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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하리에서 평생을 살아온 김찬정 씨 ⓒ문양효숙 기자 |
올해 일흔넷인 김찬정 씨는 영양군 수비면 송하리가 고향이다. 옆 동네로 시집가 살았던 10년을 빼고는 계속 송하리에 살았다.
“같은 촌이라도 여기는 냇가가 너무 좋거든. 누구라도 감탄을 해. 그래서 내가 여기로 다시 이사 오자고 했지.”
그렇게 좋은 냇가에 댐이 들어선다고 했다. 처음 소식을 접한 건 2009년이었다. 마을에 댐이 들어선다고 했을 때, 옆 동네 젊은 사람들은 “댐 건설에 문제가 많다”고 이야기했지만 그는 ‘그런가보다’ 생각했다. 댐 건설을 반대하는 모임을 만든다고 했지만 나가지 않았다.
댐 반대 활동을 벌이는 주민 중 한 명은 “김찬정 어르신이 댐 건설에 찬성하신다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태풍 루사가 몰아닥쳤을 때, 냇가에 있던 김 씨의 집이 완전히 잠기는 등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찬정 씨 부부는 같은 자리에 다시 집을 짓고 묵묵히 개울가 땅을 일궈 옥토를 만들었다. 육천 평 땅에 사과, 복숭아 등의 과일과 고추 농사를 지었다.
“‘저 집은 나무도 많으니 보상을 얼마나 많이 받겠나’, ‘왜 반대를 하나’, 그러는 사람도 있었어. 그런데 우리는 그런 게 아니거든. 장래가 중요한 거지. 고향을 지키는 게 얼마나 중요한 건데.”
“어머니, 보상받지 말고 고향을 지켜주세요”
김찬정 씨가 이런 결정을 하게 된 데는 자식들의 영향이 컸다. 경기도에 사는 아들은 어머니에게 “고향을 지켜 달라”고 말했다.
“보상받으면 애들도 한창 돈이 많이 필요할 때인데 좋지 않겠나. 그런데 절대 보상받지 마래. 다 돌아다녀도 우리 고향같이 자연이 살아있는 곳은 없다는 거야. 자식들한테 배우고 있다니까, 내가.”
아들의 말에 마음이 움직인 김찬정 씨는 사람들이 영양군 국회의원인 강석호 의원을 만나러 서울에 간다던 날, 처음으로 댐 건설을 반대하는 이들과 함께했다. 이후 댐에 관한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영양에는 댐이 필요하지 않았다.
▲ 마을 초입에 붙은 댐 건설 반대 현수막들 ⓒ문양효숙 기자 |
권영택 군수는 수몰되는 송하리 사람들이 이주할 수 있도록 산 하나를 개간해 집단촌을 만든다고 했다. 땅도 배당해 주고 집도 지어준다 했다. 그러나 김찬정 씨는 이 제안이 “말도 안 된다”고 말한다. “농사짓는데 얼마나 물이 많이 필요한데 그 산에서 농사를 지으라는 말인가” 하는 현실적인 판단이었다. 하지만 김찬정 씨가 이주를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이뿐만이 아니다. 그는 ‘마을’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시시한 시골 같으면 사람이 오래 살고 그러면 좀 지겨워지고 그럴 수도 있잖아. 그런데 여기는 누구라도 살면 살수록 정이 들고 좋은 곳이라고 느껴. 젊었을 땐 우리도 출세해서 도시로 가야겠다, 그런 생각 가끔 했지. 그런데 나이 먹을수록 여기가 좋아. 겨울이면 마을회관에 다 모여서 같이 밥 먹고, 옆의 찜질방에서 놀고 그러거든. 겨울이 어떻게 가는지 몰라. 너무 즐거워. 이렇게 정든 곳을 놔두고 어딜 가? 상상도 못해.”
경상도 토박이인 김 씨는 권영택 군수에 대해 “사람이 잘 하려고 해도 실수를 하기 마련이다. 군수님도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염려는 안 하고 좋은 점만 너무 생각한 거 같다”고 부드럽게 말하면서도 “정말 군민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이제는 이해를 좀 해야지, 이렇게 가면 개인 욕심밖에 안 된다”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국가가 하는 일에 반대하는 사람들’
김 씨는 예전에 뉴스에서 핵발전소가 들어오는 것을 반대하는 주민들 이야기를 접할 때면 “국가가 하는 사업을 왜 저렇게 말려?’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뉴스들이 살에 와 닿는다. 그 사람들이 이해가 되고 ‘그동안 내가 무언가 잘못 생각했구나’ 싶었다. 김 씨는 “멀리서나마 그 사람들에게 위로의 말을 보내고 싶다”고 했다.
송하리에는 젊은 사람이 많지 않다. 74세 김찬정 씨와 76세인 김 씨의 남편이 중간 연령대다. 하지만 지난 2월 타당성 조사가 들어오던 날, 마을 주민들은 마을 초입의 다리를 막아섰다. 80을 넘긴 노인들도 많았다. 하지만 이들의 각오는 다부지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막아내고 싶어. 1년 농사를 못 짓는 한이 있더라도 막아내자. 이렇게 결심하고 있지.”
▲ 4년 전, 송하리의 산과 계곡에 반해 귀농한 이상철 · 김길숙 부부 ⓒ문양효숙 기자 |
이상철 · 김길숙 부부는 4년 전, 아무 연고도 없는 송하리에 터를 잡았다. “너무 좋았다”고 했다.
“우리 부부는 둘 다 꽃이나 나무를 좋아하거든요. 나이 들면 시골 가서 살자 얘기했죠. 여기 오기 전에 100군데 넘게 돌아다녔어요. 큰 지도를 펴놓고 다녀온 곳을 동그라미 쳤는데 100개가 넘더라고요.” (이상철)
대한민국 100곳이 넘는 산촌을 다 찾아다녀보고 결정한 곳이었다. 천 평 밭에 콩과 고추를 심고, 지금 사는 흙집을 손수 지었다. 흙을 주물러 쌓아 40cm 두께의 벽을 만드는 과정은 1년이 걸렸다. 이상철 씨는 집 짓는 과정이 “엄청나게 힘들었다”고 말했다. 이렇게 어렵게 자리 잡은 곳에 댐이 들어선다는 소식이 들렸다. 김길숙 씨는 “처음엔 실감이 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설마 여기 댐이 들어오랴 싶었어요. 권영택 군수가 지난 3월에 영농교육장에서 느닷없이 ‘다음 달부터 보상 나온다’고 했거든요. 기가 막혔어요. 군민을 완전히 무시하는구나 싶었죠. 왜냐하면 아무런 절차를 밟지 않았거든요. 적어도 예비 타당성조사, 본 타당성조사, 고시, 이런 절차가 있잖아요. 그래서 설마설마 했어요.” (김길숙)
그러다 2011년 9월 8일, 뉴스에 영양댐이 건설된다는 보도가 나왔다. 그저 농사를 짓고, 꽃과 나무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해 숲 해설을 하며 살고 싶었던 부부에게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7명으로 시작한 대책위 활동, 점차 주민 참여로 이어져
당시 이상철 씨는 권영택 군수의 말과 행동에, 그리고 그가 벌인 비리에 분노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미웠다”고 했다. 이 증오가 스스로를 피폐하게 만드는 듯 했다. 성당에 나가 마음을 추스렸다. 그는 안동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이기도 하다.
이상철 씨는 뜻을 함께한 영양 주민 7명과 ‘영양댐반대공동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를 꾸렸다. 주로 귀농 · 귀촌한 옆 동네 젊은 부부들이었다. 안동과 대구의 환경운동연합에 문의를 하고 댐 건설 문제가 있는 다른 지역을 방문했다.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여기저기 도움을 청했다.
“지금은 그래도 120명 정도로 인원도 많이 늘어났고 여기저기 언론에도 많이 나갔지만 처음엔 영양댐 문제를 아무도 몰랐어요. 그런데 사실 영양댐은 총체적인 비리 덩어리거든요.” (이상철)
지역 주민들에게는 설명회는커녕 제대로 된 정보조차 제공되지 않았다. 군수가 한 평에 15만원씩 준다더라, 아파트를 지어준다더라 하는 근거 없는 풍문이 떠돌았다. 몇 되지 않는 대책위 사람들은 꾸준히 댐에 관한 진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했다. 동영상도 만들도 홍보도 했다. 마을 주민들이 조금씩 함께하기 시작했다.
“특히 할머니들이 댐 건설을 반대해요. 송하리에 혼자 사시는 분들이 11가구 정도 되거든요. 자식들도 다 잘 살지만 여기서 사는 걸 좋아하시죠. 고향에 대한 애정이 남달라요.” (김길숙)
물론 댐 건설에 찬성하는 사람도 있었다. 댐이 들어온다니까 밭도 아닌 논에 대추나무를 심는가 하면, 아예 논과 밭을 사서 들어온 사람도 있었다. 이상철 씨는 “송하리만 따지면 찬성하는 사람들이 10% 정도 되지 않을까 싶다”며 “지금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됐다”고 말했다.
▲ 마을 입구 초소. 타당성조사에 대비해 주민들이 3교대로 마을을 지키고 있다. ⓒ문양효숙 기자 |
“마을 입구에 초소를 운영하고 사람이 연행되면서, 겁먹고 물러서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이 모였어요. 중도 입장이었던 분들도 합류했지요. 조용히 후원금을 주시는 분들도 생겼고요.”
경상북도 영양은 오랜 시간 외부와 소통하지 않은 채 살아온 지역이었다. 읍내에 나가면 군에서 하는 사업을 반대하는 것만으로 “빨갱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고, 주민들은 군청에 가도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지역신문 사진에 얼굴이 나오는 것도, 공무원들과 얼굴을 마주하는 것도 부담스러워했다. 이상철 씨는 영양이 ‘육지 속 섬’ 같은 오지라고 표현했다.
“처음에 군의회나 군청에 갈 때엔 귀농 · 귀촌한 사람들이 주로 갔어요. 그러니 군수는 ‘몇몇 귀농한 사람들이 반대한다’거나 ‘경쟁에서 낙오된 사람들이 귀농한다’고 말하고 다녔죠.” (이상철)
하지만 싸움이 길어지면서 주민들에게 변화가 생겼다. 당당하게 “댐 건설에 반대한다”고 밝히는가하면, 영양군의회에서 책상을 치며 “당신들은 월급을 왜 받느냐”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는 영양 전체에도 영향을 미쳤다.
“군청 게시판이 실명제예요. 예전에는 댐 건설을 비판하거나 군수를 비판하는 글이 안 올라왔거든요. 그런데 요즘은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닌데 글이 막 올라와요.” (이상철)
댐 건설이 아니었다면 만나지 못했을 사람들, 행복하고 고맙다
이런 작은 변화는 대책위 사람들에게 큰 힘이 된다. 대책위는 ‘놀면서, 즐기면서 싸우자’며 여러 가지 행사를 벌였다. 읍내에서 주민들이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할 수 있는 행사 ‘이제는 말할 수 있다!’를 여는가하면 6월에는 장파천 문화제도 준비 중이다. 각자 자기가 할 수 있는 재능을 쪼개어 힘을 보내면서. 김길숙 씨는 “이런 사람들을 만나서 행운”이라고 말한다.
“저는 귀농하기 전에는 시골에 가면 재미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으니까 그냥 조용히 살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막상 모이니까 한 명, 한 명이 모두 반짝이는 사람들인 거예요. 무엇을 해도 자기가 할 수 있는 걸 조금씩 보태면서 하니까 뭔가 큰 그림이 그려져요. 이런 사람들을 만났다는 게 너무 좋아요. 댐이 아니었다면 만날 일도 없었을 인연들이잖아요.” (김길숙)
지난 3월 19일, 영양군은 밴드를 부르고 대형 모니터 시설을 갖춘 방송차량을 동원해 ‘댐 건설 추진 궐기대회’를 열었다. 언론에는 적게는 500명에서 많게는 1,500명이 모였다고 보도됐다. 이상철 씨는 “실제로는 군청 공무원까지 동원해 150여 명 모인 행사였다”고 말했다.
“우리도 그 즈음에 댐 건설 반대 행사를 했어요. 대형 모니터도 없고 밴드도 없었지만 220명 모였죠. 우리는 달력 뒷장을 이용한 게시판을 만들어서 하고 싶은 말도 쓰고 했어요. 하지만 비교할 수 없었죠.” (김길숙)
김 씨는 “댐 건설을 막는 것도 막는 것이지만, 이렇게 작은 마을 영양에서 무언가 시작돼 다른 동네로 퍼져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댐은 절대 못 들어온다”고 말하는 부부는 송하리가 ‘멋있는 마을’이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살기 좋은 마을이 되면 좋겠어요. 멋있는 마을이요. 사람들이 와서 트래킹도 하고 좋은 농산물도 사고, 그러면 좋을 것 같아요. 자연을 지켜가면서요. 여긴 정말 아름답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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