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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그 때에 네 백성은 구원을 받으리라.”
<다니엘 예언서의 말씀 12,1-3>
1 그때에 네 백성의 보호자 미카엘 대제후 천사가 나서리라.
또한 나라가 생긴 이래 일찍이 없었던 재앙의 때가 오리라.
그때에 네 백성은, 책에 쓰인 이들은 모두 구원을 받으리라.
2 또 땅 먼지 속에 잠든 사람들 가운데에서 많은 이가 깨어나어떤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어떤 이들은 수치를, 영원한 치욕을 받으리라.
3 그러나 현명한 이들은 창공의 광채처럼 많은 사람을 정의로 이끈 이들은 별처럼 영원무궁히 빛나리라.
▥ 제2독서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의 예물로 거룩해지는 이들을 영구히 완전하게 해 주셨습니다.”
<히브리서의 말씀 10,11-14.18>
11 모든 사제는 날마다 서서 같은 제물을 거듭 바치며 직무를 수행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결코 죄를 없애지 못합니다.
12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한 번 제물을 바치시고 나서, 영구히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13 이제 그분께서는 당신의 원수들이 당신의 발판이 될 때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
14 한 번의 예물로, 거룩해지는 이들을 영구히 완전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18 이러한 것들이 용서된 곳에는 더 이상 죄 때문에 바치는 예물이 필요 없습니다.
✠ 복음
“사람의 아들은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13,24-3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4 “그 무렵 큰 환난에 뒤이어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25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
26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27 그때에 사람의 아들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땅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
28 너희는 무화과나무를 보고 그 비유를 깨달아라.
어느덧 가지가 부드러워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 알게 된다.
29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가까이 온 줄 알아라.
3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31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32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 손에 죽는>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때'를 여러 차례 말씀하십니다.
종말의 때입니다.
이 종말의 때와 관련하여 ‘종말의 시계 Doomsday Clock’라는 것이 있습니다.
핵으로 해 지구가 멸망하게 될 시간이 1953년에는 7분 남았다고 했는데, 2020년에는 핵과 기후 변화로 인해 100초가 남았다고 하다가, 그저께 영국 글레스코에서 폐막한 Cop26 곧 '26차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에서 영국 총리는 이제 1분 남았다고 하며 이 시계를 우리 인류가 함께 노력하여 되돌려야 한다고 했지요.
그런데 과학자들을 비롯하여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왜 종말의 시계를 만들었겠습니까?
그것은 종말이 가까웠음을 사람들이 인식치 못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제 루카 복음에서 주님도 노아의 때와 룻의 때 사람들이 멸망의 때가 다가오는데도 먹고 마시고, 시집 가고 장가 들며,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다가 멸망의 때를 맞이했다고 경고하셨지요.
그렇지만 종말의 때 곧 "그 날과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고 주님은 또한 말씀하시며 누구도 종말이 언제라고 떠들지 말라는 하십니다.
그런데 아무도 알지 못하는 것은 종말의 때뿐이 아닙니다.
종말이란 어떤 것이고 어떻게 오는지도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지구의 종말인지 아니면 지구는 그대로 있으면서 인류만 소멸하는 건지.
그리고 또 지구를 멸망케 하는 것이 하느님이신지 아니면 인간인지도.
이와 관련하여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인간으로 인한 지구 위기를 얘기하며 인간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얘기하는 데 반해, 오늘 복음과 우리 교회는 하느님께서 멸망의 때를 정하시고, 그 날에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실 거라고 얘기합니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땅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비록 우리 인간이 죄를 짓고 벌을 받아 세상이 멸망하게 될지라도 하느님께서 멸망케 하시는 거라고 믿고, 그리고 그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저도 죽게 된다면 누구에게 살해당하지 않고, 병들어서 죽지도 않으며, 주님의 손에 죽고 주님 품 안에서 죽고 싶은데, 여러분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렇게 죽고 싶을 뿐 아니라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고 그래서 위기를 느끼고, 이보다도 더 큰 기후 위기와 지구의 위기를 느끼고 있는데, 우리를 멸망케 하는 것은 전염병도 기후도 아니고 하느님이고, 그 멸망의 때를 정하는 분도 시간의 주인이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다윗이 말년에 죄를 지어 벌을 받게 되었을 때 하느님께서는 세 가지 벌 곧 흉년과 패전과 흑사병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고 하였을 때 다윗은 이렇게 얘기하지요.
"괴롭기 그지없구려.
그러나 주님의 자비는 크시니, 사람 손에 당하는 것보다 주님 손에 당하는 것이 낫겠소."
오늘 첫째 독서 다니엘서도 보호자 미카엘에 의한 재앙의 날을 얘기하며 "그때에 네 백성은, 책에 쓰인 이들은 모두 구원을 받으리라. 또 땅 속에 잠든 사람들 가운데에서 많은 이가 깨어나 어떤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어떤 이들은 영원한 치욕을 받으리라."고 합니다.
멸망의 때에 우리는 결코 병이나 사람에 의해 죽지 말고 하느님의 손에 그리고 하느님의 품 안에서 죽어야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사람의 아들이 문 밖에 온 줄을 깨달아야.">
낙엽이 우수수 지는 11월의 늦가을은 그 자체로 우리의 스승입니다.
무화과나무 한 그루도 그 자체로 우리의 스승입니다.
싹이 돋고, 꽃이 피고, 잎이 지고, 열매를 맺는 이 모든 것이 곧 하느님의 현존을 알리는 ‘징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전례 시기의 막바지에 와 있습니다.
오늘 말씀 전례는 “종말”에 대한 ‘징표’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오실 길을 준비하도록 우리를 이끌어줍니다.
‘징표’는 미래의 세상 종말에 대한 지식을 전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현재의 삶에 대한 태도를 말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종말에 대한 예고와 더불어, 구약에서 처음으로 죽은 자에 대한 부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장면입니다.
곧 재앙의 시기와 더불어 박해받는 자의 구원에 대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말은 재앙의 때이지만, 동시에 이스라엘은 구원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받으리라는 위로가 약속됩니다.
이처럼 종말사상은 부활과 직결됩니다.
그래서 재앙은 단순히 미래를 앗아가는 두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위로와 용기가 됩니다.
제2독서는 구약의 사제직을 초월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사제직에 대한 말씀입니다.
구약의 사제들이 “날마다 서서 같은 제물을 거듭 바치며 직무를 수행한 데” (히브 10,11) 반해, 신약의 사제 예수님은 “단 한 번 제물을 바치시고 나서, 영구히 하느님의 오른 쪽에 앉으셨음” (히브 10,12)을 말해줍니다.
곧 구약의 사제의 제물이 반복해서 봉헌되어도 결코 그 죄를 사할 수는 없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단 한 번의 희생 제물은 모든 죄가 용서되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말합니다.
“이미 죄가 용서된 곳에는 더 이상 죄 때문에 바치는 제물이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히브 10,18)
오늘 복음에서는 종말에 대한 표상을 이렇게 드러내줍니다.
“해가 어두워지고 발이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린다.”
(마르 13,24-25)
이러한 종말론적인 표현은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가 파괴될 것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신앙생활이 새롭게 창조될 것이라는 약속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떼이야르 드 샤르뎅이 지적한 대로, 세상의 종말은 집단적 죽음이나 멸망, 결별이 아니라 하나의 변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곧 인간의 종말은 분열과 죽음이 아니라 일치된 사고를 통해 시간과 공간 밖으로 전개되는 새로운 변화와 새로운 탄생이 될 것입니다.
곧 종말은 대재앙이 아니라 정신적 역전이 될 것입니다.
사실상 그것은 물질과 역사의 모든 조건을 초월하는 자유, 곧 하느님 안에서의 희열일 될 것입니다.
정신은 역전하고 다른 영역으로 들어갈 것이며, 세계는 순간적으로 변모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에서 그리고 있는 종말론적인 표현들을 우주론적인 표현이 아니라 신학적인 표현으로 알아듣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하느님 나라는 시작되었고 십자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종말, 곧 완성의 때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언제가 먼 미래에 오시는 분이 아니라 이미 오셨습니다.
사실 지금 “주님은 오십니다. 내일이 아니라 오늘, 내년이 아니라 올해, 우리의 비참함이 다 지나가고 난 뒤에가 아니라 그 비참함 한가운데로,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서 있는 이곳으로 주님은 오십니다.” (헨리 나웬)
그리스도의 오심은 우리의 삶 안에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통하여 들어옵니다.
곧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질 때, 그 십자가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완성과 영광은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때”에 결정적으로는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무화과나무에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을 알 수 있듯이, 세상의 사건들을 통해 “사람의 아들이 문 가까이 온 줄을 깨달아야” (마르 13,29) 할 일입니다.
곧 시대의 징표를 읽어야 할 일입니다.
시대의 징표를 깨닫는다는 것은 단순히 비가 올지 안 올지 날씨가 추울지 더울지를 감지해내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를 통해 하느님의 마음을 읽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그렇게 마련해주신 하느님의 마음을 읽을 때 비로소 시대의 징표를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시대의 징표를 깨달을 때, ‘하느님의 마음’으로 사람을 만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마음’으로 모든 사건과 만물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을 부어주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1코린 2,16)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는 무화과나무를 보고 그 비유를 깨달아라.”
(마르 13,28)
주님!
그날은 내일이 아니라 오늘, 비참함이 다 지나가고 난 뒤가 아니라 그 비참함 한가운데로 찾아옵니다.
먼 미래가 아니라 바로 지금, 다른 곳이 아니라 내가 서 있는 바로 이곳입니다.
오늘의 결별에서 새롭게 변형되게 하소서.
오늘의 죽음에서 새롭게 탄생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토 수도회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나의 멸망: 아무도 나를 찾지 않을 때>
전례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으로 향하는 이때 우리는 세상 종말과 심판의 무시무시한 이야기들을 복음으로 듣습니다.
많은 학자는 이대로 가면 지구는 100년 이내에 멸망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한 종교가 망하고, 한 나라가 망하고, 온 인류가 망하더라도 우리는 구원되어야 합니다.
커다란 흐름은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 흐름대로 가면 안 됩니다.
망하는 데도 법칙이 있는데 그 법칙을 따라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무화과나무를 보고 그 비유를 깨달아라.
어느덧 가지가 부드러워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가까이 온 줄 알아라.”
그리고 이런 종말에 관한 것은 우리 각자의 세대에 언제나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을 상기시키시기 위해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이 멸망의 법칙에 해당하지 않도록 우리는 예수님께서 어떤 법칙을 말씀하셨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무렵 환난에 뒤이어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해와 달과 별이 사라지면 인간에겐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관계가 단절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태양이 어두워졌습니다.
모세가 이집트에서 한 아홉 번째 재앙이 어둠이었습니다.
모두가 소경이 되는 상태입니다.
이 상태가 되면 관계가 될 수 없습니다.
해와 달과 별들이 어두워지면 우리는 사람을 분간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안 본다고 여기고 하고 싶은 대로 하므로 죄를 짓습니다.
그러다 세상에 자기 혼자 남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엔 언제나 죄를 짓고 주님을 잃어 이렇게 관계의 단절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 어떤 사람이 외로움에 지쳐 자살을 시도합니다.
지구가 멸망하여 자기가 유일한 생존자라 믿습니다.
그의 꿈은 누군가와 접촉해서 자신도 인간임을 느끼고 싶은 것뿐입니다.
자살 직전에 라디오 주파수에 여자 목소리가 들립니다.
힘든 몸을 이끌고 그 주파수를 따라갑니다.
아파트 단지가 나옵니다.
몇 시간 동안 모든 방을 뒤집니다.
그러나 아무도 없습니다.
지쳐 쓰러지기 직전 마지막 한 방을 뒤졌을 때 여자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그러나 그 여자는 죽어있었고 카세트테이프가 무한 재생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는 절망에 빠져 그 여자 옆에 잠이 듭니다.
다시 깨어났을 때는 환시까지 봅니다.
아기가 자기 품에 안겨 있습니다.
자신도 미쳐가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심지어 어떤 여인까지 다시 나타납니다.
죽은 여인의 환영이라 생각한 그 남자는 소리를 지릅니다.
그러자 그 여인이 도망칩니다.
그제야 정신이 든 남자는 방금 그 여인은 사람이었음을 깨닫습니다.
하지만 그 오랜 시간 말을 하지 않아 어떻게 말해야 하는 줄도 모른 채 그 여자를 쫓아갑니다.
여자는 자신을 죽이려고 오는 줄 알고 그 남자에게 총을 쏩니다.
그렇게 그 남자는 죽어갑니다.
마지막 그 여자가 남자의 눈을 감겨줍니다.
남자는 그 접촉만으로도 행복하게 죽어갑니다.
‘FINITE’라는 단편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의 접촉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관계를 맺지 않으면 죽는 편이 낫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결국 인간은 사회적 동물입니다.
인간이 살아있고 주위에 사람이 많다고 모두 서로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며 살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이 영화의 주인공처럼 똑같이 이웃과의 단절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 영향력이 끊기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는데 그것이 그 사람의 종말이 됩니다.
그렇게 되는 데는 다른 게 필요 없습니다.
‘삼구’(三仇)만 있으면 됩니다.
이것을 멸망의 법칙으로 하면 이렇습니다.
우선 돈을 섬겨야 합니다.
오늘 복음 이전에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있어서는 안 될 곳에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이 서 있는 것을 보거든 ─ 읽는 이는 알아들으라. ─ 그때에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라.”
예수님께서는 채찍을 만들어 성전 안의 장사꾼들을 쫓으셨습니다.
있어서는 안 될 것이 성전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돈을 좋아하는 마음이 중심을 잡고 있다면 그것이 사람이건 종교이건 나라건, 세상이건 멸망의 단계를 밟기 시작한 것입니다.
솔로몬도 결국엔 돈에 집착하여 여러 나라 우상을 섬기고 나라가 둘로 쪼개지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육적인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누가 너희에게 ‘보아라, 그리스도께서 여기 계시다!’, 또는 ‘보아라, 저기 계시다!’ 하더라도 믿지 마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나, 할 수만 있으면 선택된 이들까지 속이려고 표징과 이적들을 일으킬 것이다.”
자기 내면에서 구원을 찾으려 하지 않고 외적인 데서 구원을 추구합니다.
당시 유다인들도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했습니다.
자기 내면엔 자아가 왕으로 있기에 외부에서 구원자를 찾으려 하는 것입니다.
다윗도 밧세바를 탐할 정도로 육적인 인간이 되어 아들에게까지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내면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사람은 육적인 인간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 나오는 것이 세 번째 법칙입니다.
영적인 영향력이 떨어지니 폭력을 쓰는 것입니다.
부모든 자녀든 서로에게 자유를 빼앗는 폭력을 쓴다면 서로 멸망으로 가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친교는 무력으로 할 수 없습니다.
사울은 자기 영향력을 지키기 위해 도전자로 보이는 다윗을 죽이려 했습니다.
폭력을 쓴다는 것은 이미 영향력을 잃었다는 뜻입니다.
리비아에서 40년 넘게 독재를 했던 카다피는 국민의 총에 사망하였습니다.
그의 집안은 리비아의 모든 돈을 다 가지고 있다고 할 정도로 사치스러웠습니다.
육체적인 타락은 이루 말할 것도 없습니다.
선글라스를 왜 끼느냐고 할 때 자신의 미래가 너무 밝아서 낀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그러니 누구도 그를 따라주지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폭력을 쓸 수밖에 없었고 폭력으로 망했습니다.
그는 실제 너무 외로운 사람이었을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삼구로부터 자유로웠던 분들은 어떻게 사셨을까요?
예수님은 무력을 쓰지 않으셨는데도 많은 이들이 따랐습니다.
마더 데레사도 마찬가지고 이태석 신부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력을 쓰지 않는데도 영향력이 컸습니다.
이분들은 멸망의 법칙과 반대로 갔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누립니다.
삼구는 타인과의 관계를 단절하여 세상에 살면서 혼자가 되는 고통을 겪게 만들고 그렇게 멸망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종말은 현재 우리 각자가 맞게 될 종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니 내 중심에서 돈을 좋아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자신 안에서 주님과 사귈 줄 알기 위해 육체를 절제하며 겸손하여 누구의 자유도 강요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때 성령께서 그 사람 안에서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주십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외롭다, 외롭다 하다가 갑자기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신 것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저에게 영향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외롭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제 주위에 친구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 같았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는 이웃과의 관계의 밑거름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태양이신 것입니다.
삼구를 좇으며 있거나 말거나 한 사람, 오히려 사라졌으면 좋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영향력이 떨어지면, 나를 찾는 사람이 줄어들면, 나는 멸망으로 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내가 필요해서 찾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멸망에서 생명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고 사람의 기억에서 잊힐 때, 어쩌면 그것이 진짜 멸망일 것입니다.
내가 누구에게도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전 생애를 통하여>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주님을 믿는 이들에게 세상의 종말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생각하는 가운데 영생의 희망으로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막판 뒤집기’를 아십니까?
잘한 것이 없는데 마지막에 한 건 올려서 동안의 손해를 만회한다든지 인간적으로 보기에는 별반 열심히 사신 것 같지 않은데 돌아가시기에 앞서 고해성사, 병자성사를 받고 성체까지 모시고 떠나시는 것을 보고는 ‘막판 뒤집기’ 했다고 합니다.
참으로 다행스럽습니다.
그동안의 삶이 어떠했든 마지막에 하느님 안에서 열매를 맺게 된다면 그것보다 더 다행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개중에는 그것을 이용하려는 분이 계시니 큰일입니다.
지금은 돈도 벌고 마음껏 즐기다가 나중에 동안의 모든 것에 대해 한꺼번에 용서를 청하면 되지 않겠냐고 하시니 말입니다.
그러나 막판 뒤집기의 기회도 아무에게나 오는 것이 아닙니다.
꾸준히 노력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기회는 다시 오지 않습니다.
합당한 열매를 맺고 있을 때 추수의 기쁨을 마음껏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때에 “사람의 아들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땅 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
(마르13,27)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
(마르 13,32)
결국은 선택 받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기회는 언제가 될지 모르니 뒤로 미룰 것이 아닙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의 때를 아무도 모르니만큼 늘 깨어서 할 일을 다하고 있어야 합니다.
혹시라도 방심하면 하필 그때가 심판의 날이 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 삶은 순간순간이 선택입니다.
누구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한 순간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른다는 사실이 우리를 늘 긴장하게 만듭니다.
다니엘서에서는 “어떤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어떤 이들은 수치를, 영원한 치욕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12,2)
결국 “각 사람에게 그 행실대로 갚아주신다.”는 말씀입니다.(로마 2,6)
이 말씀은 우리에게 희망을 안겨 줍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구원계획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방법으로 올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깨어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오늘 복음은 마지막 날의 징조를 “환난에 뒤이어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라고 말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2베드로 3장 13절~15절에서 “그 날이 오면 하늘은 불타 없어지고 천체는 타서 녹아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날을 기다리고 있으니 만큼 티와 흠이 없는 사람으로 하느님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을 구원의 기회로 생각하십시오.” 하고 권고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지막을 두려워 말고 지금 이순간을 흠도 티도 없는 마음으로 가꾸어야 합니다.
구원은 막판 뒤집기로 얻는 것이 아니라 전 생애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재림 시기를 구체적으로 정해 놓고 휴거를 기다린 사람도 있고 천년왕국을 얘기하며 세상의 대이변을 말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개인의 종말이든 인류의 종말이든 언제 올지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종말은 우리 일생에 있어서 단 한 번 주어지는 소중한 기회라는 것입니다.
그 때에 우리 일생의 의로움에 따라 천국이나 연옥, 지옥이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순간순간이 소중합니다.
그야말로 인생에 연습은 없습니다.
사실 마지막 날 하느님의 심판은 단죄가 아니라 ‘사필귀정’의 질서가 완성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그 때에 의인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입니다.
오늘 1독서는 “많은 사람을 정의로 이끈 이들은 별처럼, 영원 무궁히 빛나리라.”고 적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도 “의인들은 그들의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날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오늘 나의 삶이 빛나는 삶이 되어야 나중에도 빛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중에 지옥 갈까 봐 두려워 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러나 지옥도 먼 훗날의 일이 아닙니다.
이미 지상에서 지옥을 살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등지고 자신의 뜻만을 고집하며 남을 바라볼 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삶의 존재 방식 자체가 이미 지옥입니다.
그래서 “‘지옥의 문’은 ‘안쪽’에서 잠겨 있다.”고 합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느님의 주권’을 ‘자신의 것’인 양 착각하는 자체가 지옥의 출발점입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지옥을 만드셨겠습니까?
지옥은 사람이 스스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죽을 죄를 뉘우치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하느님과의 단절을 고집하는 것 자체가 고통이며 심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야고 2,13).
그러므로 하느님의 자비를 믿고 의탁하십시오.
그리하면 우리의 삶이 빛나게 됩니다.
특별히 고해성사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주신 거룩함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종말은 저 멀리서 불쑥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살던 삶의 행태를 훌훌 털어버리고 돌연 진입하는 저 너머의 세계가 아닙니다.
이 세상과 단절된 세계가 아니라 오늘 내가 살고 있는 모습 속에 미구에 내가 맞이하게 될 영원한 삶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잘 살아야 합니다(차동엽).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아버지는 아버지로, 어머니는 어머니로서 자녀는 자녀로서의 몫을 해야 합니다.
아내로서 남편으로서 이웃으로서 지금 맡은 일에 충실하며 거룩한 생활에 마음 써야 할 때입니다.
마지막 때에 관련하여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입니다.
이 순간을 통하여 미래가 옵니다.
이 순간에 충실하길 기도드리며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말씀으로 마치겠습니다.
“생각하라.
네 지닌 영혼은 하나밖에 없는 것임을.
네 지닌 목숨이 짤따랗고 이것만이 네게 달린 것임을.
하나밖에 없는 영광, 그것이 영원한 것임을.
그제야 너는 많은 것을 버리리라.
그 무엇에도 너 마음 설레지 말라.
그 무엇에도 너 무서워하지 말라.
모든 것은 다 지나가고 님만이 가시지 않나니.
인내함이 모두를 얻으리라.
님을 모시는 이 님 하나시면 흐믓할 따름이라.”
- 반영억 라파엘 신부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축제 인생 -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한 3계명>
“삶은
외로움을
견뎌내는 것
외로움 중에도
묵묵히
꽃들 피어 내는 것
하늘이
별들 피어 내듯
땅이
꽃들 피어 내듯”
만 20년 전 시가 문득 떠올랐습니다.
외로움 중에도 묵묵히 별들 피어내는 하늘처럼, 꽃들 피어내는 땅처럼, 오늘 지금 여기서 사랑의 별꽃들 피어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제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마침 지인이 보내준 젊은 신혼부부의 아름다운 사진도 가을 축제의 아름다움을 북돋우는 느낌이었습니다.
“인생은 아름다워라!”
축제 노년 가을 인생을 살라고 온통 황홀한 단풍 가을 축제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요즘은 집무실에서 일하다가 자주 집무실 문을 열면서 아름다운 축제 장면을 보면서 천국체험을 즐깁니다.
죽음의 문, 천국의 문이 열렸을 때의 아름다움은 가을 축제의 아름다움에 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다.”
(마르14,3)
전례력으로 연중 제33주일인 오늘 11월14일은 제5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이고 윗 성구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습니다.
외로운 사람들이요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바로 인간의 본질이 가난과 외로움이요, 이에 대한 답은 사랑뿐임을 깨닫습니다.
아씨시의 대주교 도메니코 소렌티오가 그리스도의 눈을 통해 가난한 이들을 보는 교황님께 찬사를 드리며 한 말씀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가장 곤중중에 있는 이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항구한 태도로 변형되어야 한다.
애덕은 우리의 끊임없는 봉헌이 되어야 한다.”
바로 이의 전형적 모범인 분을 발견했습니다.
세상 떠난 이들의 마지막 이사를 돕는 예비신자인 특수청소업체 바이오해저드 대표 ‘유품정리사’ 김새별씨입니다.
그에 관한 일부 인터뷰 기사와 그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한 7계명을 소개합니다(가톨릭평화신문 2021.11.14.10쪽; 도재진 기자).
“일반적인 유품이 아니고 고독사와 자살, 살인사건 현장에서 특수청소를 하고 돌아가신 분들의 유품 정리를 하고, 나머지 이삿짐을 나르는 일을 합니다.
모든 정리를 끝낸 후 나오면서 고인에게 ‘다음 생애는 외롭게 사시지 마세요.’ 말합니다.
고인의 메모장이나 사진을 보면 그리움이 묻어 있고 외로움이 젖어 있어요.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런 모습이 아닌 나쁜 모습만 보고 기억해요.
실제로 고인에게도 아픈 사연이 많다는 것을 알려 주고 싶어요.”
김새별 대표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한 7계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삶의 질서를 세우기 위해 정리를 습관화하라.
2. 직접 하기 힘든 말은 글로 적어라.
3. 중요한 물건은 찾기 쉬운 곳에 보관하라.
4. 가족들에게 병을 숨기지 마라.
5. 가진 것들을 충분히 사용하라.
6. 누구 때문이 아닌 자신을 위한 삶을 살라.
7. 결국 마지막에 남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추억이다. 아름다운 추억을 많이 남겨라.
무엇보다 주님과 아름다운 사랑의 추억, 가까운 이웃들과 사랑의 추억입니다.
저는 연중 제33주일인 오늘 여러분에게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한 3계명을 소개합니다.
첫째, 말씀을 사랑하십시오.
말씀은 인간의 본질입니다.
말씀은 빛이요 생명이요 영입니다.
말씀과 일치될수록 영원한 삶입니다.
경거망동, 부화뇌동하지 않습니다.
표류하거나 방황하지 않고 영원한 안식처이자 피난처인 하느님 안에 깊이 정주의 뿌리를 내리며 영원한 삶을 삽니다.
주님의 나의 목자이니 아쉬울 것도, 부러울 것도, 두려울 것도, 걱정할 것도 없습니다.
바로 다음 말씀이 결정적 깨우침이자 가르침을 줍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 내 길을 비추는 빛입니다.
인생 무지, 인생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도 주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의 빛이 무지와 허무의 고해인생의 어둠을 몰아내고 아름다운 축제인생을 살게 합니다.
둘째, 희망을 사랑하십시오.
우리의 궁극의 희망은 그리스도요, 그리스도께서 계신 하느님의 옥좌입니다.
히브리서가 명쾌하게 밝혀 줍니다.
궁극의 승리자 그리스도님이 우리의 영원한 궁극의 희망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한 번 제물을 바치시고 나서, 영구히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이제 그분께서는 당신의 원수들이 당신의 발판이 될 때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
한 번의 예물로, 거룩해진 이들을 영구히 완전하게 해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거룩해진 우리들이요 영구히 완전해진 우리들입니다.
다니엘서가 우리의 부활후 빛나는 희망의 미래를 보여줍니다.
“땅 먼지 속에 잠든 사람들 가운데에서, 많은 이가 깨어나, 어떤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어떤 이들은 수치를, 영원한 치욕을 받으리라.
그러나 현명한 이들은 창공의 광채처럼 많은 사람을 정의로 이끈 이들을 별처럼, 영원무궁히 빛나리라.”
과연 나의 미래는 어느쪽에 속할까요?
천국과 지옥도 선택이자 은총입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영원한 희망이신 그리스도 주 예수님을 선택하여 창공에 빛나는 별처럼 아름다운 축제인생을 사시기 바랍니다.
셋째, 오늘을 사랑하십시오.
어제는 지나갔고 내일은 오지 않았습니다.
어제와 내일은 하느님의 영역입니다.
마지막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릅니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십니다.
죽음의 시간이, 최후 심판이 바로 그러합니다.
알 수도 없고 알려고 할 것도 없습니다.
최상 최고의 대책은 오늘 지금 여기를 사는 것입니다.
참으로 유일한 길은 그분의 사랑과 섬김 안에서 오늘을, 매일을 사는 것입니다.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현재입니다.
여기와 지금에 집중하도록 하십시오.
우리는 이미 주님의 나라에 들어왔고 조만간 그분은 우리를 부르러 오실 때, 옛 친구들과의 재회도 이뤄질 것입니다.
사실 그분은 이미 여기 계시고, 언제나 계셔왔고, 언제나 계실 것입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죽음을 통과해 다른 세상의 삶으로 들어갈 것이며 그분과의 관계도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참으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날로 깊어지는 주님과 사랑의 우정관계입니다.
쏜살같이, 강물처럼 흐르는 세월입니다.
아버지의 집에 갈 날도 얼마 안남았다는 통절(痛切)한 자각(自覺)에 휴가 가는 것을 잊고 산 지 수십년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날로 당신과 깊어지는 사랑의 우정을 살게 하십니다.
말씀을 사랑하며, 희망이신 주님을 사랑하며, 오늘을 사랑하며 ‘아름다운 3계명’의 축제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마지막 제 사랑하는 좌우명 고백 시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아멘.
- 성 베네딕토회 성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너희는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세계 가난한 이들을 기억하는 오늘 미사의 말씀은 ‘사람의 아들의 날’을 이야기하십니다.
제1독서인 다니엘 예언서와 마르코 복음에는 ‘사람의 아들의 날’의 두 국면을 보여 줍니다.
곧 구원의 얼굴과 재앙의 얼굴입니다.
여러분은 미사 독서들에서 어떤 얼굴과 마주하셨는지요?
구원에 대한 희망으로 기쁘셨나요, 아니면 심판의 두려움으로 불안하셨나요?
"그때에 사람의 아들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땅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
(마르 13,27)
언제일지 아무도 모르는 그날은 해와 달이 빛을 잃고 하늘과 땅이 뒤흔들리는 엄청난 물리적 재해를 동반할 것입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전한다 해도 자연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는 우리는 미처 겪어 보지 못한 천재지변의 재앙과 변고에 당황하며 두려움에 떨게 될 것이지요.
"선택한 이들"
그날 영광 속에 다시 오실 사람의 아들은 당신이 선택한 이들을 잊지 않고 찾으실 것입니다.
구원입니다.
땅 끝, 하늘 끝까지 흩어져 있는 선택받았던 이들은 그 부르심이 완성되는 결정적인 일치의 시간 안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고, 지상 순례 기간 동안 간절히 바라 마지 않던 영원한 사랑 안에 잠기게 될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 울려 퍼지는 구원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때에 네 백성은, 책에 쓰인 이들은 모두 구원을 받으리라."
(다니 12,1)
이렇듯 주님께서 구원을 약속하십니다.
주님께 선택되어 사랑과 신의를 고백하며 삶과 죽음으로 증거한 이들은 모두 약속의 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요.
바로 그날 그분 앞에서 그 책이 펼쳐질 것이고, 그들은 평생 그리워하고 기다리던 주님과 복된 해후의 때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제2독서는 여전히 심판의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들에게 격려가 되는 말씀을 전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한 번 제물로 바치시고 나서 ... 한 번의 예물로, 거룩해지는 이들을 영구히 완전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히브 10,12.14)
우리의 정화와 성화는 우리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희생제사의 열매입니다.
그분은 매번 속죄 제물을 바쳐야 하는 여느 인간 사제들과 달리 단 한 번, 당신 자신의 피로 영원한 계약을 완성하셨지요.
우리는 그분이 그렇게 치르신 피의 대가로 구원을 약속받았습니다.
적극적인 자의로 사랑을 거부하거나 신앙을 저버리지 않는 한 구원의 가능성은 쉬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여전히 희망해도 좋습니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복음 환호송)
깨어 있음과 기도가 구원을 향한 우리의 바람을 현재화시켜 줍니다.
기도는 그분을 사랑하고 향유하는 구원 상태를 앞당겨 누리는 맛보기이고, 깨어 있음은 그 기도가 삶의 구석구석에 구체적으로 반영되게 해 줍니다.
사랑하는 벗님!
특별히 세계 가난한 이들을 기억하며 기도와 선행으로 그들에게 손을 내미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사람의 아들의 날 우리를 데리고 오라고 주님께서 보내실 천사들이 바로 그들이 될 것이고, 그들이 주님 앞에서 우리를 위해 큰 소리로 증언을 해 줄 것입니다.
그들 마음에 새겨진 우리 이름은 결코 지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아멘.
- 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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