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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꽹과리를 치고 흥겹게 한바탕을 놀면서 거푸 막걸리를 들이 키고 있었다.
음전이 생글 생글 웃으며 옆에 있는 자배기에서 조롱박으로 술을 떠서 주었다.
재덕이 벌떡벌떡 마시면 바로 떠서 주었다.
그러면서 한 자배기의 술을 다 마시자 음전이 웃으며 “더 가지고 올게요.”
하면서 어느 집인지 모를 커다란 대문 안으로 사라 졌다.
“술 술 술가지고 와. 술가지고 와.”
그런데 음전이가 술자배기를 이고 나오다 대문 문지방에 걸려서 넘어지면서 술자배기가 커다란 소리를 내면서 깨어졌다.
그 소리에 깜짝 놀라 깨어나 보니 열린 창고 문으로 눈부신 햇살이 들어와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간신히 눈은 뜨고 보니 포로 두 명이 삽과 괭이를 들고 서있고 옆에서 있던 인민군이 보였다.
‘아 내가 죽었구나.’ 그렇다면 끌려가느니 내발로 걸어가야지, 일어나려고 움직였으나 일어날 수 가 없었는데.
“야 이 아새기레 살있디 않아, 살았구만. 살았어,”
“어데 분명히 둑엇었는데, 야 명도 질기기도 하구만.”
그 소리에 눈을 껌뻑이며 머리를 좌우로 돌려 보니 살아 있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간신히 눈을 떠서 살펴보니 가마니가 덮어져 있었고, 밑에는 가마니가 깔려져 있었다.
“야 여기다 두디 말고 날레 들고 가자우,”
하면서 재덕을 단가에 실어서 조금 떨어진 어느 민가에 맡겨졌다.
그 집에 사는 아주머니가
“거더 앰병에는 파국이 최고야요.”
하면서 막 해토가 되면서 뾰족 뾰족 올라오는 파를 캐다가 파국을 끓여서 주었다.
국물을 반 대접정도를 마시고 나니 정신이 조금 돌았다.
“아주머니 감사 합니다.”
“거더 아들 같아스리.”
하면서 혀를 찾고 아들이 인민군으로 나갔다고 하면서 저녁에는 파 국물에 부추를 넣어서 죽까지 쑤어주어 반 대접 가량 먹고 회복이 되기 시작하였다.
옷을 벗으라고 해서 벗어준 똥 묻은 옷을 내가고 아들이 입던 옷이라며 한 벌 주어서 입고 다음날에는 변소 출입을 할 수 있었다.
그런 가운데 3월 14일 대한민국 국군이 서울을 함락 된지 2개월 만에 재 수복을 했다.
그리고 재덕은 몸이 회복되자 다시 작업에 투입되고 야간에는 비행장 복구 작업을 하고 아침을 먹고 민가에 흩어져 잠을 자는데 낮에는 미군의 포격으로 편하게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폭격이 있을 때에는 머리를 감싸고 귀를 막고 구석에 머리를 처박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이제는 몸을 숙이고 귀를 막고 미 공군 폭격기가 활주로를 폭격하는 장면을 구경을 하게 되었다.
“그래 잘 퍼붓는다.”
“자아 알 때려 부순다.”
그리고 밤이면 밤마다 깜깜한 활주로 복구공사를 하면서 한 달 쯤 지난 어느 날 외국인 포로들을 격리해서 다른 곳으로 옮겼다.
다음 날 아침 먼동이 터올 무렵 남쪽 하늘에 새카맣게 전폭기 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모두다 몸을 숙이고 엎드리고 했다.
재덕을 민가에 있는 집으로 뛰어들어 부엌에서 귀를 막고 머리를 처박았는데, 활주로 폭격이 시작 되고 무언가 철렁 하며 떨어지는 느낌과 화끈한 느낌에 얼굴을 들어 보니 온 누리가 빨갛게 불구덩이로 변해서 타고 있는데 보이는 것은 부엌에서 안방으로 통하는 문과 다시 윗방 문이 열려져 불문이 되어서 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무조건 문이 열린 안방, 윗방, 윗방 뒷문으로 뛰어 나가면서 불이 붙은 옷을 벗어 버리며 뛰었다.
앞뒤로 기총소사에 의한 총알이 튀었다.
총알이 사람을 피하는 것 같았다.
불붙은 바지를 벗어 던지며 뛰는데, 한 바퀴를 선회한 전투기의 기총소사가 시작 되어
앞뒤로 총알이 파 바 박 튀면서 총알이 재덕을 피해 갔다.
잽싸게 방공호에 뛰어들어 쭈그리고 앉아 있다가 비행기가 물러갔는지 조용해진 다음 정신을 차리고 온몸 구석, 구석을 살펴보니 머리는 그슬려 까치둥지 같이 되고 온 몸에 약간에 그슬린 자욱이 남아 있고 목을 이리 저리 움직여 보니 다친대는 없는 것 같았다.
그렇게 서너 시간이 흐른 뒤 배가 고파서 방공호를 나와서 폭격 받을 곳을 쳐다보니 아직도 영기가 피여 오르고 부서진 집에 함석은 불에 그슬려 하얗게 변해 있었다.
팬티 바람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서 폭격을 맞지 않은 집을 찾아가니 모두가 깜짝 놀라며 하는 말이
“집이며 논 밭 이며 거기에 있던 사람들 다 죽었는데, 어떻게 살았느냐”며 천운이라고 했다.
그리고 다음 날 다른 곳에서 포로가 투입되고 시신을 거두어 묻고 다시 강제 노역이 시작되었다.
강제 노역 중에도 쉬는 시간이면 자기 자랑인지 포로 중에서 무용담을 많이 들을 수 있었다.
어떤 포로는 일사 후퇴 때 대퇴부에 관통상을 입은 병사를 부축해서 후퇴를 하다가 급하고 방법이 없어서 모포에 앉혀놓고 총과 실탄을 주고 분 대원 들이 건빵을 거두어 주고 떠났는데 잘 가라고 손을 흔들며 눈물을 흘리는 전우를 두고 왔다고 하면서 눈물을 짓는 포로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어떤 포로는 이번 횡성 전투에서 포위 될 때 연대장이 헬기를 타고 탈출하려는 걸 이 많은 병사를 다 두고 떠나느냐면서 수류탄 안전핀을 뽑아들고 함께 죽자고 했다는 포로가 있는 가 하면, 어떤 포로는 지난 번 원주서 출발할 때 현병하나가 출병하는 친구와 악수를 하는 걸 사단장이 보고 군 사기를 떨어트리는 행위라고 현병 철모를 걷어차 벗기고 지휘봉으로 머리를 때려서 머리가 터져서 쓰러 졌는데 눈 하나 깜짝 않고
“누가 감히 싸우러 가는 전사의 행군을 지체할 수 없다”
“이 짜식 당장 영창 보내.”
했다면서 역시 장군은 뭐가 다르다는 이야기도 했다.
어떤 포로는 자기가 신병을 훈련시키는 조교였다면서, 어느 날인가 신병들을 훈련 중 시키던 중 연병장서 사단장의 연설이 있었다는데.
“친애하는 장정 여러분 조국이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여기 있는 본관은 사단장이기에 앞서 부모를 둔 아들이기에 큰 결심을 했습니다.”
“여기 있는 장정중 독자 이거나 부모가 늙어서 본인이 아니면 부양할 사람이 없는 사람은 집으로 귀가를 시켜주겠습니다.”
“그러니 귀가를 원하는 장정은 앞으로 나오시오.”
이때 쭈뼛쭈뼛 한두 명이 나오더니 우르르 나오는데 30여명이 넘게 나왔는데. 사단장이
“더 없나?”
조금 침묵이 흐른 뒤
“지금 조국이 백척간두에 서있는 이때 나라보다 가족을 생각하는 이런 병사는 전선에 나가 봐야 총알받이나 되거나 탈영을 해서 전 장병의 사기를 떨어트릴 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교관, 명령이다, 이들을 낙동강가로 데리고 가서 총살 시켜 버려 알았나,”
이에 교관과 조교 5명이 30명을 데리고 강가로 나가서, 교관이 울면서 훌쩍이는 훈련병들을 강가에서 세수를 시키고 다시 부대로 인솔해 데리고 들어온 일도 있었다고 했다.
새로 유엔군 포로와 함께 많은 포로들이 왔다.
그리고 이제는 수용시설이 필요해 지니 학교에다 수용을 했고 정보가 들어갔는지 포로가 있는 곳은 공습이 없었다.
밤에만 하던 작업도 이젠 낮에도 시켰다.
호루라기를 불면서 항공, 항공 하면서 피하라고 하더니 이젠 유엔군 포로들을 풀어놓고 쏠 태면 쏴 봐라 하는 식이 되었다.
폭격기가 폭격 전에 전투기들의 위협사격이 있고 포로들이 피하고 바로 폭격이 시작 되었다.
그러던 것을 인민군들이 호루라기를 불면서 피하지도 노골적으로 피하지도 못하게 했다.
날씨는 하루가 다르게 따듯해지고 있었고. 그러다 보니 이제는 살만하고 일에 요령도 늘고 감시하는 인민군과도 대화를 나누는 적도 있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쉬는 시간에는 모아 놓고 정치학습을 하면서 전향을 해서 의용군으로 나가기를 종용했다.
그러면서 위대한 우리의 인민군 전사들은 지금 미제와 그의 앞잡이 이승만을 부산 앞바다에 처넣을 때가 얼마 남지 않았고, 지금 낙동강을 사이에 두로 공방전을 하고 있다고 선전을 했다.
사상교육이 있고 포로들 끼리 이야기를 하는데 어떤 포로가
“우리 국군이 정말 낙동강 까지 밀렸을 까?”
“에이 빨갱이 새끼들 하는 새빨간 거짓말을 어떻게 믿어 전부다 새빨간 거짓말이야.”
“동무, 지금 뭐라고 했소, 새빨간 거짓말이라니 안 되겠구먼, 따라 오라우.”
재덕의 뒤에 정치군관이 지나가 들은 것이었다.
군관을 따라간 재덕은 따로 떨어진 사택의 방 하나에 가두고 작업관리를 하던 군관하나를 세워놓고 감시를 하게 했다.
“거 임됴심 하지 않고 서리 와 허튼 소리를 해서 고욕을 당하시오.”
인민군 군관이 말을 붙여 왔고 재덕이 씩 웃었다.
“동무 고향이 어디요.”
“춘천입니다.”
“그렇소, 난 평북 룡천이요. 그곳에서 피양으로 와서 공부를 하다가 해방을 맞아서 학교를 다니다 인민군에 징집 되 끌려 왔시오.”
“피양에서 학교를 다녔으면 꽤 잘살았나 보네요.”
“거 잘살았으면 뭐 합네까. 넷날 이야기 디요. 토지개혁 때 다 빼앗기고 남은 게 없이오.”
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그 군관은 심심했는지 가끔씩 이야기를 주고받았고 재덕은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하는 사이가 되었다.
재덕의 이야기 듣는 걸 좋아했다.
이야기 밑천이 떨어지자 할아버지 아버지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그 군관도 마음을 들어 내놓고 이야기를 하다 보니 친숙해 졌다.
“내래 밖에서 있을 때 쉬고 싶으면 편이 쉬시오. 내래 기침을 하거나 김 동무 하고 부르면 쉬다가 일어나 앉아서 반성하는 것처럼 하시오.”
“알았습니다.”
그래서 누워서 자다가 수용소 소장이 보이면
“김 동무! 김 동무!”
하고 부르면 일어나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머리를 숙이고 있으면, 수용소 소장이
“김 동무 반성 많이 했시오.”
“네.”
그렇게 사흘이 지나서 풀어주면서 수용소 소장이 운동장에 포로들을 모아놓고, 연단에 올라서서
“동무들 오늘은 김재덕 동무가 자아비판을 하갔시오. 그러니 잘 알 들으시오.”
그리고 재덕을 연단위로 올라오게 하고 박수를 치게 했다.
“동무들 나 김재덕은 오늘도 조국해방전쟁에 수고하는 인민군 전사들의 노고는 생각하지도 않고 나 하나만 생각하고 일을 하는데 불평을 했고. 더 나가서 인민군 전사들의 전과를 헛소문이라고 하여 비하하는 발언을 하는 우를 저질렀습니다.
이에 깊이 반성하고 앞으로는 인민군 전사들을 생각해서 더욱 열심히 일해서 조국에 보탬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앞뒤로 죽 서 있던 인민군 경비병 들이 박수를 치면서 박수를 유도해 냈다.
그게 공산주의의 자아비판의 실체로 저항적 사상을 가진 사람 중 하나를 조직에서 떼어내어 자아비판을 하게해서 그 집단에서 왕따를 시켜서 사회적 동물인 인간을 자기들 조직으로 하나 둘 끌어들이는 방법을 쓰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한 수법의 희생양이 재덕이었다.
그러고 보니 풀려난 재덕을 멀리하는 눈치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니 무슨 버선 모양 뒤집어서 속을 보여 줄 수도 없고, 답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구국동맹에 가입을 하라고 했다.
서너 번 거절 끝에 해방된 조국에서 고향으로 돌아가 행복하게 살게 해 주겠다며 다시 졸랐고 홀로 독방에 있을 때 감시하던 군관이 눈을 찡긋하며 권유를 해서 가입원서에 지장을 찍었다.
“김 동무, 훌륭한 선택을 했소.”
하면서 소장을 비롯한 인민군 들이 악수를 했다.
여지없이 자의와는 상관없이 재덕은 열성분자가 되어버렸다.
한편 대한민국 국회에서는 1951년 4월 30일 국민방위군의 해체를 결의하였고, 이와 관련된 부정 착복한 국민방위군 고위간부들은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재덕에게는 기회가 찾아왔는데 독방에 있을 때 감시하던 인민군 군관이 재덕을 은밀히 불러서 가보니.
“김 동무 덩말로 여기에 남을 생각이오.”
“무슨 소리요, 나는 가족이 있는 고향으로 가야 합니다.”
“알았소. 가보시오.”
다시 몇 칠이 지나서 그 인민군 군관이 다시 재덕을 손짓을 해서 가보니 거기에는 포로 한명이 있었다.
“서로 얼굴은 보았을 테니 인사들 하시오.”
“나 김재덕입니다.”
“난 한희천입니다.”
“내가 볼 때 이 사람도 밑을 만한 사람이오. 그러니 서로 비밀을 유지하기 바라오.”
그리고 5월로 접어들어 벚꽃이 지는 어느 날 여섯 명이 모여서 서로 얼굴을 한번 익혔다,
그리고 그 군관이 또 한 명의 포로를 데리고 왔는데, 믿을만한 사람이라며 같이 가라고 권해서 모두 7명이 되었다.
그 사람은 8사단 소속이 아니었다.
드디어 5월 15일 북한의 노동절 날 인민군 군관이 우리에게 필요한 지도와 정보를 주면서 7명을 인민군 낙오자 명단에 넣어서 인민군 복장을 지급 받게 해 주었다.
탈출과정에서 어떠한 경우라도 사람을 해치지 말라고 했다.
이틀 후 우리들은 인민군 복을 입고 인민군 군관이 만들어 준 낙오자 명단을 한 희천 대위가 들고 인민군 정치보위부 중대 본부로 갔다.
그 곳에는 수많은 낙오병들이 모여 있었으며 그 중대의 인사군관이 나오더니 우리들에게 동무들은 돌아가서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오라는 지시를 했다.
사실 우리들은 그 날 밤에 탈출을 감행하려고 세밀한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는데 이렇게 인민군 복장으로 갈아입게 되었으니 지금 당장 탈출하자는데 모두 동의를 하였다.
재덕을 비롯한 7명을 즉시 행동을 개시했다.
신속하게 산속으로 숨어들어 별자리를 보면서 남쪽으로, 남쪽으로 걸었다.
그렇게 산속을 한참 가다보니 산중턱에 조그마한 암자가 있었다.
우리 일행은 조심스럽게 접근을 해서 보니 피난을 떠났는지 아무도 없었다.
그곳에 들어가서야 제대로 인사를 나눌 수 있었는데 같이 가기로 한 인민군 하나와 재덕만 초면에 가까워 인사를 나누니 한 희천은 계급이 대위 이고 소위 최돈선. 이등병 윤준철 학도병 서병하 학도병 문영권 이등병 황영수 그리고 김재덕 이등병 이었다.
자연스럽게 계급에 의해서 통제 되고 있었다.
그 곳에서 일행은 인민군 군관이 준비해준, 계급장을 가지고 왔다며 황영수 이등병이 내놔 소대장, 특무 장, 전사 등의 계급장을 각자 달고, 절간을 뒤졌다.
부엌 에 들어가 부엌 바닥을 발로 울려보니 쿵쿵 하는 게 비어 있는 것이 분명하여 나무 가지로 파기시작하고 누군가 연장이 있나 하고 한참을 찾아서 해우 소에 있는 부삽을 가져오고 헛간에 호미 와 괭이를 가져다 파보니 쌀독이 있었다.
그리고 장독에는 각종 장아찌와 된장이 있어서 모두가 나서서 밥을 짓고 반찬을 챙겨서 오랜만에 쌀밥을 먹었다.
쌀을 가지고 갈수 있는 대로 담고 밥도 주먹만큼 뭉쳐서 각자 배낭에 넣고 나무 가지를 살펴보아 가지가 많이 나 있는 쪽이 남쪽이라는 짐작을 해가며 이동을 했다.
그렇게 1km 정도 이동을 해서 길이 있는 곳을 나오니 길에는 중공군 보급부대가 마차를 끌고서 이동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래서 재덕일행은 슬그머니 합류를 해서 인민군 방향이 같은 인민군인 것처럼 따라 붙어서 중공군들의 보급부대를 다음날은 사리원 이틀 뒤에 금천 삼거리에서 표지판을 보니 중부전선 과 서부전선이 개성으로 가는 화살표가 나왔다.
순간 망설였는데 마차는 중부전선 쪽으로 향하고 있어서 지도를 보면서 목적지를 정해 두었던 한 대위가 서부인 개성으로 가라고 해서 서부전선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리고 또다시 얼마 동안 그 길을 따라오다 보니 계정역이라는 곳을 지나서 조금 더 가니 “19”라는 빨간색의 글씨로 표시되어 있는데 이는 인민군의 19사단의 약칭이었고 평양에서 낙오자와 부상자들을 모아 재편성된 사단의 명칭이었던 것이었다.
그 때부터 우리들은 19사단 소속으로 위장하여 조심스럽게 하루를 걸어서 개성을 지나서 이번에는 산길을 택해서 동남쪽을 향해 걸었다.
다음날 강폭이 제법 넓은 강가에 도착해서 주의를 살펴보니 지도와 견주어보아 임진강이 아니면 한강 같다고 한 대위가 말하면서 재덕에게 논에서 일을 하고 있는 농부에게 물어 보라고 했다.
재덕이 다가가 보니 농부를 보니 나이가 비슷해 보였다.
“말씀 좀 묻갔시오, 저 강이 한강 입네까.”
“아니오, 임진강이오. 한강은 여기서 한 사오십리 내려가야 하오.”
“그럼 저. 강 건너에는 인민군이 있습니까? 국군이 있습니까?”
재덕을 평양 사투리를 쓰다가 바로 사투리를 쓰지 않고 정중하게 물었다.
“이곳은 인민군이 가끔씩 나타나고 저 강 건너에는 국군이 주둔하고 있는 것 같소만.”
“저 강을 건너려면 요 부근에 배 같은 것 없습니까?”
“웬걸요. 전쟁 통에 그런 게 일을 리가 있습니까?”
“그럼 헤엄쳐 건널 수 있을 까요?”
“저래 뵈도 강폭이 넓고 물살이 꽤 세요. 헤엄 좀 할 줄 알아도 좀해서 못 건널 거요.
민물 때는 그 닦지 않아도 썰물 때는 엄청 세요.”
이야기를 전해들은 한 대위는 고개를 갸우뚱 하다가 언덕아래에 있는 집 한 채를 발견하고 조심스럽게 접근을 해서 보니 빈집이었다.
우선 대문을 떼어내어 둘이 한 짝씩 들고 강가 후미진 곳으로 가지고 왔다.
“한 대위님 제가 한번 건너갔다 오겠습니다.”
“정말 할 수 있겠나?”
“저 북한강과 홍천강 합수머리가 제 고향입니다.”
“그럼 김 이병이 건너갔다 와.”
“네 알겠습니다. 여기서 곧바로는 못가고 대각선으로 갔다가 올 때는 제대로 와도 200m 아래에 도착 할 겁니다.”
그리고 재덕이 대문짝에 엎드려 양팔로 물을 밀어내며 건너가기 시작해서 삼분에 일 쯤 건넜을 때, 강 건너에서 사격이 시작 되었다.
재덕을 급히 반대편으로 엎드려 다시 돌아오고야 말았다.
그 날 밤을 그 빈집에서 밥을 지어 먹고 나서 한 대위가 물었다.
“어떻게 건너면 좋겠나?”
“제가 보니 사다리가 있는데 사다리 위에 대문을 얹어서 지개꼬리로 단단히 묵고 제가 사다리 앞쪽에서 가면서 헤엄을 칠 테니까 헤엄은 못 처도 두 팔로 사다리를 꽉 움켜잡고 발로 저으면서, 머리만 내놓고 나무가 떠내려가는 것처럼 가는 방법이 제일 나을 겁니다.”
“그 방법 밖에는 없겠네.”
그날 밤 재덕은 지개꼬리를 끌러오고 짚 두 단을 가져다 새끼를 꼬아 놓고 잠깐 눈을 붙이고 아침을 맞아서 밥을 지어 먹고 사다리와 새끼줄 그리고 지개꼬리를 가지고 강가로 가서 사다리에 대문을 묶었다.
그런데 강가에 있는 논둑 밑으로 몇 사람이 왔다 갔다 하는 게 보였다.
열심히 뗀 목을 만들며 곁눈질로 살펴보니 밀짚모자를 쓴 게 농사꾼 같기도 한데, 일은 안하고 이쪽을 힐끔 힐끔 살펴보고 있었다.
농사꾼이라면 일이나 할 것이지 문득 의심이 들었다.
인민군, 아니면 중공군 어제 그 농부는 분명 인민군이 왔다 갔다 했다고 했는데, 다가오면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하나 궁리와 눈치를 살피며 대문짝을 사다리에 거의 묶어 가는데 별안간 그 들이 일제히 사격을 가해 왔다.
무기도 없는 우리는 모두 두 팔을 번쩍 들고 항복의 의사표시를 하자 그들이 접근을 해 왔다.
그러는 중에도 마음속으로는 만감이 교차 했다.
다시 그 지겨운 포로수용소에 가야 하나 그리고 가족을 영 못 만나는가.
그러는 사이에 그들이 접근을 해왔다.
간단한 질문이 있었다.
“당신들 소속이 어디?”
“ 내 국군입니다.”
“국군인데 왜 비무장이야?”
“포로 인데 탈출을 해서 오는 중입니다.”
“소속은?”
제각기 소속을 뎄다.
그러자 들이 댔던 총구를 거두고 우린 해병대 수색중대 요원이라고 밝혔다.
어제 만났던 그 농부도 수색 중대 요원 중의 한 사람이었던 것이었다.
그 농부 차림의 수색 중대 요원은 어제 저녁 때 우리들을 만난 후 비무장 인민 복장을 한 1개 분대 정도의 수상한 자들이 출현하였다는 정보를 수색 본부 중대에 보고 하였고 수색 본부 중대에서는 총 비상 경계령을 발령함과 동시에 우리들의 동태를 면밀히 관찰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재덕은 중공군에게 포로가 된지 5개월 동안 죽을 고비를 넘기고, 해병대 수색 중대 요원들이 강가에 준비하여 놓은 배를 타고 1951년 6월 20일 임진강을 건너 우리가 그렇게도 그리던 대한민국 조국의 품으로 살아서 돌아오게 되는 기쁨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해병 수색 중대 요원들의 안내 하에 재덕일행이 해병대 수색본부 중대에 도착했을 때 그 부대의 지휘관인 해병 중령장교는 우리를 맞이하면서
“아군 귀환병이라고 하더니 인민군이 다 된 사람들을 데리고 왔구먼.”
하면서 재덕일행을 짚차에 태우고 해병 헌병대로 향하였다.
재덕은 그 곳 해병 헌병대와 제1사단 헌병대를 거쳐 서울지구 헌병대로 이송되었으며 그 곳에선 조사를 받는데, 그간의 행적을 물으며 특히 북에서 있었던 것에 대하여 철저히 조사를 했다.
“같이 온 포로 중, 아는 사람이 있는가?”
“없습니다.”
“황 영수는 처음인가?”
“아닙니다, 제가 나오기 일주일 전에 수용소에서 얼 뜻 본 것 같습니다.”
“그전엔 본 일이 없나?”
“없습니다.”
“그자가 증언 하기는 김 이병 자내가 자아비판을 하는 걸 보았다고 하던데?”
“아닙니다, 저는 그전에 황 이병을 본적이 없습니다.”
“그 외에 다른 사람은 본적이 있는가?”
“다른 사람은 몇 번씩 얼굴을 본적이 있습니다.”
“음 그래 틀림없지?”
“네.”
그리고 일주일이 더 지나서 대구에 임시 수용시설로 재덕을 헌병이 데리고 가면서 전쟁 중 있었던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김 이병. 어디 가서 이런 이야기 하지 마 황 영수가 프락치였어.”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어쩐지 조사 과정에서 황 이병에 대하여 철저히 물어 보더라니.
그보다 앞서 황골에서는 국민방위군에 나갔던 재운이 5월 17일 날 돌아와 온 식구들이 기뻐하며 재덕의 소식을 물었으나 알 길이 없다는 소식에 희상의 낙담은 컸다.
그동안 밤마다 장독대에 정화수를 떠놓고 매일 빌었었는데, 하늘이 무심하기도 하지.
재운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접한 용단은 콩을 담가서 두부를 만들어 가지고 재운내 식구들을 불러서 대접을 했다.
대구 임시 수용소에 도착한 재덕은 하루는 수용소 상공을 날아가는 L 19 정찰기 소리를 듣고 다른 사람들은 가만히 있는데, 안절부절 하면서 막 뛰어가며 항공, 항공 하면서 구석을 찾아서 숨었다.
일종에 트라 우마에 빠진 것이다.
첫댓글 정말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돌아왔군요.
파로 끓인 국이 최고군요...
어린시절 선생님이 북한의 자아비판에 대해 이야기 해주시곤 하셨는데, 잘봤습니다.
사상 교육은 전형적인 공산주의자들의 수법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