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bCuFIrg7Pk0?si=rcPY9T6L5zGmO0rT
Maria Callas sings "Nel di della vittoria" from Macbeth
05:37
Concert in Hamburg. May 15, 1959.
Nicola Rescigno conductor
Maria Callas, Soprano
마리아 칼라스(Maria Callas,1923.12.2-1977.9.16)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산 오페라의 여신(女神)
https://youtu.be/h9kiaH0h2pQ?si=2RJsPbpeN5y9-Gac
그간 수많은 오페라 히로인들이 등장했지만, 새로운 기대주가 출현할 때마다 매스컴들이 즐겨 인용했던 크레딧은 "칼라스의 후계자 등장"이라는 것이었다.
칼라스는 그만큼 오페라의 표준적 존재인 것이다. 칼라스의 음악과 칼라스의 연기야말로 변치 않는 오페라의 표준이자 교과서였던 셈이다. 또한 칼라스만큼 이토록 오랜 세월에 걸쳐서 회자되는 오페라 가수는 그 누구도 없다.
많은 평론가들은 칼라스로 인해서 오페라 예술은 그것이 최초로 발생되었던 '피렌체 시대'의 정신과 이념을 되찾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음악과 언어가 근원적으로 결합하는 방법의 탐구를 통해서 오페라에 내재(內在)된 극적인 요소를 풍요롭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칼라스는 19세기 이탈리아 오페라가 지니고 있는 인간적 생명력을 이끌어 내어서 그것을 가장 드라마틱한 것으로 만든 천부적 재능의 소유자라는 것이다.
칼라스는 실생활과 오페라 무대를 공(共)히 드라마틱하게 살았던 인물이다. 그녀의 실생활에서 빚어진 사건들(남편과의 이혼, 오나시스와의 만남, 재클린 케네디와 오나시스의 결혼으로 인한 이별 등)이 오페라 가수로서의 활동에 영향을 끼쳤던 것도 사실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그의 생활이나 오페라 무대가 모두 극적인 것이었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칼라스는 1923년 12월 4일(또는 2일), 그리스系 이민의 딸로 뉴욕에서 태어나 1977년 9월 16일 파리에서 사망했다. 본명은 마리아 카로게로푸로스. 13세까지 미국에서 성장했는데 그라모폰 레코드와 라디오로 음악 듣기를 좋아하였고 성악과 피아노 레슨을 받았다. 그러나 아버지가 경영하던 약국이 경영난에 부딪치게 되고 그로 인해서 양친 사이에 불화가 싹트기 시작했다. 결국 마리아의 어머니는 남편과 이혼하고 두 딸을 데리고 1937년에 그리스로 돌아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의 부친은 양육비를 그리스로 계속해서 보내주었고 그 덕분에 마리아는 2차대전 중에 아테네 음악원에서 왕년의 명가수 히달고에게 성악을 사사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14살 때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산투짜역으로 처음 오페라 무대에 서게 된다.
1940년, 그리스는 제2차대전에 휘말리게 되었고 그 결과 미국 부친으로부터의 송금도 중단되기에 이르렀다. 마리아는 오페라에 간간이 출연하면서 생활비를 벌었고 때때로 점령군을 위한 공연에 나서기도 했다. 최초의 프로페셔널한 데뷔는 1941년, 아테네 오페라에서 상연된 '토스카'의 주역이었다. 당초 출연 예정이었던 주역이 병을 얻게되자 그 대역으로 토스카 역을 노래하였던 것이다. 1944년, 영국군에 의해서 그리스가 해방되자 마리아는 통역사로 일했다. 그러나 그해 12월, 그리스에 내전이 발발하고 어머니와의 사이도 나빠지자 마리아는 아버지가 있는 뉴욕으로 돌아갈 결심을 굳힌다. 1945년, 뉴욕에 돌아왔다.
그녀의 생활은 그리스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아테네의 생활에 비하면 마리아의 뉴욕생활은 호화판이라 할만했다. 단지 가수로서의 생활은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당시 미국엔 이탈리아에서 건너 온 가수들이 차고 넘치는 형편이었고 따라서 경쟁은 날로 치열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천신만고 끝에 시카고에서 데뷔하게 되었는데 그마저 오페라단이 파산하는 통에 오페라 가수의 꿈도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그 무렵 어머니가 뉴욕으로 돌아왔고 마리아는 다시금 가정의 불화에 휩싸이게 된다. 고민 끝에 가수로서의 기회를 확실하게 잡기 위해 이탈리아로 가기로 결심한다. 그것은 동시에 가정의 불화에서 탈출할 수 있는 길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미 베로나 오페라팀과 '라 조콘다' 출연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간 터여서 주저하지 않고 이탈리아로 갔다. 여기서 마리아는 두 남자를 만난다. 한 사람은 후일 그의 남편이 되는 메네기니이고, 또 한 사람은 그녀의 음악적 스승이자 후원자인 툴리오 세라핀(Tullio Serafin)이다.
특히 세라핀의 열정적인 지도를 통해서 대성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마리아가 출연한 작품은 바그너의 '발퀴레'와 벨리니의 '청교도'였고, 두 작품 모두에서 큰 성공을 거두고 일약 그녀의 이름은 국제적인 각광을 받기에 이른다. 동시에 레코딩을 제의 받고 이들 레코드를 통해서 결정적인 명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1947년의 일이다. 이를 계기로 이후 십수년간에 걸친 화려한 오페라 가수로서의 활약이 보장된 것이다. 문자 그대로 '영광의 시대'를 쌓기 시작했던 것이다.
한편 1949년, 조반니 메네기니(Giovanni Battista Meneghini)와 결혼하였다. 메네기니는 10년 뒤 이혼할 때까지 칼라스를 충실하게 도와주었다. 이때부터 이탈리아의 언론은 끈질기게 마리아의 꽁무니를 다라 다녔고, 그녀의 사생활들이 그들에 의해서 까발려졌다. 메네기니와의 이혼, 그리스의 선박왕 오나시스와의 염문도 이들에 의해서 시시콜콜 전세계에 알려졌다. 특히 오나시스와의 로맨스는 그녀의 인생에 있어서 행복과 비극의 극단을 달리게 하였고 음악적 경력에 있어서도 결과적으로는 치명적인 손상을 입혔다.
초창기엔 '이졸데'나 '브륀힐데'같은 드라마틱한 역을 주로 맡았다. 이어서 '루치아' '노르마'역을 맡게 되는데 역시 세라핀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다. 그런가하면 '케루비니' '롯시니' '도니제티' '벨리니'등에 의해 19세기 초엽에 작곡됐지만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던 작품들을 차례로 섭렵하여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고 그 작품들이 현대에 다시 부활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위업을 일구어 냈다.
https://youtu.be/TWrWBqM1cWI?si=s-GTT96FTnYUe17b
1950년, 아이다로 데뷔한 라 스칼라 무대는 이후 10년간 그녀의 경력에서 가장 눈부신 것이었다. 그러나 1962년, '메디아'를 스칼라에서 노래한 것을 끝으로 이탈리아를 떠났고 이때부터 그의 미성(美聲)은 급격하게 광채를 잃어가기 시작했다. 목소리에 이상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오나시스가 재클린 케네디와 결혼하게되자 상황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어쩔 수 없이 무대에 서는 횟수가 급격하게 줄어들었고 1965년엔 파리와 런던에서 토스카 역으로 단 두번 무대에 섰을 뿐이었다.
그러한 공백을 마스터 클라스를 여는 것으로 채웠다. 1971년부터 이듬해까지 열린 그녀의 마스터 클라스는 세계적인 이목을 집중시킨바 있었고, 많은 제자들을 훈육하게 되는데 그 가운데는 테너 박인수(서울대 교수)가 이 클라스에서 공부하는 행운을 누리기도 하였다.
1973년, 스테파노와 함께 세계 순회연주를 끝으로 칼라스는 무대를 떠났고, 이때부터 마리아는 거의 완전하게 의욕을 잃어갔다. 그리고 1977년 9월 16일, 파리에서 5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누구도 처음엔 그녀의 죽음을 믿으려하지 않았다. 그만큼 그녀의 죽음은 충격이었다.
칼라스는 1970년 어느 날, 주변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 "인생은 전장(戰場)이다. 나는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나에게 그저 사물과 사람들이 다가올 뿐이다. 다만 누구에게도 거절당하는 존재가 아니길 바랄 뿐이다. 그건 동시에 내 자존심이기도 하다. 사생활에서나 공적인 생활에서나 난 요구하지 않고, 명령하지도 않고, 명령하는 존재가 되고 싶지도 않다. 어떤 일이 내게 다가오건 또는 다시 떠나건 난 불평하지 않는다." 오나시스에게서 버림받은 그녀의 마음의 상처가 얼마나 깊은 것이었는지를 이 절실한 말에서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https://youtu.be/_mkLcgZ3gXI?si=RANOM3dK5KhOIr0O
앞에서도 설명되었듯이 칼라스는 음악 가운데 내재되어 있는 드라마와 감정, 성격을 최대한으로 이끌어 내어 그것들을 극대화시키는데 천부적인 재질을 발휘하였다. 칼라스가 노래하는 루치아는 과거의 명 코로라튜라들처럼 미성과 초인적 기교를 통해서 마치 프랑스 인형처럼 장식적인 것이 아니고, 비극적 이미지를 생생하게 재현함으로써 죽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절실한 것인가를 체험하도록 만들만큼 전혀 다른 이미지였다. 칼라스처럼 인간의 슬픔과 절망과 희망을 선명하게 표현하는 가수는 이전에 없었다. 음악 속에 깃들어 있는 드라마틱한 요소를 찾아내는 비범한 재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칼라스의 소리는 코로라튜라와 드라마틱한 것을 합친 것이다. 때문에 그녀의 노래는 섬세함에서 극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그 폭이 넓은 것이다. 게다가 음색의 변화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능력까지 갖추고 있어서 감정 표현이 그만큼 다양했던 것이다. 이러한 재능에 힘입어서 오페라 '메디아' '몽유병 여인'등은 오랜 세월 잊혀져 있다가 그녀에 의해서 부활의 계기를 맞기도 하였던 것이다.칼라스는 20대 후반(1953년 2월)에서 40대 초반에 이르는 12년간에 걸쳐 20여종의 오페라 전곡을 녹음하는 위업을 이룩했다(EMI).
한편, 그녀의 무대는 언제나 강렬한 열광과 감동으로 넘쳐흘렀고, 풍부한 표정과 세련된 연기는 그녀의 음악과 혼연일체를 이루고 있어서 마치 극장을 위해 태어난 인물 같았다. 칼라스가 노래하고 연기한 오페라 배역(주역)은 무려 46개에 달한다.
https://youtu.be/1iwGIBewHPM?si=b4gfMeqEDDzdC-I9
글출처: 웹사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