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 / 하린 (시인)
4. 상상 테마3 - 공간에 대한 상상력으로 시 쓰기 @ 소재나 모티브가 갖는 특징과 상상 적용 방법
시를 가능하게 하는 추동력은 이미지다. 이미지는 보통 사물, 움직임, 상태, 시간성과 공간성 등에 의해 획득되는데, 이 중에서 공간은 시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이미지 저장 창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공간을 사물 간의 관계라고 했다. 그렇게 공간은 사물과 사물이 만나는 관계성을 형성한 채 놓인 이미지 덩어리다. 여기 강의실이 있다고 치자. 강의실엔 사람(나), 학생(타인), 교탁, 의자, 책상, 칠판, 보드마카, 스크린, 휴지통, 시계, 원격조정 협탁, 컴퓨터, 먼지 등이 있다. 공간이 설정되는 순간 이렇게나 많은 사물들이 자동적으로 딸려온 것이다. 그만큼 공간은 사물 이미지를 환기시키는 능력이 탁월하다.
그런데 시에서의 공간은 단순한 사물들의 거주지가 아니다. 전부 다 시적 메시지와 연관이 있는 장소이다. 시적 메시지에 부합하는 시인의 의도에 의해 설정된 장소인 셈이다. 갓난아기 때 버려져서 죽는 순간까지 고아 취급을 받는, 서러움의 정서로 가득 찬 화자가 있다고 치자. 그럴 때 ‘죽음마저 버림받았다’라는 나만의 시적 메시지가 탄생하게 되는데, 그 메시지를 전달할 때 가장 적합한 공간을 설정해야 한다. 생계조차 해결하지 못해 혼자 쓸쓸하게 죽어가는 누추한 방으로 할 것인가? 노숙자 생활을 하는 도시의 지하철이나 지하도 공간으로 할 것인가? 교통사고 나서 죽었는데 아무도 찾아가지 않는 무연고 시체들만 모여 있는 시체실로 할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고독한 삶을 마감할 자살에 적합한 장소(난간, 절벽, 육교, 욕실 등)로 할 것인가? 그런 고민 끝에 구체적인 공간을 설정했을 때 이미지도 획득되고 실감 나는 표현도 우러나오게 된다.
이제 공간에 대한 상상을 해보자. 사물의 거주지로서의 공간에서 예상했던 사물 말고 다른 것이 거주하게 만드는 것이 시적 상상이다. 그 대신에 구체적으로 설정해야 한다. A라는 공간에 B라는 대상이 살거나 놓여 있다고 상상해 보자. ‘거실엔 100년 동안 지구를 떠돌다 돌아온 사람이 쉬고 있을 거야’ ‘욕실엔 내가 집을 비운 사이에 찾아온 헤어진 애인의 독백이 살고 있을 거야’ ‘무덤 속엔 아직도 살아있는 죽은 자의 그리움이 살고 있을 거야’ ‘건설 현장으로만 떠돌던 아버지의 몸속엔 ‘고도’나 자살 충동이 아닌 스님이 되겠다는 열망이 살고 있을 거야’와 같은 구체적인 상상을 펼치면 된다.
필자의 시를 통해 그 소재가 어떻게 상상과 만나 펼쳐지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자.
가건물 / 하린
거처가 떠돈다 방황이 규격화된다 컨테이너 속으로 한 번 들어온 것들 웬만해선 빠져나갈 줄 모르고 금속이 인간을 품는 일이 허다해진다 전기장판이 아직까지 맥박을 증명한다 뜨거운 등 차가운 코 겨울엔 이중적인 날씨가 독감을 부추긴다 꼼짝없이 우린 껴안는다 마스크를 착용한 채 튀어나오려고 하는 욕을 봉인한다 사장은 안식을 제공하는 좋은 사람이니까 교회에 가는 착한 사람이니까 기도할 때조차 땅값이 올라야 하니까 참는다, 체불한 일당을 받아야 겨울을 건널 수 있으니까 아침엔 손잡이가 얼어붙고 컨테이너 밖이 온통 백색이다 이 아름다운 폭설 앞에서 울고 말 것인가 웃고 말 것인가 우리를 위해 우리 빼고 다 황홀 속에서 밤을 보냈다
임시방편이 떠돈다 못이 박힌 바퀴처럼 굴러서 체인처럼 엮여서 연장통을 들고 생활은 없고 생존만 있는 지점으로 가건물은 어디에나 넘쳐나니까 간격과 사이 더 벌어진 것을 우리만 실감하니까 사계절 내내 체감 온도가 항상 낮았으니까 ― 「1초 동안의 고백」, 문학수첩, 2019.
1단계 - 스스로 점검하기 – 메시지 분명히 하기+내 시만의 장점 찾기
전국 어디를 가나 가건물로 쓰이는 낡은 컨테이너가 있다. 그곳엔 간혹 혹한기를 살아가는 건설 노동자가 있다. 그들이 임금도 제대로 받지 못한 상태에서 폭설 후의 눈부신 아침을 맞이한다면 어떤 존재성을 드러낼까? 하는 시적 고뇌 속에서 「가건물」은 탄생했다. 이 「가건물」은 결코 뛰어난 상상을 보여주는 시는 아니다. 그들의 존재론적인 의미를 담다 보니 리얼리티에 비중을 두게 되어 상상이 아주 조금 적용되었다. “거처가 떠돈다” “방황이 규격화된다” “임시방편이 떠돈다” “금속이 인간을” 품는다. 정도의 상상이 개입되어 있다. 그런 상상을 통해서 떠돌이 건설 노동자의 삶을 극명하게 보여주려는 것이 시의 의도다.
「가건물」을 처음 쓰려고 할 때 필자가 생각했던 시의 장점은 떠돌이 건설 노동자의 삶을 극명하게 실감 나게 나만의 직관과 묘사를 통해 보여주는 것이었다. 특히 시의 앞부분에서 담백한 묘사와 진술을 통해 화자가 처한 상황을 흡입력 있게 보여주려고 했다. “거처가 떠돈다/ 방황이 규격화된다/ 컨테이너 속으로 한번 들어온 것들/ 웬만해선 빠져 나갈 줄 모르고/ 금속이 인간을 품는 일이 허다해진다/ 전기장판이 아직까지 맥박을 증명한다/ 뜨거운 등/ 차가운 코/ 겨울엔 이중적인 날씨가 독감을 부추긴다/ 꼼짝없이 우린 서로 껴안는다/ 마스크를 착용한 채/ 튀어나오려고 하는 욕을 봉인한다”와 같은 표현이나 “생활은 없고/ 생존만 있는 지점으로/ 가건물은 어디에나 넘쳐나니까/ 간격과 사이/ 더 벌어진 것을 우리만 실감하니까/ 사계절 내내/ 체감온도가 항상 낮았으니까”와 같은 직관은 그런 의도에 의해 쓰인 구절이다.
2단계 - 객관적 상관물(현상) 찾기+관찰과 조사 정밀하게 하기
이 시의 객관적 상관물은 가건물로 쓰이는 컨테이너이다. 임시 거주 공간으로 쓰이는 외떨어진 곳의 컨테이너가 피폐한 삶을 사는 존재들의 생생한 몸짓을 보여주기에 적당한 장소라고 판단을 했다.
혹한 속 가건물을 상정한 후 관찰한 이미지나 단어는 다음과 같다. 규격성, 금속성, 전기장판, 체감온도, 외떨어져 있다, 겨울엔 춥고 여름엔 덥다, 전기패널을 사용한다, 이중적인 날씨(등은 따뜻하고 얼굴 부분은 춥다), 겨울엔 마스크까지 써야 한다 등의 단어나 구절을 메모했다.
3단계 - 확장하기 – 상상적 체험을 섬세하게 극적으로 하기
처음 설정한 의도인 ‘떠돌이 건설 노동자의 삶을 극명하게 보여주기’에서 극명한 상황을 어떻게 하면 잘 보여줄까에 대해 나름대로 고민을 오래 했다. 폭염 속에서의 노동자의 삶이 더 극명할까? 폭설 속의 삶이 더 극명할까? 폭염도 좋지만 폭설이 더욱더 두드러지게 하는 역할을 할 것 같았다. 폭염 때에는 부자들도 가난한 사람들도 전부 더운 경우가 많다. 그런데 추울 땐 가난한 사람만 추운 경우가 많다. 그래서 상상적 체험을 폭설이 내려 추운 날 아침 건설 노동자가 겪는 상황으로 정했다. 밖은 황홀한 눈으로 뒤덮여 있는데 컨테이너 안에서 추위를 견디며 밤을 지새운 사람을 화자로 설정하고, 그 화자의 상태를 극한까지 몰고 가기 위해 ‘사장’이 체불임금을 오랫동안 주지 않는 상황을 끌어왔다. 그래서 “사장은 안식을 제공하는 좋은 사람이니까/ 교회에 가는 착한 사람이니까/ 기도할 때조차 땅값이 올라야 하니까/ 참는다, 체불한 일당을 받아야/ 겨울을 건널 수 있으니까/ 아침엔 손잡이가 얼어붙고/ 컨테이너 밖이 온통 백색이다/ 이 아름다운 폭설 앞에서 울고 말 것인가/ 웃고 말 것인가/ 우리를 위해 우리 빼고 다 황홀 속에서 밤을 보냈다”와 같은 구절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 또 다른 예문
房의 이중법 / 이영춘
때로 방안에 가만히 누워 있을 때면 마치 내가 관속에 누워 있는 듯한 착각이 들 때가 있다
관속 천정에서 들리는 소리, 소리들의 방출,
째깍째깍 초침 돌아가는 소리, 내 맥박 뛰는 소리, 물 흐르는 소리, 창 틈새로 햇살 지나가는 소리, 얼마 전 이 지상의 문을 닫고 떠난 한 시인의 눈물 흐르는 소리, 그 눈물에 젖어 드는 잔디의 묘지, 묘지의 뚜껑이 열리는 소리, 그 문으로 또 누군가가 들어오는 소리...
화들짝 놀라 '의식'이라는 거울 조각을 흔들어 깨고 나와 보니 나는 곰인형처럼 방 한가운데 동그랗게 누워 있다
동그란 형광등 눈알이 목사님의 그윽한 눈빛처럼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다
내가 관인지 관이 나인지 알 수 없는 장자의 나비처럼, 그렇게 - 《우리詩》 2010년 1월호
진흙 정원 / 박은정
몇 날 며칠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지만, 사람들은 이 집을 방문하지 않는다.
여기서 잠을 좀 자고 가도 될까요?
집주인은 여자를 모르는 사람처럼 쳐다보다 아무 말 없이 보던 TV를 본다. 그렇게 한동안 화면을 보며 낄낄거리다가 여자에게 말했다. 애가 우는데 거기서 뭐해.
아이는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서럽다는 듯, 힘껏 운다.
이 집은 언젠가부터 화분과 장판 밑에 벌레가 우글거리고 악취가 진동하여 방문객이 오지 않는다. 하지만 여자는 갈 곳이 없고 밖은 너무 추우니 집주인에게 허락을 구해야 하고
딱 하룻밤만 있을 곳이 필요해요.
집주인은 베란다 화단에 물을 주고 창밖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운다. 그때 말이야. 대사를 까먹어 무대를 박차고 나간 배우는 여전히 연기를 하고 있을까?
혼자 울던 아이가 네 발로 기어 나와 여자를 보며, 더 크게 운다.
아이의 손발에는 진흙이 묻어있다. 이 아이의 울음 속으로 들어가면 진흙 정원이 있을 것이다. 지지, 이런 곳에서 놀면 더러워지잖아. 이곳은 우리 집이 아니니까 얼른 나가자.
세상 어디에도 우리 집은 없다고 말할 수 없었지만
아이의 발자국이 여자의 주위를 돌며 찍힌다. 저 아이의 전부가 그녀에게 슬픔의 전부를 던져준다.
거실 소파에서 집주인은 코를 골며 잠이 들었다. 그의 손을 묶고 입속에 진흙을 쑤셔 넣었다. 자신이 죽이던 벌레처럼 사소하고 무의미하게 꿈틀거리는 그를 본다.
그때 말이야. 그 배우가 무대를 박차고 나가지 않았다면 계속 행복했을까?
정원에 구덩이를 파고 묻었다. 검붉은 나무들이 자라는 계절이 지나면, 아이는 집주인을 잊고 나를 엄마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여자는 아이를 안고 나오지 않는 젖을 물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라난 나무들이 집 안을 가득 채웠고, 아이를 보듬고 잠이 든 여자의 얼굴은 마지막 잠처럼 평온하다.
몇 날 며칠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지만, 누구도 텅 빈 집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았다. ― 《시로 여는 세상》 2021년 봄호.
구릉 / 강대선
아가미를 버들가지에 꿰인 메기가 탁자에 앉아 있다 딸려온 물빛이 거무스름하다 물내가 전부였을 것 같은 저 입으로 뻐끔거리는 허공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고향을 바라보려는 듯 눈을 부라린다 수염은 그가 한 마을의 유지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구릉이 실은 고분이었다는 구깃구깃한 신문 기사가 메기 앞에 놓인다 고분에는 왕이었을, 어쩌면 한 고을의 유지였을 사람의 뼈와 금으로 된 장신구가 신발과 나란히 앉아 있었다고 한다 신발이 수염이었을까 구릉속으로 유영을 하는 메기가 버들가지를 빠져 나온다 한때는 잘 나갔던 기억으로 살아온 주인장이 하품을 한다. 눈물이 찔끔거리는 메기가 끓는 탕 속으로 몸을 던진다 구릉은 왠지 메기의 잘 나가던 한 때처럼 쓸쓸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신발처럼 남겨진 버들가지를 허공으로 보내준다 한 번은 어디론가 훨훨 날아보고 싶었다는 아버지의 遺志(유지)였다 - 2019년 〈광주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출처 : 『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 (더푸른, 20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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