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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의 책은
1. 의식의 흐름이라는 창작 기법
‘개인의 발견’은 20세기 초 유럽의 한 정신사적 현상이었다.근대정신의 한 귀결점인 1차 세계대전 은 인간과 역사의 진보에 대한 믿음을 흔들었고,확신에 차서나부끼던 온갖 플래카드들을 촌스러워 보이게 만들었다.근대를 지 탱했던 사회적·역사적 인격이 물러난 자리에 생물학적이고 심리학적인 개인이 들어섰다.프로이트나 프루스트 이후,의식이란 알 수 없는 열정과 끊임없는 무의식의 작용 아래 놓여졌다.또한 부르주아 윤리는 새로운 계급분화와 더불어 찢겨져나갔다.
버지니아 울프(1882∼1941)의 생애가 걸쳤던 곳도 바로 이 지점이었다.이런 환경은 울프에게 ‘지식인 여성으로서의 자아’를 발견하게 했고,그는 세기 초의 유행 속에 머물렀을 뿐 아니라 문학과 삶을 통해 이 유행의 한 전위를 이끌어나갔다. 이같은 전위는 물론,오성과 신성의 빛을 남성이 독점했던 근대적 남성쇼비니슴이나 “여성의 영광은 화제에 오르내리지 않는 데 있다”는 부르주아윤리,이런 당대의 상식들과의 부단한 싸움을 통해 쟁취한 것이다.이것이 울프로 하여금 20세기 지성사에 두가지 중대한 기여를 하게 만들었다.그의 문학은,의식의 흐름이라는 새로운 창작기법으로,다른 한편으론 페미니즘문학을 통 해 이후 세계문학사에 영향을 드리웠다.
2. 버지니아 울프와 페미니즘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의 딸로 태어난 울프는 당시 여성에게는 대학 입학이 허용되지않아 주로 아버지의 서재에서 희랍어와 러시아어를 익혔다.스물다섯살에 처녀작「출항」을 쓰고,평론을 발표하기 시작한 울프는 20세기초 TS엘 리어트와 경제학자 케인즈 등이 모였던 「블룸스베리그룹」의 핵심 멤버이기도 했다.정신질환으로 1941년 자살하기까지 소 설 9편과 평론,희곡,에세이 등을 남겼다.
울프는 D.H로렌스,올더스 헉슬리 등과 함께 영국 주요 작가의 한사람으로 꼽히고 있고,그녀의 작품은 독일과 프랑스 미국 등 구미에서 왕성하게 재해석되고 있다.최근 서구에서 그녀에 대해 열광하고 있는 이유는 버지니아 울프를 광풍처럼 불고있는「 페미니즘 문학」의 대모라고 보는 시각 때문이다.국내에서도 연극무대에 오른「자기만의 방」은 페미니즘 텍스트로 사용되고 있을 정도다.그러나 실상 버지니아 울프는『인간 모두가 평등하게 해방돼야 비로소 여성도 해방될 수 있다』는 신념에서「페미 니즘」이란 말자체를 혐오했다고 한다.그녀의 작품은「인간 내면에 흐르는 의식을 치밀하고 정교하게 표현했다」는 평을 받는다 .이 점에서 울프는「의식의흐름」을 좇은 조이스와 포크너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의식의 흐름 따라 울프가 추구한 주제는 결국 「인생이란 무엇인가」였다.그녀는삶이란 타인과 커뮤니케이션의 문제며,이는 사랑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이렇게 울프는 근본 문제를 탐구하면서도 사회 부조리와 여성문제를 고발하는 것도놓치지 않았다.
3. 당대의 상식과 부단한 싸움
브론테 자매들이 남자의 필명을 써야 했던 19세기 상황에 비해,울프의 등장은 이제 새로운 여성의 세대 가 출현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그는 처음부터 자신의 이름으로 작품을 썼고,당대 문인 예술가들과 서클을 만들었으며,남편과 함께 출판사를운영하면서 편집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의 삶에는 19세기와 20세기,빅토리아시대와 에드워드시대,봉건과 현대,개인주의와 페이비어니즘,남성과 여성이 공존 했고,이 이질적인 것들 사이에 몇 개의 팽팽한 전선이 형성돼 있었다.어쩌면 이런 갈등과 긴장이 물론 체질적인 섬약함과 더불 어,이 천재 작가에게,간헐적인 정신질환에 시달리다 자살로 마감하는,개인적으로는 지극히 불행한 삶을 가져다주었을지 모른 다.
세상을 떠나기 전해인 1940년 버지니아 울프가 쓴 어린 시절에 대한 회상은 그런 삶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이 집에서는 빅토리아와 에드워드시대라는 두 세대가대치했다.아침 10시에서 오후 1시까지 나는 플라톤의〈공화국〉을 읽거나 고대희랍의 코러스를 읽었다.그러나 오후 4시30분쯤 빅토리아 사회는 압력을 가해왔다.단정한 옷으로 갈아입고,저녁 파티의 손님들을 위해 이야깃거리를 준비해두어야 했다.8시,목이 드러난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거실로 가면 조지 오빠가 야회복을 입고 의자에 앉아서 내 옷을 검열 했다.빅토리아 사교계가 시작됐고 만찬은 고문이었다.나와 언니는 박수를 치고 복종할 뿐이었다.테이블 둘레에는 조지와 제럴드와 잭이 우정성과 출판부와 법정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남자 친척들은 모두 빅토리아시대풍습게임에 능 통했다.나 역시 그 규칙을 너무도 철저히 익혔고,나중에 내가 쓴 글에서 그것을 발견하기도 했다.어떤 유순함 공손함 엇비스 듬한 접근이 그것이다.” 1900년쯤 하이드파크 게이트 22의 어느 하루에 관한 글이다.
버지니아의 집안은 중상류층에 속했고 아버지 레즐리 스티븐은 저명한 영문학자이자 비평가였다.그의 집에는 당대의 유명한 작 가들이 드나들었다.학교 교육을 받지않은 버지니아에게 가장 절대적인 교사는 부친이었다.부친은 딸에게 주로 전기물을중심으 로 많은 책들을 골라주었고 책들을 읽고난 뒤 꼭 자신과 토론하게 했다.
그의 부모 양쪽 모두 두번째 결혼이었고,그는 의붓·이복형제와 함께 자랐다.어머니는 그가 13살 때,아버지는 22살에 세 상을 떠났는데,버지니아가 정신질환증세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이때였다.
잇단 불행이 몰고온 가족의 해체는 그를 신경쇠약에 빠뜨렸지만,동시에 19세기적 강제로부터 해방시켰다.그것은 하이드파크 6층 저택의 파티들,남편과 아이들 그리고 불우한 이들에게 봉사하는 여성이라는 부르주아 규범의 화신이었던 어머니,그에게 드레스를 골라주고 사교계로 끌어냈던 의붓 오빠,그런 울타리에 갇혔던 어린시절과의 결별을 의미했다.가족의 해체와 결혼,1 차 세계대전은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 60년을 전후반으로 뚜렷이 갈라놓고 있다.이제 30대 이후의 울프에게는 창작비평활동 과 블룸즈버리 서클과 호가스 출판사와 헌신적인 남편이 기다렸다.
4. 결혼 후의 작품 세계
30살 되던 1912년,그녀는 유대인 문예비평가 레너드 울프로부터 청혼받았고곧 결혼했다.이미 7년 째 정신질환을 앓고 있던 그는 그해 봄 세번째 발작을 일으켜요양소에 입원했던 터였다.버지니아는 이 결혼으로 남편과 간호부 를 함께 얻었다.
그는 버지니아의 생리주기와 몸무게를 일일이 기록했고 교제와 집필활동까지 적절히 통제했다.그들은 신혼 초부터 육체 없는 결혼생활을 했지만 버지니아는 이것 자체를 불평한 적이 없었다.그는 오히려 주변의 다른 여성에게 연정을 느꼈는데,소설〈올 란도〉는 양성연애자였던 시인이자 소설가 비타 니콜슨에게 보내는 연애편지이기도 했다.
버지니아 울프가 작가로서 영국문학사에 이름을 등재한 것은 1915년,33살되던 해였다.데뷔작은 〈항해〉.그러나 작가 로서 전성기는 40대에 찾아왔고,그는22년작〈야곱의 방〉,25년작〈댈러웨이 부인〉,27년작〈등대〉,28년작〈올란 도〉,29년작〈자기만의 방〉으로 제임스 조이스나 서머싯 몸,로렌스,포스터등과 더불어 당대 영국 문단의 가장 주목받는 작 가군에 끼었다.
인물과 시간과 줄거리가 완전히 해체된〈야곱의 방〉은‘의식의 흐름’기법을 본격적으로 실험한 그의 첫 작품이었다.그는 1917년 남편과 함께 호가스 출판사를냈고,이후 모든 작품을 이곳서 출판했는데,〈등대〉는 그같은 형식실험이 고전적인이야 기구조와 적당히 타협해 당대로서는 가장 성공작으로 평가받았다.일가족이 보내는 섬에서의 여름 한철을 그린 이 작품에서 버지 니아는 자신의 어머니를 주인공으로삼아 부르주아시대의 여성규범을 풍자한다.작품 속에서 램지 부인은 젊은 학자인 남편의 까 다로운 성미를 가라앉혀주고,아버지에게 화가 난 아들의 기분을 달래며,젊은 연인들을 한자리에 만나게 주선해주는 선행으로 하루를 보낸다.
5. 평론을 통한 사회문제 개입
〈자기만의 방〉에서 그는“여성이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혼자만의 공간과 연 5백파운드의 고정수입이 있 어야 하며 경제력은 참정권보다도 중요하다”고 썼다.이 작품은 여학생을 입학시키지 않는 명문대학들,여성의 열등함을 입증하 려는 학문적 업적 등을 신랄하게 비꼬았다.그는 1932년 이후 케임브리지대학의 강연요청과 맨체스터대학,리버풀대학의 명 예박사학위를 모두 거절했다.비판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지급한 대가였을까?
레너드 울프는 1960년에 쓴 자서전에서 아내에 대해“정치와 무관하게 산 정치적 동물”이라고 썼다.점진적 사회주의 서클 인 페이비언협회에 그를 소개시킨 사람은 남편이었다.그러나 레너드가 노동당 집행위원회에 참여하는 등 적극적이었던 데비해, 버지니아는 한걸음 물러서서 평론을 통해 정치와 사회문제에 개입했다.그는〈배움의 전당〉〈예술과 정치〉〈여성노동자협의회 에 관한 회고〉라는 세권의 평론집을 통해,위대한 문인들이 대개“중산계급에서 태어나 비싼 교육을 받은”수혜자들이었다고 천 재의 계급성을 추출해내는가 하면,가부장적 통치를 떠받드는 다양한 제도와 상징들을 폭로한다.
또한 국내의 가부장제와 전지구적인 식민지가 영국 상류층 남자들에게 본토에서건해외에서건 교장이나 장군 혹은 각료나 판사 같은 신분을 보장해준다는 분석도 흥미롭다.
6. 자살로 생애를 마감
버지니아 울프가 서섹스 시골집에서 아침산책을 나갔다가 근처의 오즈강에서 주머니 속에 돌을 채워넣고 물에 빠진 시체로 발견됐던 1941년 3월,그는 교정으로만 여러해를 끌어오던 마지막 소설〈세월〉을 탈고한 뒤였다.〈세 월〉을 고치고 또 고치면서 극단적인 만족과 절망 사이를 오가던 그는 한 기록에서“다시 환청이 들려일에 집중할 수가 없다”고 적었다.그는 남편 앞으로“더이상 당신의 삶을 망쳐놓을수는 없다”는 유서를 남겼다.
그에 의해 몇편의 대표작이 보태진‘의식의 흐름’문학의 영향은,입담 좋은 이야기꾼처럼 사건들을 엮어나갔던 19세기 소설 과,인물의 내면묘사에 주력하는 20세기 소설을 결정적으로 구별시켰다.
또한 최근 〈올란도〉의 영화화나 〈자기만의 방〉의 연극화는 페미니즘 문학의 20세기를 열었던 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의 권위를 새삼 확인시켜주고 있다.
대표적 작품
1) 3기니/버지니아 울프 지음 태혜숙 옮김
전쟁·폭력 발생의 근본원인 밝힌 소설로 전쟁과 폭력이 단지 남성의 왜곡된 심성때문에 파생하는 것이 아 니라 남성을 왜곡시키고 여성을 억압하는 사회구조와 문화에서 야기되는 것임을 지적한 소설이다.
한 전쟁방지단체로부터 받은 전쟁방지를 위한 자문과 기부금을 요청하는 편지에 대한 답장을 쓰는 가상적인 사실을 소재로 쓴 장편으로 전부 3부로 나누어 1부에 1기니씩을 쓰는 이유를 밝히는데1기니는 여성의 교육을 위한 여대증축기금,1기니는 여 성의 경제적 자립을 위해 여성취업을 돕는 단체에 대한 기부,그리고 나머지1기니를 전쟁방지단체에 주기로 결정해 전쟁과 폭력 이 발생하는 근본원인을 되묻는다.
2) 「집안의 천사 죽이기」/버지니아 울프 지음
여성의 사회적 가능성 실현 역설한 책으로 울프는『세월』등의 소설로도 유명하지만 그보다 여성문제에 대 한 날카로운 비판을 담은 에세이나 일기 등을 통해 더욱 명성을 굳힌 작가다.페미니즘의 상업화가 팽배한 가운데 20,30년 대에 활동한 페미니스트의 사상을 통해 현대의 페미니즘을 점검해 볼수도 있다.
이 책 제목의「집안의 천사」란 바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현모양처다.자신의 세계보다 남편과 자녀의 행복을 더 중요시하는 여 성,남성에게 상냥하게 구는 여성들을 말한다.울프는 여성을 이런 상황에 묶어두는 것을 가부장적 문화라고 지적하고 여성도 현 대사회가 열어주는 무한한 가능성을 실현하라고 역설하고 있다.울프가 제시하는 사회 개선은 인간의 정신이나 가치관 등 사회문 화의 변화다.
7. 페미니즘의 재조명
영화나 소설에 여자 이야기가 왜 꼭 약방 감초처럼 끼는지는 새삼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폭력물에도 남자들이 사랑하는 여자이야기는 꼭 따라나와야 한다. 그 장면이 극장 간판과 홍보 리플렛에 나와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상술 로만 말할 수는 없다. 실제의 남자와 여자들이 그렇게 엉켜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가 거기에 상술이란 말을 갖다붙이는 데는 정 당한 이유가 있다.여자들은 대개 연약하고 아름답고, 그래서 사랑받는 사람들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이상의 상식으로 요즘 극장가를 들여다보면 확실히 세상이 변해있다. 그것도 1백80도 변해 있어서 아닌게 아니라 '페미니즘'이 란 말을 혀끝에 달고 다니는 게 어줍잖게 보이지만은 않는다.
페미니즘이란 용어는 모든 양식의 문화로 역침투하고 있는 것 처럼도 보인다. <자기만의 방>이라는 연극이 페미니즘을 들 고 나와 안착한 것도 그렇고, 남근(男根)등을 소재로 삼는 그림이 '페미니즘'이란 새로운 분류로 나뉘어지는 것도 그렇다.
페미니즘 산업은 특히 출판분야에서 불을 뿜고 있는데 아마도 출판계가 전례없이 맞고있는 깊은 불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새롭고 기발한 아이디어로 순식간의 승부를 걸어야 하는 출판경쟁에서 페미니즘은 자원 가득한 처녀지같이 다가올 터이기 때문이 다.
8. 포스트 모더니즘과 페미니즘의 만남
우리 사회에 페미니즘은 포스트모던 시대와 함께 발화했다. 여성운동은 끈질기게 있어왔지만 적어도 그들 은 그 운동을 페미니즘이라 부른 적이 없다.
페미니즘의 대중화는 어느날 갑자기 그 사람들 외부에서 그 사람들고 모르는 사이 이루어졌다. 그들의 머릿속에서보다 몇 걸음 씩 빨리 영화기획자나 소설가들은 그것을 상품화, 선전한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흔히 하늘/땅, 이성/감정, 여자/남자등 모든 구분을 이분법적이라는 이유로 '해체'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 굳이 '알려져있다'고 쓰는 이유는 이런 해석과 논리 또한 '회의'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강박관념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포스트 모더니즘을 이렇게 정의하기도 한다.
"논리가 사유양식으로 모독당하는 곳, 모든 해석이 타당하고 가치는 전복되었으나 대체되지 않은 곳,의미가 유보되어 있는 세계."(로즈마리 통, [페미니즘])
기존의 가치들이 전복된다는 그런 의미만큼 페미니즘은 이세계에서 환호받는다. 일찌기 보봐르는 그의 책 [제2의 성]에서 '타자 '(the other)라는 개념을 내세워 여성을 설명했고 이제 그 개념을 인정받고있다. 여성과 남성의'차이'가 이제 풍부한 창의력 있 는 자원으로 재해석되고 있는 것이다. '여성성'은 이제 여성에게 극복되어야 할 것으로 말해지는 게 아니라 여성 남성 모두에게 개발되고 발휘되어야 할 품성으로 둔갑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포스트 모더니즘은 끝없는 자본의 논리,그 거대한 힘과 함께 밀려온다는 사실이다. 당연히 포스트 모더니즘은 '모 든것의 상품화'와 한 짝을 이루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해체하는 것들은 조각조각나 자본이라는 거대한 입속으로 밀어넣어진 다.
첫댓글
페미니즘의 일반화라는 구절에서
문득 교육대학 시절 많이 외웠던
<의미 있는 타인들(significant the other's)>이라는 단어가
설핏 떠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