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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행복하여라, 지혜를 찾은 사람! 행복하여라, 슬기를 얻은 사람(잠언 3,13)/정진석 추기경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
[의정부] 새해, 평화 가득하시길!/이기헌 주교
“새해 복 많이 만드십시오.”
우리는 대개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하고 인사합니다. 복은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것이기에, 그것이 일반적이고 옳은 인사말이긴 하지만, 자신이 하느님 뜻에 맞게 살면서 복 받을 일을 많이 해야 한다는 의미에서는 ‘복 많이 만들라.’는 것도 좋은 인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쨌든, 복을 받든 만들든 간에 새해에는 우리 모두에게 복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새해가 시작되는 첫 날, 우리는 평화의 날을 지내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평화가 가득하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우리 자신이 평화의 사도가 될 결심을 새롭게 해야 할 것입니다. 먼저 내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작은 것이라도 구체적으로 실천하고, 이웃과도 화목하게 지내기 위해서 작은 봉사와 나눔을 실천하며, 또 본당과 교구 내에서도 진정한 형제애로 평화를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온 세상의 평화를 위해 우리가 기여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평화는 단순히 무사안일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런 사고도 없고 걱정도 없이 편안하게 잘 먹고 잘 사는 것만이 평화는 아닙니다. 어떠한 어려움과 고통이 덮친다 해도 ‘임마누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믿음만 있다면 평화를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늘 대축일을 지내면서 우리가 기리는 천주의 성모 마리아께서는 하느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으로 평화를 간직하고 사셨습니다. 그분은 운이 좋아서 어느 날 갑자기 하느님께 선택되어 유명해진 스타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잉태를 수락함으로써 당신께 닥치는 수많은 시련과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기 위해서 줄곧 하느님께 시선을 고정한 채, 당신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내맡기셨습니다. 성모님의 삶은 줄곧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를 계속하는 신앙의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시메온의 예언대로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그 엄청난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인 평화를 간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새해 첫 날인 오늘, 하느님께서 복을 내려주시기만을 바랄 것이 아니라, 우리도 성모님처럼 하느님 뜻대로 살아갈 결심을 먼저 합시다. 그리고 새로운 한 해를 그렇게 삶으로써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체험하고, 그 평화가 이웃에게도 퍼져나가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지난해보다 새해에는 우리 의정부교구민 모두에게 더욱 기쁘고 행복한 일이 많기를 빕니다. 혹 어렵고 힘든 일이 더 많더라도 ‘임마누엘’,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면서, 주님의 평화가 가득하기를 빕니다.
[부산] 루가 2, 16-21./서공석 신부
새해 아침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은혜로운 새해를 빕니다. 모두들 건강하시고, 여러분의 가족들과 친지들에게도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충만할 것을 빕니다. 2011년 한 해 동안 하느님이 여러분과 함께 계셔서 그분의 은혜로우심이 여러분을 통해, 여러분 주위에 실천되어 ‘아버지의 나라가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을 빕니다.
오늘은 2011년을 시작하는 초하루이면서,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 축일’이기도 하고 또한 ‘세계의 평화’를 비는 날이기도 합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라는 말은 기원 후 431년 에페소 공의회가 믿을 교리라고 반포하면서 채택한 표현입니다. 마리아가 하느님을 낳았다는 의미로 사용된 표현이 아니고, 예수가 마리아에게서 태어날 때, 이미 하느님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천명하기 위해 사용된 표현입니다.
에페소 공의회가 열리기 전, 콘스탄티노풀 주교 네스토리우스는 예수가 출생할 때는 인간이었지만, 후에 하느님의 아들로 입양되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가 주장하는 대로 예수가 사람으로 태어났다가, 후에 하느님의 아들로 입양되었다면, 그 시대의 사고방식으로는 예수 안에 참다운 하느님을 인식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예수가 출생 때부터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면, 예수는 신앙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와 다를 바가 없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공의회에 모였던 교부들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인 것과는 전혀 다른 뜻으로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라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 그분은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의 아들이었다고 천명하였습니다. 그것을 공의회는 ‘천주의 성모 마리아’라는 말로 표현하였습니다. 따라서 마리아를 천주의 성모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가 마리아에게서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의 아들이었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이 표현은 그 시대 신앙인들이 예수를 올바로 인식하기 위해 필요하였었습니다. 그것은 마리아의 품위를 격상시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삶에서 우리가 참다운 하느님에 대해 알아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천명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신앙의 핵심적 교의(敎義)입니다. 1970년 교회는 그 교의 표현을 사용하여 오늘의 축일을 제정하였습니다. 오늘은 마리아로부터 출생할 때,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라, 그냥 사람이었다고 굳이 고집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이 축일을 교회가 제정한 것은 우리는 다른 이론에 바탕을 두지 않고,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알아듣고 믿는 신앙인이라는 사실을 천명한 것입니다.
오늘은 세계 평화의 날이기도 합니다. 이 축일은 1967년에 제정되었습니다. 과거에 평화는 통치자 한 사람이 보장하는 것이었습니다. 통치자가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 백성을 평화롭게 살도록 해 주면. 모두가 평화를 누렸습니다. 교회가 세계 평화의 날을 제정한 것은 세계의 평화는 이제 통치자 한 사람의 몫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찾아야 하는 가치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전쟁이 없는 상태를 평화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 평화는 ‘하느님의 사랑 받는 사람들이 누리는 평화’를 의미합니다. 성탄날 밤, 베들레헴의 하늘에 울러 퍼진 천사들의 환호가 알리는 평화를 의미합니다(루가 2, 14). 예수님의 산상설교에도 “복되어라,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니.”(마태 5, 9)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이웃을 돌보아주며 사랑하는 사람이 평화를 위해 일하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뜻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우리가 이웃의 자유를 빼앗고 억누르면서 평화를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은 명령하고 지배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는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 살고 싶으면,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쳐주고, 죄인을 용서하면서 그 섬김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이웃을 보살피며 섬기는 사람 안에 참다운 평화가 있습니다.
어느 고을에서 사람들로부터 죄인이라고 낙인찍힌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 그분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머리칼로 닦은 이야기가 루가복음서(7, 36-50)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의 죄는 용서받았습니다...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했습니다. 평화 안에 가시오.”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믿었으니 평화 안에 가라는 말씀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서 하느님이 어떤 보살핌이며, 어떤 은혜로우심인지를 깨달았고, 이제 그 깨달음을 안고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으로 세상에 나갑니다.
우리 앞에는 또 한 해의 세월이 펼쳐졌습니다. 은혜롭게 영접하여 살아야 하는 세월입니다.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위해서도 은혜로운 것이 되게 해야 하는 세월입니다. 새해 아침에 우리는 복 많이 받으라고 서로 인사합니다. 하느님이 베푸신 새해입니다. 은혜롭게 살자는 뜻이 담긴 우리의 인사말입니다. 은혜로우신 하느님이 우리의 뇌리에서 사라지면, 우리는 이 세상에 영원히 살 것 같이 착각하면서, 욕심에 사로잡히기도 하고 이웃에게 무자비하기도 합니다. 1970년 노벨상을 받았던 구소련의 반체제 작가 솔체니친이 망명생활 후, 고국에 돌아와 기차여행을 하면서 동내마다 폐허가 되어 서 있는 성당 건물들을 보고,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저 건물들이 있어서 사람들이 두 발 가진 동물이 되지 않았다.”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기억하게 해 주는 성당 건물들이 있었기에, 사람들이 두 발 가진 늑대가 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은혜롭게 베풀어진 생명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이 이웃에게 은혜로움을 실천하여 그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습니다. 행복은 물질과 명예를 위한 우리의 욕구가 충족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 욕구는 흔히 사람을 두 발 가진 동물이 되게 합니다. 하느님이 베푸셔서 있는 우리의 생존이며, 세월이라는 사실을 의식하는 사람이 이웃에게 관대할 수 있으며,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배워 실천해야 하는 하느님의 진리입니다.
하느님이 베풀어주신 한 해를 오늘 우리는 또 시작합니다. 베푸심이 흐르고 또 흘러서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을 기원하며, 새해 한 해를 살아야 하겠습니다. 좋으신 하느님이 베푸신 좋은 한 해를 시작합시다. ◆
[교황청] 제44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문(요약)/교황 베네딕토 16세
새해의 시작을 맞아, 여러분 모두에게 안정과 번영, 특히 평화가 있기를 간절히 빕니다. 슬프게도 지난 한 해는 박해와 차별, 그리고 폭력과 종교적 불용의 잔혹한 행위들로 얼룩졌습니다. 최근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겪고 있는 고통들과 특히 2010년 10월 31일 시리아 예법 천주교회인 이라크 바그다드 영원한 도움의 성모 주교좌 성당에 가해진 잔인무도한 공격으로 당시 미사 거행을 위하여 모인 사제 2명과 신자 50여 명이 사망한 참사가 생각납니다. 세상의 어떤 지역에서는 개인의 자유와 목숨을 내걸지 않는 한 자신의 종교를 자유롭게 고백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종교 자유의 권리는 인간의 존엄성 그 자체에 뿌리박고 있으며, 도덕적 자유의 근원입니다. 종교 자유가 부인될 때마다 그리고 자기의 종교나 신앙을 고백하며 그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시도가 있을 때마다 인간 존엄이 손상되고, 그 결과로 정의와 평화가 위협받습니다. 각 사람은 개인으로나 공동체로나, 공공장소에서나 사적인 곳에서나, 가르침으로, 행동으로, 출판물로, 예배로, 전례 의식으로, 자신의 종교나 신앙을 고백하고 천명할 권리를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종교 자유가 보장되고 충실히 실천되지 않으면 결국 인간의 존엄은 축소되고 훼손되어, 우상들의 지배, 절대화된 상대적 선들의 지배 아래 떨어지게 될 위험에 놓입니다. 이 모든 것은 사회를 각종 정치적 이념적 전체주의의 위험에 노출시킵니다. 이러한 형태의 전체주의는 공권력을 강조하는 반면 양심의 자유, 사상의 자유, 종교의 자유를 마치 잠재적인 정적인 것처럼 비하하고 규제합니다. 폭력으로 종교를 강요하거나 반대로 종교를 거부하는 사회는 하느님과 개개인에게뿐 아니라 그 사회 자체에도 불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종교 자유는 건전한 정치 문화와 법률 문화가 이룬 업적이기도 하며, 종교인들만의 배타적인 유산이 아니라 지구촌 가족 전체의 유산입니다.
오늘날에도, 점점 더 세계화되는 사회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사회, 경제, 정치 생활에 책임감 있게 참여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사랑과 신앙의 증언을 통하여 정의와 온전한 인간 발전과 인간사의 올바른 질서를 추구하는 수고롭지만 고무적인 일에 소중한 기여를 하도록 부름 받고 있습니다. 공공 생활에서 종교를 배제하면 초월을 향해 열린 이 두 번째 차원이 사라져 버립니다. 이러한 근원적 체험이 없으면 사회를 보편적 윤리 원칙들로 이끌기 어렵고, 기본적인 권리와 자유를 온전히 인식하고 존중할 수도 없습니다.
종교 근본주의와 세속주의는 둘 다 정당한 다원주의와 세속성의 원칙을 거부하는 극단적인 형태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라는 것을 분명히 밝혀 두어야 합니다. 한쪽은 일종의 종교 통합주의를 또 다른 한쪽은 일종의 합리주의를 선호하지만 양쪽 다 왜곡되고 편파적인 인간관을 절대시합니다.
폭력으로 종교를 강요하거나 반대로 종교를 거부하는 사회는 하느님과 개개인에게뿐 아니라 그 사회 자체에도 불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의 계획으로 인류를 부르십니다. 자연적이고 영적인 차원의 전 인간을 포괄하는 이 사랑의 계획은 개인이든 공동체든 온 마음과 전 존재를 다한 자유롭고 책임감 있는 응답을 요청합니다.
서로 다른 종교의 신봉자들이 나누는 대화는 교회가 공동선을 위하여 모든 종교 공동체들과 협력하는 중요한 수단입니다. 교회 자신은 모든 종교의 옳고 거룩한 것을 배척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생활양식과 행동 방식뿐 아니라 그 계율과 교리도 진심으로 존중합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상대주의나 종교 혼합주의가 아닙니다. 교회는 사실 “그리스도를 선포하며 또 끊임없이 선포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요한 14,6) 그분 안에서 모든 사람은 풍요로운 종교 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삶의 다른 분야에서 대화와 진리의 공동 추구를 배척하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이 말씀하신 대로 “누가 말하든 모든 진리는 성령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종교에 기초한 박해, 차별, 폭력과 불용의 행위를 목격하고 있습니다. 세계 주요 종교의 지도자들과 국가 지도자들은 종교 자유를 촉진하고 수호하기 위한, 특히 종교적 소수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노력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종교 자유는 평화의 길입니다. 평화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도 아니고 군사적 경제적 패권에서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기만적 계략이나 간교한 조작의 결과는 더욱 아닙니다. 그보다 평화는 모든 개인과 민족들이 참여하는 정화의 과정과 문화적 도덕적 정신적 고양의 과정을 거쳐 이루어지는 결과입니다.
종교 자유는 심각한 불의와 물질적 도덕적 빈곤에 직면해서도 정의와 평화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줍니다. 지상의 모든 지역 모든 계층에 사는 모든 사람과 모든 사회가 하루빨리 평화의 길인 종교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빕니다.
[춘천] 선물은 포장지 속에 있다/이종찬 신부
2011년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새해에도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을 발견하게 되기를 청해봅니다.
오늘 1독서의 말씀은 새해 첫 날을 맞는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의 복을 기대하도록 인도합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주시리라.” 그러나 하느님의 복은 언제나 ‘기다림’과 ‘인내’라는 두 단어를 기억하게 해줍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삶은 구원자 그리스도를 만나기까지 떠돌이생활과 노예생활, 잦은 전쟁, 유배생활과 식민지 생활 등 온갖 역경과 고난의 시간으로 요약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에서도 마찬가지죠? 도대체 하느님의 복은 언제 주어질 것인지 답답하기만 할 때가 많을 것입니다. 분명히 주실 것이라는 믿음은 있지만 언제인지는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에 2독서는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때’가 있음을 알려줍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스라엘의 모든 역경과 고난의 시간이 지나 때가 찼을 때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에게 보내셨다고 고백합니다. 나아가 우리는 루카가 전한 성모님을 통해 그때가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모님은 아마 사람들 중에 가장 큰 복을 받은 분이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의 삶 역시 가브리엘 천사의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하는 선포에도 불구하고 위기와 고난의 여정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루카는 성모님께서 오늘 복음에서처럼 언제나 당신에게 주어진 위기의 상황들, 당황스러운 일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셨다고 전합니다.
이는 마치 선물의 포장지를 푸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듭니다. 성모님은 그 안에 하느님의 뜻이 있음을 믿으신 것입니다. 천사가 잉태를 알릴 때에도, 목자들이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있는 분이 구원자 그리스도임을 알릴 때에도, 잃어버린 어린 아들을 찾았을 때 자신은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몰랐냐며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할 때에도 그 안에 하느님의 선물이 있음을 믿으신 것입니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성모님을 둘러싼 포장들이 하나씩 벗겨집니다. 고난과 역경, 아픔과 상처의 포장 속에 숨겨진 선물은 바로 하느님께서 미천한 인간인 당신을 그리스도, 곧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게 하심이라 다가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도 이미 복을 받았고 그 복중에 있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그분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미천한 인간을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게 하신 하느님의 은총에 기대어 우리 삶의 포장지를 힘차게 풀어나가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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