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점 꽃길에서
일주일 전 백로가 지났고 추석이 코앞으로 다가온 구월 둘째 금요일이다. 웬일로 여름이 물러가지 않아 폭염이 지속되어 더위를 식혀 줄 태풍이라도 닥쳤으면 싶다. 머나먼 필리핀해역에서 한두 개 발생하긴 해도 진로가 우리나라는 아닐 듯하다. 여름철 기단 배치인 북태평양고기압이 여전한 상태에다가 중국으로부터 뻗쳐온 티벳고기압까지 덮쳐 두 겹의 이불을 덮고 있는 형국이다.
스무날 전 팔월 끝자락 가을이 어디쯤 오는가 싶어 둑길로 마중을 나가봤다. 이른 아침 동읍 무점마을로 나가 동판지 둑길을 걸었더니 여름 폭염을 견뎌낸 코스모스가 피기 시작해 장관이었다. 수천수만 꽃송이의 열병을 받으며 둑길을 걸으니 도중에는 아직 봉오리만 맺은 꽃송이는 더 많았다. 거기도 다가올 추석이면 만개할 듯했는데 그즈음 한 번 더 다녀가려 시간을 비워두었다.
그새 변수라면 변수가 초가을 가뭄이 지속되어 물 부족을 겪는 코스모스가 시들어 고생을 많이 할 듯했다. 당국에서 관심을 갖고 애써 가꾼 꽃길이 가뭄을 타서 말라가기에 소방차로 물을 실어 날아 주었으면 싶기도 했지만 그건 내 생각이고 쉽지 않을 듯했다. 이번 주 초반에 한 번 들릴까 하다가 비가 와 주길 기다렸는데 어제 오전 먼지를 재울 만큼 감질나게 살짝 오긴 왔다.
금요일 아침 월영동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소답동에서 내렸다. 마산에서 동읍 방면으로 오는 차 가운데 무점 종점으로 가는 44번 버스를 탔다. 전번에 탔던 34번은 창원 불모산동 기점이고 44번은 월영동에서 왔다. 도계동 만남의 광장을 거쳐 용강고개를 넘어 덕산에 이르기까지 승객은 한 명 더 태워 내려주고 혼자 타고 자여마을을 둘러 무성을 지나 무점마을 들머리에서 내렸다.
전번에 피던 코스모스는 가뭄 속에 제 임무를 다해 꽃잎이 시들면서 씨앗을 맺어갔다. 물길이 빠져나가는 다리를 건너 둑으로 오르자 길고 긴 코스모스 꽃길은 계속 이어졌다. 지난번 화사하던 꽃 덤불은 저물어 가도 앞으로 필 꽃송이는 더 많았는데 어제 스친 빗방울로 시들던 꽃송이는 잠시 생기를 되찾은 듯했다. 꽃잎이 시든 모습을 보기가 안쓰러워 탐방을 유예해 찾은 격이다.
동읍 행정복지 센터 앞에는 추석 연휴 지나 이틀에 걸쳐 무점마을 코스모스 축제가 열린다는 현수막이 걸려 있음을 본 적 있다. 아마 입소문을 타고 홍보와 무관하게 꽃길을 걸으려는 이들이 더러 찾아올 듯하다. 코로나가 유행했던 기간은 단절해도 무점마을에서는 해마다 가을이면 코스모스 축제를 열었다. 인근에 사는 탈북민이 북한 음식을 마련한 시식도 한다는 얘기도 들었다.
저수지 수면은 갯버들이 숲을 이루었고 무성한 연잎은 아직 꽃을 피우기도 했다. 둑 아래 무점마을 앞 들판에는 고개를 숙여가는 벼들이 황금빛으로 물들어갔다. 농로에는 각양각색으로 꾸며진 허수아비가 설치미술 전람회를 하듯 일정 간격으로 세워져 있었다. 멀리 진영 신도시 아파트단지가 드러나고 하늘은 구름이 덮여 햇살이 약해도 한낮이면 폭염이 계속될 기미는 여전했다.
주천강으로 드는 수문을 지난 판신마을 앞으로 가니 거기는 무궁화 꽃길과 함께 백일홍이 피어 알록달록했다. 주남지에서 흘러온 냇물에 놓인 주천교를 건너 주남 들녘을 걸었다. 남포가 바라보인 들녘의 화훼연구소를 앞두고 상등마을에서 장등을 거쳐 가술에 닿았다. 마을도서관 입실 시각이 일러 카페에서 냉커피를 한 잔 받아 목마름을 해갈하고 땀을 식힌 뒤 열람실로 들었다.
아침나절 어제 읽다 접어둔 유홍준의 답사기를 펼쳐 발걸음 보조를 맞추었다. 때가 되어 국수로 점심을 해결하고 쉼터에서 ‘무점 꽃길에서’를 남겼다. “동판지 둑길 따라 길고 긴 가장자리 / 누군가 손길 닿아 꾸며진 꽃길 조성 / 여름내 폭염 견뎌낸 코스모스 피구나 // 화사한 꽃송이가 수없이 어어져도 / 시드는 꽃잎에서 인생도 한 때임을 / 가는 길 문득 깨쳐줘 그지없이 고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