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속 국물
아내가 ‘박속 낙지탕’이 먹고 싶다 해서 따라나섰다. 오랜만의 외식이다.
“국물 맛 참 시원하이.”
그 옛날 어머니의 박속 국물 맛이었다. 아버지가 박 바가지를 만들 때면 어머니는 덜 익은 박으로 박속국(?)을 만드셨다. 밋밋하긴 하나 향긋한 맛이었다.
트롯 사랑가에도 “박속 같이 맑은 정을, 백년해로를 하자구나.”라는 가사가 있다. 아버지의 십팔번지였으나 어머니와는 박속같은 맑은 정은 아니었어도 은근한 정으로 사셨던 것 같다. 부부 30년 해로 어렵다고 늘 그리 말씀하셨는데 씨가 되었는지 아버지는 내게 역할을 넘겨주시고 일찍 떠나셨다.
엊그제 같은데 아내와는 벌써 40년이다. 아버지가 어머니와 함께 사신 것보다 10년을 더 살았다.
얼마 전인가 아내는 박속 낙지탕을 맛있게 끓여주었다. 어렴풋하나 어머니의 국물맛이었다. 아내도 친정 어머니가 해주신 고향의 맛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아내와 나는 박속국물처럼 밋밋하긴 하나 향긋한 맛, 그렇게 살아온 것 같다. 음식 맛이 우리 삶을 만들고 우리 삶이 음식 맛을 만드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요새 아파트 울타리에 덩굴장미가 하나 둘 피기 시작했다. 또 시기를 놓칠까봐 일찍 수목원을 들렀다. 장미는 봉오리만 맺었을 뿐 전혀 피지 않았다. 요새 하도 꽃들이 일찍 피어서 서둘렀더니 이 번에는 낭패다. 두어 주 후에나 가야 꽃이 필 것 같다. 그래도 올해엔 아내 덕분에 모란꽃을 놓치지 않았다.
세상엔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놓친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어머니가 만든 박속 국물, 아내가 만든 박속 국물만은 세월이 흘렀어도 놓치지 않았다. 부부간의 정이 박속국물 같은 이런 소박한 맛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아버지, 어머니가 몹시도 보고 싶다.
- 여여재,석야 신웅순의 서재.2023.5,4.
첫댓글 박속 국물이 드러나지 않는 은근한 맛이 있지요.
자주 먹을 기회는 없어도 가끔씩 생각나는 그 맛!
그게 서민들의 풍미와 어울리는 것인가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