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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www.fmkorea.com/68711476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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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후기, 기독교적 가치관에 기반한 빈곤과 연민에 대한 찬사가 여전히 발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이러한 관점은 현실과 일상생활에서 상당히 멀어져 있었다.
빈곤층의 수가 늘어나면서 중세 후기 사회의 빈곤과 구걸에 대한 태도는 크게 변화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일종의 제도화된 사회보장이 점진적으로 발전하면서 개인의 연민과 동정심을 잠식해 갔다.
중세 후기 시대는 이러한 전환기였다.
많은 역사가들이 13세기 이후 기부자들이 빈자들에 대해 보다 차별적인 태도를 보이는 모습을 관찰했다.
더 근본적으로, 빈곤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중세 후기와 근세 초기의 개념은 중세 초기 및 전기의 개념과 달랐다.
초기의 정의는 빈곤을 불가피한 노동 수행의 강제로 이해했지만, 후기의 정의는 이를 완전히 뒤집어 빈곤과 노동에 대한 인식의 방향성이 바뀌게 된다.
빈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노동이 필수라는 관점이 보급되었고, 빈곤은 노동하지 않는 상태에 머무르는 것으로 정의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중세의 노동 개념은 노동을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활동으로 여기는 단계에 도달하게 된다.
노동은 자유의지의 선물을 받은 인류가 취한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이에 따라 인간이 행한 선행이자 구원의 길에 노동이 편입되었다.
신학자 라바누스 마우루스는 이른 시기에 노동(labor)의 신학적 가치를 지지했다.
그는 마태복음 9장에서 그리스도가 장님, 절름발이, 벙어리의 치유 기적을 행한 것은 단순히 이들을 장애에서 치유했다는 것뿐만 아니라, 이제 건강한 몸을 가진 그들이 신앙에 힘입어 하느님의 일을 잘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훨씬 더 긍정적이라고 주장했다.
비록 라바누스 마우루스가 주로 '선한 일'을 종교적 의미로 생각했지만, 그의 견해는 구원에 이르는 수단으로서의 노동에 대한 인식을 넓히는 데 기여했다.
여기에는 신체적, 지적, 그리고 종교적 노동을 모두 포함한다.
빈곤 증가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인구 증가, 전통적인 가족과 이웃의 지원망 상실을 의미하는 이동성의 증가, 그리고 기근과 질병은 14세기경 빈곤층의 수를 급격하게 증가시켰다.
이러한 상황은 빈민에 대한 태도 변화에 큰 영향을 미쳤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지원 시스템의 변화로 이어졌다.
한 연구에서는 가족 구조가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
핵가족 중심의 사회는 구성원들이 더 넓은 범위의 가족의 지원 없이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러한 사회가 늘어날수록 공동체 차원의 지원(자선단체, 교회, 지자체, 국가 등)이 중요해진다는 것이다.
실제로 중세 후기와 근세 초기 북유럽과 서유럽에서는 자선이 주로 단체를 통해 제공되었으며, 사적인 가족 간 지원은 그 중요성이 감소했다.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던 중세 구호소의 발전은 그러한 단체 활동의 한 예이다.
1400년 새프런 월든 구호소의 규정은 "절름발이, 뼈가 뒤틀린 사람, 장님, 침대에 누운 사람" 13명을 위한 지원을 명시했다.
에스파냐의 바르셀로나에 있는 엔 콜롬 구호소는, 1375년에서 1386년 사이의 기록에 따르면 팔다리가 없는 환자, 손이 없는 환자, 그리고 중증의 급성 질환(열, 수종, 호흡기 질환)과 부상(검이나 창에 의한) 환자들을 치료했다.
이처럼 빈곤에 대한 태도의 변화가 시작된 것은 12세기 중반부터였다.
인구 증가, 사회 계층화에 대한 의식 확대, 농업 구조의 변화, 화폐 경제의 발전 및 도시화가 진행되던 시기였다.
중세 시대에는 빈곤에 대한 인식이 자발적 빈곤과 비자발적 빈곤으로 구분되었다.
자발적인 빈곤은 종교적 소명의 일부로 이해되어 칭찬받은 반면, 비자발적 빈곤은 사회적 고통의 상황에서 비롯된 것으로 간주되어 점점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비자발적인 빈곤자들은 가난을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상태에 있는 것을 원치 않았고, 변화와 개선을 원했으며, 특히 부를 원했기 때문에, 그러한 욕망은, 비록 최소한의 소유물과 돈에 대한 것이라 하더라도, 가난한 자들의 영적 건강을 위태롭게 한다고 여겨졌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따르면:
"영적 위험은 자발적이지 않은 빈곤으로부터 온다. 왜냐하면 자발적이지 않은 빈민은 자신들을 괴롭히는 부자처럼 되려는 욕망을 통해 많은 죄에 빠지기 때문이다."
로마의 움베르토(†1277)는 가난한 사람들은 거의 교회에 가지 않고 설교에도 거의 참석하지 않았으며 구원을 얻는 방법에 대해서도 전혀 알지 못한다고 불평했다. 따라서 일부 중세 지식인들은 부를 갈망하는 탐욕의 죄에 빠지지 않기 때문에 자발적 빈곤자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이 낫다고 주장했다.
이미 4세기에 교부 예로니모는 "넝마와 신체의 오물 속에서 타오르는 욕망이 지배하는" 비자발적인 빈곤자들보다 자발적인 빈곤자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이 더 낫다고 말했다.
13세기에 프란체스코회와 도미니코회 수도사들은 '진짜' 가난한 사람들을 배제하면서 자신들의 탁발 활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 주장을 인용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 주장에 모두가 동의한 것은 아니다.
13세기 후반에는 이미 자발적 빈곤에 대한 비판이 있었다.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 즉 몸이 멀쩡한 구걸 수도사들은 다른 기독교인들에게 구걸해서는 안 된다는 관점이 있었다.
이 관점은 사도 바울의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는 훈계에 근거한 것이다.
이러한 교회 내부의 비판은 점차 흔해졌다.
중세 성기에 자발적 빈곤이 칭찬할 만한 것으로 여겨졌지만, 14세기 초가 되면서 교황 문서에서는 더 이상 빈곤을 최고의 미덕이라고 언급하지 않게 된다.
14세기 백과사전의 저자로 여겨지는 자크 르 팔머는 몸이 멀쩡한 남자들이 일을 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혐오감을 느꼈기 때문에, 구걸하는 수도사들을 비판했다:
"탁발 수도사나 육체노동이 가능한 멀쩡한 사람들에게는 구호품을 주어서는 안 된다."
14세기에 이르러서는, 일반적인 문헌들에서도 종교적 자발적 빈곤이 다소 애매하게 여겨지기 시작했다.
랭글랜드는 '농부 피어스'에서 니드라는 캐릭터를 통해 "수도사들과 그들의 위선적인 자발적 빈곤"을 풍자했다.
니드는 궁핍한 사람(배고프거나 가난한 사람)만이 필요한 것을 가져갈 자격이 있다고 말한다.
실제적이고 비자발적인 빈곤의 지위 하락에 비해 자발적 빈곤의 문화적 가치가 높아지는 동안, 신체 장애에 대한 관점에 영향을 미치는 또 다른 종교적 발전이 있었다.
금욕주의와 신체적 고행으로 정의되는 성인의 개념이 발달한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1260년대에 성체실재론의 도입과 함께 그리스도의 몸과 같은 종교적 신체, 그리고 성인의 몸이 더욱 중요해지면서, 평범한 사람들의 실제 몸은 덜 중요해지기 시작했다.
자발적 종교적 빈곤과 비자발적 실제 빈곤 사이의 긴장과 마찬가지로, 성인, 신비주의자, 금욕주의자들이 견디는 자발적인 신체 고행(때로는 신체 절단)과 평범한 사람들이 애초에 피하려고 애쓰거나, 괴로워하자마자 치료받기를 원하는 비자발적 신체 장애 사이에 긴장이 생겼다.
이러한 맥락에서 핵심적인 사안은, 단순히 경제적, 기타 '하부구조'의 측정 가능한 사실에 의해 야기된 후기 중세 빈곤에 대한 태도 변화를 설명해서는 안 되며, 몸에 대한 문화적, 종교적 개념의 변화와 같은 '상부구조'의 중요성을 과소평가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중세 사람들이 가장 걱정했던 것은 가짜 장애였다.
겉으로는 장애가 있는 것처럼 위장하지만 실제로는 멀쩡한 것이다.
현대 학자들은 이를 후기 중세의 현상으로 보고 있지만, 사실 이러한 '사기성 거지'에 대한 비난은 더 오래된 뿌리를 가지고 있다.
806년 님베헨에서 발표된 카롤링거 왕조의 칙령은 육체 노동을 거부하는 거지(즉 신체적으로 건강한 거지) 에게 구호품을 주는 것을 이미 금지했었다.
경건왕 루트비히는 820년경 거지와 빈민을 관리하도록 명령하여, 건강한 자들이 그들 사이에 숨는 것을 막고자 했다.
또한 13세기 초, 주창자 피에르의 저서에서는 부적절한 자선을 비판하며, 거짓 눈물이나 속임수로 돈을 갈취하는 거지들을 강하게 규탄하고 있다.
자선에 대해 점차 신중하면서, 노동을 통한 생활을 강조하는 '보통' 서민들의 사고방식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1282년 성 루이의 기적에 관한 조사에서, 레밀리 출신의 루시라는 맹인 여성은 자신이 시각 장애를 가장하지 않았다는 증거로, 자신은 장애를 이용해 구걸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14세기가 되면 '사기성 거지'에 대한 우려는 문학에도 표현된다.
윌리엄 랭글랜드의 '농부 피어스'에서 작가는 이런 거지들을 가혹하게 비난하고 있다.
심지어 어떤 거지들은 자신의 아이들이나 타인의 아이들의 등이나 팔다리를 부러뜨리는 등 신체를 훼손해 동정심을 유발하고 더 많은 구호품을 받아내기도 했다.
1440년대 후반 파리 인근에서 거지, 살인자, 강도로 구성된 범죄 조직이 체포되면서 이러한 문학적 묘사가 끔찍한 현실임이 드러났다.
이들은 어린아이들을 납치해 고의로 다리를 절단하거나 눈을 뽑아내는 등 신체를 훼손했다.
조직의 의도는 이러한 잔인한 방법으로 동정심을 유발하고 구걸을 더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이 사례는 극단적인 범죄 사례였으며, 일반적인 '사기성 거지'를 대표하지는 않다.
허구의 세계로 다시 초점을 맞춰보면 다소 덜 끔찍한 이야기들을 찾아볼 수 있다.
15세기 프랑스의 시인 유스타슈 데샹은 게으른 사기꾼 거지들이 속임수로 사람들을 기만하는 것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출했다.
이로 인해 그는 신체 장애가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의심을 품었고, 장애인 전반을 불신했다.
15세기 초의 기적극 '성녀 제네비브의 기적'에 등장하는 거지들 중에는 경련을 흉내내는 나병 환자, 손수레에 실려 다니는 마비 환자가 있다.
또한, 수종으로 온몸이 부어오른 사람, 다양한 부수적인 고통과 질병이 있는 사람, 꼽추, 열병과 치통으로 얼굴이 일그러진 사람 등도 등장한다.
이러한 인물들은 중세 연극에서 언제나 코믹한 요소로 등장하며, 연민이 아니라 그들의 장애가 진짜인지에 대한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야곱의 우물'이라는 작품 역시, 구부러지거나 실명한 것처럼 사기치며 사람들의 동정심을 이용해 돈을 뜯어내는 거지들에 대해 독자들에게 경고한다.
이러한 가짜 거지들은 구걸해서 얻은 돈을 선술집에서 탕진하며, 작가는 부자들에게 이런 '위선자들'은 굶어죽게 놔두라고 조언한다.
문학 작품에서 거지들의 세계는 종종 뒤집힌 세상으로 묘사된다.
정상 세계에서는 '정직한' 노동이 물질적 부의 선결 조건이지만, 그들의 세계는 더욱 기형적이고, 불구이거나 그런 척할 수록 더 많은 구걸 수입을 얻는다는 내부 논리가 존재한다.
속임수로 거짓 장애인 노릇을 할 필요가 없을수록, 구걸에 더 적합해지는 것이다.
이는 허구 속 뒤집힌 세계에서는 장애가 있는 자가 더 강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농부 피어스'에도 이런 가짜 거지들이 많이 등장한다.
랭글랜드는 온갖 종류의 사기꾼, 게으름뱅이, 위선자 등을 다 알고 있다.
구걸하는 자, 방랑자, 기만자들 등, 국가 및 지역 법령과 기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물들이다.
랭글랜드의 글에는 "눈이 멀었거나 다리가 부러진 것으로 가장한 거지들이 피어스에게 자비를 베풀어달라 애원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이들은 기도를 해주는 대가로 자선을 바란다는 사회 계약을 주장하지만, 피어스는 그들의 장애가 진짜라고 믿지 않고 질책한다:
"정말 눈이 멀거나 장애가 있거나 사지가 묶여 있다면 그대들은 일 하지 않고도 음식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아니라면 일을 해야 한다."
다른 지역과 세속 문서들에서도 거지들을 구분했다.
1343년 아우크스부르크의 법령은 거지를 9가지로 나누었다.
간질을 가장하는 이들, 친족을 살해한 죄로 속죄 중이라고 하는 이들, 질병을 가장하는 이들, 성직자 옷을 입는 이들, 로마 순례자로 가장하는 이들, 병든 수도사로 가장하는 이들, 순례자로 위장하는 이들, 정신질환을 가장하는 여성 거지, 그리고 세례받은 유대인이라고 말하는 이들.
이런 분류는 이후 더욱 심해져 1350년에는 브레슬라우에서, 1450년에는 바젤에서 거짓 거지에 대한 기록이 등장한다.
1475년에는 가짜 장애가 언급되고 1510년경에는 28가지 유형의 거짓 거지 '유형'을 다룬 일종의 경찰 업무 지침서 격인 '리베르 바가토룸'이 출판된다.
그 중에서도 '순례자로 가장하는 사기꾼들'에 대한 우려가 컸던 듯 하다.
이들은 형이상학적인 차원에서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1485년경 이탈리아에서는 43가지 '유형'의 사기성 거지를 다룬 논문이 유행했다.
중세 후기 사회는 가난한 자들이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구걸을 하면서 사기와 위장을 자행한다고 비난했다.
구걸은 필요에 의해 정당화되어야 했고 신체 장애가 그러한 정당한 이유 중 하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으로 인해, 비록 문헌에서는 거짓 장애가 언급되었다 할지라도, 신체 장애 자체가 당시에는 정당한 구걸의 요건 중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15세기의 미술 작품에도 '장애인' 유형의 거지가 자주 등장한다.
구걸의 자격이 장애에 크게 의존함에 따라 거지의 신체는 점차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하지만 중세 사회의 모든 계층이 장애인 거지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13세기 말 성왕 루이의 기적에 관한 기록 중에는 평범한 사람의 목소리가 드물게 보존되어 있다.
대장장이 로베르는 심하게 불구가 된 한 여성이 기적적으로 치유된 것을 증언한다.
로베르는 "여성이 그토록 고통스럽게 움직여야 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녀가 질병을 위장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터무니없다"고 말한다.
이는 지식인들의 기록과 달리, 일반인들은 눈으로 직접 본 증거를 신뢰했고 진짜 장애와 사기를 구분할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심지어 기적을 조사하는 '관리'도 장기간 지속되는 질병이나 장애는 위장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었다.
1290년대에 루이 9세를 성인으로 추대하기 위한 기적을 조사하던 추기경은 "장애가 있는 것처럼 걸었고 춥고 괴로워했다"는 목격담만으로는 신빙성이 없으나, 고통이 너무 오래 지속되었다는 점을 증거로 제시한다.
상업적으로 가장 발전된 지역들은 거지에 대해 제한적인 법규를 가장 먼저 제정한 지역이기도 했다.
북부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이 이러한 조치를 처음으로 시행했다.
13세기의 식량난으로 인한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던 시기에 제노바에서는 임시방편으로 급료를 받은 노꾼들과 함께 몇 척의 갤리선을 고용했다.
그리고는 모든 가난한 사람들이 해안으로 가면 공동체로부터 빵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통지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모두가 배에 올랐다."
제노바 당국은 사실상 그들의 가난한 사람들의 '문제'를 사르데냐로 수출했다.
같은 소식통에 따르면, 그들은 그곳에서 버려졌지만, 적어도 그곳에는 먹을 음식이 충분했다.
1288년 볼로냐의 법령은 "거짓으로 절름발이인 자들과 거짓으로 눈먼 자들"을 해결이 필요한 "문제"로 묘사했다.
피렌체 사람들은 1294년에 눈먼 가난한 사람들을 도시 밖으로 내보내는 입법 조치를 제정했다.
이것이 얼마나 실행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1320년대에도 시 당국이 장님들이 도시에서 공개적으로 구걸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재정적으로 스스로를 부양할 수 있는 사람들만 피렌체에 살도록 허용했다고 한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1300년에 "빈민들은 도시를 돌아다니며 구걸하기보다는 구호소에 수용되어야 한다"는 법령을 만들었다.
1440년대 피렌체의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는 신체 장애가 있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매우 낮은 평가를 내렸다.
인문주의자이자 미학자였던 그는 아마도 이들이 시각에 미치는 불쾌한 영향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그는 병원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가 장애인의 공개적인 모습을 차단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은 "그들의 구걸로 정직한 시민들을 쓸데없이 방해하거나 그들의 역겨운 외모로 까다로운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지 않아야 한다".
또한 그는 "문지방을 돌아다니며 누더기 옷을 걸치고 자선을 구하는 절름발이들을 도시에서 용납하지 않은" 특정 이탈리아 군주들의 정책을 지지했다.
구호소가 보기 흉한 가난한 사람들을 가두고 격리하는 장소라는 알베르티의 견해와 대조적으로, 다른 지역과 다른 시대에는 구호소에 입원한다고 해서 수용자들의 구걸이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장애인의 경우 예외적이었는데, 이는 그들이 질병으로 인해 자선을 구하기 위해 ‘나다니지’ 못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정서는 카스티야의 알폰소 10세가 편찬한 13세기 법률집인 '7부 법전(Las Siete Partidas)'에 표현되어 있는데, 여기서 자선은 주로 "버려진 아이들, 연약한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보호받고 있는 구호소를 떠날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불구가 된 사람들"과 같이 "스스로 구걸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주어져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수용자들은 정기적으로 식량을 배급받기는 했지만, 13세기에 루이 9세가 300명의 맹인을 위해 설립한 파리의 유명한 시설인 캥즈뱅 구호소에서 수용자들은 기관의 수입을 보충하기 위해 구걸하도록 허가받았다.
교황 클레멘스 4세는 캥즈뱅의 거지들이 파리의 교구 교회들에 받아들여지도록 허락하는 교황 칙서(1265년)를 발표했다.
그 결과, 이 구호소가 설립된 직후에 시인 뤼트뵈프는 맹인들이 매일 파리 주변을 헤매며 "볼 수 없는 300명"을 위해 자선을 구하는 것을 풍자적으로 비판했다.
트루아(1263년의 법령)와 앙제(13세기 초의 법령)의 구호소에서는 만성 질환자, 영구적 장애인, 신체 장애자들이 거부될 수 있으며, 시설이 감당할 수 없는 숫자의 전염병 피해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병 환자뿐만 아니라 신체가 절단된 사람(demembrati), 마비된 사람이나 신체 장애자(contracti), 맹인들도 다른 구호 수단을 찾아야 했다.
이러한 배제된 빈곤층들은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을 수 있다.
다시 말해, 그들은 기관의 도움 없이도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었을 것이라는 뜻이다.
1434년 발랑시엔의 성 자크 구호소는 노인, 마비 환자, 정신질환자 및 기타 불치병 환자들을 배제했다.
하지만 이 구호소는 일시적인 숙박을 제공하는 순례자 쉼터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13세기에 작성된 익명의 교회법 관련 서적 'Summa pastoralis'는 구호소가 신체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지원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매우 분명하게 밝혔다.
"경건함을 가장한 많은 시민들이 이러한 종류의 집들에 부담을 주곤 한다. 그들은 장애가 있거나, 눈이 멀었거나, 늙고 무력한 가족이나 이웃 사람들을 구호소에 맡긴다. 구호소는 여행 중인 가난한 사람들, 특히 회복될 때까지 환자들을 환대하기 위해 설립된 것이지, 이런 사람들을 위해 세워진 것은 아니다."
장애와 질병이 서로 연관이 없다는 사실, 그리고 그 사실이 구호소 입원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성 루이의 기적에 관한 두 가지 사례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장느 드 세리스라는 여성은 다리가 마비되었지만, 오텔 디외 드 파리에 "수녀들이 목발을 사용하는 법을 가르쳐 그녀가 외출해서 구걸할 수 있을 때까지" 머물렀다.
또한, 기욤 드 코즈라는 장애인 남성은 "열병으로 인해 외출해서 구걸할 수 없을 때"에만 같은 구호소를 이용할 수 있었다.
심지어 캉브레 구호소처럼, 구걸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을 입원시키려는 명확한 의도가 있었던 경우에도 이러한 규정은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1220년에 제정된 이 구호소의 규정은 '구걸할 수 없을 정도로 아픈' 사람들만 입원시켜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는 물론 구걸 자체가 비난받지 않고 생계를 위한 정당한 수단으로 여겨졌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하지만 구걸자가 적법한 상태여야 했던 것도 사실이다.
14~15세기 이후, 많은 독일 도시들은 거주하는 가난한 사람들(Hausarme)을 보호하고 외지에서 온 이주 빈민들을 배제하거나 구걸을 금지하는 법률을 제정하기 시작했다.
뉘른베르크는 가장 이른 시기에 독일 구걸법(Nürnberger Bettelordnung 1370)을 선포했는데, 이 법은 교회를 제외한 다른 모든 장소에서의 구걸을 금지하고, 특별한 표식이나 토큰으로 구분되는 등록된 거지들만이 다른 곳에서 구걸하도록 허용했다.
마치 유대인이나 나병 환자가 특정한 옷을 입어야 했던 것과 유사하다.
공무원들은 이 토큰을 발급하는 역할을 맡았고, 발급 후 6개월 동안만 유효했다.
따라서 1년에 두 번, 거지들은 자신들이 '도움이 필요한 자'임을 입증해야 했다.
이를 위해서는 2~3명의 신뢰할 수 있는 증인이 필요했고,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구걸 토큰 발급이 거부되었다.
외국인 거지들은 뉘른베르크에서 3일 동안만 머물 수 있었고, 그 후에는 떠나야 했으며 1년 동안 돌아올 수 없었다.
레겐스부르크에서는 질병을 위장하는 남성 거지와 임신을 위장하는 여성 거지는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기본적인 기도문을 암송할 수 없는 거지는 도시에서 추방되었다.
정신 장애로 인해 기도를 할 수 없다면, 기도하는 법을 배우도록 강요받았다.
레겐스부르크 시 당국은 단순히 정직한 거지와 게으른 거지를 구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구걸하는 사람들은 특정 지역에 모이는 경향이 있었다.
예를 들어 13세기 후반 파리에서는 "마비되거나 절름발이인 거지들이 흔히 특정 장소, 보통 그들의 교구 교회를 자주 찾았다."
그들은 교회 앞이나 심지어 교회 건물 안에서도 관행적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공간 집중 현상으로 인해 중세 후기에는 구걸에 대한 전반적인 우려가 구걸의 지형학으로 관심을 돌리게 되었다.
레겐스부르크에서는 도시 의회가 1388년 제정한 구걸 금지법에 따라 거지들이 시민들의 집에서 자선을 구하는 것을 금지했으며 특정 유형의 사람들(순회 예능인)은 도시에 출입하는 것 자체를 금지했다.
교회 내에서의 구걸을 특히 억제해야 하는 관행으로 간주하는 등 구걸에 대한 공간적 제한을 규정하는 법률이 제정되기 시작했다.
쾰른(1330년 2월 26일, 대주교 하인리히 2세 법령의 14조에서 교회 내부 거지에게 기부하는 것을 금지), 바젤(1429년) 또는 아우크스부르크(1459년)의 예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쾰른에서는 맹인들은 대성당 밖에서 계속해서 구걸했는데, 이곳이 그들의 정기적인 장소였고 1484년 5월 성 레빌리엔 병원에서 2실링을 받는 등 공식적으로 구호금을 받았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교회 내부에서 구걸을 못하게 하면서, 거지들은 성직자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되었다.
또한, 자선과 동정심, 그리고 개인의 영혼을 위한 돌봄에 대한 기독교적 의무라는 이전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린 것이기도 한다.
종교 개혁기에 이르면서는 구호 자체에 대한 비판이 일어났고, '건강한 거지'에 대한 고정관념이 구호에 반대하는 논거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잉글랜드의 경우, 체스터 시는 반(反)구걸 입법의 한 사례를 보여준다.
체스터에서는 1349년 흑사병 위기 이후 거지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면서 일련의 조례를 제정했다.
"생활 수단 없이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해 1393년에 최초로 기록된 조례가 제정되었고, 이 금지 조항은 1404년에 반복되었다.
구걸에 대한 이러한 규제가 이끌어낸 결과는, 거의 대부분의 경우 신체 장애자들이 '진정으로 도움이 필요한' 거지의 범주에 포함되어 있었고, 유럽 중세 후기에 많은 도시 당국이 제정한 바람직하지 않은 거지들에 대한 단속 조치로부터 여전히 약간의 보호를 받았다는 것이다.
구걸에 대한 도시 당국의 제한은 또한 현지인(즉 합법적인 거지)과 외부인을 구분하게 만들었다.
일부 도시에서는 자선을 받을 만한 자원이 점점 더 부족해지자 가난한 사람들 사이의 경쟁이 심화되었고, 이로 인해 걸인 형제 조합과 같은 길드식 조직이 발달하기도 했다.
그 중 가장 초기의 것은 13-14세기에 제노바에 존재했던 맹인들의 걸인 형제회인 Consorzia dei Ciechi인 것으로 보이며, 비슷한 형제회들이 베네치아(1315년 Scuola degli Orbi)와 파도바에서도 설립되었다.
에스파냐에서는 1329년의 법령에 따른 바르셀로나와 발렌시아의 맹인 형제회가 있다.
1442년의 후대 문서는 "집과 약간의 재산을 소유하고 유산을 받을 수 있는 바르셀로나 시의 절름발이, 맹인,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성령 형제단"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협회, 특히 많은 도시에 존재했던 종교적 형제회를 모델로 삼은 후기 형제회와 달리 바르셀로나와 발렌시아 길드는 조직 내 상호 연대와 호혜를 제공했다.
예를 들어 맹인을 위한 길잡이(Lazarillo)를 대여하고, 질병 시 도움을 주거나, 받은 자선을 공동으로 나누는 등의 활동을 했다.
중세 후기 바르셀로나에서 '자선을 받기에 부적합한' 또는 덜 자격이 있는 가난한 사람들(pobres captaires)에는 맹인과 귀머거리 거지들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아마도 이 사람들이 '밥벌이' 즉 구걸을 하고 있었고 따라서 이미 충분한 도움을 받은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시각장애인 이동 보조기구의 역사적 증거와 전제 조건에 대해 잠깐 탐구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안내인(Lazarillo)은 시각장애인에게 주요 '이동 보조기구'였다.
문학작품에서 안내인이 시각장애인을 기만하고 학대하는 내용이 자주 등장하지만, 실제 특정 인물의 경험을 중립적으로 기술한 예시도 있다.
기욤 드 생파투스의 1280년대 작품 '성 루이의 기적들'에서 아녠 드 퐁투아즈는 "시각장애인들이 다니듯 누이의 어깨에 손을 얹고 다녔다"고 한다.
페트라르카의 '노년의 편지' 중 한 편에서는 폰트레몰리 마을의 문법 학교를 운영했던 "페루자의 그 늙은 시각장애인 스트라마초가 10대 아들의 어깨에 기대어 나폴리에서 페트라르카를 만나러 왔다"고 묘사한다.
시각장애인은 주로 다른 사람, 특히 어른의 인도를 받았다.
중세 시대 시각장애인 안내견 사용에 대한 증거를 찾으려 노력했지만 단편적인 문헌 언급과 이미지 몇 개만 발견되었다.
안내견은 신뢰할 수 없다는 이유로 '최후의 수단'으로 여겨졌다.
14세기 중반의 중세 고지독일어 시 '여성들의 왕관'에서 하인리히 폰 뮈겔른은 시각장애인이 개, 아이, 지팡이에 의지해 방황한다고 지적했다.
바톨로메우스 앵글리커스의 '사물의 성질들'에서도 개의 부적합성을 언급했다.
개와 아이들은 너무 쉽게 주의가 산만해져, 개가 뼈를 보면 시각장애인을 진흙탕으로 끌고 가버린다는 이유에서이다.
미술사학자 모셰 바라쉬는 14세기 초 플랑드르 필사본의 삽화를 인용하며, 개에게 줄로 이끌리는 지팡이를 짚고 있는 시각장애인을 예로 들었다.
개는 동시에 구걸용 그릇도 물고 있다.
바라쉬는 이것이 안내견에 대한 관념을 보여준다고 해석했지만, 나는 이 개가 단순히 '반려동물'에 불과하고 훈련된 안내견은 아니라고 본다.
또한 14세기 문학작품인 프랑코 사케티의 '트레첸토노벨레'에서 세 명의 피렌체 출신 시각장애인 거지와 그들의 개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들은 "각자 구걸 그릇을 들고 다니도록 훈련된 개에 이끌려" 성모 대축일 기간에 피사로 이동했다고 한다.
그리고 여관에 들를 때 "개에게 줄을 매고 들어갔다"고 묘사된다.
바라쉬는 이 사례를 들어 중세 시각장애인 안내견의 '일반성'을 주장했다.
Irina Metzler, A Social History of Disability in the Middle 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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