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 / 하린 (시인)
5. 상상 테마4 - 날씨 요소를 바탕으로 상상하며 시 쓰기
@ 소재나 모티브가 갖는 특징과 상상 적용 방법
간절한 정서를 언어로 그려내는 작업을 하는 시에서 날씨는 정서에 자극을 주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날씨에 따라 기분의 변화와 기복이 심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날씨는 감정을 부추기고 분위기를 만들고 기억을 소환한다. 1차적으로는 몸의 감각에 자극을 주지만 그 몸의 감각에 의해 심리 상태가 결정되므로 날씨는 객관적인 형태의 외부 환경으로 끝나지 않고, 주관적인 요소로 확장되어 개별 심리 상태를 대변한다.
이런 날씨를 가지고 상상력이 발동된 시를 쓸 때는 비유적 상상이나 상징적 상상을 통해 날씨를 예민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요즘은 기상이변으로 우기를 자주 만나게 된다. 그런데 그런 우기와 상관없이 “4월엔 유난히 비가 많이 내린다”라고 한다든가 “내가 면접을 보러 갈 때마다 땡볕이 쏟아진다” “슬픔에도 주의보가 있다. 이별한 직후엔 더더욱…”이라고 하게 되면 날씨가 화자의 처지와 심리 상태를 비유적으로 대변하게 되는 것이다. 4월에 왜 비가 많이 쏟아지겠는가? 그것은 4월이 암시적으로 슬픔을 많이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더욱 신선하게 상상을 적용해 보자. 예상치 못한 날씨를 상상으로 떠올려 보는 것이다. 기억 속 날씨, 이별 속 날씨, 심장 속 날씨, 불면 속 날씨, 노래 속 날씨, 빈방이 가진 날씨 등을 상상으로 체험하게 되면 나만의 시를 쓸 수 있는 발상이 자리하게 된다.
필자의 시를 통해 그 소재가 어떻게 상상과 만나 펼쳐지는지 그 과정을 살표보자.
독거노인 표류기 / 하린
이미 난 타국이다 나의 독백은 이종 또는 변종 비의 숨소리가 지나치게 예민하다 폭우는 꼭 내가 사는 마을 가까운 곳에 내리고 좌초된 곳에서 난 우기를 견딘다 이러다 죽음이 즉흥곡처럼 흘러들 거다 내가 바라는 기척은 직전에서 멈출 거다 젖어든다는 건 미세한 균열을 누군가가 읽었다는 거 몸속 공명판의 떨림을 채널이 맞지 않는 주파수를 내주었다는 거 최대 풍속 50m/s 비의 결론을 듣는다 너는 멀어지고 난 빠르게 가라앉는다 결국 내일은 오지 않고 폭풍은 짙어질 것이다 나를 오독하게 하는 세상의 버릇마저 사라질 것이다 축축하고 짭짜름한 예감을 부표처럼 던져 놓고 발견될 죽음의 자세를 생각한다 난파를 즐기련다 하여 한 마리의 서글픈 귀신이 되어 너를 찾아 나설 것이다 내가 완전히 젖어들 때까지 곡진에 곡진을 더해 ― 『야구공을 던지는 몇 가지 방식』, (문학세계사, 2010)
1단계 - 스스로 점검하기 – 메시지 분명히 하기 + 내 시만의 장점 찾기
이 시에서 표현하려는 메시지는 혼자 악천후를 견디는 독거노인의 심리와 존재 양태이다. 그런데 그런 독거노인에 관한 시가 너무나 많이 쓰여 있기 때문에 필자만의 형상화 방법이 필요했다. 그래서 필자는 독거노인의 상황과 날씨의 상황이 맞물리게 하는 방법으로 나만의 시에 도달하려고 했다. 철저하게 ‘타국’처럼 소외된 노인 화자의 입장이 되어 자신의 처지를 냉철하게 강인하게 발화하려고 했다. 타인에게 비굴하게 손을 내밀지 않고 죽음이 다가오는 순간에도 노인은 자존을 지킨다. 그래서 ‘표류’는 정처 없이 떠도는 단순한 행위로만 읽히지 않고 세상을 향한 고고한 저항으로 읽힌다.
2단계 - 객관적 상관물(현상)을 찾기+관찰과 조사 정밀하게 하기
이 시의 객관적 상관물은 폭우다. 덤덤하게 최후를 맞이하려는 노인의 심리 상태를 폭우가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폭우가 “꼭 내가 사는 마을 가까운 곳에 내리”겠는가? 그것은 노인의 마음 상태가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따라 폭우와 관련된 구절을 나열해 봤다. ‘지나치게 예민한 비의 숨소리’ ‘좌초를 더욱 확실하게 만드는 폭우’ ‘이미 정해진 비의 결론’ ‘내일은 오지 않고 폭풍만 짙어질 거라는 예감’ 등이 시를 쓰기 전에 순간적으로 떠오른 표현이다.
3단계 - 확장하기 – 상상적 체험을 섬세하게 극적으로 하기
필자는 다음과 같이 독거노인을 설정했다. 철저하게 혼자된 상황이지만 비관도 하지 않고 비굴하지도 않는 노인. 그런 후 그 노인의 입장에서 상상적 체험을 극적으로 하려고 했다. 강인한 인식을 가진 노인에게 우기는 오직 자신을 침몰시키려는 외부 요인으로 작용한다. 우기는 노인에게 죽음을 예감하게 만드는 날씨인 동시에, “축축하고 짭짜름한 예감을 부표처럼 던져 놓고/ 발견될 죽음의 자세”까지 생각하게 만드는 요소인 셈이다. 이것이 필자가 상상적 체험을 통해서 만난 자존을 지키는 모습이다.
* 또 다른 예문
흰 눈 / 박성현
매일, 흰 눈이 내렸다 가장자리는 높고 안쪽은 따뜻했다 늦도록 기울어진 초승달과 새파란 별이 곁을 지켰다 언덕에 앉으면 허물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앙상한 뼈에 달라붙은 옛날이 초록의 깊은 곳으로 물러났다 나는 울음을 꺼낼 수 없어 매일, 흰 눈을 뭉쳐 당신을 조각했다 바람이 등에 기대 휘파람을 부는 사월이나 피와 녹이 사납게 엉겨 붙는 구월에도 매일, 눈을 뭉쳐 당신의 악보와 의지를 그렸다 흰 눈이 내렸다 제발 그만이라 말해도 흰 눈 내리는 사월과 구월은 그치지 않았다 머물 수 없이 떠나는 이유가 회오리치는 대낮이라면 이제는 믿어야 할까 매일, 흰 눈이 내리고 혼자 부르는 노래는 상냥했으며 당신의 조각은 어김없이 녹아 흘렀다 눈이 내렸다 매일 높고 따뜻한 새가 날아와 당신을 지웠다 흰 눈이 내리면 내 몸에서 쏟아지는 울음을 꾹꾹 눌러 심장 속에 감췄다 심장을 찢어야 울음을 꺼낼 수 있는 한여름, 흰 눈은 그치지 않고 자꾸 당신을 지웠다 - 『내가 먼저 빙하가 되겠습니다』 (문학수첩, 2020)
오늘의 날씨 / 이문희 - 이별 주의보
나 오늘 활짝 펴도 되나요?
매일 죽음을 입고 벗지만 정작 우리는 죽음을 모르죠 그래서 당신과 나 사이엔 기압골의 영향으로 편서풍이 분대요 눈물은 잘 마를 거예요 나는 너무 밝은 게 탈이지만 당신은 언제나 폭풍 같죠 그래서 세상은 폭풍전야예요 그래요 밤새 벼락을 맞거나 국지성 호우에 떠내려 가기도 하겠지만 그깟 피지도 않은 꽃잎이 대수겠어요 우울의 강수량 70퍼센트 연애에 실패할 확률 99.99mm 붉은 칸나가 피었어요
나 오늘 활짝 죽어도 되나요? - 『맨 뒤에 오는 사람』 한국 문연, 2021)
빗방울 랩소디 / 진혜진 우산이 감옥이 될 때 예고 없이 소나기가 쏟아진다 손잡이는 피하지 못할 것에 잡혀 있다 비를 펼치면 우산이 되고 우산을 펼치면 감옥 수감된 몸에서 목걸이 발찌는 창살 소리를 낸다 소나기 속의 소나기로 나는 흠뻑 젖는다 보도블록 위의 빗방울 절반은 나의 울음으로 남고 절반은 땅의 심장에 커다란 구멍을 낼 것이다 버스 정류장 앞 웅덩이가 막차를 기다리는 새벽 2시의 속수무책과 만나 서로의 발목을 잡는다 빗방울 여러분! 심장이 없고 웃기만 하는 물의 가면을 벗기시겠습니까 젖어서 만신창이가 된 표정을 바라만 보고 있겠습니까 어떤 상실은 끝보다 시작이 더 아파 누가 누구를 용서해야 끝이 날까 두 줄을 긋듯 질주하는 차가 나를 후경에 밀치고 검은 우산과 정차 없는 바퀴와 폭우가 만들어내는 피날레 젖어서 죄가 되는 빗방울 용서가 잠겨있는 빗방울 우산은 비를 따라 용서 바깥으로 떠난다 - 『포도에서 만납시다』 (상상인, 2021)
- 출처 : 『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 (더푸른, 20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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