러대고는 집을 나섰다. 도로가에서 기다리던 새마을 금고 이사장의 차에 편승해 약속 장소인 사제관 앞으로 바로 갔다. 주인신부도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기다리고 있었다.
물금읍을 지나고 40분쯤 달렸을까? 승용차는 천년 고찰 앞에 닿았고, 일행은 주지스님의 마중을 받았다. 주지 스님의 방에 들어가 인사를 나누고 셋은 대강 씻은 뒤 저녁 공양까지 마치고 나서 환담을 나누고 있는 사이 주지 스님 왈
“산승(山僧) 오늘 저녁 예불까지 마쳤습니다. 밖으로 가실까요?”
다시 두 대의 승용차에 분승하여 20분쯤 들어갔는데, 황토로 지은 아담한 집이 나왔다. 주지스님과 부주지 스님, 주임신부, 이사장, 요동시 등 다섯 사람은 차에서 내려 어떤 별실로 들어갔다. 이미 세속에(?) 들어 선 다섯! 군소리 별로 없이 군용 담요를 펼치고 둘러앉았다. 드디어 화투 한 모가 놓이자, 주지스님과 주임신부가 차례로 패를 뗌으로써 써 선(先)을 보았고. 다섯이니 셋은 직접 노름(?)에 참가하고, 나머지 둘은 광(光)을 판다. 점당 5백 원…. 경찰이 덮쳤으면 진짜 도박으로 간주 처벌을 받을 정도의 큰판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찰 대표(?) 둘은 얼굴이 상기되어 갔다. 반면 성당 대표 셋 중 특히 요동시는 돈 긁어모으기에 바빴다. 자기가 ‘설사’해서 다음에 그걸 도로 갖고 오면서 상대의 ‘피’를 뺐을 때 이런 농담도 튀어 나올 지경에 다다랐다. 집 나간 며느리 얼라(아이) 배어 오네!
새벽이 가까워지자 ‘빈익빈 부익부’의 격차가 더욱 심해졌다. 아니 사찰 대표 측으로 봐서는 갈수록 태산이라는 비명이 터질 만할 때쯤, 모두가 손을 털고 일어서고 말았다. 결산을 대충해 보니, 요동시의 불로소득(?)은 20만원을 조금 넘겼다. 손해는 사찰 대표 둘에게 고스란히 돌아갔고. 주임 신부와 새마을금고 이사장은 출연료 없는 엑스트라로 약간은 겸연쩍은 표정을 짓는 것으로 만족…. 20만원의 뒤처리는 설명을 자제해야겠지만 글쎄, 어땠을까?
그 뒤로도 몇 번 대결이 이어졌으나, 요동시 앞에 사찰 대표 둘은 무릎을 꿇어야만 했더란다.
그때쯤엔 요동시도 주례를 많이 서기로 이름나 있었다. 모두 경재 선생의 덕분이었다. 요동시는 주례 앞에 혹은 괴짜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었다. 경재 선생은 ‘명(名) 주례’였고.요동시는 일요일엔 소위 직업 주례로서 시내 몇 군데 예식장에 부지런히 드나들게 되었던 거다. 괴짜! 언행 자체가 남의 시선을 끌기 충분했다기에 당연히 따라올 수밖에 없는 별칭이기도 했다. 다른 미사여구 따위 동원해 봤자 헛일일 테니 아래 일련의 사례들로 증언(?)하자.
그는 일 년을 통틀어 거의 며칠도 쉬지 않는 남자였다. 남은 도무지 흉내를 낼 수조차 없는 주례 기담(?)-‘일화’보다는 더 설득력이 있으리라-을 동구청 예식장에서 생산해 냈다. 그는 거침없고 현란하게 결혼식을 이끌어 나갔다. 폭소도 자아내게 하지만, 이내 수그러들게 할 줄도 알았다. 관계 되는 가족이나 이웃으로 하여금 눈시울을 적시게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참 여기서 잠깐, 그 예식장에서 모든 일을 주선하는 사람은 안영규 사장이었다. 요동시는 부산시 기획관리실장으로 있었던 정양석 구청장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그가 부산시 문화상과 쌍벽을 이루는 큰상을 받았을 때 정양석 구청장은 상전계장이었음도 밝히자. 구청장은 요동시가 노태우 대통령 내외를 시정보고회에서 만나게 해 준 은인(?)이기도 했다.
하니 일요일 열한 시부터 오후 늦게까지 요동시는 구청 밑 부산진 시장에서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허다할밖에. 바로 거기서 돼지 국밥으로 점심을 때우고 노상 카페에서 커피도 마셨다. 하루에 예사롭게 세 쌍 앞에 서서 기염을 토했다. 15만원 수입. 그러니 동구청(예식장)이야말로 요동시에게는 은혜의 공간이고도 남았다 할밖에. ‘인연’이란 말로 포장하여 몇 가지만 들먹여 보자.
그날 주례는 두 쌍이었다. 먼저 서면 로터스 예식장에서 기가 막히는 일 하나를 겪었다. 축가를 부른다는 친구가 신곡이라는 대중가요 하나를 붙잡고 어찌나 멈칫거리는지….마음을 졸일 대로 졸였다. 급히 사진을 찍고 부리나케 도로가로 뛰어나왔지만, 택시가 잘 잡히지 않는다. 천신만고 끝에 동구청에 도착했는데, 세상에 시작 15분 전이다. 아슬아슬하게 약속 시각을 지킨 셈이다. 마음을 졸이던 안영규 사장이 저만치서 안도의 숨을 쉬는 모습이 차라리 애처롭게 느껴졌다.
요동시는 땀을 훔칠 겨를도 없어 소매로 이마를 슬쩍 문지르고는 주례석 탁자에 얹힌 청 첩장을 보았다. 신랑 문복ㅇ씨의 장남 백ㅇ필, 신부/촉ㅇ트바요르의 장녀 오란빌ㅇ! 그는 쾌재를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신부가 외국 규수로구나! 지난 일요일 두 번째가 공년조옷 씨와 응원티베의 차녀 김ㅇ희 양(베트남 규수인데, 이미 개명을 한 모양)이 신부였는데, 오늘 또 ‘국제결혼식’을 집전하게 되었다. 이 얼마나 가슴 뿌듯한 일인가?
잠시 자리엔 앉아 있으려니 중년 남자가 허리를 굽히면서 인사를 건넨다. 사회를 맡은 김아무개란다. 요동시는 눈치를 챌밖에. 아, 신랑이 나이가 제법 든 모양이구나.
이윽고 안영규 사장과 그의 부인 권혜옥 수모-도우미를 그렇게 부르는 모양인데, 실제 그들의 역할은 대단하더라-까지 가까이 다가오더니, 오란빌ㅇ 양은 몽골 규수란다. 그러면서 부인이 봉투를 내민다. 주례 사례다. 요동시는 눈치껏 받아 넣고는 반대쪽 호주머니에서 뭘 하나 끄집어내어 부인의 손바닥 위에 슬쩍 얹었다. 받은 것은 7만원, 준 것은 2만원. 요동시와 그들 부부의 아름다운 거래는 오랫동안 이어져 왔던 거다. 안영규 사장의 귀띔.
“신랑 신부가 이미 남매를 두고 있으며, 큰애가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오늘도 축가 한 곡을 불려 주셔야 하겠습니다. ‘사랑으로’나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둘 중 하나로 말입 니다. ”
요동시는 속으로 환호를 했다. 야호! 여태껏 하객 수나 식장 내의 온도 차를 보고, 재량으로 축가 열창(?) 여부(與否)를 결정하였었다. 한데 오늘은 황망 중에도, 안영규 사장이 ‘불감청이언정고소원’인 요동시 자신의 심사를 어찌 미리 헤아리고 있었다는 말인가.
그는 그렇게 짐짓 약간의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신랑 신부의 아들딸이라는 귀여운 남매가 요동시 앞으로 쪼르르 달려 나온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누나가 참 예쁘게 생겼다. 두 살 터울인 것 같은 작은아이(아들)도 보통 인물이 넘는다. 묻지도 않았는데, 자기가 다니는 학교 이름까지 댄다. 얼굴과 행실로 봐서 ‘따돌림’ 따윈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듯했다.
여기서 잠깐!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주례 선호 조건 중의 하나가 키다. 164 센티미터가 될까 말까한 요동시는 그래서 약간 기가 죽는다. 물론 보조 무대가 항상 마련되어 있어서 그럭저럭 넘기긴 하지만, 동구청에서만은 그가 비상수단이 하나 마련되어 있어 더욱 마음을 놓는다. 바로 옆에 있는 별실에 키높이 구두를 한 켤레 마련해 둔 것.
이윽고 예식이 시작되었다. 신랑 신부가 입장할 때부터 요동시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팔도 치켜들어 보이는 등 짐짓 여유를 부렸다. 마흔일곱 살 신랑(장신이었다)과 여남은 살 아래인 신부는 썩 어울렸다. 특히 신부가 보기 드문 미인이다. 하여튼 일사천리로 결혼식을 이끌어 나갔다. 군소리를 할 눈치를 보이는 사회에겐 수시로 고개로 주의를 촉구했고.
이윽고 요동시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주례사 순서. 항상 그래왔듯이 그의 주례사는 간단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그날도 마찬가지. 은사인 정신득 학장의 수필 ‘그물 한 코’를 인용한 것. 그물 한 코만으로써는 아무리 애써 봤자 참새 한 마리도 잡지 못한다. 그러나 그 그물 수백 코가 이어졌을 때는 다르다. 수확(收穫)의 의미를 거기서 찾자. 그런 뒤 그걸 사회로 되돌리는 것, 그게 자아실현이다. 3분이면 그 얘기는 끝났다. 이어 주례의 독창….그는 머뭇거리지 않고 피아노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물론 신랑신부를 그대로 세워 놓은 채. 전주가 끝나고 나서 몇 초도 안 걸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그는 목소리를 높였다.
눈을 감기 힘든 가을 하늘보다 저 하늘이 기분 좋아/ 휴일 아침이면 나를 깨운 전화…살아가는 이유 꿈을 꾸는 이유 모두가 너라는 걸/ 널 만난 세상 더는 소원 없어…7월의 어느 멋진 날에…
물론 ‘1월의 어느 멋진 날에는 개사(改詞)를 한 거다. 그때가 7월이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식장 안은 열기의 도가니로 변하고 말았다. 그 노랠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걸 낙수라 하면 폄하하는 결과로 비쳐질까봐 염려스럽다. 하여튼 곧바로 진짜 감동 장면이 연출되었으니 바로 이거다. 신부 측 혼주석에 우리나라에 시집 와서 산 지 오래된 이모(姨母)가 앉아 있었다. 그런데 이모의 나이가 신랑보다 몇 살 아래라는 안영규 사장의 귀띔이다. 신랑 신부약가 부모에게 인사를 할 때, 신랑이 사회의 안내에 따라 큰절을 한 것! 신부는 그 순간 기쁨의 눈물을 터뜨렸다. 쓸데없이 또 자랑이냐고 나무람을 받을 각오로 요동시가 닫았던 입을 다시 연다. 그날 이걸로 찬란한(?) 식을 아래와 같이 축복으로 마감했더라나?.
그날 그는 기분이 참 좋아서 ‘쾌척’을 실행에 옮긴 거다. 그는 주례 사례가 든 봉투에다 5만 원 짜리를 석 장 더 보탰다. 그걸 꼬깃꼬깃 접어서 손에 쥐고 있다가 주례와 새 출발하는 부부와 셋이서 사진 촬영을 할 때, 신랑 호주머니 안에 밀어 넣었다는 얘기. 들릴락말락한 목소리로 축하 인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잘 살게!
‘가짜 어머니’ 사건도 빼놓을 수 없다.
색동 어머니회라는 전국 단위 단체가 있다. 동화 구연으로써 사회에 봉사하는….어머니회니까 당연히 결혼을 해야 자격이 주어진다. 요동시는 어느 날, 손복래라는 회원의 뜬금없는 방문을 받았다. 회원 여럿과 함께 어울려 요동시를 찾아온 거다. 손복래 회원이 입을 연다.
“요동시 선생님, 결혼 주례를 좀 서 주실 수 있을는지요?”
“그럼요. 당연하지요. 신랑 신부가 누굽니까?”
“신랑은 천천히 말씀드리기로 하고 신부를 먼저 소개하겠습니다. 신부 손복래.”
“아니, 손복래 씨는 아이 어머니 아닙니까? ‘색동 어머니회’ 회원인데….실례 같습니다만, 행여 재혼하시는 겁니까?”
정색을 한 손복래 씨가 잇는 말에 되레 탄성이 터져 나왔다. 너무 동화 구연을 좋아해, 오랜 전 아이를 둘 어머니라고 속인 채 대회에 출전했는데, 금상에 입상했었다는 것! 얼마 뒤에 사실이 밝혀졌지만, 어쩔 수가 없었더라는 것이다. 요동시는 당연히 약속을 하고 모원 모일 예식장에 발걸음을 했으렷다?
한데 사회자를 보고 그는 거듭 놀라고 말았다. 남자가 아닌 여자, 윤명희 색동어머니회 부산회장이 미소를 띠고 그에게 사인을 보내고 있었던 것. 당시만 해도 여자 주례는 있어도 여자 사회는 극히 드물었으니, 그 또한 기록이라 하자. 그날은 사례를 톡톡히 받은 걸로 기억한다. 그때쯤엔 동구청 예식장 외엔, 키높이 구두를 가방에 넣고 다녔다. 그러니 주례의 키를 두고 시비(?)의 시선을 보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한 예는 몇 년 동안 합동결혼식 주례를 2-3년 동안 맡았다는 사실. 집안 사정이 어려워 실제 가정을 이루고 있으면서, 식만 올리지 못한 커플을 위해 구청과 관계기관에서 주최 주관하는 그 행사가 봄과 가을에 열리고 있었다. 요동시에게는 좀 버거운 느낌이 없지 않았으나, 그런 대로 도합 스무 쌍이 넘는 신랑신부 앞에 사자후(?)를 토했다. 권익 청장은 항상 참석했고, 허태열, 정형근 의원도 가끔은 얼굴을 내밀었다. 각계각층에서 답지한 선물이 제법 많아서 요동시는 놀라기도 했다. 사례는 구청에서 책정한 20만원 정액. 하나 한 번도 그걸 요동시가 자기 호주머니에 넣은 적이 없다. 향방(向方)? 그걸 세세히 밝힐 수 기회가 있을는지 모르겠다.
요동시는 가끔 이런 독백을 했다.
“‘눈먼돈’이란 말이 있지. 내 사정이 남보다 나았으면 나았지 못하지는 않은 것은 이런 ‘눈먼 돈 덕분이야. 늘 그래왔듯이 이렇게 번 돈은 누구에게든 비밀! 아내조차 속속들이 내 행적을 모르니 얼마나 다행이냐 말이다. 훗훗”
거듭 밝히지만 그는 고스톱이며 주례 사례비로 버는 돈이 만만찮았다. 대신 그는 은행 거래를 할 줄 몰랐으니 낭패일 수밖에. 입금도 할 줄 모르고 출금 또한 마찬가지. 그래서 그는 항상 시쳇말로 현금 박치기가 생활화 되어 있었다. 기가 막히는 일을 그래서 당했으니 그 전말이 이러하다.
학교에 사고가 잦았다. 아이 하나가 죽었는가 하면, 또 다른 아이 하나는 실명 직전. 앞서의 경우는 조현병이 원인이었고, 다친 아이는 친구로부터 폭행을 당해서였다. 백이성 문화원장이 위로 차 오더니 학교 건물이 가야 시대 고분군 위에 서 있단다. 요동시는 가톨릭 신자라 미신을 믿는 건 아니로되, 답답한 사람이 샘을 파기 마련, 교장실을 아래 1층으로 옮기도록 결심한다. 그 공간은 간이 창고로 쓰기로 하고.
실내 장식이며 집기 등을 바꾸고 옮기는 건 수월한데, 정작 책이 문제였다. 집에서 상당한 양의 도서를 가져다가 책장 안에 꽂아 놓았기 때문이다. 부끄러운 이야기인데, 동료 교장들도 그런 과시 내지 허영을 나타내기 예사였다.
이사하는 날 그는 출장을 급히 갈 일이 생겼다. 그래 행정실장에게 잘 부탁한다고 하고선 버스 정류소로 나갈 수밖에. 그런데 어쩐지 몇 시간 내내 찜찜한 느낌이 들었다. 영어도 잘 모르는 주제에, 학교 돈으로 산 큰 <영한사전>과 그 속에 그동안 모아 감춰 두었던 ‘눈먼돈’…. 그게 머리에서 내내 떠나지 않았던 것. 출장을 마치고 귀교하여 부리나케 새 교장실로 들어가 <큰 영한 사전>을 펼쳤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게 송두리째 없어졌다! 어림셈으로 자그마치 600만원에 가까운 거액이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누구에게 묻는 것은 더욱 불가했고. 땀 흘려 모은 돈이 있는가 하면(주례), 그 반대의 부정(不淨)한 돈도 그에 못지않았기 때문이다. 범인은 대강 짐작이 갔다. 아니 둘 중에 하나다. 낮에 짐을 옮기기 위해 임시로 쓴 인부.
워낙 분통이 터져 둘을 불러다 추달을 할까도 해 봤다. 윽박지르면 실토할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이윽고 어금니를 깨물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자. 만천하에 그동안의 행적이 낱낱이 드러날지 모르는 일 아닌가?
아내에게도 사실을 밝히지 못했다. 그래도 그는 통장을 따로 갖지 않은 채, 일흔아홉 살까지 버텨내고 있다. 영원한 괴짜!
요동시는 지금도 시쳇말로 여전히 ‘현금 박치기’로 여생을 꾸려 나가고 있다. 카드? 없다. 지하철 무임으로 승차하는 카드조차 예외가 아니다. 그것만은 몇 달 갖고 다녔었는데, 두어 번 분실하고 보니(몇 만원씩 입금되어 있었다), 다시 농협에 가서 신청할 생각이 없어져버렸다.
극비리에 ‘눈먼돈’을 관리하고 있으니 불가사의하다 하자. 그렇다고 해서 그게 하늘에서 떨어지나 땅에서 솟나?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라 할지 모르지만 비밀은 있기 마련. 그의 전언을 슬쩍 흘려 보자. 아내와 딸이 주는 용돈을 아끼고 나머지는 떼어 내 아무도 보지 않는 <큰 한자 자전(字典)> 안에 넣어 두고 필요할 때 꺼낸다. 아내를 속이지 않고서는 그가 눈먼돈을 더 이상 마련하기는 불가하고말고. 그렇다고 해서 타관살이 주제에, 화투를 다시 만질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어쨌든 3백 만 원은 확보되어 있다. 용처가 어디냐고? 내년이 그의 팔순이다. 그는 그 잔치를 할 수 없는 사정이 있다. 핵심을 비껴서 설명을 해 달라는 요구조차 그에게 너무 잔인하다니 개략만 적어 보자.
단 눈먼돈을 조금만 더 모을 수 있다 치자. 그리 멀지 않은 이웃에 노인 요양 시설이 하나 있다. 내년 6월 7일, 돼지 몇 마리를 잡아 거기 가족들에게 대접하고 싶다. 거기다가 그와 친한 쟈니리와 오기택에게 부탁하여 ‘뜨거운 안녕’, ‘영등포의 밤’ 등을 부르게 하는 것. 사회는 방수일 코미디언이면 되겠지. 오기택은 와병 중이지만 지난해 그의 고향 해남 땅끝 마을에서 열린, 그의 이름을 딴 가요제까지 갔다 왔으니 가능하리라. 둘 다 50만원씩의 출연료가 필요하다.
약간 예산이 약간 부족하다. 그래도 요동시는 믿는 구석이 있다. 그에게는 아직 수금이 안 된 외상(外上) 주례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50만 원 가량 된다. 사정에 의해 서울 근교로 올라오기 직전의 극적인 주례 사례 5만원을 포함하여, 열네 번의 주례 사례의 합이다. 요동시 성정이 너무 사납다는 반응을 접하기 십상인 사연이다. 해서 대놓고 터뜨리기 움츠려지지만, 적어도 그런 그의 주례 수첩에 기록될 만하다.
동구청 예식장 외의 주례는 주로 조방 앞에서 섰다. 그런데 도중에 소개비를 받는 K라는 친구가 있어 그에게 모든 걸 맡겨 두면 2만원을 뺀 5만원을 예사롭게 외상으로 달아놓는 것이다. 한꺼번에 몇 십 만원씩….
45만원이 그렇게 밀린 어느 날, K를 예식장에서 만나기로 했다. 여유롭게 결혼식을 집전했다. 그런데 K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끝날 무렵에 사모인 듯한 아가씨 하나가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더니 다가와서 하는 말이다.
“주례 선생님, 이후 계획이 어떠신지요?”
“그건 왜 묻지?”
“아래 층 107호실에 주례 선생님이 못 오신다는 겁니다. 다른 선생님을 찾을 수도 없구요. 주례 선생님, 저희 사정을 좀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사례는 두 배로 드릴게요.”
요동시는 부리나케 내려갔다. 과연 테이블마다 하객들이 둘러 앉아 있고, 사회가 신랑 입장을 외치기 직전이다. 요동시는 그래서 요동시다. 다른 주례 같으면 어림도 없을 일을 그는 시원하게 처리했다. 그리고 받은 사례는 20만원! 5만원을 손해 보고-그 뒤에 K를 못 만났다-20만원을 받았으니, 그 순간의 선택이 어찌 잊힐 리야!
K의 전화번호는 아직 있다. 011-035-0000. 법칙이 있으니 010으로 바꾸면 단번에 장답이 나온다. 하지만 이르다. 과연 연락을 할까 말까는 오롯이 요동시의 느긋한 판단에 좌우된다.
요동시가 겪은 실로 어처구니 없는 결혼식 광경을 두어 개 전하는 것으로 마무리하자.
“사회의 횡포 내지 무지가 심합니다. 어느 결혼식 사회를 맡은 친구가 한다는 말입니다. ‘신랑 신부를 낙태(落胎)한 양가 부모님이 어쩌고저쩌고…’. 장내에서 소란이 안 일어날 수 없었지요. 그런가 하면 이런 일도 있었어요. 사상의 뷔페식당을 겸한 예식장 안. 회촉 점화가 끝나고 미묘하고도 나지막한 웅성거림을 느끼는 순간, 신랑 혼주석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대갈일성! ‘이놈의 자슥들 장사 처음 하나? 신랑 신부 이름도 안 갈아 붙였잖아?’”
이래서 세상은 요지경이다. 참, 요동시는 칠순 잔치를 생략하고 삼랑진 오순절 평화의 마을에 가서, 가족(장애를 가진)들에게 돼지 몇 마리를 잡아 직접 가서 대접했었다. 그 돼지들은 흰색, 검은 색? 글쎄다, 그걸 누가 알랴. 다만 ‘눈먼돈’은 거기에도 섞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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