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0년대🌺 |
✿1861년6월 15일,, 우리나라 두 번째 사제 최양업 신부 순직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에 이어 두 번째로 사제 서품을 받은 최양업(1821∼1861) 신부가 경상도 지역 전교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던 중 1861년 6월 15일 과로로 문경에서 순직했다. 시신은 제천의 배론성지에 묻혔다. | |
🌱1900년대🌱 | |
🌳07년 헤이그 만국 평화 회의 개막
회의에 참석하려던 이준 열사는 일본의 방해로 좌절되자 자결
이준열사 사진 3인의 특사 사진. 이준, 이상설, 이위종(사진 왼쪽부터)
1907년(융희 1) 고종이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여 을사조약과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폭로하고 호소하여 한국의 국권 회복을 이루고자 한 활동(한국사). 이 활동은 일제의 한국에 대한 침략과 만행을 세계에 폭로하고 국민의 반일감정을 촉발시켰다. 그러나 제국주의 열강간의 이해관계를 상호 조정하는 국제회의에서 약소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던 만큼 실질적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결과적으로 고종 폐위의 계기가 되어버렸다.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 1907년 제2차 헤이그 회의 모습 ⓒ Anonymous/wikipedia | CC BY-SA 3.0
1905년 일본 제국주의는 서유럽 제국주의 열강으로부터 한국의 보호국화를 승인받은 뒤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하여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다. 이에 대해 고종은 헐버트를 통해 "보호조약은 병기로 위협하여 늑정(勒定)했기에 전혀 무효하다"는 내용의 급전을 미국 정부에 전달했으나, 미국은 반응이 없었다.
또한 고종은 서울의 각국 공사들을 상대로 조약의 부당성을 호소했으나 역시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이후 1907년 1월 16일 고종은 영국인 베델이 경영하는 〈대한매일신보〉에 미국·프랑스·독일·러시아 원수에게 보내는 서한을 발표했으나, 박제순(朴齊純) 친일내각이 21일 이를 위조라고 했다.
이 준 열사가 도착한 헤이그 역
이에 고종은 같은 해 6월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마지막 기대를 걸었다. 이 회의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스 2세의 주창으로 열리는 회의로 40여 개 국의 대표 225명이 참석하는 것인데, 주로 중재재판·육해전법규 등을 논의하지만 사실상 열강간의 식민지 쟁탈전에 따르는 분규를 해결하기 위한 국제법회의였다. | |
🌳11년 성균관 폐지하고 경학원 설립 🌳20년 천도교 청년회의 이돈화가 월간 종합지 '개벽'을 창간 : 창간호는 총독부에 압수됨. 🌳27년 이해조 죽음(1869∼) : 신소설 작가. '자유종' 등을 통해 신교육과 개화 사상을 고취. 🌳39년 서울-대전, 복선운행 개시 🌳42년 쿠바에서 개최된 전승 연합 대회에서 대한 민국 임시 정부 승인. 🌳46년 해방병단이 해안경비대로 개칭되자, 해군병학교도 "조선 해안경비대 사관학교"로 개칭 🌳47년 조선올림픽위원회 발족, 초대 위원장에 여운형 | |
🌳50년 여간첩 김수임 사형 선고
▲(좌) 김수임. (우) 김수임이 1930년대말 세브란스 병원 근무 당시 자신의 치과과장 붓 박사와 함께 찍은 사진
주한 미 수사기관의 고위직 고문을 유혹, 결혼해 살면서 고급정보를 빼내 자신의 애인인 남파 공산당 거물 이강국에게 계속 제공하다 검거된 미모의 여간첩 김수임이 1950년 6월 14일 육군본부 고등군법회의에 회부되어 6월 15일 사형언도를 받고 곧 처형됐다. 가난한 농부의 딸로 태어난 김수임은 11살 때 시집갔다가 2년이 못되어 서울로 도망쳤다.
김수임은 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이대 영문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세브란스병원의 통역으로 근무하다가 사교계로 진출한 후 경성제대 법과와 베를린대학 유학생 출신인 남로당원 이강국과 깊이 사랑하게 됐다. 이어 주한미군 수사기관의 고위직 고문과 결혼, 아들까지 낳았지만 이강국의 지시에 따라 미군에 관한 1급정보를 빼내 이강국에게 계속 제공하다가 국내 수사기관의 정보망에 걸려들었던 것이다.
1950년 6월 15일, 여간첩 김수임 사형 선고
“한 남자에 대한 사랑이 간첩의 죄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재판장 육군 대령 김백일이 차갑게 말했다. 피고석에 선 김수임(1911년 – 1950년)은 열 아홉가지 혐의로 고발되어 있었다. 미군 헌병 사령관 베어드의 동거녀였고 한 아이의 어머니였던 그녀는 베어드의 차로 남로당의 거물이었던 애인 이강국을 월북시키고 기밀을 빼내고 북에서 남로당에 보내는 정치자금을 전달하는 등 일대 스파이 행각을 벌였다는 것이 그녀의 죄목이었고, 1950년 6월 14일 육군본부 고등군법회의에 회부되어 6월 15일 사형선고를 받았다.
김수임과 이강국 | |
🌳54년 제1회아시아민족대회 개최(∼21일), 아시아민족 반공연맹 창설 아시아 7개국, 반공민족대회 개최.진해 🌳59년 정부, 재일교포 북송 대항책으로 대일 교역중단 발표 | |
🌳60년 내각책임제 개헌안 국회 통과, 부통령제 폐지 당일공포(제2공화국 발족)
1960년 6월 15일, 제3차 개헌(내각책임제) 통과, 제2공화국 출범
1960년 6월 15일 국회 본회의에서 내각책임제를 골자로 한 제3차 개헌안이 출석의원 211명 중 찬성 208표, 반대 3표로 국회에서 통과, 같은 날 공포됐다. 우리나라 최초 의원내각제의 화려하고도 힘겨운 시작이었다.
1960년 10월 1일. 2공화국 수립 경축 기념식에 참석한 윤보선 대통령, 장면 총리. | |
🌳60년 일본 전학련 국회 난입 (일본 안보투쟁)
1960년 6월 15일, 히비야 공원에서 국회로 향하는 시위대
1960년 6월 15일 미-일 신안전보장조약에 반대하는 일본 데모대가 국회의사당 난입을 시도해 경찰과 충돌, 여학생 1명이 사망했다.
신안보조약은 1월 19일 조인됐다. 자유민주당이 경찰대를 국회 내에 배치시킨 가운데 단독으로 신안보조약 승인을 강행함에 따라 자민당의 비민주주의적인 행위에 대한 저항으로 발생한 사건이다. | |
🌳61년 국가재건최고위원회, 농업협동조합과 농업 은행의 양기구를 통합키로 의결 🌳64년 김종필 공화당 의장 사퇴 🌳67년 전국 28개 대학과 57개 고등 학교에 휴교령. 🌳77년 월성 원자력 1호기 착공 🌳77년 김택수 대한체육회장, IOC 위원에 뽑힘 🌳81년 경기도 용인군 김량장리 구획정리 현장에서 조선 중기 왕족 수의 36점을 발굴 🌳83년 한국형 다목적 경비함 진수 🌳83년 김상협 총리, 3당 대표를 초청하고 정치활동규제 해금·학원사태 등 정국 수습방안을 논의 🌳84년 결혼피로연 그릇 빼돌리기 성행-예식장 업주들 부당행위 근절 결의 🌳84년 유 민한당총재, 외신기자클럽 연설에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 🌳84년 소아레스 포르투갈 수상 내한 🌳87년 김수한 추기경, 민주화를 위해 여야에 조건없는 대화촉구. 신부ㆍ 신도등 8000여명, 명동서 촛불행진 🌳88년 서울ㆍ부산ㆍ인천ㆍ강원등 법관 200명, 대법원의 전면개편을 주장하며 서명운동 실시 🌳89년 국무회의, 최저임금법시행령을 개정, 최저임금제 적용범위를 10인이상 전 산업으로 확대 🌳89년 교원노조 서울지부, 서울대 학생회관에서 기습 결성. 10여명 부상 🌳89년 대한의학협회, 의료보험수가 9%인상 정부안 수용, 극적 타결 🌳90년 민주당(가칭), 창당전당대회 개최(총재 이기택 창당준비위원장, 박찬종 김광일 홍사덕 조순형) 🌳90년 교통부, 총연장 409km인 경부고속전철노선을 확정, 91년 8월 착공 98년 8월 준공 예정이라고 발표. 🌳90년 한국출판문화운동협의회는 6·29 이후 출판 관계자들의 구속자 수는 이전보다 두배 늘어났다고 주장 🌳90년 노태우 대통령·김대중총재 회담, 북방 초당외교에 합의. 내각제 등엔 이견 🌳91년 정부, 92년 1월1일부터 국내 증권시장을 외국 인에게 개방하기로 결정. 🌳91년 정부, 일반여권의 유효기간을 3년에서 5년으로 단일화하고 신청서류도 간소화한다고 발표. 🌳92년 일본,해외파병 법안 통과-유엔평화유지군 - 9개월 만에 🌳93년 김영삼-이기택, 문민정부 출범후 첫 청와대 대좌 🌳93년 윤동윤 체신부장관, 94년6월로 제2이동통신 사업자 선정 연기한다고 언급. 🌳93년 교통부·한국 고속철도 건설 공단, 서울역외 시발역 '남서울역' 광명시에 건설키로 결정. 🌳93년 국제 민간항공기구(ICAO), KAL007기 피격사견 재조사 보고서를 채택. 격추령을 내렸다고 결론. 🌳93년 김용식 전외무부장관은 제3차 한.일 본회담 불법행위사실이 드러난다면 배상을 공식 약속 증언. 🌳94년 미국 안보장관회의, 북한의 IAEA탈퇴와 관련, 對北 유엔경제원조중단. 무기금수 등 1단계제재案 확정 🌳94년 카터, 북한방문-핵문제 대화해결 모색 🌳96년 버스카드제 전면 실시 🌳99년 인천지하철 1호선 1공구 흙더미 붕괴 1명 사망 | |
🌺2000년대🌺 | |
✿2005년 6월 16일. (향년 73세)이구 (李玖: 고종의 손자) 왕세자 별세
영친왕(英親王.고종의 아들) 이은(李垠)의 유일한 생육이자 그의 왕세자(王世子)였던 고(故) 이구(李玖) 씨의 영결식이 서울 창덕궁 희정당 앞에서 열렸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