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도마 신부 전기(五)
『경향잡지』 1949년 8월호 제43권 제8호(119〜122쪽)
2. 귀국도상에(속)
一八四二년 八월 二十八일 안드레아는 「세실」대장과 동반하여 남경을 방문하고 도라와서만 학수고대하던 최도마를 싣고 「파보리로」호가 나타났다 친우 도마를 만난 것은 더없이 반가웠으나 앞으로 귀국의 도정에대한 묘책이 서지않어 번민하였다.
「유람을 필한다음에 오송구(吳송口)」를 귀항하는중에 우리가 고대하던 파보리로를 만나
「브르니에르」신부와 그 두 반여 도마와 반요안의 도착하였음을 탐문하고 슬픔과 즐거움을 일시에 느꼈나이다. 모두 회합하였으니까 즐거웁기는하나 우리의일이 더욱 곤난한 상태에 빠졌기 때문에 또한 슬퍼하였나이다」(5, 고레 一, 25) 이는 一八四二년 十二월 九일 김안드레아가 요동(遼東)서 「레그레좌」신부께 올린 편지의 일절이다.
「그후 최도마는 해리를 가지고 「브르니에르」신부와함께 황세흥이라하는 외교인의 집에로 발정하였다. 이 황씨의 집은 해변에 있고 김안드레아의 일행이 임시 체류하던곳이였다. 一八四二년 九월 十一일이다. 브르니에르신부와 최도마는 근처에 정박하고있던 영국군함에 올러 변복하고 「배시」주교택에로 처소를 옴겼다. 그후 엿새가 지난다음 김안드레아와 「메스뜨르」신부께서도 주교땍에 모였다. 베시주교께서는 신부들과 한국신학생들을 후대하섰고 또는 그 알선으로 어떤 교우의배를 타고 약 十五일간 항해하여 요동반도 다충호에 이르렀다. 이 항해중에 역풍으로 두세번 출범하던곳에로 되돌아가세된것의에 이렇다할만한 역경이 없었다.」(6, 고레 二, 36, 37)
요동에 도착한 일행은 또 난국에 봉착한다 여기에관하여 김안드레아의 편지일절을 다시 소개한다.
「……반요안은 일을 마련키위하여 신자들에게 파견되여 자기는 거기 머무르고 두(杜) 요셉이라고하는 회장을 우리게 보내였으며 이 항구에서 신부님은 밤에 상육하기로 작정하였으나 주위환경이 허락지않으므로 낮에 회장을따러 나리고 물건은 다른길로 보내였나이다. 그런즉 어떤외교인들이 신부님을 보고 구라파인이라고 단정하매 안내자는 우리가 주막에 가까이가 여러 가지 시끄러운 힐문을 당할까하여, 그저 강변에 나려 일의 추이를 관찰하라고 하였은데, 그곳은 주막에서 바라볼수가 있었고 거기에 또 물이 바로전에 빠젓던고로 대단히 질었나이다. 그리고 그는 도마를 동반하고 일을 미리하러 주막에로 즉시 향하여가니 우리는 다섯명 즉 매스뜨르, 브르니에르, 양위신부와 두사공과 내가 남어있었나이다.
외교인들은 우리가 질고 길도없는 강변에 배회하는 것을 보고 한편에서는 영국인신부라고 소리지르고 한편에서는 (주막편에서) 장정 三十명이 고함지르며 우리에게 달려오니 그들은 여관업자이던 것을 우리는 경관으로 오인하였나이다 과연 경관도 몇 명 있기는하였지만.- 그래서 장소의 곤난으로인하여 서로 떠러저있던 사공들에게 신부님옆에로 가까이가라고 내가 가만이 지시하였으나 저들은 공포로인하여 안색을 변하고 고개도 처들지못하더이다. 그들은 와서 우리를 붓잡으며 여러 가지로 힐문하였으나 신부님들은 우리가 들고 있던 책 때문에 극히 두려워하여 아무 대답도없이 계속하여 길만걸으섰나이다. 그래도 그들은 여전히 붓잡고 힐문하므로 내가 언성을 높여 이와같티 말하였나이다. 즉
자기들은 안녕질서를 위하여 있는 정부의 관리임에도 불구하고 무고한 인민을 능욕한다 고.-
이말을 듣고 그들은 우리를 바라고 떠나갔으나 우리가 힐문당하는동안에 두회장과 도마는 우리가 피착듸는줄로 생각하고 매우 걱정하였나이다……」(7, 고레 一, 27-28)
「그다음에 「박갸서」라 부르는 교우촌에 있는 두(杜)요셉의 집에로 우리는 수레를타고 갔나이다. 이촌은 해변에서 六十리 격하여있고 산협에 있으며 교도가 약 二백명있었나이다. 그러나 두씨가족외에 다른 교인들은 신부님들을 환영하지않을뿐아니라 도리어 어떤이들은추방할 공작까지 하였나이다.
전에 「베롤 주교께서 그들중에 체류하시려하시는것도 원치않었으니 이것은 이상히 볼수없는것이로소이다. 그들은 아직 마음을 놓지못하고 있는자들이오, 또한 주교신부님들께관하여 그다지 자미스럽지못한 말을 나도 많이들어사오나 지면이 허락지않어 신부님께 써올리지못하나이다.
지금 「브르니에르」신부님과 도마는 「개체우」에서 멀지않게있는 양관이라하는 교우촌에 머무르고, 「매스뜨르」신부님은 나와함께 어떤 과부집에 유하고 있나이다…」(8, 고레 一, 35-36) 우리학생들은 신부님을 모시고 입국을 희망하고있으나 환경은 당장 허락지않었다. 김안드레아가 위선 앞서 입국하여보려고 변문을 뚜드려보았다. 제일차에 국경근방에서 김방지거라는 한국교우를 만나 국내정세와 한국교회의 형편을 간단이 들었다.
一八三九년박해에, 이미, 입국하셨던 주교신부 세위와 모모 유력한 교인들이 순교한 사정을 들었다. 그중 김안드레아 자기부친의 순교와 모친의 의지할곳없이 유리객걸하는사정도 알었고, 최도마의 부모역시 치명하였다는 말을 들었다.
이 소식은 김안드레아와 동반하였던 중국교인들의편에 박갸서까지 전하여졌을 것이다. 최도마는 순교자의 아들이 되였다. 오래 소식없던 한국에서 흘러나온 소식은 이것뿐이다.
김안드레아는 모험적으로 일시 국내까지 들어왔었으나 사정이 부득하여 되돌아서서 만주로 갔다가, 그후 기회를 엿보아 수차 변문내왕을 시험하였다. 그는 입국의 새로운길을 찾으려고 결사적으로 대륙을 횡당하여 두만강변에 열리는 경원(慶源)국제시장방문까지 하여보았다. 그러나 환경은 아직 입국에까지 허락지않었다. 김안드레아는 최후노력으로 의주(義州)변문을 뚫고 입국에 성공하였다.
본시 「매스뜨르」신부와함께 입국하였던 것이다 그는 더욱 불가능한 일이여서 김안드레와 단독 입국한 것이다. 이동안 최도마는 만주에 체류하여 학업을 계속하는한편 만주교회 신학생들을 교수하였다. 만주교회문헌중에서 아래와 같은 재료를 찾을 수 있다.
「一八四四년……「매스뜨르」이라하는 신부 당신의 포교하실땅 한국에 들어가실 수 없어 쇼빠자즈(小八家子) 동리에 계섯고 또한 한국인 육품부제 한위가 이동리에 함께계시며 신학생 셋을 교수하였다……이상에 기록한 이신부와 육품부제는 모험을 무릅쓰고 한국을향하여 나아갔었으나 국경을 넘지못하고 국경지대에서 배회하기에 八, 九개년의 긴세월을 허비하고 있었다……」(9, 小八家子 3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