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후서(後書) 외 1편
신현락
뒤를 돌아보다가 돌이 된 사람에게
뒤를 보여주는 사람의 등은 적막하도록 아름답습니다
한때 바람의 시간을 따라가면 사랑이 깊어진다고 생각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바람의 방향을 하나의 언어로 정의 내리기 좋아하는 때였으니 편서풍이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바람의 이름이 되었는데요
회오리바람에 내 편애의 지도가 찢어졌을 때
지평선에는 먼지바람만 자욱했지요
나의 미래가 그대의 뒤에서 오는 것은
그대의 뒤가 끝이 아닌 까닭입니다
뒤끝이라는 말 참 난감하지요
한 이야기가 끝나고 난 뒤에도 한참을 그 뒤가 궁금한 어린 바람의 사전에도
뒤끝이 없습니다만……
뒤는 시간의 단애처럼 직립의 존재만이 갖고 있는 거울입니다
내가 꿈을 회상할 때 꿈의 뒤편에 비추어 보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뒷덜미가 불안한 사람들이 시간의 철학자가 되거나 수다스러운 이야기꾼이 되는 것은 이 고장의 오랜 전통입니다만
내 꿈과 그대의 뒤가 서로를 비추는 눈앞의 낯선 얼굴이어서
나는 돌아서지 않습니다
그대 뒤의 생 역시 사랑일까
미래를 궁금해하는 눈먼 자들이 다가와 우리의 눈동자를 쓰다듬고 있습니다
내가 뒤를 돌아보는 동안 그대가 보여준 건 빈들이었습니다
내 사랑의 기다림과 그대의 망각 사이에서
그대의 뒤는 눈 내리고 바람 부는 세상에서
시간의 먼지가 가라앉은 지평선처럼 오래도록 고요할 겁니다
쌀의 오독
평생, 쌀을 팔러 다니는 것은
쌀을 주식으로 하는 종족의 운명이다
간식이 주식보다 귀하던 시절엔 주머니에 한 움큼
쌀알을 넣고 다녔다 깨물면
오독오독(誤讀誤讀) 소리가 났다
어린 어금니 깨지는 소리가 났다
쌀을 판 날은 밤 새워 책을 읽었다
가난한 세상을 읽어내는 일생이
오독뿐이라고 해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때로는 쌀을 사러 다니기도 하였다
쌀을 살이라고 발음하는 여자를 만난 이후였다
쌀과 살 사이에서 그 여자의 덜 여문 살을 움켜잡자
내 손등에는 쌀알 같은 소름이 흘러내렸다
바닥에 흩어진 쌀알은 이별의 점괘를 가리켰다
쌀을 사는 것은 살을 파는 것이다
쌀을 파는 것은 삶을 사는 것이다
죽어서도 쌀을 입에 물고 쌀을 팔러 다니는 것은
쌀 한 톨이 생사의 안팎을 관장하는 종족의 운명이다
한 됫박의 쌀로 사랑을 구하고
아침과 저녁을 먹는 동안이 내 평생이었다
신현락
1960년 경기도 화성 출생. 1992년 《충청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으로 그리고 어떤 묘비는 나비의 죽음만을 기록한다 외 3권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