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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지혜는 영원한 빛의 광채이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활동의 티 없는 거울이다.”
<지혜서의 말씀 7,22ㄴ―8,1>
22 지혜 안에 있는 정신은 명석하고 거룩하며 유일하고 다양하고 섬세하며 민첩하고 명료하고 청절하며 분명하고 손상될 수 없으며 선을 사랑하고 예리하며
23 자유롭고 자비롭고 인자하며 항구하고 확고하고 평온하며 전능하고 모든 것을 살핀다.
또 명석하고 깨끗하며 아주 섬세한 정신들을 모두 통찰한다.
24 지혜는 어떠한 움직임보다 재빠르고 그 순수함으로 모든 것을 통달하고 통찰한다.
25 지혜는 하느님 권능의 숨결이고 전능하신 분의 영광의 순전한 발산이어서 어떠한 오점도 그 안으로 기어들지 못한다.
26 지혜는 영원한 빛의 광채이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활동의 티 없는 거울이며 하느님 선하심의 모상이다.
27 지혜는 혼자이면서도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자신 안에 머무르면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며 대대로 거룩한 영혼들 안으로 들어가 그들을 하느님의 벗과 예언자로 만든다.
28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지혜와 함께 사는 사람만 사랑하신다.
29 지혜는 해보다 아름답고 어떠한 별자리보다 빼어나며 빛과 견주어 보아도 그보다 더 밝음을 알 수 있다.
30 밤은 빛을 밀어내지만 악은 지혜를 이겨 내지 못한다.
8,1 지혜는 세상 끝에서 끝까지 힘차게 퍼져 가며 만물을 훌륭히 통솔한다.
✠ 복음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17,20-25>
그때에
20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서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을 받으시고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21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22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날을 하루라도 보려고 갈망할 때가 오겠지만 보지 못할 것이다.
23 사람들이 너희에게 ‘보라, 저기에 계시다.’, 또는 ‘보라, 여기에 계시다.’ 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나서지도 말고 따라가지도 마라.
24 번개가 치면 하늘 이쪽 끝에서 하늘 저쪽 끝까지 비추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날에 그러할 것이다.
25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어디에 계시지 않고 어디에나 계시는>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루카 17,20-21)
하느님은 어디에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와 계신 분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선 어디를 고집하거나 집착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을 찾아 헤매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만나는데 어디를 고집하거나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는데, 하느님을 만나는 특별한 곳이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성체가 모셔져 있고 더 나아가 현시가 되어 있는 곳에서 하느님을 더 잘 만나게 되고 성지 같은 곳을 가는 것도 하느님 만남에 도움이 되지요.
그러나 사람마다 하느님을 만나는 특별한 곳이 있다는 것은 그곳에만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만남에 있어서 그 사람만의 고유함이 있기 때문이지요.
저의 경우 보통은 같은 성당이라도 창을 통해 하늘이나 나무를 볼 수 있는 창가 자리가 그냥 어둠침침한 성당 자리보다 하느님을 더 잘 만나게 하지만, 또 어떤 때는 아무 것도 안 보이고 감실의 등만 보이는 어두컴컴한 경당의 구석진 자리가 하느님을 더 잘 만나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와 관련하여 신적인 보편성과 인간의 독특성을 다 인정해야지요.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진정 보편적이십니다.
천주교에만 계시지 않고 성당에만 계시지 않습니다.
힌두교 신전에도 계시고 법당과 이슬람 성전에도 계십니다.
우리나라 남한에도 계시고 북한에도 계시고 중국에도 계십니다.
성당에도 계시고, 시장이나 술집에도 계시고, 조용한 곳에도 계시고, 시끄러운 곳에도 계시며, 심지어 무신론자들의 집회나 살인 현장에도 계십니다.
시장에도 계시지만 돈벌이에 눈이 멀면 하느님을 못보고, 시끄러운 곳에도 계시지만 소음에 신경이 곤두선 사람은 못보고, 무신론자들의 집회와 살인 현장에도 계시지만 그들이 못 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특별한 경우 특별한 곳을 찾아갈 필요도 있지만, 그야말로 특별한 경우만 특별한 곳을 찾아야지 일상적으로는 내가 지금 있는 그곳, 곧 ‘지금, 여기’에서 만나야 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만나야 하는데 무엇보다 우리들 가운데서 만나야 합니다.
이것은 우선 ‘사람들 가운데서’ 하느님을 만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람들 가운데서는 만나지 못하고 사람을 피해 골방이나 성당에서, 또는 사람들을 피해 자연 가운데서나 하느님을 만나려 해서는 안 되고, 사람들 가운데서,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서 하느님을 만나냐 한다는 겁니다.
‘지금, 여기’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만나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지금 여기 같이 있는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는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이나 영적 지도자와의 만남에서만 하느님을 만난다면, 지금 여기서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라고 할 수 없고 사람들 가운데서 만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결국 사랑이신 하느님은 사랑 가운데 계시고, 사랑하는 사람과 사람 가운데 사랑이신 하느님이 계신다는 얘기이군요.
그러니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사람 가운데 계신 하느님을 만나지 않고 사람과 사랑 밖에서 하느님을 찾으려 들지도 말고 헤매지도 말아야 할 것입니다.
- 작은형제회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가 왔는지, 오지 않았는지, 또 ‘재림’은 언제 오는지 혼란스러워하기도 합니다.
전자가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것이라면, 후자는 ‘하느님 나라의 완성’에 대한 것입니다.
전자가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라면, 후자는 ‘아직 아니’ 온 하느님 나라입니다.
전자가 하느님 나라의 ‘내면적 도래’라면, 후자는 하느님 나라의 ‘외면적 현현’입니다.
전자가 ‘구속사’라면, 후자는 ‘종말론’입니다.
오늘 복음의 앞부분은 전자에 해당하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말씀이요, 뒷부분은 후자에 해당하는 ‘재림’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루카 17,20)을 받으시고 대답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
(루카 17,20-21)
이는 당시의 유대인들이 지니고 있었던 “하느님 나라”에 대한 대전환이요 혁명적인 선언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 나라’를 지상적, 정치적, 민족적인 메시아 왕국으로 이해하고 있었고, 그래서 ‘하느님 나라’가 세워질 때, 자신들을 압제하는 로마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 정치적,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백성으로 살게 되리라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종말의 때에 이루어지리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물리적인 의미로서의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하느님의 주권과 통치가 실현되면 어디에서나 이루어지는 ‘하느님 다스림의 나라’를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당신의 오심과 함께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안에 ‘이미’ 임재하는 나라로 선언하십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때와 장소와 성격’에 대한 대전환을 요청하십니다.
곧 그 ‘때’는 당신과 함께 이미 왔고, 그 ‘장소’는 “너희 가운데”라는 공간적이거나 심리적인 내면이라기보다 역사적이면서도 동시에 초월적인 하느님의 활동 공간이며, 그 ‘성격’에 있어서는 민족적, 정치적이 아니라 당신의 활동과 동시에 당신의 통치와 주권이 미치는 곳이면 어디서나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 나라’는 이미 와 계신 당신과 함께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안에 ‘이미’ ‘지금 여기’에 ‘우리들 가운데’ ‘와’ 있는 나라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메시아 나라의 왕국을 물리적으로 또 시각적으로 확인하려 했던 유대인들의 시도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깨우쳐줍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재림’이 언제 어떻게 올 것인지, 그리고 그 전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번개가 치면 하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비추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날에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
(루카 17,24-25)
이는 ‘예수님의 재림’이 번개가 번쩍할 때처럼 단박에 천지가 환해지듯이 동시에 즉각적으로 일어날 것이며, 동시에 범우주적으로 일어날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여기 있다. 저기 있다’라고 찾아 나설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토피아’(장소가 없는)가 아니라 분명한 장소, 곧 하느님의 백성인 하느님의 다스림이 이루어진 ‘우리들 안’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여기’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 곧 ‘하느님의 다스림 안’에 머무는 일이요, 지금 ‘우리 가운데’ 와 계신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일입니다.
<오늘의 말·샘 기도>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
(루카 17,21)
주님!
저희를 비추소서.
저희들 안에 이루신 당신의 나라를 보게 하소서.
저희를 다스리소서.
‘지금 여기’에 와 있는 당신의 사랑을 살게 하소서.
저희를 변형하소서.
번개가 치면 단박에 천지가 환해지듯이, 저희의 온 정신과 영혼, 삶과 방식이 바뀌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토 수도회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님께서 죽으셔야만 왕이 되시는 이유>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주제입니다.
찾아다닐 필요가 없는 이유는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바로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는 나라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명령이고 그 명령에 따르면 그 나라가 곧 하느님 나라입니다.
누군가를 지배하기 위해 눈에 보이게 명령하고 지시할 수도 있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면 그 지배는 불완전합니다.
아이는 보통 부모님의 나라입니다.
부모님의 뜻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모가 아이에게 사랑을 주지 않을 때는 아이는 부모를 따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자기 마음대로 하기에 부담스러우면 자기를 지배할 누군가를 만들어냅니다.
『벼랑 끝, 상담』에 이와 같은 예가 나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민서는 이혼한 엄마에게서 키워졌는데 엄마는 술과 담배에 찌든 밤을 지내는 생활을 하는 직업을 가졌습니다.
결국 민서는 아동보호센터에 넘겨졌고 그곳에서는 고등학생 언니들의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경찰 조사에 의해 다시 엄마에게 키워졌지만, 엄마는 여전히 민서를 보살펴 줄 여건이 되지 않았습니다.
민서는 거짓말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동보호센터에서 혼나지 않기 위해 시작된 거짓말이 엄마에게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때 민서를 도와준 것은 한 친구였습니다.
진짜 사람은 아니고 환시로 자신만 보이는 아이입니다.
그 아이는 친한 친구인 척하면서 거짓말을 하도록 유도하였습니다.
처음엔 귀로만 들리던 음성이었는데 눈으로도 그 아이를 보게 되었고 이젠 그 아이의 말에 무조건 순종하게 된 것입니다.
최고야 원장은 민서의 역할을 하고 민서는 자기에게 거짓말을 종용하는 환시의 아이 역할을 하며 역할놀이를 하였습니다.
최 원장은 민서의 말에 따라 엄마에게 거짓말을 하는 연극을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다 보고 난 민서는 자신이 보는 환시의 아이가 착한 아이가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삼자 측면에서 보니 그 아이는 자신을 망치는 아이였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의 말을 무시하게 되었고 점차 환시도 사라지고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외부에서 눈에 보이게 나에게 명령하는 대상은 끊기가 오히려 쉽습니다.
그 명령이 내 신의 판단을 거쳐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영화 ‘뷰티풀 마인드’(2001) 역시 자신이 만들어낸 환시들을 보며 결국에는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존 내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존은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친구를 만들어내고 인정받기 위해 비밀 요원을 만들어내 그들에게 조종당합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이 자신의 허상임을 알고 무시하며 꿋꿋이 자신의 길을 갑니다.
이처럼 외부 조종자는 내부 조종자보다 힘이 약합니다.
가장 강력하게 나를 지배하는 내부 조종자는 ‘나’입니다.
내가 ‘나’라고 믿는 대상이 실제로는 내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내 안에서 나를 지배하면 그것은 완전히 나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서는 자신이 개인지 사람인지 구별하지 못하는 경우도 나옵니다.
22세의 의대생이었던 스티븐 D.는 약물중독으로 거의 완벽한 개의 경지까지 갔었습니다.
개가 되는 꿈을 꾸었는데, 실제로 꿈을 깨고 나니 개의 모든 감각, 특별히 후각이 인간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게 된 것입니다.
모든 향수의 냄새를 다 구별하게 되었고, 환자들을 눈을 감고 냄새로 다 구별할 수 있었으며, 심지어 자신이 간 길을 다시 냄새로 되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3주 동안 이 일을 겪고 나서 약물을 끊었고 나중에 신경과 의사가 되었습니다.
정말 나를 지배하는 것은 내가 ‘나’라고 믿는 대상입니다.
그 대상이 내 안에 들어오는 방법은 ‘감사’를 받는 것입니다.
내가 감사를 하면 그 대상은 점점 ‘나’가 되어갑니다.
부모에게 감사할 때 부모가 내 안에서 나를 지배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감사를 받으려면 필연적으로 나에게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탈출기에서 잠깐 살펴보자면,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 산 위에 서 있고 여호수아가 아말렉족속과 전투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전에 만나와 메추라기, 그리고 바위에서 흘러나온 물 이야기가 나옵니다.
만나는 진리로써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주는 것이고 물은 은총으로서 사랑입니다.
이 사랑과 진리가 그 사람 안에 들어가면 그 사람 안에서 여호수아, 곧 예수께서 자아를 몰아내고 당신의 나라를 세우십니다.
이것이 가나안 정복과 같은 의미입니다.
이미 피 한 방울 안 흘리고 나의 ‘나’가 되어있는 자아를 밀어내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나를 살게 해 준 나보다 훨씬 고마운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그 방법은 나에게 살과 피를 양식으로 내어주는 부모처럼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오늘 복음에 당신이 눈에 보이지 않게 우리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배척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리아 고레띠 성녀의 예를 다시 보겠습니다.
10살을 갓 넘은 성녀는 20살 난 청년인 알렉산더에게 겁탈당하려는 것에 저항하다가 수십 차례 칼에 찔려 사망하였습니다.
마리아는 무려 20시간 동안의 큰 임종 고통을 겪으면서도 어머니를 위로하고 가족을 걱정했습니다.
종부성사를 주시는 신부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이 강도에게 하듯이 너도 살인자를 용서하겠느냐?”라고 물었을 때, “예, 신부님 그를 용서합니다. 하늘나라에서 그의 회심을 위해 기도하겠어요. 그 사람도 저와 같이 낙원에 머물기를 원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숨을 거두기 전, “어머니, 아름다운 부인이 서 계신 것이 보여요.”하고 말했습니다.
알렉산더는 30년 형을 받고 감옥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않고 모든 이들에게 완강하게 저항하였습니다.
몇 년이 지난 후, 고레띠는 그의 꿈에 나타나 그에게 백합꽃을 전해주었고 그 환시를 본 후 알렉산더도 회개하였습니다.
형을 다 마치고 나와서는 먼저 고레띠의 어머니 아쑨따를 찾아가 무릎을 꿇게 사죄를 청했습니다.
어머니는 “마리아 고레띠가 너를 용서했으니 나도 너를 용서한다.”라고 하며 함께 영성체하였습니다.
알렉산더는 이후 카푸친 수도원의 정원사로 나머지 생에 대해 속죄하며 살았습니다.
그는 죽기 얼마 전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그릇된 길을 가는 모든 젊은이에게 청합니다.
나처럼 죄악에 빠지지 않도록 게으름에서 도망치십시오.
그리고 열심히 기도하십시오.”
내가 찌른 사람이 나를 위해 기도하고 나의 양식이 되어 줄 때 그 사람은 내 안에서 주인이 됩니다.
그 사람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알렉산더는 마리아 고레띠의 나라입니다.
그를 위해 피를 흘렸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가슴까지 지배할 수 없습니다.
우리도 하느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피를 흘려 나를 당신의 나라로 만드셨듯이, 우리도 이웃을 위해 피를 흘려 이웃을 나의 나라로 만들어야 합니다.
따라서 그 나라는 눈에 보이는 나라일 수 없습니다.
그 주인이 마음 안에 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음 안에 사는 방법은 살과 피로 먹히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사랑이 있으면 천국>
좋은 곳, 아름다운 곳에 머물기를 바라는 것은 모든 사람의 마음입니다.
특별히 신앙인은 더없이 좋은 곳, 하느님의 나라에 머물기를 희망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는 “여기에 있다”, “저기에 있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여기에도 저기에도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루카 17,21)
묵시록에는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을 모시는 곳에 있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또 사는 곳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상태가 곧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오신 것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 내 마음속에 오시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느님의 통치, 그리스도의 주권이 내 마음에 미치면 하느님의 나라요, 안 미치면 하느님의 나라가 세워지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이미 와 있는 하느님의 나라는 육적인 눈이 아니라 신앙의 눈으로 볼 때 잘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서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요한 3,3).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내게는 이제 천당 영복이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영복을 얻고자 한다면 하느님만을 열심히 공경하시오.” 하고 말씀하시며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일깨워주었습니다.
성 정하상 바오로는 “‘내 눈으로 천당과 지옥을 보지 못하였으니 어떻게 천당과 지옥이 있음을 믿으리요?’ 하는 이는 마치 소경이 제 눈 어두운 것을 생각하지 않고, 눈으로 하늘을 보지 못하니 해와 달이 있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말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하고 말씀하시며 하느님 나라에 대한 믿음을 촉구하였습니다.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먼 훗날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자 예수님을 통해서 이미 우리에게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한13,34)는 새 계명 안에 성장되고 마지막 날에 완성될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여기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한 번 일상 안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하는 사람은 기쁨 속에 있고, 거기가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슬픔 속에 있습니다.
그곳이 지옥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천국이고, 사랑이 없으면 지옥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십니까?
그렇다면 사랑하십시오.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십시오!
주님께서 눈물로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세 번씩이나 넘어지시며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이 우리를 위한 사랑의 발걸음이었다면, 우리도 어떤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사랑의 끈을 결코 놓아서는 안 됩니다.
그곳이 하느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묻지 마십시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왔고 여러분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부터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믿는 이들이여, 이 땅 위에 살지만 천국을 그리워합시다.”
(성 베르나르도)
그러나 “안락의자에 앉기만을 원하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성 필립보 네리)는 것도 잊지 마십시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께서는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우리네 인생사 안에 굳건히 자리 잡고 계십니다>
여러분들 혹시 엄청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하느님 나라는 어디에 있으며, 어떤 곳이며, 언제 올 것인가?’
언젠가 도래할 하느님 나라를 생각하면 살짝 두렵기도 하고, 대체 있기는 한 건가 하는 의구심도 들고, 아무튼 막막한 느낌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이 나서서 예수님께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올 것인가 물었습니다.
바리사이들에게 있어 예수님의 답변이 너무나 의외였고 참으로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오랜 세월 동안 학수고대했습니다.
언젠가 강력한 왕권을 지니신 하느님께서 휘황찬란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등장하시고 당신의 나라를 세우실 텐데, 그 나라는 더 이상 유배나 함락이 없는 초강대국이 될 것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정말이지 놀랍게도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믿기 어렵겠지만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건네신 말씀이기에 명백한 신앙의 진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인류 역사상 그리도 수많은 사람들이 간절히 꿈꾸어왔던 하느님 나라가 대체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문제는 참으로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있다고 하시는데, 이 말씀을 대체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아마도 이렇게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예수님의 육화 강생으로 인해 이미 하느님 나라는 우리 가운데 도래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당신의 발길이 머무는 곳 그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둘러서서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는 군중들은 이미 하느님 나라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누군가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며 삶 속에 실천한다면 그는 이미 하느님 나라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한 그리스도인이 경건한 마음으로 성체성사에 참여해서 지극정성으로 성체를 영한다면 그는 이미 하느님 나라에 입국한 것입니다.
결국 하느님 나라는 내가 몸담고 있는 바로 이곳, 나의 삶의 자리여야 마땅한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지니고 있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 하나는 ‘하느님의 다스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곳이 어디이든 상관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 그분의 사랑과 봉사, 섬김과 희생의 정신이 흘러넘치는 곳은 모두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이제부터 ‘하느님 나라가 대체 어디일까?’ 하는 마음에 고개를 여기저기 돌릴 필요가 없겠습니다.
우리 본당 공동체가 하느님 나라입니다.
우리 수도 공동체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우리 가정 공동체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느 머나먼 다른 하늘 아래 계시는 것이 아니라 자질구레한 우리들의 일상사 안에 현존하심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때로 하느님께서는 빛바랜 사진첩 같은 우리들 인생사 안에 항상 함께 하셨습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우리네 인생, 결핍과 죄투성이로 실패한 듯 보이는 우리들 삶 안에 굳건히 자리 잡고 계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 강생으로 인해 이미 우리 가운데 도래했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왔지만 아직 완결되지 않은 하느님 나라 사이 중간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결국 우리는 불완전한 몸이지만 완성된 하느님 나라를 향해 걸어가는 순례자들인 것입니다.
늘 겸손하게 깨어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기다려야겠습니다.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내 작은 두 손이지만 하느님 나라 건설에 조금이나마 기여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오늘 미사의 말씀은 지혜의 아름다움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제1독서의 대목은 지혜의 본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여러 차례 반복해 읽다 보면 지혜의 매력에 푹 빠져들어 헤어나오기 어려울 정도로 영혼이 즐겁고 행복해집니다.
거룩, 청절, 자유, 평온, 섬세, 통찰, 광채...
지혜를 가리키려 골라낸 단어들이 얼마나 영롱하고 찬란한지, 가히 '지혜의 찬가'가 울려퍼지는 듯하지요.
“지혜는 영원한 빛의 광채이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활동의 티없는 거울이며, 하느님 선하심의 모상이다.”
(지혜 7,26)
우리의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지혜이십니다.
구약에서 성경 저자들이 의인화한 지혜가 바로 육신을 취해 세상에 내려 오신 예수님이시지요.
지혜이신 예수님께서는 빛이신 아버지에게서 흘러나오는 광채이시고, 언제나 일하시는 아버지를 따라 일하시며, 선하신 아버지의 완전한 모상이십니다.
“거룩한 영혼들 안으로 들어가, 그들을 하느님의 벗과 예언자로 만든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지혜와 함께 사는 사람만 사랑하신다.”
(지혜 7,27-28)
지혜를 사랑하고 갈망하며, 지혜를 만나 마음에 품은 이는 하느님의 벗이 되어 그분과 마음을 나누며, 그분의 목소리가 됩니다.
하느님의 벗과 예언자의 앞길이 꽃길만은 아닌 게 분명한데도, 지혜 문학 저자들은 내내 지혜를 얻기 위해 힘쓰라고 권고합니다.
무사, 무탈, 쾌락, 풍요의 세상 가치와 지혜는 방향을 달리하니까요.
그래서 지혜서 저자는 지혜를 소유하는 일의 고귀함을 전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하느님께서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신다고 다소 도전적으로 말합니다.
하느님은 모든 이를 사랑하신다고 두루뭉실하게 넘어가지 않고, 사랑받는 조건을 아주 명백하고 정확하게 한정합니다.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만!’
복음은 바리사이들의 질문에서 촉발된 하느님 나라 이야기입니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루카 17,21)
바리사이들이 "언제 하느님의 나라가 오는지" 예수님께 묻습니다.
그동안 보여 준 그들의 태도로 보아 질문의 의도가 그리 단순하고 순수하게 들리지는 않지요.
하느님 나라를 물리적인 실체로 여긴다면 이미 세상 한가운데 와 있는 하느님 나라를 놓치기 쉽습니다.
육화하신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이고, 비록 거창하거나 요란하지 않아도 세상을 진리와 선으로 지탱하는 힘이 바로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
(루카 17,25)
이미 와 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의 나라는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비로소 완성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전에 사람의 아들은 세상에서 고난과 배척을 받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과 교회가 고난받고 배척받는 이, 소외되고 죽어가는 이에게서 하느님의 현존을 발견하고, 겸허히 옷깃을 여미며 하느님 나라에 참여하기를 바라십니다.
세상의 질서와 발걸음을 함께하지 않는 하느님 나라를 알아볼 수 있는 힘이 곧 지혜입니다.
그리고 이 지혜와 함께 사는 이를 하느님은 사랑하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
(복음 환호송)
포도나무와 가지의 표상은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가리킵니다.
지혜와 우리의 관계도 다르지 않지요.
지혜를 찾아 얻고 지혜에 머무르는 이는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와 하나가 된 바로 그 지혜께서 맺어 주시는 열매입니다.
그 열매로 세상이, 교회가 양분을 얻어 더욱 선하고 아름답게 변화됩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전히 미완성의 불완전한 세상과 이웃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는 지혜의 눈을 청하며, 그 지혜를 꼭 붙잡고 나아가시길 기원합니다.
이렇게 지혜를 찾아 매일매일 말씀의 샘물가로 모여드는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 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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