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직(李景稷)
[문과] 선조(宣祖) 39년(1606) 병오(丙午)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25위(35/36)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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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상고(尙古)
호(號) 석문(石門)
시호(諡號) 효민(孝敏)
생년 정축(丁丑) 1577년 (선조 10)
졸년 경진(庚辰)(주1)【補】 1640년 (인조 18)
향년 64세
합격연령 30세
본인본관 전주(全州)
거주지 한성([京])【補】(주2)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조선 후기에, 경기도관찰사, 호조판서, 강화유수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상고(尙古), 호는 석문(石門).
함풍도정(咸豊都正) 이계수(李繼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이조참판 이수광(李秀光)이다.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이유간(李惟侃)이며, 어머니는 개성 고씨(開城高氏)로 대호군(大護軍) 고한량(高漢良)의 딸이다. 이항복(李恒福)과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01년(선조 34)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가 되고, 1606년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권지부정자에 올랐다.
이후 1609년(광해군 1) 승문원주서 겸 시강원설서, 1610년 홍문관정자 · 봉교, 이듬해 전적 · 호조좌랑 · 수찬 · 병조좌랑 겸 지제교 등을 역임하였다.
1613년 병조정랑으로 승진했으나 이이첨(李爾瞻)이 득세해 이른바 계축옥사를 도모하자, 이에 연루된 서성(徐渻)과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수성찰방(輸城察訪)으로 나갔다가 파직되었다.
그 뒤 황해도도사로 복직되고, 다시 병조정랑이 되어 접반관(接伴官) · 진휼종사관(賑恤從事官) · 평안도경차관(平安道敬差官) 등을 겸하였다.
1617년에는 회답사(回答使) 오윤겸(吳允謙)을 따라 종사관(從事官)으로 일본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1618년 폐모론에 반대해 사직하고, 약 5년여를 고향에 내려가 지냈다.
이후 1622년 명장(明將) 모문룡(毛文龍)이 가도(椵島)에 주둔하자 백의종군했으며, 곧이어 철산부사가 되어 모문룡의 신임을 얻었고, 인조반정 이후 형조참의 · 의주부윤이 되었다.
또한,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전라도절도사로 여산(礪山)으로 가, 병사들을 모으고 난군 진압에 힘썼다. 그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품계가 오르면서 수원부사가 되었다.
1626년(인조 4) 부총관 · 장례원판결사를 거쳐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 도체찰찬획사(都體察贊畫使) · 비변사유사당상이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때는 병조참판으로 왕을 강화도에서 호종하고 강화가 성립될 때 접반사로 활약, 환도 이후 호조참판이 되었다.
1629년 도체찰부사(都體察副事)로서 모문룡 병사의 동향을 파악하기에 노력했으며, 호조참판 · 경기도관찰사를 거쳐 1634년 도승지가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는 부호군으로 비변사당상을 겸해 남한산성으로 왕을 호종했고, 화의가 성립된 뒤 호조판서가 되었다.
그러나 영의정 김류(金瑬)와의 불화로 일시 정직되었다가 다시 도승지 · 강릉부사 · 동지중추부사 겸 경도총관을 지냈다. 1640년 강화유수로 있다가 병으로 죽었다.
관료로서 재주가 있고 품위가 준수했으며, 특히 사부(詞賦)와 글씨가 뛰어났다.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효민(孝敏)이다.
[생원] 선조(宣祖) 34년(1601) 신축(辛丑)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13위(43/100)
[진사] 선조(宣祖) 34년(1601) 신축(辛丑) 식년시(式年試) [진사] 1등(一等) 4위(4/100)
[이력사항]
선발인원 36명 [甲3・乙7・丙26]
전력 진사(進士)
관직 호조판서(戶曹判書)
관직 옥당(玉堂)
타과 1601년(선조 34) 신축(辛丑)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등(三等) 13위
1601년(선조 34) 신축(辛丑)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1등(一等) 4위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이유간(李惟侃)[生]
[조부(祖父)]
성명 : 이수광(李秀光)
[증조부(曾祖父)]
성명 : 이계수(李繼壽)
봉호 : 함풍수(咸豊守)
[외조부(外祖父)]
성명 : 고한량(高漢良)
본관 : 미상(未詳)
[처부(妻父)]
성명 : 이성길(李成吉)
본관 : 미상(未詳)
[처부(妻父)2]
성명 : 오경지(吳景智)
본관 : 미상(未詳)
[안항(鴈行)]
제(弟) : 이경설(李景卨)[進]【補】(주3)
제(弟) : 이경석(李景奭)[文]
[가족과거]
자(子) : 이정영(李正英)[文]
[주 1]졸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을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
[주 2]거주지 : 『만력29년신축사마방목(萬曆二十九年辛丑司馬榜目)』(한국국학진흥원[안동 풍산김씨 허백당(虛白堂[金楊震]) 종택]) 내의 합격 기록을 참고하여 거주지를 추가.
[주 3]안항 : 『만력29년신축사마방목(萬曆二十九年辛丑司馬榜目)』(한국국학진흥원[안동 풍산김씨 허백당(虛白堂[金楊震]) 종택]) 내의 합격 기록을 참고하여 안항을 추가.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卷之八(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이유간(李惟侃)
[생원] 선조(宣祖) 24년(1591) 신묘(辛卯) 식년시(式年試) [생원] 2등(二等) 23위(27/100)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3C774C720AC04B1550X0
자(字) 강중(剛仲)
생년 경술(庚戌) 1550년 (명종 5)
졸년 갑술(甲戌)(주1)【補】 1634년 (인조 12)
향년 85세
합격연령 42세
본인본관 전주(全州)
거주지 한성([京])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조선 중기에, 사산현감, 돈녕부도정, 동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강중(剛仲).
정종의 아들 덕천군 이후생(德泉君 李厚生)의 5세손이며, 완성군(完城君) 이귀정(李貴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함풍도정(咸豊都正) 이계수(李繼壽)이다. 아버지는 증 이조참판 이수광(李秀光)이며, 어머니는 행충좌위부사과(行忠佐衛副司果) 김언정(金彦禎)의 딸이다.
민순(閔純)의 문인이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여러 번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1591년(선조 24)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593년 지우인 이항복(李恒福)의 추천으로 벼슬길에 나아가서 사산현감(四山縣監)이 되고, 돈녕부도정 등을 역임하였으며, 1634년 동지중추부사로 치사하였다.
천성이 자애롭고 선량하였으나 일을 처리할 때에는 강하고 과단성이 있었으며 군읍(郡邑)에 나가서는 간사하고 교활한 언동을 금하고 세금부과에 엄정하여 치적이 드러났다.
이호민(李好閔)·서성(徐渻) 등과 교환이 있었으며, 둘째 아들인 이경석(李景奭)이 승지로 있을 때 내전으로부터 황감(黃柑)을 특사받기도 하였다.
[이력사항]
선발인원 100명 [一等5・二等25・三等70]
전력 유학(幼學)
부모구존 영감하(永感下)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이수광(李秀光)
관직 : 충의위(忠義衛)
[안항(鴈行)]
형(兄) : 이유신(李惟信)[生]
형(兄) : 이유서(李惟恕)
[주 1]졸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을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
[출전]
『신묘년사마방목(辛卯年司馬榜目)』(성균관대학교 존경각[貴B13KB-00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