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드라마를 보다가 연기 잘하는 배우를 만나면 언제나 반갑다. 「태양의 후예」가 인기몰이를 하면서 주인공 송중기와 송혜교도 덩달아 상종가를 쳤지만, 두 사람 다 태생적으로 연기 자질이 없어 볼 때마다 답답해진다. 표정은 극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대사는 겉돈다. 찜찜하던 터에 서대영 상사 역을 맡은 진구와 윤명주 중위 역을 맡은 김지원의 빼어난 연기는 통쾌했다. 김지원의 연기를 보고 있자니 송혜교에게 ‘언니, 연기란 이렇게 하는거야’ 하고 조언을 하는 듯했다. 송중기‧송혜교보다 연기를 잘하는 배우는 넘쳐난다. 우리나라에는 이처럼 연기력보다 외모로 인기를 누리는 배우들이 너무 많다. 평론가들이 벌써부터 한류바람의 한계를 걱정하는 이유다.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가 드라마 「옥중화」에 오래 시선이 머물게 된 건 순전히 옥녀 역을 맡은 진세연 때문이었다. 드라마나 영화를 자주 안 본 까닭에 내가 그녀의 연기를 본 건 영화 「인천상륙작전」에서가 처음이었다. 그때도 외모는 상큼한데 연기력이 못 따르는구나 싶어 안타까워한 정도였다. 그녀를 「옥중화」에서 다시 만나자 새삼 관심을 가지고 연기를 지켜보았는데, 시상에나, 그새 연기력이 엄청나게 늘어 있었다. 표정이며, 호흡이며, 동작이며, 대사처리며, 한 군데도 흠잡을 데가 없었다. 특히 입에 짝짝 달라붙는 어투는 다른 여배우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매력이었다.
그새 연기력이 급신장한 게 이상하다 싶어 인터넷을 뒤졌더니 역시나! 「인천상륙작전」은 무슨 사연인지 31분 분량을 삭제한 채 개봉했단다. 그래서 31분 분량을 추가한 확장판을 다시 개봉한다나. 그러니 눈에 익숙하지 않은 진세연 같은 배우의 연기가 어색하고 미숙하게 보인 건 당연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그녀는 시방 중앙대 연극영화과 재학 중이란다. 연기력은 빠르게 무르익고 대사처리는 더욱 세련되어갈 터. 「옥중화」의 연출자가 이병훈이란 사실도 반갑다. 그가 연출한 드라마 가운데 「허준」「대장금」「이산」 등을 이미 즐겁게 시청했기 때문이다. 드라마 「용의 눈물」「여인천하」 등을 연출했던 故 김재형 PD처럼, 사극 연출자는 무엇보다 탄탄한 신뢰가 생명이다.
「옥중화」의 시대적 배경은 조선 13대 임금 명종(1534~1567. 재위 1545~1567) 연간이다. 12대 임금 인종(1515~1545)을 등에 업고 온갖 만행을 저지른 윤임 일파와, 명종을 업고 같은 만행을 저지른 윤원형 일파 간에 소위 ‘대윤 소윤 분쟁’으로 20여년 간 조정에 피바람이 멈춘 날이 없던 시절이었다. 명종의 아버지인 중종(재위 1506~1544)은 세 正妃와 아홉 후궁을 거느린 복 터진 임금이었다. 세 정비 가운데 단경왕후는 아버지 신수근이 역모로 몰리면서 왕후 책봉 7일만에 폐출되었다. 두번째 정비 장경왕후는 원자(훗날 인종)를 낳은 지 엿새만에 산후병으로 요절했다. 장경왕후의 오라비가 이른바 ‘대윤’인 윤임이었다. 배우 김미숙이 열연하고 있는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는 중종의 세번째 정비였다.
문정왕후는 각종 사극에서 조선조 대비 가운데 가장 악랄한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1515년 장경왕후가 죽자 1517년 중종의 세번째 정비로 간택되어 장경왕후가 낳은 세자를 키웠는데, 1534년 자신이 경원대군(훗날 명종)을 낳자 각중에 태도가 돌변하여 딴마음을 품기 시작했다. 인종이 재위 9개월만에 급서한 것도 경원대군을 보위에 앉히기 위해 문정왕후가 독살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파다했다. 문정왕후는 1545년 명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수렴청정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나라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동생 윤원형 및 윤원형의 처 정난정과 손발을 맞춰 온갖 불법적인 방법으로 권력을 휘두른 것이다.
조선조의 권력 다툼에서 가장 안타까운 점은, 反正이나 사화나 박해가 일어날 때마다 수십 또는 수백 명의 정적을 무자비하게 살해했다는 사실이다. ‘대윤’과 ‘소윤’ 간의 다툼에서도 각각 백여 명에 이르는 정적들을 살해했다. 정적을 제거할 때는 가장 유능하고 강직한 인재를 골랐다. 수양대군이 사육신을 참살한 경우가 대표적이다. 사육신은 조선 500년을 통틀어 가장 유능하고 충직한 신하들이었다. 수양대군이 겨우 13년 동안 임금노릇을 해먹기 위해 어린 조카와 사육신을 비롯한 수많은 충신들을 잔악하게 살해함으로써 조선에는 모리아첨배만 살아남았다. 그 결과 오늘날 이 나라 정치인과 고위공직자들이 이 모양 이 꼴로 국가 발전의 발목을 잡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저께 더(러운)민주당 국害의원 조응천은 최순실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목걸이와 브로치를 선물했다고 폭로했다. 설사 그게 사실이라 할지라도, 한때 자신이 모시고 일하던 대통령의 극히 사적인 일을 함부로 누설해도 된단 말인가? 나라의 종말을 보는 듯하여 비애를 느낀다.
각설하고, 정난정은 私家의 여인 가운데서는 나라에 가장 큰 폐해를 끼친 희대의 요부였다. 요즘 「옥중화」에서 정난정 역을 맡고 있는 배우 박주미의 연기를 두고 인터넷이 뜨겁다. 지금까지 드라마에서 맡아온 역할이나 인상에 비해 정난정 역이 너무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46세의 나이에도 방부제 童顔을 유지하는 비결이 더 궁금하다. 강호동과 함께 예능프로 「소나기」에 출연하여 코믹하면서도 아련한 연기를 보여준 게 언젯적 얘기던가! 그녀의 연기력에 대한 시비에도 동의할 수 없다. 생김새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표독스런 눈빛과 표정 연기를 기막히게 잘 소화해내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천하의 이병훈 감독이 발탁한 배우 아닌가. 내가 보기엔 드라마 「여인천하」에서 정난정 역을 맡았던 강수연보다 연기력이 뛰어난 것 같다.
정난정은 도총부 부총관을 지낸 정윤겸의 첩실 자식으로 태어났다. 가슴에 불덩이를 품고 태어난 난정은 어릴 때 집을 나와 기생이 되었으며, 기방 출입이 잦던 윤원형을 방중술로 사로잡아 첩실 자리를 꿰찼다. 1537년, 지난날 ‘대윤’인 윤임과 손을 잡고 ‘소윤’인 윤원형 일파를 몰아냈던 김안로가 문정왕후를 폐출하려다 실패하여 사사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난정은 김안로의 질녀인 윤원형의 부인 김씨를 몰아내고 정실부인 자리를 차지했다. 본격적으로 나라를 결딴낼 문정왕후-윤원형-정난정 편대가 완성된 것이다. 문정왕후가 외명부 종1품 정경부인 직첩을 내리자 난정은 제 집 드나들듯 궁중을 출입하며 궐 안팎을 휘저었다. 그녀의 적나라한 악행은 드라마 「옥중화」를 통해 지켜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