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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임금들아, 들어라. 지혜를 배워라.”
<지혜서의 말씀 6,1-11>
1 임금들아, 들어라.
그리고 깨달아라.
세상 끝까지 통치하는 자들아, 배워라.
2 많은 백성을 다스리고 수많은 민족을 자랑하는 자들아, 귀를 기울여라.
3 너희의 권력은 주님께서 주셨고 통치권은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주셨다.
그분께서 너희가 하는 일들을 점검하시고 너희의 계획들을 검열하신다.
4 너희가 그분 나라의 신하들이면서도 올바르게 다스리지 않고 법을 지키지 않으며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5 그분께서는 지체 없이 무서운 모습으로 너희에게 들이닥치실 것이다.
정녕 높은 자리에 있는 자들은 엄격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6 미천한 이들은 자비로 용서를 받지만 권력자들은 엄하게 재판을 받을 것이다.
7 만물의 주님께서는 누구 앞에서도 움츠러들지 않으시고 누가 위대하다고 하여 어려워하지도 않으신다.
작거나 크거나 다 그분께서 만드셨고 모두 똑같이 생각해 주신다.
8 그러나 세력가들은 엄정하게 심리하신다.
9 그러니 군주들아,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을 듣고 지혜를 배워 탈선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10 거룩한 것을 거룩하게 지키는 이들은 거룩한 사람이 되고 거룩한 것을 익힌 이들은 변호를 받을 것이다.
11 그러므로 너희가 나의 말을 갈망하고 갈구하면 가르침을 얻을 것이다.
✠ 복음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17,11-19>
1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12 그분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는데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13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14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15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16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18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19 이어서 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오늘 복음에서 나병을 치유 받은 열 사람 중에서 한 사람만이 예수님께 돌아와 하느님을 찬양하며 감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루카 17,18)
만약 오늘 우리가 감사하지 않은 채 살고 있다면 우리는 그 아홉 중에 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감사하지 못하고 있다면, 대체 무엇 때문일까?
이 질문은 가장 분명한 영적인 선택 하나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자비를 신뢰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선택하는 일입니다.
묘하게도 사람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실상은 믿지 않기 일쑤입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여기는 마음속에서 그 실상이 드러납니다.
그것은 감사하지도 기뻐하지도 못하고, 자비를 입었음에도 여전히 무엇인가를 채우고자 안달하거나 불평하고 원망하는 모습에서 드러납니다.
마치 아버지께서 베푸는 잔치에 들어가지 않고 문밖에 서 있는 큰아들과 같습니다.
그래서 나병을 치유 받았으면서도, 하느님을 찬양하지도 감사를 드리지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와 감사드린 사마리아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루카 17,19)
그렇습니다.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이 하느님께 대한 찬양과 감사를 불러온 것입니다. 그러니 나병의 치유가 구원인 것이 아니라 그 치유가 하느님의 사랑임을 믿는 것이 구원인 것입니다.
이러한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은 감사를 불러옵니다.
그러기에 지금 감사하며 기쁘게 살고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을 드러냅니다.
결국 그가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지 아닌지는 ‘그가 감사와 가쁨의 삶을 살고 있는지, 아닌지’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아침 식사 때 빵에 발라먹는 꿀 한 숟가락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꿀 한 숟가락, 이를 위해 하느님은 몇 천 마리의 벌을 몇 천 시간 동안 날아다니게 하셨습니다.
그분은 몇 천 가지 꽃들을 피게 하셨고 태양을 비추셨습니다.
비가 오면 벌들이 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하느님께서 지구를 약간 기울어지게 만드셨음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해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고, 그래서 우리는 해마다 발육과 성숙을 체험하고 죽음과 소멸도 체험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영원히 같은 계절만 있었을 것입니다.
또 밥상의 반찬을 두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음식들이 바로 나를 위해 목숨 바치고 있음을!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목숨이 나를 위해 몸 바쳤는지!
닭은 나를 위해 몇 마리 쯤 목숨을 바쳤을까요?
또 몇 마리의 소가, 몇 마리의 멸치가 나를 위해 목숨을 바쳤을까요?
이처럼 감사하는 일은 이 세상에 당연한 것이란 아무 것도 없음을 의식하면서, 모든 삶을 지속시켜주고 있는 많은 기적을 주의 깊게 바라보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의 신비를 들여다보는 일입니다.
모든 것 안에서 기적을 일으키고 계시는 그분을 보는 눈!
신비를 바라보는 눈!
우리 안에서 살아계시며 활동하시는 그분을 볼 줄 아는 눈이야말로, 바로 감사의 눈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되새겨 봅니다.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에페 5,20)
아멘.
- 오늘 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루카 17,16)
주님!
감사하게 하소서!
청하기도 전에 듣고 계시는 당신께 감사하게 하소서.
베풀어지기도 전에 이미 품으신 당신의 사랑에 감사하게 하소서.
치유보다 치유시키는 당신의 사랑에 감사하게 하소서.
모든 것 안에 깃든 당신의 자비와 사랑에 감사하게 하소서!
무감각하지 않게 하소서.
치유를 받고도 감사할 줄을 모르는 배은망덕은 말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토 수도회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청하는 것은 다 들어주신다는 믿음만으로는 부족하다>
오늘 복음은 ‘감사’의 중요성에 관한 내용입니다.
나병 환자 열 사람이 예수님께 치유를 받았지만,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린 사람은 사마리아사람 한 명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께 감사하지 못해서 ‘믿음’이 없음이 증명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완전히 믿음이 없었던 사람들일까요?
그들도 예수님으로부터 치유를 청할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런 믿음이 있었는데도 예수님은 오직 감사하는 사마리아사람에게만 믿음이 있다고 하시고 구원에 다다랐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믿음도 단계가 있음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부터 열역학 법칙에 따라 우리 믿음도 측정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열역학 법칙은 0부터 3 법칙까지 4단계로 되어 있습니다.
열역학 제0 법칙은 에너지는 많은 쪽에서 적은 쪽으로 이동한다는 법칙입니다.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이 있을 때 뜨거운 물은 저절로 차가운 물에 열을 빼앗깁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첫 번째 단계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언가 주실 수 있기에 청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기적을 본인 의지가 아니라 빼앗기실 수밖에 없으셨던 것일까요?
어쩔 수 없습니다.
당신이 만드신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열두 해 동안 하혈병을 앓던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었는데 피가 멈추었습니다.
에너지를 회복했던 것입니다.
부모는 어쩔 수 없이 자녀에게 살과 피를 내어줄 수밖에 없습니다.
창조하였기 때문입니다.
아홉 명의 나병 환자들의 믿음은 여기까지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열역학 제1 법칙으로 넘어가야 합니다.
열역학 제1 법칙은 에너지를 누군가 얻었다면 누군가는 빼앗겼다는 뜻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성장시키기 위해 고생하듯, 하느님도 고생하십니다.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에너지는 곧 당신의 살과 피입니다.
만약 아홉 명의 나병 환자들이 자신들을 치유해 준 은총이 곧 예수님께서 나병에 걸리시는 것임을 알았다면 그분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나병을 치유해주시기 위해 주시는 성체가 곧 그분의 죽음임을 안다면 우리가 어떻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열역학 제1 법칙, 곧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고쳐주시기 위해 지셔야 했던 십자가의 무게는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사람이 오늘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님께 감사드릴 줄 알았기에 그분의 십자가를 이해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위 단계도 있습니다.
바로 열역학 제2 법칙입니다.
이 법칙은 아무리 은총과 에너지를 받았어도 시간이 지나면 계속 빠져나간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처럼 이런 사람은 규칙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는 선물을 받기 위해 다가옵니다.
규칙적인 기도를 한다는 뜻입니다.
규칙적으로 기도하고 규칙적으로 주님께 감사하고 찬미합니다.
그 다음 단계도 있습니다.
열역학 제3 법칙인데 내 안에 있는 모든 에너지가 소멸하기까지 가만히 있으면 내 존재까지 사라진다는 법칙입니다.
결국 지금 나에게 존재할 수 있는 에너지를 주시는 분이 나의 창조자이시어서 그분이 아니면 나는 먼지보다 못한 존재, 아니 존재할 수 없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때 나오는 감정이 무엇일까요?
바로 찬미입니다.
나를 낮추고 그분의 전능함을 찬미하는 것이 가장 큰 믿음입니다.
‘열역학 법칙’에 대치되는 종교가 ‘저절로교’입니다.
모든 것이 저절로 생겨났고 저절로 유지된다는 믿음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는 창조자 없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 안에 하느님의 법칙이 있음을 믿었고 남들이 소홀히 여기는 작은 차이에도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행성들은 원이 아니라 타원으로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는 발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와 함께 천문학을 연구하는 한 친구는 창조자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열역학 법칙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태양계란 저절로 생성된 것이며 저절로 유지되는 것이니 누가 만든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케플러는 그 친구에게 태양계의 모형을 실제 크기의 축소비율에 맞게 만들어 아름다운 색을 칠하고 별들이 빛을 발하며 빙글빙글 돌아가도록 하여 그 친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을 본 친구는 매우 감탄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누가 이렇게 아름답게 만들었나?”
“아무도 만들지 않았네.
자기 힘으로 생겨나서 자기 힘으로 도는 것일세.”
“뭐야? 어서 말해봐.
어떻게 만든 사람이 없이 절로 만들어지고 돈단 말인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잖나?”
“이 친구야!
이렇게 작은 장난감도 만들어 움직이는 사람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어떻게 이보다 비교할 수도 없이 큰 태양계가 저절로 생겨나서 저절로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무신론자 친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믿음은 저절로교에서 벗어나 열역학 법칙을 믿는 것으로 증가합니다.
열역학 법칙은 한 마디로 ‘저절로 존재하는 것도 없고 저절로 움직이는 것도 없다.’입니다.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열역학 법칙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에너지와 존재를 내어줄 존재를 찾습니다.
아기들은 열역학 법칙을 믿습니다.
그래서 부모를 찾아서 에너지와 존재를 부여받습니다.
그렇게 부모에게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감사했다면 열역학 법칙을 이해했다는 뜻입니다.
열역학 법칙을 이해하면 기도의 법칙도 이해합니다.
기도하면 에너지가 들어오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고, 기도하지 않는 자는 소멸한다는 것이며, 기도로 주시는 그분의 에너지는 곧 그분의 십자가를 통해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하지 않을 수 없고,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열역학 법칙을 먼저 믿게 되면 믿음은 저절로 성장하게 되고 감사와 찬미도 저절로 나오게 됩니다.
이 모습을 보인 대표적 인물이 ‘다윗’입니다.
다윗은 주님의 계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실 때 벌거벗고 춤을 추며 찬미하였습니다.
계약궤를 모시는 것은 자신의 머리가 되실 주님을 자신 안에 모시는 성찬례와 같습니다.
이때 자기를 버리고 낮출수록 찬미가 솟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낮추는 것을 비웃던 아내 미칼에게 “나는 이보다 더 자신을 낮추고, 내가 보기에도 천하게 될 것이오.”라고 말합니다. (2사무 6,22)
미칼은 자신을 낮추고 주님을 찬미하는 다윗을 비웃었기에 더는 아기를 낳지 못하는 저주를 받습니다.
주님 앞에 우리가 근엄하게 앉아있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이 아니면 먼지보다도 못한 나를 존재하게 해 주시고 자아에 지배받지 않도록 나를 구원해 주신 주님이기에 지금 이 순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얻어내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기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만이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을 만나라>
바오로 사도는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하고 말합니다. (1테살 5,16-18)
그러나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보입니다.
차고 넘칠 때는 물론 부족함을 느끼는 가운데에서도 감사한다는 것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닙니다.
잘되면 자기가 잘했기 때문이고, 잘못되면 탓을 다른 사람이나 하느님께 돌리고 원망하기도 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것에 대해 서운함이 앞섭니다.
그 처지가 어떠하든 감사하면 또 감사할 수 있는 은혜가 주어지는데 그 순간을 참지 못하고 또 은혜를 입고도 전혀 아닌 양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땅히 받을 것을 받았다고, 아니 더 받아야 하는 데 받지 못했다고 불평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던 중에 열 명의 나병환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나병환자는 부정 탄 사람들로 낙인 찍혀 멀리 동네 밖에 쫓겨나 살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예수님을 부르며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하고 외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고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습니다.
주님께서 하라는 대로 했더니 병이 나았습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졌는데 한 사람만이, 그것도 유다인이 아닌 사마리아 사람이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 사람은 참으로 성숙한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육신뿐 아니라 영혼까지 건강해진 것입니다.
그는 육신의 건강을 되찾았고 성화되기까지 했습니다.
은총 자체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은총을 베푸시는 분에게까지 이른 것입니다.
아마도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선물을 그들이 당연히 받아야 할 몫이라고 여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선택 받은 사람이 누려야 할 혜택을 누린 것뿐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보다 자기의 노력으로 이루어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은혜를 입은 것에 감사하기보다는 자기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먼저 사제를 찾아가 병이 나았다는 것을 확인 받는 일에 급급하게 행동한 모습입니다.
당시 상황은 나병이 나았다는 사실을 사제가 확인해 주어야 외부와 차단된 상태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구원의 혜택은 이방인, 죄인에게도 열려 있고, 한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은총과 그 사람 자신의 믿음과 협력이 중요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이스라엘의 자녀들 가운데 들지 않는 이방인이었고, 자기가 하느님께 어떤 것을 내세운다는 것은 감히 생각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비를 간구했고 결국 얻었으며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몸의 치유를 통해 하느님을 만났다는 것은 더없이 큰 기쁨입니다.
그러나 아홉은 어디로 갔습니까?
그들은 그야말로 화장실 들어갈 때 마음과 나올 때의 마음이 달랐습니다.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하여 큰 은총을 입었음에도 하느님을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은혜를 받은 것에 머물렀습니다.
몸의 치유를 통하여 은혜 주시는 분을 만났어야 하는데 은총의 열매에 매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그러한 은혜를 베풀어 주실 수 있는 분, 능력의 하느님을 만나야 합니다.
“몸이 깨끗해진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이 깨끗해진 몸으로 하느님께 돌아온 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습니다.
몸은 아무리 깨끗해도 때가 되면 흙으로 돌아가 썩는 것이 몸입니다.
사람의 몸의 가치는 그것을 통해 하느님께로 갈 수 있는 데 있습니다.”
(이현주)
받은 은혜를 돌판에 새길 수 있는 성숙한 믿음의 소유자 되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은 나의 힘, 나의 방패, 내 마음 그분께 의지하여 도움을 받았으니 내 마음 기뻐 뛰놀며 나의 노래로 그분을 찬송하리라.”
(시편 28,7)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여기 저기 숨겨져 있는 수많은 감사꺼리들을 찾아냅시다>
나병으로부터 치유 받은 열 명 가운데 유일하게 감사 인사를 하러 온 이방인의 모습을 묵상하면서, 감사 기도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세탁물이 산더미인데 세탁기가 자주 고장이 나서 한동안 무척 성가셨습니다.
출장 서비스를 신청했더니 기사님 왈, 15년 됐으니 수명이 다 됐답니다.
마침 창고를 정리하다가 큼지막한 구식 통돌이 세탁기를 발굴해서 설치했더니...세상에 시원시원 너무나 잘 돌아가는 것입니다.
화창한 날,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옥상에서 담요들을 널고 있자니 제 입에서는 감사기도가 저절로 터져 나왔습니다.
별로 없을 것 같지만 우리 삶의 주변을 찬찬히 살펴보면 여기저기 얼마나 많은 감사기도꺼리가 숨겨져 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도 감사기도를 바치신 흔적을 복음서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마태오 복음 12장 25절)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요한 복음 6장 11절)
갈 곳 없는 소녀들을 수녀님들께서 친딸처럼 양육하는 청소년보호시설 개원 기념 미사 때의 일입니다.
영성체 후에 초등학교에 다니는 막내가 '우리 집에 살면서 감사할꺼리 37가지'라는 묵상글을 낭독했는데, 듣고 있는 내내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감사기도보다는 청원기도에 혈안이 되어 있는 제가 부끄러웠습니다.
감사보다는 불평불만이 앞서던 제가 비참해보였습니다.
우리들의 기도생활 안에서 감사기도가 더 확장되면 좋겠습니다.
눈을 크게 뜨면 더 많은 감사꺼리들을 찾아낼 수 있을 듯합니다.
육의 눈도 크게 뜨지만 영안(靈眼), 심안(心眼)을 크게 뜨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노년에 다다른 루르드의 벨라뎃다 수녀님께서 한번은 자신의 일생을 총정리하며 감사기도를 바치셨는데, 진정한 의미가 감사기도가 어떤 것인지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제게 발현하심에도 감사드리지만, 발현하지 않으심에도, 주님께 감사 드립니다.
기억력이 나빠 아무리 노력해도 암기할 수 없었던 제 무지와 어리석음에도, 주님께 감사 드립니다.
원장수녀님이 저를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라고 말씀하신 것, 갖은 폭언과 차별, 굴욕의 방 처벌에 대해서도 주님께 감사 드립니다.
세상 사람들이 저를 보고 '이 여자가 정녕 그 벨라뎃다인가?' 라고 말할 정도로 보잘 것 없는 저라는 것과, 마치 희귀한 동물 대하듯 바라본 것에 대해 주님께 감사 드립니다.
주님께서 제 눈앞에 나타나실 때도 감사드리지만, 나타나지 않으실 때도 감사 드립니다.
언제 어디서나 주님께서 현존하심에 감사 드립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는 어떠합니까?
우리는 주로 우리에게 주어진 은총이나 축복에 감사합니다.
건강과 성공에 감사합니다.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감사기도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감사기도는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극심한 고통이 다가올 때는, 주님의 수난에 깊이 참여하게 되었음에 감사해야겠습니다.
깊은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을 때는, 더 이상 내려갈 곳 없는 바닥까지 내려온 것에 대해, 이제 남은 것은 바닥을 딛고 올라가는 것뿐임에 감사해야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찬양과 감사 - 구원의 행복은 선택이요 선물이다>
“아침바다 갈매기는 금빛을 싣고, 고기잡이 배들은 노래를 싣고,
희망에 찬 아침바다 노저어 가요, 희망에 찬 아침바다 노저어 가요.
저녁바다 갈매기는 행복을 싣고, 고기잡이 배들은 고기를 싣고,
넓고넓은 바다를 노저어 와요, 넓고 넓은 바다를 노저어 와요.”
어제 하루 행복한 하루를 선택해 피정을 한 코이노니아 자매회 자매들이 처음 강의에 앞서, 또 떠날 때 끝으로 부른 ‘바다’란 옛 동요입니다.
이렇게 좋은 동요인지는 예전엔 미쳐 몰랐습니다.
희망찬 시작과 행복한 끝의 인생을 상징한 구원의 노래입니다.
새삼 구원의 행복은 선택이자 선물임을 깨닫게 됩니다.
새벽에 일어나 카톡을 확인해 보니 45년 전 거의 반세기 전 신림초등학교 6학년 때 제자들로부터 뜻밖의 메시지와 선물로 보낸 쌀 여러 포대 사진이 첨부되어 도착되어 있었습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철없던 6학년에 처음 뵈었을 때 선생님 연세보다 두배를 더 먹은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저희는 6학년입니다.
자주 찾아 뵙지는 못해도 뵐 때마다 감동해 주시는 선생님 덕에 저희 맘도 따뜻합니다.
선생님이 계셔서 얼마나 든든한지 모릅니다.
해마다 선생님께 저희 6반 친구들의 정성된 마음 전달해 드릴 수 있어 기쁩니다.
무엇보다 항상 건강하시길 기도드립니다.
- 6학년6반 제자일동; 김대현, 김광철, 이원재, 김옥현, 홍희기, 배준석, 박건우, 정찬석, 김종호, 이동환, 김성호, 이진”
선생님, 신부님, 수사님 세 호칭으로 불리는 행복한 존재인 제가 참 감사했습니다.
선생님답게, 신부님답게, 수사님답게 살아야 하겠다는 각오를 새로이 하게 됩니다.
참 고맙고 반가운 선물입니다.
눈만 열리면 곳곳에 널린 감사의 선물들입니다.
오늘은 참 자랑스러운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입니다.
자랑하기로 하면 끝없이 자랑해도 부족한 처음으로 큰 대(大)자가 붙는 무려 1600년 전 교황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히 빛을 발하는 지금도 함께 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교황입니다.
야만의 외적들 침입으로 참 어려웠던 격동기의 로마를 구했던 다방면의 천재였던 하느님 보내 주신 최고의 선물같은 교황이었습니다.
교황에 대한 업적을 간략히 소개합니다.
“대 레오 교황에 대한 평가는 위대한 행정가, 외교가, 전략가, 신앙의 보존자, 고대 교회의 초석을 놓은자로 요약된다.
서로마 제국의 정치적 사회적 불안과 교회 역시 여러 이단 사상들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상황에서 신학적, 사목적, 정치적 난제들을 훌륭하게 해결해 냈던 그는 대내적으로 로마 교회의 최고 통치권 기반을 확립한 수장이었으며, 대외적으로도 사실상 로마의 수호자가 되었던, 당시 서방 교회 안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우리 교회에 보내 주신 참 좋은 하느님의 선물인 성 대 레오 교황입니다.
얼마 전 세 위대한 근래의 교황 세 분에 대한 소통의 스타일에 대한 비교도 공감이 갔습니다.
이 세 분 교황들 또한 참 좋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소통의 거인(a giant of communciation)’으로 병으로 인한 고통과 약함 중에도 침묵의 시간을 통해서 소통의 빛을 발했던 교황이었다.
베네딕도 16세 교황은 ‘말씀과 저술의 사람(a man of words and writing)’이다. 압축된 태도 안에서, 또 말과 생각에서 명석하고 질서 잡힌 방식으로 그의 사상과 영성을 표현했던 ’문화의 사람(a man of culture)’이기도 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친밀함의 사람(a man of proximity)’이다.
그의 소통의 힘은 사람들에 대한 가까운 접근에서 표현되는 분명하고 짧은 말과 태도 안에서 잘 드러난다.”
참 자랑스런 하느님의 선물인 세 분의 교황들입니다.
하느님은 이처럼 좋으신 분입니다.
오늘 제1독서 지혜서는 특히 지도자들에게 ‘지혜를 찾아라’ 강조합니다.
어찌 지도자들뿐이겠습니까!
하느님은 누구나 지혜를 찾는 자에게, 지혜를 선택하는 자에게 지혜를 선물하십니다.
하느님은 ‘들어라’, ‘깨달아라’, ‘배워라’, ‘귀를 기울여라’ 부단히 선택의 노력을 촉구하십니다.
“만물의 주님께서는 누구 앞에서도 움츠러들지 않으시고 누구 위대하다고 하여 어려워하지도 않으신다.
작거나 크거나 다 그분께서 만드셨고, 모두 똑같이 생각해 주신다.
거룩한 것을 거룩하게 지키는 이들은 거룩한 사람이 된다.
그러므로 너희가 나의 말을 갈망하고 갈구하면 가르침을 얻을 것이다.”
바로 이런 대자대비, 공평무사한 하느님을 믿고 선택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치유받은 열명의 나병환자 중 찬양과 감사로 응답해 전인적 치유의 구원을 받은 바로 한 사람, 사마리아 사람이 참 좋은 본보기입니다.
하느님은 절대로 차별하지 않습니다.
기득권도 소용없습니다.
찬양과 감사를 선택하여 응답함으로 온전한 치유의 구원을 받은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찬양과 감사로 응답하지 못한 유대인 나병환자 아홉은 영혼 아닌 육신의 치유라는 반쪽의 구원뿐임을 깨닫습니다.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오지 않았단 말이냐”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오늘 복음입니다.
부활의 기쁨, 파스카의 구원 기쁨을 가득 안고 귀가하는 영육이 온전히 치유 받은 나병환자 사마리아인입니다.
지혜도 믿음도 찬양과 감사도 치유의 구원도 선택이자 동시에 하느님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역시 진인사대천명이 답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지성의 선택에 감천의 선물입니다.
찬양과 감사로 표현되는 우리의 믿음은 그대로 하느님께 영광이 되고 우리에게는 치유의 구원이 됩니다.
더불어 감사 10계명을 소개합니다.
1. 생각이 감사다. 깊은 생각이 감사를 불러 일으킨다.
2. 작은 것부터 감사하라.
3. 자신에게 감사하라.
4. 일상을 감사하라.
5. 문제를 감사하라. 문제에는 항상 해결책이 있게 마련이다.
6. 더불어 감사하라. 함께 감사하면 은총의 결실도 풍성하다.
7.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라.
8. 잠들기 전에 감사하라.
9. 감사의 능력을 믿고 감사하라.
10. 모든 것에 감사하라. 우리 삶에서 은혜와 감사가 아닌 것은 한 가지도 없다.
새삼 희망과 더불어 감사는 최고의 명약(名藥)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께 희망을 두고 감사하는 우리 모두에게 전인적 치유의 구원을 베풀어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루카 17,19)
아멘.
- 성 베네딕토회 성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모든 일에 감사합시다>
오늘 미사의 말씀은 감사하는 이에게 주어지는 축복을 들려 주십니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루카 17,12)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실 때 한센병을 앓는 이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자비를 청합니다.
"멀찍이"라는 표현에 당시 사회가 그들에게 가졌던 편견과, 그들 스스로 느꼈던 두려움이 동시에 느껴져 참 마음이 아픕니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루카 17,14)
예수님은 치유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으십니다.
멀찍이 거리를 두고 서 있는 그들을 존중해서 무작정 다가가지도 않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은 어쩌면 결과론적인 것입니다.
율법에 따라 악성 피부병을 앓는 이들의 발병 여부나 회복에 대해 확인을 해 주는 이가 사제였으니까요.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루카 17,14)
치유의 기적은 그들이 예수님 말씀에 순종해 걸어가는 동안에 일어납니다.
그저 믿고 걸어가다 보니 어느새 나은 겁니다.
어떤 결정적 순간이 아니라 믿고 가는 동안...
우리 삶에서 벌어지는 많은 기적들도 이렇게 찾아올지 모릅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루카 17,19)
몸에 정화의 치유가 일어난 걸 알고 예수님께 되돌아와 감사를 드린 단 한 사람,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몸이 달라졌다는 걸 깨달은 순간, '사제에게 가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했을 것이고, 그 말씀이 이 모든 놀라운 기적의 열쇠라는 걸 직감했지요.
그는 가던 길을 멈추고 되돌아와 예수님 발 앞에 엎드립니다.
그는 사제의 완치 판정이나 가족과의 재회보다 더 중요한 게 무엇인지 아는 이였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다른 아홉은 육신의 치유를 받았고, 이 사마리아 사람은 육신적 치유에 영혼의 구원까지 얻습니다.
그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 바로 "감사"입니다.
제1독서에서 지혜서 저자는 세상의 권력자와 통치자에게 지혜를 배우라고 촉구합니다.
"작거나 크거나 다 그분께서 만드셨고, 모두 똑같이 생각해 주신다."
(지혜 6,7)
통치자, 힘 없는 이들 할 것 없이 누구나 지혜를 추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권력을 가진 이들을 콕 짚어 더 엄중하게 지혜를 요구하시는 이유가 있겠지요.
사실 모든 이가 하느님 앞에 한낱 작고 보잘것없는 피조물이지만, 하느님은 일부에게 더 많은 재능과 재물과 권력을 허락하시고 그에 맞갖는 자질과 덕행을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높은 자리, 중요한 역할을 부여받을수록 주제 파악이 필요합니다.
본래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단지 하느님께서 뭔가 세상에서 좋은 일을 하라고 잠시 힘을 맡기셨다는 것을 자각할 때 감사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감사는 자신을 알고 타인을 알며 하느님을 아는 이의 덕행입니다.
그렇게 감사할 줄 아는 권력자는 세상을, 타인을, 가난한 이를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너희가 나의 말을 갈망하고 갈구하면, 가르침을 얻을 것이다."
(지혜 6,11)
권력자나 통치자가 끝내 얻어야 할 것은 힘이나 명성, 재물, 이권이 아니라 감사할 줄 아는 지혜입니다.
하느님과 함께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지만 그분이 떠나시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 버리는 인간 실존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모상인 우리가 기껏해야 짧게 지나가 버릴 이 풍진 지상 삶에서 도토리 키재기가 목표여서는 안 되니까요.
지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영이며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지혜를 갈망하고 갈구하는 이는 지혜를 찾아 얻고 지상의 삶과 영원한 생명을 관통하는 가르침을 받아 얻을 것입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여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너희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이다.”
(복음 환호송)
어떤 처지에서도 감사할 줄 아는 지혜를 구합니다.
인생이라는 망망대해에서 희로애락의 파도에 출렁이고 생로병사의 풍랑에 뒤집어지면서도,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최선을 다하고 계심을 믿고 감사드리고 있다면 지혜의 길 안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지금 몸과 마음이 힘들고 처한 상황이 어렵다 해도, 눈을 더욱 크게 뜨고 감사할 일들을 꼽아내어 주님 앞에 엎드리시길 기원합니다.
우리 주님은 자비를 청하고 감사를 되돌려 드리는 이들을 결코 그냥 보내지 않으시니, 벗님에게도 치유와 구원이 반드시 함께 일어나리라 믿습니다.
그러니 힘내십시오.
은총과 자비의 주님께서 벗님과 함께 하시길 두손 모아 기도합니다.
- 작은형제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사랑도 아니고 구원도 아닌 치유>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사랑도 아니고 구원도 아닌 치유. 이것이 오늘 복음을 읽으며 제가 느낀 것입니다.
달리 얘기하면 사랑은 받아도 구원은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병을 고쳐줬는데 병만 치유받지 사랑은 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치유가 사랑이고 사랑이 구원인데, 사랑도 구원도 발생하지 않고 하느님도 발생치 않은 것이 오늘 아홉 나환자의 불행이고, 우리도 이 아홉과 같다면 같은 뜻에서 불행합니다.
우선 치유만 받고 사랑은 받지 못하는 경우를 보겠습니다.
치유만 받고 사랑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한 마디로 치유를 사랑이라고 생각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치유가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입니까?
그것은 치유가 사랑이 아니라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의사가 환자의 병을 치유해주는 것은 의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요 의무이지 사랑이 아니지요.
같은 식으로 어머니의 밥이 사랑이 아닐 수 있습니다.
어머니는 사랑으로, 지극 정성으로 밥을 지어 자식에게 먹이는데, 자식은 그것을 부엌데기 엄마의 당연한 일,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사랑이 발생치 않습니다.
다음으로 사랑을 받아도 구원이 발생치 않고 하느님이 발생치 않는 경우를 보겠습니다.
이 경우는 믿음이 없고, 믿음의 눈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릇 모든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만 하느님의 사랑이 아니고, 엄마의 사랑도 하느님의 사랑이고, 친구의 사랑도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엄마의 사랑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보는 것을 자주 실패합니다.
우리는 친구의 사랑에서 친구와 친구의 사랑만 봅니다.
연인끼리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그런데 풋사랑일 경우, 다시 말해서 사랑이 초보일 경우 다 그렇습니다.
서로를 볼뿐 같이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 서로를 볼뿐 하느님 안에서 상대를 보지 못합니다.
가끔 우리 형제를 영적 동반하면서 이성 문제를 안고 있는 형제를 만납니다.
그때 저는 그 자매와의 사랑을 그만 두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기보다는 그 자매가 바로 하느님의 자녀이니 그 자매를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사랑하라고 충고하고, 그럴 때 자매의 사랑은 하느님 사랑의 현현이고 현재가 될 거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형제가 저의 충고대로 할 경우 자매와의 사랑은 하느님과의 사랑에 오히려 도움이 되고 심지어 이웃과의 사랑에도 도움이 됩니다.
그때까지의 사랑이 관념적이고 메마른 사랑이었음을 이 사랑이 깨닫게 하고,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촉촉한 사랑을 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이웃 사랑들을 보고, 하느님의 사랑들인 이웃 사랑들에 대해서 감사하는 하루가 되어야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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