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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16.05.01)]
/ 갈라냄(이장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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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설교(16.05.01)]
/ 열왕기하 8:7-15 '우는 선지자'
마태복음 13:47~50 갈라냄 2014. 5. 1
“47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48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 49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50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
오늘 말씀은 마태복음 13장 천국 비유의 마지막 비유입니다. 그동안의 천국 비유들을 살펴보면 천국은 사람이 손 될 수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천국은 사람하기 나름이 아니라 하나님하기 나름인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이 우리에게 불편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이미 선악과를 따 먹은 후의 인간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과를 따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그것을 따 먹으면 너도 하나님처럼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 유혹에 넘어간 것을 성경은 인간의 타락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타락한 이후에 태어난 인생들이기에 모두가 자기중심의 선악체계가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들은 어느 누구나 예외 없이 자기를 진리의 척도로 삼아 모든 선악을 판단합니다. 가족도, 이웃도, 세상도, 하나님도 자기중심으로 선악을 판단합니다. 자기를 이롭게 하면 선으로 보고 자기를 해롭게 하면 악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들과 천국을 의논 할 수가 없습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하듯이 천국도 모두 자기중심적인 천국을 만들려고 할 것입니다. 천국을 여러분들에게 설계하라고 하면 누구 중심으로 설계를 하시겠습니까? 제가 20대 초반에 하도 돈이 없어서 주택복권을 두 번 사본 적이 있습니다. 주택복권에 당첨되면 어떤 집을 지을지 상상을 해 보았습니다. 완전히 자기중심적인 구조를 생각하였습니다. 돼지 꿈 꾸고 그 당시 오백 원짜리 복권 두 번 사 보았는데 한번은 꽝이고 한번은 오백 원짜리 당첨이 되어 그것으로 다시 복권을 샀는데 그것도 꽝이었습니다. 그 뒤로 복권을 사지 않았습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천국을 우리 손에 맡기지 않습니다. 이미 창세전에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의 언약대로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 천국에 선택되어 들어가는 자들은 자기중심성이 완전히 무너지도록 만들어 데리고 가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주가 되시도록 하시는 일이 그 사람이 천국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입니다. 죽어서 가는 그런 천국이 아니라 지금 그리스도가 주인 되는 천국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가 됩니다.
오늘 본문을 봅니다. “봉독”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다고 합니다. 그물이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을 내 버린다고 합니다. 세상 끝에도 이렇게 된다고 합니다.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서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간다고 합니다. 그러면 나는 좋은 물고기 입니까? 나쁜 물고기 입니까? 이 질문에 직면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의 특징을 말하지 않습니다. 어종이나 물고기의 크기를 말하지도 않습니다. 어부가 그물을 쳐서 자기가 원하는 물고기를 잡는 것이 당연하듯이 그저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를 갈라내는 기준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린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비유의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마태복음 13:36~43절을 봅니다. “봉독” 가라지 비유의 해설입니다. 여기서 밭은 세상이며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곳에 원수가 가라지를 뿌린 것입니다.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입니다. 이들이 함께 자라고 있는 것을 보고 종들이 가라지를 뽑아야 하지 않느냐고 주인에게 말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대로 두라고 합니다. 세상 끝인 추수 때에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듯이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물고기 비유나 가라지 비유의 결론은 같습니다. 갈라지고 풀무 불에 던져져서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된다고 합니다. 참으로 무서운 갈라냄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기준은 아직 모릅니다.
오늘 본문에서 좋은 물고기와 못된 물고기가 나오는데 ‘못된’이라는 이 단어가 마태복음 7:17~18절에 나옵니다.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여기서 ‘못된’ 이라는 말과 오늘 본문의 ‘못된’ 이라는 단어가 같은 말입니다. 못된 열매를 맺는 나무는 찍혀서 불에 던져집니다. 못된 나무인지 아닌지는 그 열매로 알게 됩니다. 그러면 물고기를 분류하는 못된 것의 기준도 여기와 같이 연결하여 볼 수 있습니다. 무엇이 좋은 것인지 무엇이 못된 것인지 성경은 어떻게 구별하고 있느냐는 것을 찾아봅니다.
마태복음 7:21~23절입니다.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이미 앞에서 본 내용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대단한 능력을 행하였는데 이들은 주님께서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떠나가라고 합니다. 왜 이렇게 되는 것입니까? 이어지는 말씀을 보시면 그들의 존재기반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반석이신 그리스도위에 세워져 있느냐 아니면 땅의 티끌인 인간 위에 세워지느냐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위에 세워진 사람이라면 반드시 자기 부인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내가 이렇게 잘했다는 것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위에 세워지지 않고 자기 자신이 여전히 자진의 존재기반으로 있으면 자기 부인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자신이 하는 일이 다 옳다고 여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갈라내시는 것은 하늘나라에서 필요 없는 것들을 갈라내시는 것입니다.
성도는 지금 여기서 갈라냄을 당합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날에 갈래냄을 당하는 자들은 풀무 불에 던져져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왜 갈라냄을 당한 자들이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는 것입니까? 자신은 주의 이름으로 대단한 일들을 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날에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고 하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교회도 다니지 않고 예수가 누군지 알려고도 하지 않고 거저 눈에 보이는 세상이 좋고 돈이 좋아서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 쾌락을 따른 사람이라면 그 날에 지옥가면서 당연하게 여길 것입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죽었다고 하더니 그 예수가 진짜 주와 그리스도가 맞구나 하면서 지옥에 가야할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은 누구보다 천국의 높은 자리를 차지하리라고 생각한 자가 지옥에 간다면 정말로 이를 갈지 않겠습니까?
다시 본문 을 봅니다. “봉독” 그물에 가득한 물고기를 끌어내어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 버립니다. 이 비유를 예수님께서 바로 설명을 하십니다. 세상 끝에도 이렇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을 것이라고 합니다. 좋은 물고기는 의인이며 못된 물고기는 악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의인과 악인의 기준을 말씀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의인과 악인에 대하여 갈라내신다는 말씀을 성경 몇 곳만 찾아보면 갈라냄의 기준을 알 수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9:9~13절입니다. “9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이제 좋은 물고기와 못된 물고기가 보입니다. 좋은 물고기는 자신이 얼마나 긍휼이 필요한지를 아는 세리와 죄인들이 좋은 물고기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이 의롭다고 여기는 바리새인들이 못된 물고기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어떤 물고기입니까? 좋은 물고기입니까? 못된 물고기입니까? 자신의 옳음을 주장하기 위하여 상대방을 깔아뭉개지 않습니까? 자신의 옳다는 것도 순전히 자신의 제한적인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옳다고 주장합니다. 다른 사람이 내가 한 말과 일에 대하여 옳지 않다고 하면 온갖 이론을 다 펼치면서 자신의 주장에 동조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그런데 동조해주지 않으면 적으로 여기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런 선악의 판단을 가지고 있기에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행위를 악하다고 하시자 모든 사람들이 합동하여 예수님을 살해한 인간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좋다고 여기며 담는 물고기는 하나님의 긍휼을 담기에 좋은 세리와 죄인들과 창기들과 같은 자들입니다. 이들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입니다. 이 말씀은 오래전에 진해 우도에서 수련회 중에 갑자기 나온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 못된 물고기 곧 버림을 받는 악인들이란 하나님의 긍휼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담겨지지 않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의를 가진 자들입니다. 이들은 긍휼히 여김을 받음으로 의인이 된다는 것을 싫다고 여기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전적인 죄인인 줄 아는 자가 좋은 물고기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람으로 불가능하기에 성령이 임하여야만 알게 됩니다. 성령이 임하게 되면 정말 자신이 어떤 죄인인지 비로소 알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의 긍휼만 의지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22:1~7절입니다. “1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이르시되 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5 그들이 돌아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7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이 말씀도 천국 비유입니다. 천국잔치에 청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유대인들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왜 천국 잔치에 가지 않은 것입니까? 이 잔치는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냥 빈손으로 오기면 하면 됩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주어지는 천국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런 의가 싫다는 자들입니다. 이미 앞에서도 살펴본 대로 주의 이름으로 대단한 업적을 남기는 자들이기에 주인이 다 마련한 잔치에 가기가 싫은 것입니다. 그런 잔치는 임금의 아들이 영광 받는 자리이지 자신이 주인공이 되지 않는 곳이기에 가기 싫다고 핑계되고 오지 않았습니다. 오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였습니다. 그러므로 임금이 노하여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릅니다. 무시무시한 잔치자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본문 바로 앞의 21:33~39절을 봅니다. “33 다른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거기에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34 열매 거둘 때가 가까우매 그 열매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35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36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그들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37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이르되 그들이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38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산을 차지하자 하고 39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이 말씀으로 세상을 보는 기준을 삼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성도입니다. 악한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살해한 자들이 어떤 벌을 받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종들만 죽인 것이 아니라 그 아들을 죽인 자들을 어떻게 하겠느냐고 예수님께서 물으실 때에 그 질문을 받은 자들이 대답하기를 그 악한 자들은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를 줄 것이라고 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지금 예수님을 중심으로 갈라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갈라짐 또는 갈라냄의 기준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마태복음 22:8~10절입니다. “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9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 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이미 잔치는 다 마련되어 있는데 청한 자들이 오지 않았기에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들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고 합니다. 그래서 종들이 길에 나가서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이 비유가 오늘 그물비유와 연결이 됩니다. 가라지 비유는 좋은 씨와 가라지가 구별되게 나옵니다. 그런데 그물 비유에서는 그런 구분이 없이 물고기를 가득 잡은 그물로 비유합니다. 그러니 악한 자나 선한 자가 차별이 없이 불러오듯이 그물도 그렇게 모아 와서는 좋은 물고기와 못된 물고기를 나누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11~14절입니다. “11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12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잔치자리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왜 예복을 입지 않았느냐고 묻습니다. 이스라엘의 잔치는 입구에서 예복을 나누어준다고 합니다. 그러면 다들 예복을 입으면 신랑만 두드러지게 보여야 합니다. 신랑이나 신부친구들이 신랑이나 신부보다 멋있게 하고 결혼식에 가면 민폐입니다. 그런데 천지창조의 목적인 하나님의 자기 아들 자랑하는 천국잔치에 인간의 공로들을 들고 가려고 하는 자들이 예복을 입지 않은 자들입니다.
천국은 모든 것을 다 갖추어놓고 예복까지도 다 갖추어놓았습니다. 이러한 천국이 정말로 좋은 사람은 자신이 전적인 죄인이라서 도저히 천국에 갈 수 없는 자임을 아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세리와 죄인들과 창기들과 같은 자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피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받는 그 천국이 너무나 기쁘고 복된 소식이 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입혀주시는 그 의의 세마포 보다 자신의 공로라 좋다고 예수님의 의를 배척하는 자는 그 잔치에서 쫓겨나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그물로 사람들을 모아놓은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는 좋은 물고기도 있고 못된 물고기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본 말씀에 비추어보면 나는 좋은 물고기 입니까? 못된 물고기입니까? 자신의 가치판단을 기준으로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자신이 정말 죄인인줄 알고 회개하십니까? 좋은 물고기는 의인이며 못된 물고기는 악인입니다. 못된 물고기 곧 악인이란 자신의 의를 가지고 있는 자들입니다. 값없이 주어지는 천국의 선물을 받지 않는 자들입니다. 자신이 값없이 의롭다 함을 받아야 할 만큼 악하지 않다고 여기는 자들이 바로 못된 물고기들입니다. 이들은 남과 비교하면서 자기 의를 주장하게 됩니다. 이들은 결국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갈라짐을 당하여 풀무 불에 던져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하나님의 그 마지막 심판을 미리 앞당겨서 보여주는 곳입니다. 무조건 사람 많이 끌어 모으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곳인지 말해주는 곳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지금 여기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에 의하여 갈라짐은 당하여야 합니다. 그 기준을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8:9~14절입니다. “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자타가 인정하는 의인이라는 자는 못된 물고기 곧 악인입니다. 그런데 자타가 인정하는 죄인이라는 세리는 의롭다 함을 받은 좋은 물고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좋은 물고기라고 골라 담는 사람은 세상과 전혀 반대되는 시각입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만이 담기는 자를 좋은 물고기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담지 않고 자신의 행위로 만들어낸 것을 가득 담아 있는 자는 십자가의 원수가 됩니다. 이 못된 물고기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의 완성인 십자가를 담을 자리가 없기에 쫓겨나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영원히 갈라지기 전에 오늘 여기서 회개하고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으시기를 소원합니다.
[주일오후설교(16.05.01)]
/ 열왕기하 8:7-15 '우는 선지자'
열왕기하 8:7-15 우는 선지자 2016. 5. 1
지나 주에 수넴 여인이 자신의 땅을 돌려받는 내용을 보았습니다. 엘리사 선지자를 영접하고 접대한 여인이 이스라엘 땅의 7년 기근동안 블레셋 땅으로 피난 간 후에 돌아와서 땅을 돌려받는 것은 엘리사 선지자의 사환 게하시가 왕에게 마침 그 여인의 이야기를 할 때에 일어난 일입니다. 오늘 본문은 지난주의 말씀과 동떨어진 이야기로 보이지만 이 이야기도 결국 엘리야와 연결되는 이야기입니다. 엘리야는 이미 승천하고 없지만 엘리야가 예언한 일이 엘리사를 통하여 일어나고 있습니다. 엘리야나 엘리사는 주의 기름부음 받은 자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그렇게 된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승천하거나 죽어 없어져도 그들을 통하여 예언된 그 말씀들은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통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 세상 만사가 다 하나님의 뜻대로 만들어지고 유지되고 결론 내려짐을 보는 것입니다.
로마서 11:36절입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골로새서 1:15~17절입니다.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이시니 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엘리야나 엘리사가 주의 지시를 받아 예언한 일들이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이방나라들에도 일어남을 통하여 신약의 이런 말씀이 믿어지고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정말로 믿어지신다면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 아님을 알기에 마음의 쉼도 있을 것입니다.
본문 7~10절입니다. “7 엘리사가 다메섹에 갔을 때에 아람 왕 벤하닷이 병들었더니 왕에게 들리기를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 여기 이르렀나이다 하니 8 왕이 하사엘에게 이르되 너는 손에 예물을 가지고 가서 하나님의 사람을 맞이하고 내가 이 병에서 살아나겠는지 그를 통하여 여호와께 물으라 9 하사엘이 그를 맞이하러 갈새 다메섹의 모든 좋은 물품으로 예물을 삼아 가지고 낙타 사십 마리에 싣고 나아가서 그의 앞에 서서 이르되 당신의 아들 아람 왕 벤하닷이 나를 당신에게 보내 이르되 나의 이 병이 낫겠나이까 하더이다 하니 10 엘리사가 이르되 너는 가서 그에게 말하기를 왕이 반드시 나으리라 하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가 반드시 죽으리라고 내게 알게 하셨느니라 하고”
엘리사가 아람의 수도인 다메섹에 갔습니다. 이 때 아람 왕 벤하닷이 병들어있습니다. 왕이 하나님의 사람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왕의 측근인 하사엘에게 자신의 병이 나을지 엘리사 선지자에게 보냅니다. 다메섹의 모든 좋은 물품으로 예물을 보내는데 낙타 사십 마리에 싣고 갑니다. 이방 나라의 왕도 엘리사가 하나님의 사람임을 알아보고 예물을 보내 자신의 병이 나을지를 묻습니다. 그런데 엘리사가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왕이 반드시 낫게 되리라고 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가 반드시 죽으리라고 내게 알게 하셨다고 합니다. 이 대답을 듣는 하사엘도 이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사의 다음의 말을 봅시다.
11~13절입니다. “11 하나님의 사람이 그가 부끄러워하기까지 그의 얼굴을 쏘아보다가 우니 12 하사엘이 이르되 내 주여 어찌하여 우시나이까 하는지라 대답하되 네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행할 모든 악을 내가 앎이라 네가 그들의 성에 불을 지르며 장정을 칼로 죽이며 어린 아이를 메치며 아이 밴 부녀를 가르리라 하니 13 하사엘이 이르되 당신의 개 같은 종이 무엇이기에 이런 큰일을 행하오리이까 하더라 엘리사가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네가 아람 왕이 될 것을 내게 알게 하셨느니라 하더라”
하나님의 사람이 하사엘의 얼굴을 쏘아봅니다. 하사엘이 부끄러워하기까지 그의 얼굴을 쏘아봅니다. 그러다가 엘리사가 웁니다. 하사엘이 왜 내 주여 라고 말하면서 왜 우시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엘리사가 네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행할 모든 악을 내가 안다고 합니다. 엘리사 선지자는 지금 하사엘이 앞으로 할 일이 보입니다. 하사엘이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성에 불을 지르고 장정을 칼로 죽이고 어린 아이를 메치며 아이 밴 부녀를 칼로 가를 것을 보기에 웁니다. 그러자 하사엘이 당신의 개 같은 종이 무엇이기에 이런 큰일을 행하겠느냐고 합니다. 이방의 권력자가 하나님의 사람에게 자신이 개 같은 종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엘리사가 대답하기를 여호와께서 네가 아람 왕이 될 것을 내게 알게 하셨다고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런 의문이 듭니다. 왜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하사엘이 아람의 왕이 될 것을 알릴뿐만 아니라 그가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어떤 악을 행할지를 알려주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런 하사엘을 하나님의 사람이 죽여 버림으로 이스라엘에 닥칠 후환을 없애버리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하여는 조금 있다가 말씀을 보기로 하고 우선은 이 말을 들은 하사엘이 어떻게 하는지 봅니다‘
14~15절입니다. “14 그가 엘리사를 떠나가서 그의 주인에게 나아가니 왕이 그에게 묻되 엘리사가 네게 무슨 말을 하더냐 하니 대답하되 그가 내게 이르기를 왕이 반드시 살아나시리이다 하더이다 하더라 15 그 이튿날에 하사엘이 이불을 물에 적시어 왕의 얼굴에 덮으매 왕이 죽은지라 그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아람 왕 벤하닷에게 하나님의 선지자의 말을 전합니다. 왕이 반드시 살아나리라고 하고서는 그 이특날 하사엘이 이불을 물에 적셔 왕의 얼굴에 덮으매 죽어버립니다. 열병일 경우에 물로 식히기에 이불이 젖어도 알리바이가 성립된다고 하는 주석이 있습니다. 어떻든 이렇게 죽여 버린 것은 하사엘이 왕이 되리라는 엘리사의 말로 인한 것임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하사엘이 왕이 되는 이런 일이 왜 일어나는지 보겠습니다.
열왕기상 19:11~14절입니다. “1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12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13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4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갈멜산에서 불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라는 엘리야의 제안에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이 동의하여 누구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인지 대결을 합니다. 엘리야의 하나님이 드러나고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를 다 잡아 죽여 버립니다. 그런데 아합이나 이세벨이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엘리야의 목을 베어버리겠다고 이세벨이 말하는 것을 듣고 엘리야는 광야로 가서 로뎀 나무아래 누워 잡니다. 천사가 먹을 것을 주어 힘을 얻어 호렙산에 이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는 장면입니다. 여호와께서 크고 강한 바람이나 지진이나 불로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세미한 음성으로 네가 왜 여기에 있느냐고 합니다. 그때 엘리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언약을 버리고 자기 혼자 남았는데 자신조차 죽이려고 해서 이렇게 도망 온 것이라고 합니다.
15~18절입니다. “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통하여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16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17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18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여호와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시기를 다메섹의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왕이 되게 하고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는 예후가 죽일 것이며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는 엘리사가 죽일 것이라고 합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심판을 집행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직접 만난 사람은 엘리사입니다. 그리고 엘리사에게 기름을 붓는 것이 아니라 엘리야의 겉옷을 엘리사에게 던짐으로 불러냅니다. 그리고 하사엘은 오늘 말씀대로 엘리사가 왕이 될 것을 전하고 예후는 엘리사의 사환이 기름을 붓게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일이 일어나는 것은 이미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 한 치의 빈틈없이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심판의 과정 속에서도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천 명의 남은 자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오늘 본문 13절을 봅니다. “11 하나님의 사람이 그가 부끄러워하기까지 그의 얼굴을 쏘아보다가 우니” 하나님의 선지자는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엘리사가 하사엘을 쳐다보니 그가 할 재앙이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엘리야가 예언한 하나님의 심판이 집행되는 것을 알기에 엘리사가 웁니다. 그러면 우리 옆 사람의 얼굴을 한번 쏘아보시기 바랍니다. 부끄러워하기까지 한번 쏘아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그 사람을 위하여 웃어야 합니까? 울어야 합니까? 아니면 내가 울어야 합니까? 웃어야 합니까?
누가복음 19:41~44절입니다. “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43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십니다. 성전이 있고 제사장이 있고 제사가 있으며 율법 선생들이 가득한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십니다. 그들은 지금 평화에 대하여 알지 못합니다. 참된 평화란 종교와 정치의 안정을 기하는 기득권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 의하여 배척받는 예수 그리스도가 평화의 왕이십니다. 하나님과 원수 된 죄인들이 화목하게 되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 예루살렘이 무너질 것을 보고 예수님께서 우십니다. 하사엘이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장면을 보는 엘리사가 우는 것처럼 지금 로마의 군대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포위되고 그 자식들이 땅에 메어치는 장면을 예수님은 미리 보시기에 우십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 때문에 울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선지자와 그들에게 그 영을 부어주신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보고 우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세상을 보면서 무엇 때문에 울고 있습니까? 우리의 자녀들을 위하여 무엇 때문에 울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그 안타까움 때문에 우십니까? 무너질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얻지 못한다고 울고 있습니까?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가 없어서 울고 있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 영이 임한 사람이 아닙니다. 이런 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을 보고 울고 있는 모습과 다를 바 없습니다. 어떻게 그리스도가 저런 모습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지 안타까워서 울고 있는 그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23:26~31절입니다. “26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27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28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29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30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31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십자가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보고 우는 많은 여인들에게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보고 우신 것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은 이 세상의 심판입니다. 곧 예루살렘의 멸망입니다. 이 세상의 심판을 십자가를 통하여 보지 못하면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속한 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돈이나 명예나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세상이 이미 죽은 세상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안에 들어오지 못한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불쌍해 보이고 예수님을 따르면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자들이 불쌍해서 웁니다. 그러나 십자가 안에서 그들을 보면 그들이 불쌍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세상의 멸망의 전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십니다.
누가복음 6:20~26절입니다. “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21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22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23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24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25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지금 우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지금 웃는 자는 화가 있습니다. 우는 자는 자신의 의가 없음을 인하여 애통하고 가난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웃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부요하다고 부족함이 없다고 하는 자들은 세상의 부요만이 아니라 자신의 의로도 부요하여 부족함이 없다고 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웃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 주님 앞에서 그들이 화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는 자들은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웃는 자들은 화가 있을 것입니다. 이제는 그 때가 더욱 단촉하여 졌습니다. 예수님 때보다 사도들의 때보다 더욱 단촉하여 졌기에 지금 우리가 울고 있는 내용이 바꿔져야 합니다. 무엇으로 우시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7:29~31절입니다. “29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0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1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면 세상이 울 때에 웃을 수 있고 세상이 웃을 때에 우는 자가 됩니다. 이 세상의 형적은 다 지나갑니다. 지나가는 것에 마음 빼앗기지 말고 영원하신 그 분, 만유가 되시는 그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으로 기뻐하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능력으로 될 일이 아니기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자들을 반드시 이런 길로 이끌어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만족하게 되는 삶으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와 세상이 간 곳이 없고 구속한 주님만 보이게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