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 / 하린 (시인)
3. 상상 테마2 - 병적 현상을 바탕으로 상상하며 시 쓰기
@ 소재나 모티브가 갖는 특징과 상상 적용 방법
인간의 삶에서 생로병사는 살아가는 내내 시작과 과정과 끝에 개입한다. 그중에서 병적 현상은 과거와 다르게 현대인들에게 다양한 형태와 속성으로 밀착되어 끊임없이 우리와 대화를 시도하거나 길들이거나 싸움을 걸어온다. 두려움, 자학, 자살, 유폐, 병사, 괴로움, 이별과 같은 단어를 부추기면서 인간과 한 몸이 되려고 접근한다. 이런 병적 현상과 관련된 모티브는 시에서 매우 많이 쓰이는 제재 중의 하나다. 그중에서도 단순히 육체적 고통이 아닌 정신적 고통과 심리적 폐허를 동반한 병이나 현상은 존재론적인 의미나 정서적인 무늬를 표출하는 데 유용하다.
그럴 때 이 병적 현상을 단순화시키지 않고 다각적으로 발상의 전환을 통해서 바라보는 태도가 중요하다. 단순히 병이 급성이 아니라 그리움이나 고독 등이 급성이 되어야 하고, 화자를 전염시킨 것이 바이러스가 아니라 어둠이거나 음악이거나 변방이거나 월요일이거나 3월이거나 황무지 같은 것이어야 한다. 원래 그 대상이나 현상이 하는 일을 그대로 심각하게 다루는 일은 진지함만을 던져줄 뿐임으로 피해야 한다. 사람이나 의자가 고독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니 예상치 못한 존재의 고독을 떠올려야 한다. 그와 같이 사람이 병이나 이별로 인해 치명상을 입는 것은 당연하다. 무조건 다른 것으로 인해 치명상을 경험해야 한다. 치명을 입히는 것이 첫 번째 문장이면 어떨까? 상징이면 어떨까? 생일이면 어떨까? 10층이면 어떨까? 오렌지나 토마토면 어떨까? 다양하게 접근하고 고민해야 한다. 절대 현상을 단순화시키지 말고 무조건 발상의 전환을 통해 신선함을 확보한 다음 시적으로 다가오도록 자연스럽게 상상적 체험을 하고 객관적 상관물을 세심하게 관찰한 후 내밀하게 사유해야 한다.
필자의 시를 통해 그 소재가 어떻게 상상과 만나 펼쳐지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자.
포비아(Phobia) / 하린
지구 반대편 마을에 부슬비가 내려 지금 막 내 귀가 간질거렸던 거야 나의 건조한 목소리를 다른 계절 속 먹구름들이 듣고 있었던 거야 무책임한 상상으로부터 소름이 돋아 올지도 몰라 아무도 나를 의식하지 않을 땐 신경질적으로 긁어줘야 해 밖이 두렵지 않은 척하면서 너머를 해석하는 버릇을 사랑해 줘야 해 의사는 항상 내게 입김을 불어 주었지 괜찮아요 조금만 용기를 내봐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서 일찍 손가락장갑을 끼어요
그래서 난 마지막까지 긁는 사람으로 남을 거야 성분이 눈물로만 된 물집을 수십 개 갖는다 해도, 지독한 간지러움이 위악을 동반한다 해도 납득 못하는 당신들을 위해 내 몸속 벌레들을 모두 쏟아내고 말 거야 수백 번 손톱을 속이는 건 쉬운 일이야 가려운 건 타인들이 보낸 신호일 뿐이라고 피가 묻은 손톱에게 속삭이면 돼
그럴 리는 없겠지만 누군가 당신은 동굴입니까? 광장입니까? 묻는다면 난 대답을 거부할 거야 내 몸속 시커먼 광장을 질문자는 모를 테니까 광장 속에서 내 기억을 먹고 사는 박쥐들을 발설하긴 싫으니까 불을 켜는 순간 후드득 떨어져 죽고 말 낯섦을 들키긴 싫으니까 병균이 득실거리는 태양에게 저주를 보내고 싶어 나를 한 번도 떠난 적 없는 위생적인 어둠에게 내내 복종하고 싶어 ― 『1초 동안의 긴 고백』, 문학수첩, 2019.
1단계 - 스스로 점검하기 – 메시지 분명히 하기 + 내 시만의 장점 찾기
포비아는 병적인 공포를 말한다. 지나치게 예민한 상태로 공포를 느끼면서 거기에 반응하는 것이 포비아다. 그래서 필자는 포비아의 속성 중에서 ‘지나치게 예민한 상태’를 끌어와서 시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포비아(Phobia)를 통해서 전달하고자 하는 시적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화자는 단순히 외부 병균에 대한 공포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다. 몸속 ‘광장 속에서’ 화자의 “기억을 먹고 사는 박쥐들”과 “불을 켜는 순간 흐드득 떨어져 죽고 말 낯섦”에서도 암시되듯이 그것은 지극히 사적인 트라우마에 대한 공포다.
필자는 이 시를 쓸 때 이런 고민을 했다. 트라우마를 암시하는 “위생적인 어둠”의 사연(근원)을 추가로 표현을 할까, 아니면 그런 뉘앙스만 남기고 시를 마무리할까. 필자는 후자 쪽을 택했다. 그러나 이 시에 대한 독자들의 평가나 리뷰는 거의 없었다. 전자 쪽을 택해 시를 썼어야 했던 것이다. 근원을 암시하는 표현을 조금이라도 추가했더라면 공감과 실감의 폭이 넓어졌을 것이다.
필자의 시처럼 분위기나 뉘앙스까지만 담은 시도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독자들은 그것의 근원까지 암시해주길 바라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분위기나 뉘앙스에 그치지 말고 원인이나 근원을 암시하는 데까지 나아가면 좋겠다.
「포비아(Phobia)가 갖는 장점은 시적 발상이다. 단순히 바이러스나 병균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몸속 넓은 광장에 갇힌 ‘벌레’나 ‘박쥐’, ‘어둠’이 상징적인 공포로 등장해 화자를 긴장시키면서 괴롭히고 있기 때문이다.
2단계 - 객관적 상관물(형상) 찾기 + 관찰과 조사 정밀하게 하기
이 시의 객관적 상관 현상은 당연히 포비아이다. 포비아적인 공포증은 2020년~2021년 내내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19’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초창기에 우리는 조심스러움을 넘어 지나치게 예민한 공포심을 가지게 되었다. 스스로 격리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심리 상태를 반영해 시적인 ‘어둠’을 예민하게 감지하는 상관물로 필자는 포비아 현상을 택했던 것이다.
예민한 공포심을 나타내는 포비아 현상에 대해 조사를 했다. 그래서 “차단한다, 예민하다, 두려워한다, 신정질적으로 피가 나도록 긁는다, 지나치게 위생에 신경 쓴다, 타인과 만나는 것마저 꺼린다”와 같은 단어나 이미지를 메모했다.
3단계 - 확장하기 – 상상적 체험을 섬세하게 극적으로 하기
토라우마에 대해 상상적 체험을 극단까지 끌고 가려고 했다. 너무나 예민하다 보니까 ‘나비효과’처럼 “지구 반대편 마을에 부슬비가 내려 지금 막 내 귀가 간질거렸던 거야”라는 반응을 보일 거라는 상상을 했다. 포비아 생활이 오래되었다면 자기 자신이 독특하게 품은 그 ‘무언가’가 ‘광장’과 ‘어둠’ ‘박쥐’ ‘벌레’ 들일 수 있다는 추론적 상상도 했다. 그리고 극도로 예민한 반응을 가진 화자라면 분명 모든 것을 차단하고 싶어서 태양마저 “병균이 득실거리는” 존재로 인식할 거라는 예상도 했다.
* 또 다른 예문
마스크 / 서안나
얼굴은 실행하는 것이다 나의 세상은 눈동자만 남았지
턱을 지우고 코와 입술과 뺨을 지우면 마스크
내가 확장 돼 마스크를 쓰면 세상의 상처가 다 보여
마스크는 나의 의지 모두 아픈데 모두 웃었어 의사가 말했지 실패가 가장 완벽한 치료법이라고
실패한 웃음을 마스크 속에서 숨겨둘게 외부를 번역하면 바이러스 맛이 나
마스크 속에 내가 되고 싶은 내가 있어 미소가 부딪혀 당신이 버린 얼굴이 부딪혀
마스크는 나에게 집중하는 표정의 기술
나는 표정이 많아 나는 출구가 많아 - 《문파》 2020년 봄호
시멘트 중독자 / 이영숙
사람들은 왜 자다가 깨어 냉장고 문을 연 채로 서서 물을 마시지? 팔꿈치 관절이 굳어가는 마네킹이나 꿈을 꾸다 제소리에 놀라 깨어난 봉제 인형처럼
가령, 날아가며 똥을 날리는 새들이나 추억을 되새기는 사람의 표정으로 건초를 되새김질하는 소 콘크리트죽을 섞으면서 달리는 레미콘은 스무드하게 현재를 수행한다 접시를 씻거나 마우스를 부리는 일로 회전근개파열 따위 욱신거려 돌아눕지 못할 때
후회 없는 생이란 없지 카페인이 아니라 후회 때문에 어두운 광장을 지나 낯익은 냉장고를 찾아가는데
신호등 앞에 멈춰 서서 무료한 되새김질을 반복하던 한낮의 레미콘 훅 끼치는 건초 냄새 잡식의 새똥 냄새
재건축을 앞둔 아파트에 내걸리는 현수막이 과격한 것은 물기 다 빠져 금이 쩍쩍 간 외벽의 금단현상 때문이다 콘크리트죽을 자주 쑤는 꿈속에선 계속 물이, 물이 모자라고
지퍼가 열렸다 동굴 입구였다 습하고 서늘한 기운이 환하게 끼얹어졌다 ― 《문학저널》 2021년 여름호
협착의 헤게모니 / 장서영
뼈와 뼈 사이가 수상하다 경추의 1번과 5번이 밀착되고 요추의 3번과 4번이 뒤틀렸다 그래서 넓어진 건 통증, 다물어지지 않는 연속성 엉덩이는 의자와 협착하고 마감일은 나와 협착하는데 몸에 담긴 뼈와 말에 담긴 뼈가 서로 어긋나서 삐딱한 시선과 굴절된 자세를 도모한다 책상과 내가 분리되기까지 뼈가 중심이란 생각을 한 번도 못했는데 아는지 모르는지 키보드 소리는 경쾌하고 새겨진 문장들은 마냥 과장됐다 어긋남은 순간이었다 되돌아보면 한쪽으로 치우친 건 언제나 나였고 오로지 솔직한 건 내 안의 그녀였다 움직이는 팔을 따라 마우스 줄을 따라 고이는 불협 예민해진 신경과 굳어진 근육 사이로 아픔이 비집고 들어와 지금 여기가 버겁게 흘러내렸다 무게중심이 무기력 쪽으로 기운다 사랑도 관계도 전부 불편하다 결심만 남아 있었다는 듯, 처음부터 떠날 사람이 떠났다는 듯 연애에 관한 시는 끝내 완성을 거부했다 난 이제 누구와도 협착할 수 없는데 너 하나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절망이라는 단어가 재빨리 들러붙었다 ― ≪모던포엠≫ 2021년 5월호
- 출처 : 『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 (더푸른, 20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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