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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크나큰 진노가 이스라엘 위에 내렸다.’
<마카베오기 상권의 말씀 1,10-15.41-43.54-57.62-64>
그 무렵
10 죄의 뿌리가 나왔는데, 그가 안티오코스 임금의 아들로서 로마에 인질로 잡혀갔던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이다.
그는 그리스 왕국 백삼십칠년에 임금이 되었다.
11 그 무렵에 이스라엘에서 변절자들이 생겨 많은 이들을 이러한 말로 꾀었다.
“자, 가서 우리 주변의 민족들과 계약을 맺읍시다.
그들을 멀리하고 지내는 동안에 우리는 재난만 숱하게 당했을 뿐이오.”
12 이 말이 마음에 들어,
13 백성 가운데 몇 사람이 임금에게 기꺼이 나아가자, 그는 그들에게 이민족들의 규정을 따라도 좋다는 허락을 내렸다.
14 그리하여 그들은 이민족들의 풍습에 따라 예루살렘에 경기장을 세우고,
15 할례 받은 흔적을 없애고 거룩한 계약을 저버렸다.
이렇게 그들은 이민족들과 한통속이 되어 악을 저지르는 데에 열중하였다.
41 임금은 온 왕국에 칙령을 내려, 모두 한 백성이 되고
42 자기 민족만의 고유한 관습을 버리게 하였다.
이민족들은 모두 임금의 말을 받아들였다.
43 이스라엘에서도 많은 이들이 임금의 종교를 좋아하여, 우상들에게 희생 제물을 바치고 안식일을 더럽혔다.
54 백사십오년 키슬레우 달 열닷샛날, 안티오코스는 번제 제단 위에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을 세웠다.
이어서 사람들이 주변의 유다 성읍들에 제단을 세우고,
55 집 대문이나 거리에서 향을 피웠다.
56 율법서는 발견되는 대로 찢어 불태워 버렸다.
57 계약의 책을 가지고 있다가 들키거나 율법을 따르는 이는 누구든지 왕명에 따라 사형에 처하였다.
62 그러나 이스라엘에는 부정한 것을 먹지 않기로 굳게 결심한 이들도 많았다.
63 그들은 음식으로 더럽혀지거나 거룩한 계약을 모독하느니 차라리 죽기로 작정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죽어 갔다.
64 크나큰 진노가 이스라엘 위에 내린 것이다.
✠ 복음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18,35-43>
35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의 일이다.
어떤 눈먼 이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36 군중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37 사람들이 그에게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 하고 알려 주자,
38 그가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39 앞서 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40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셨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41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그가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42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43 그가 즉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
군중도 모두 그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개안의 은총, 개안의 여정 - 예수님이 답이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기쁨,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삶중에
주님이신 당신을 만나니
당신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기쁨과 평화, 희망과 자유를 선사하시나이다.”
개안의 은총, 개안의 선물, 개안의 감격, 개안의 기쁨을 노래한, 그동안 수없이 나눴던 제 행복기도 중 일부 내용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주님을 만나 눈이 열린 어떤 눈먼 이의 심정이 이러했을 것입니다.
무지에 눈먼, 참 역설적이게도 눈뜬 무지의 맹인들이 무수한 현실입니다.
인간의 근원적 질병이 바로 눈멀게 하는 무지입니다.
무지의 약, 무지의 죄, 무지의 병, 참으로 제가 많이도 강조했던 내용입니다.
개안의 은총, 개안의 여정입니다.
불교 용어지만 제 좋아하는 말마디 중 하나가 눈이 열린다는 개안(開眼)입니다.
개안에 대한 답은 예수님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참으로 예수님을 만날 때 개안의 은총, 사랑의 개안입니다.
개안의 은총, 개안의 여정은 그대로 깨달음의 은총, 깨달음의 여정이란 말과 통합니다.
역시 한 두 번의 개안이, 깨달음이 아니라 평생 개안의 여정, 깨달음의 여정을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깨달을 ‘각(覺)’자 안에 볼 ‘견(見)’자가 들어 있습니다.
깨달음은 개안에 직결됨을 봅니다.
개안의 깨달음과 더불어 치유의 구원에 날로 자유로워지는 영혼들입니다.
참으로 빛이신 예수님을 만날 때 개안의 깨달음이요 인생 무지와 허무의 어둠에서 벗어납니다.
오늘 복음은 ‘소복음(mini-gospel)’서라 할만큼 상징으로 가득하며 풍성한 깨달음을 선사합니다.
길가에 앉아 구걸하는 어떤 눈먼 이가 상징하는 바 무지에 눈먼 비참한 인간 실존, 바로 우리 인간의 보편적 모습입니다.
여기서 제외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길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길이신 예수님을 만나 눈이 열리게 되는 극적 상황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오늘 복음입니다.
하루 이틀, 아니 평생 날마다 주님을 만나 눈이 열려야 하는 우리들입니다.
육신의 육안(肉眼)의 시력은 날로 나빠져도 영혼의 영안(靈眼)의 시력은 날로 좋아졌으면 좋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 알려 주자 조건반사적으로 반응하는 눈먼 걸인입니다.
그의 눈 뜨고자 하는 갈망이, 열망이 얼마나 대단한지 깨닫습니다.
이런 갈망은 열망은 그대로 주님 향한 열렬한 믿음의 표현입니다.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우리가 바칠 최종의 유일한 기도는 이 하나 자비송뿐입니다.
최종의 승리는 간절한 자에게 옵니다.
간절히 주님을 찾을 때 주님을 만납니다.
다시 연이어 자비송 기도를 바치는 눈먼 걸인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만일 이런 간절한 부르짖음의 자비송 기도가 없었다면, 주님은 그냥 지나쳤을 것이며, 눈먼 걸인은 평생 무지의 눈먼 상태로 비참한 인생을 살았을 것입니다.
사실 이런 사람들은 우리 주변에도 부지기수일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유래하는 미사 시작 전 자비송이요, 동방 교회의 ‘예수님 이름을 부르는 기도’입니다.
다음 예수님과 눈 먼 걸인이 주고 받는 대화는 절실하기가 불가(佛家) 고승(高僧)들의 선문답(禪問答) 같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주님, 제가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바로 무지에 눈먼 우리가 바칠 유일한 소원입니다.
참으로 필요한 단 하나는 지혜의 눈, 혜안(慧眼)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개안이요 혜안의 선물입니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간절한 열망의 믿음과 주님 은총의 말씀이 만날 때 개안의 선물입니다.
그대로 간절한 믿음으로 이 거룩한 미사에 참여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개안의 선물입니다.
그는 즉시 다시 보게 되었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라나섰고 군중은 모두 그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니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참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바야흐로 길에서 길이신 주님을 만나 눈이 열려 주님을 따라 나서는 개안의 여정이, 추종의 여정이 시작되었음을 봅니다.
새삼 주님을 보라 있는 ‘눈(眼)’이요, 주님을 찬양, 찬미하라 있는 ‘입(口)’이요, 주님을 따르라 있는 ‘다리(脚)’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제1독서 그리스왕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치하에서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재앙의 현실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들의 하느님 믿음의 상실과 더불어 세속화가 걷잡을 수 없이 전개되니 순수한 믿음은 오염되고 저절로 변절(變節), 변질(變質), 부패(腐敗)가 뒤따릅니다.
다음 묘사가 이를 입증합니다.
‘그들은 이민족들의 풍습에 따라 예루살렘에 경기장을 세우고, 할례 받은 흔적을 없애고 거룩한 계약을 저버리고 이민족들과 한통속이 되어 악을 저지르는 데에 열중하였다.’
반복되는 역사입니다.
흡사 오늘날의 광란(狂亂)사회, 중독(中毒)사회를 연상케 합니다.
제대로 된 정상 사회 현실이 아닙니다.
무지에 눈먼 자본주의 사회의 약육강식, 각자도생의 지옥도를 연상케 하는 미칠 광(狂)자 들어가는 광인(狂人), 광기(狂氣), 광신(狂信), 광폭(狂暴), 광분(狂奔), 광란(狂亂)의 중독 공화국 같습니다.
부동산 광풍(狂風)을 어떻게 잠재울 수 있을런지요.
우리를 참으로 눈멀어 중독시키는 무지의 탐욕, 교만, 질투, 분노, 증오, 이념, 광신 등 끝이 없습니다.
참사람 하나 만나기 힘든 시절입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 주님을 만남으로 눈이 열려 참사람이 되어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몫을 다하며 제대로 살아가는 보물같은 이들이 그립고 그리운 시절입니다.
하느님이 사라진 중심 자리에는 무수한 악령들이, 우상들이 자리잡기 마련이며, 가속화되는 세속화, 중독화, 노예화로 서서히 자유를 잃고 참 왜소한 좀비로 전락해가는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무지에 대한 답은 단 하나, 예수님과 함께 하는 개안의 여정, 깨달음의 여정, 자유의 여정, 예닮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함으로 성인(聖人)이 되는 길뿐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개안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아멘.
- 성 베네딕토회 성 요셉 수도원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오늘 복음은 예리고의 눈먼 거지(바르티메오)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는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다른 이들의 꾸짖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악을 쓰듯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루카 18,39)
그 당시의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에게서 나온다는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11,1)을 믿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가까이 오자 물으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루카 18,41)
예수님께서는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으시고, 그의 믿음을 유도하고 고백하게 하기 위해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물으십니다.
곧 당신께 대한 믿음을 묻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청원기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곧 첫째는 믿음으로 청하는 일이요, 둘째는 자신이 바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주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청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진정 청해야 할 바를 청하는 일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는지 빤히 아시지만, 당신께 대한 믿음을 보고자 하십니다.
거지 장님은 신뢰와 의탁으로 청합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루카 18,41)
그런데 대체 무엇을 보아야, ‘다시 본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사용되고 있는 “보다’(anablefo)라는 단어는 ‘위를 쳐다보다’, ‘새로운 것을 보다’, ‘다시 보다’, ‘시력을 회복하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인이 눈을 뜨기 위해서는 바라보아야 할 대상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 ‘위에’ 달리신 예수님을 쳐다보는 일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그분의 사랑을 알게 될 때 비로소 눈을 뜨게 될 것입니다.
결국 그분의 ‘사랑을 보는 눈’이 다시 보는 눈이요 새로운 눈이요 영적인 눈인 것입니다.
그것은 육신의 눈을 치유 받는 것을 넘어서, 영혼의 눈을 뜨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믿음’이 ‘다시 보게 하고 구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루카 18,42)
이제는 보려고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태어나면서 물질의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면, 이제는 ‘믿음’을 통해서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떠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그분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는 일이요, 지금 우리의 길을 동행하고 계시는 그분을 보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제 ‘길가’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동행하시는 주님을 ‘따라’ 따라나서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루카 18,41)
주님!
제가 보지 못함은 태양이 떠오르지 않아서가 아니라 눈을 감고 있고 있는 까닭입니다.
눈을 뜨지 않으려는 완고한 마음 때문입니다.
성전 휘장을 찢듯 제 눈의 가림막을 걷어 내소서!
완고함의 겉옷을 벗기시고, 깊이 새겨진 당신의 영혼을 보게 하소서!
제 안에 선사된 당신 사랑을 보게 하소서.
제 안에 벌어진 당신 구원을 보게 하소서.
제가 바라고 싶은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해주고 싶은 것을 바라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토 수도회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그리스도인이 누구나 다가오기 쉬운 사람이어야 하는 이유>
오늘 복음은 우리가 미사 때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하는 기도의 모태가 되는 내용입니다.
예리코의 한 소경이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군중에게 듣고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좀 조용히 하라고 꾸짖습니다.
하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외칩니다.
예수님은 그의 마음을 보시고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소경의 믿음이란 바로 세상 사람들이 뭐라 해도 주님은 내가 청하기만 하면 좋은 것을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세상 사람들이 뭐라 해도 상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목소리에 흔들렸다면 그는 그만한 축복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세상을 거스를 수 있는 힘을 이 소경은 어떻게 가질 수 있었을까요?
어느 분이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한 모녀가 자신에게 찾아와 상담하였답니다.
어머니도 우울증 증세가 있고 딸도 대인기피증이 있어 사회생활이 쉽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최면을 걸어 딸의 무의식 세계를 알아보고자 했습니다.
딸이 청년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더니 급기야는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의 기억까지 이야기하였습니다.
“아 답답해. 아 답답해. 너무 비좁아….
그런데 어떤 여자의 음성이 들리는데, ‘넌 죽으면 안 돼. 넌 죽으면 안 돼. 넌 살아야 해. 넌 살아야 해.’ 이런 음성이 반복해서 들려요.”
이 말을 듣자 함께 있던 어머니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은 딸을 잉태하고 있을 때 자신이 배를 어루만지며 자주 했던 말이랍니다.
당시 남편은 외도하고 있었고 아내의 임신도 자신의 아이가 아니리라 의심하여 낙태하라고 강요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넌 죽으면 안 돼. 넌 살아야 해.”라고 하며 아기를 낳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여자 청년은 태어나기 전부터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다는 내면의 상처가 생겼고, 그로 인해 당당히 사람들과 맞설 수 있는 용기가 없어 대인기피증과 우울증이 생겼던 것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는 이렇게 아이가 태중에 있을 때부터 형성되어 세상을 살아나가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그리고 아이가 태어나서도 여전히 계속됩니다.
아버지의 이미지가 곧 세상의 이미지가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두려운 존재가 되면 세상도 그렇게 됩니다.
『벼랑 끝, 상담』에 ‘분노조절장애와 망상으로 학교 선생님을 아빠라고 믿는 딸’의 내용이 나옵니다.
집도 부유했고 아이도 행복했습니다.
아이는 과학자가 되는 게 꿈이었고 공부도 잘했습니다.
그런데 항상 자신의 성이 왜 아빠가 아닌 엄마 성을 따르는가가 궁금했었습니다.
결국 중3 때 엄마에게 이 사정을 물었고 엄마는 언젠간 알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진실을 이야기했습니다.
아빠는 본래 미국에 살림이 있는 사람이었는데 한국에서 사업을 하다 엄마를 만나 다은이를 낳은 것입니다.
이때부터 다은이는 아빠를 ‘쓰레기’ 같은 인간으로 여겼습니다.
아빠가 미국에 갈 때 왜 엄마가 그리 불안해했는지도 알 것 같았습니다.
아빠는 점차 사업이 실패하자 다단계를 기웃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단계에서 만난 여자와 또 바람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다은이는 친구들이 이 사정을 알까 두려웠고 그래서 친구들을 멀리했으며 조금씩 아버지에게 막말을 하였습니다.
학교에서 분노조절장애로 사고를 치는 다은이의 이야기를 들어준 사람은 유일하게 역사 선생님이었고 다은이는 역사 선생님을 자기 아버지로 믿었습니다.
그리고 집에 있는 아버지는 가짜라고 여겼습니다.
조현병 증상까지 온 것입니다.
다은이는 급기야 아버지에게 뺨을 맞고 부모에 의해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다은이에게 더 큰 상처를 입혔고 돌아와서는 아버지를 칼로 찌르겠다며 설쳤습니다.
딸이 찾지 못하는 곳으로 아버지는 집을 나와 이사를 해야 했습니다.
아버지는 미국 집에도 이 사실이 알려져 미국으로도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딸은 청년이 되어서도 폐인이 되어 어머니가 더는 볼 수 없어서 상담소로 데리고 온 것입니다.
최고야 원장은 우선 역사 선생님이 다은이의 친아버지가 아님을 깨닫게 해 주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역사 선생님을 설득하여 DNA 검사를 진행했고 그제야 다은이는 수긍할 수 있었습니다.
그 다음은 아버지에 대한 증오를 가라앉혀야 했습니다.
아버지의 사과를 받도록 했으며 최면 명상을 이용하여 과거의 일들을 잊고 아버지를 이해하도록 했습니다.
서른 번이 넘는 이 과정을 통해 다은이는 아버지를 아버지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이해하게 되었으며 사랑하지는 못하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은이 아버지도 외도를 멈추고 다단계에서 나와 직장에 취직하여 다은이에게 존경받는 아버지가 되기 위해 노력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와 아주 친하게 된 것은 아니지만 아버지가 용서를 청했고 변하려는 모습을 보여주자 다은이도 다시 세상을 향해 마음을 열었습니다.
결국 좋은 대학에 들어가 과학자가 되는 꿈으로 공부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대한 이미지는 분명 아버지에게 얻습니다.
어머니는 어차피 아이와 하나입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가는 다리라면, 아버지는 세상으로 가는 다리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나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는 누가 형성해 주어야 할까요?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에 대한 이미지가 주님께 대한 이미지를 형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성직자들이 자비로워야 하는 이유는 그 성직자들을 보고 신자들이 하느님의 이미지를 그리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어린이들을 참 좋아합니다.
그래서 어린이들이 단상에 올라와도 모자를 달라고 해도 다 받아줍니다.
그런데 어떤 아이들은 교황님에게 다가오기를 꺼리고 왜 어떤 아이들은 교황님의 모자도 받고 교황님 자리에 앉아보기도 할까요?
교황님이 좋으신 분이란 믿음은 어디서 얻은 것일까요?
저는 아버지에게서 얻은 것이라 확신합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예수님도 그런 자비로운 분일 것임을 믿게 될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세상의 반대를 무릅쓰고 주님께 모든 것을 청할 믿음을 지닌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도 세상 사람들에게 하느님 자비에 대한 믿음을 키워줄 아버지가 되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편안하게 여겨질 수 있도록 해 주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야 그들이 예수님께 자신 있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편안하게 다가올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늘 나라로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영혼의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
시력이 6.0인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그는 아주 멀리 있는 것도 잘 봅니다.
그렇다고 그가 늘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볼 수 있다는 것이 행복이기도 하지만 볼 것 안 볼 것 다 보면 오히려 힘들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외적으로는 잘 보지만 혹 자기 자신을 볼 수 없다면 그는 불행합니다.
육신의 눈이 중요하지만, 내면의 세계를 보는 마음의 눈은 더 소중하고 내세의 세계를 보는 영혼의 눈은 더욱 더 고귀합니다.
우리는 감겨진 영혼의 눈을 떠야 합니다.
어떤 눈먼 이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앞서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습니다.
‘이웃사촌’이라 했는데 아무래도 눈먼 소경은 이웃을 잘못 만난 것 같습니다.
유다인들의 표현으로 자비라는 것은 애간장, 애타는 심정을 말합니다.
호세아서에서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마음을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11.8)
애간장이 녹는 안타까움!
이것이 바로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이며 사랑입니다.
눈먼 이는 바로 그 자비를 간구했습니다.
절박한 부르짖음을 외면한 사람들은 아무리 좋은 눈을 가졌다 할지라도 마음의 눈은 뜨지 못했으니, 정작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외쳐야 할 사람은 눈먼 소경이 아니라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이웃의 마음을 읽고 그의 부족함을 채워야 할진대 시끄럽다고 야단을 치고 있었으니 그들이 소경입니다.
자비는 적선이 아닙니다.
함께 하면 손해 볼 것 같아도 주님의 마음으로 함께 머무는 것입니다.
그의 필요를 절박함으로 함께 하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있는 이들에게 이웃이 되어줄 수 있을 때 그들을 통해서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눈먼 이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붙잡으려는 심정으로 발버둥치듯이 그렇게 절박하고 간절하게 매달렸습니다.
'잠자코 있으라'는 꾸짖음에 굴하지 않고 믿음을 가지고 외쳤습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믿음은 군중이라는 장벽을 넘어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믿음은 군중의 손가락질도 마다하는 예수님께 대한 일편단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믿음을 보시고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눈먼 이는 다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즉시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하느님을 찬양하며 따랐다는 것은 단순히 외적인 눈만 뜬 것이 아니라 영적인 눈을 뜨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우리도 눈을 떠야 합니다.
믿음의 눈을 뜨면 세상이 달라 보이고 이웃의 요구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영혼의 눈이 뜨여 내가 변하면 세상이 아름답습니다.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기 전에 그의 처지와 절박한 마음을 공감하게 되고, 오히려 주님을 불러 세우고 주님께로 인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하고 부르짖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영적인 시력을 키울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오늘 미사의 말씀은 가장 소중한 것을 지키려면 삶의 도전과 난관에 대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 보여 주십니다.
‘앞서 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루카 18,39)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예리코의 눈먼 이가 큰 소리로 자비를 청하자 사람들이 그를 꾸짖습니다.
눈이 보이지 않는 그로서는 목소리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밖에 없는데 군중에게는 그저 소음처럼 들렸나 봅니다.
군중의 꾸짖음에도 그는 지치지 않고 움츠러들지 않고 계속 외칩니다.
자기 목소리가 예수님의 귀에 전달될 때까지, 자기의 절박함과 간절함이 예수님 마음에 닿을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겠다는 태세입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루카 18,41)
예수님이 그를 데려오라고 하셔서 무엇을 바라는지 물으시자 그가 즉시 대답합니다.
한시도 잊은 적이 없는 갈망이었겠지요.
많은 경우 사람들은 뭔가를 바라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정확히 표현하지 못합니다.
자신이 바라는 바가 하느님의 뜻 안에서 제대로 내면화되지 못한 까닭입니다.
예리코의 눈먼 이는 장애를 안고 구걸하며 살아가는 가운데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뜻이지요.
다시 보고 싶다는 바람, 원의, 갈망이 결정적인 때에 그의 뼛속을 뚫고 나와 예수님 앞에 펼쳐졌고 예수님은 즉시 그의 청을 들어주십니다.
제1독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닥친 암울한 역사를 들려 줍니다.
"임금은 온 왕국에 칙령을 내려, 모두 한 백성이 되고 자기 민족만의 고유한 관습을 버리게 하였다."
(1마카 1,41-42)
마카베오기는 선택된 민족 이스라엘이 헬레니즘 시대에 겪었던 고난의 역사를 들려줍니다.
당시 유다 지방에 그리스 문화를 강요하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계자들과 그들에 맞선 민족적 항쟁이 줄거리지요.
이스라엘은 창조주이시며 유일하신 한 분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으로서 그분만을 섬기라고 불리운 신앙의 민족입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점령당한 왕국들에게 모두 한 백성이 되라 하고 각 민족마다의 고유한 관습을 버리도록 한 칙령은 그들에겐 날벼락과 같은 도전이었을 겁니다.
게다가 더욱 슬픈 일은 이를 찬성하고 자청하여 끌어들인 이들이 동족 안에서 나왔다는 점이었지요.
"그들은 음식으로 더렵혀지거나 거룩한 계약을 모독하느니 차라리 죽기로 작정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죽어갔다."
(1마카 1,63)
오늘 독서의 대목에서도 드러나지만, 대부분의 전쟁사가 그렇듯 마카베오기 안에는 수월히 읽어나가기 어려울 정도의 격심한 전쟁과 잔인한 박해, 처절한 죽음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중요하고 또 소중한 이유는 민족적 정체성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배반하라고 시시각각 조여 오는 악의 폭력 앞에서 목숨을 던져 신의를 지킨 이들의 존재를 통해, 지금 이 세상의 흐름을 주도하는 권력과 재물의 드센 유혹에 맞서 하느님 백성인 우리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 차라리 죽기로 작정하였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다종교사회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이스라엘의 이런 결의가 많이 생소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이스라엘에게 하느님과의 관계와 율법은 자기들이 누구인지 규정하는 생명이었지요.
민족의 생명인 정체성을 생명을 바쳐 지켜내는 것이 신앙의 정당한 표현이었을 겁니다.
이스라엘은 외세의 침략과 박해, 죽음의 시련을 겪으면서도 멈추지 않고, 지치지 않고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일어섭니다.
죽음도 그들을 막지 못했지요.
자신이 바라는 바를 정확히 알고 하느님의 뜻 안에서 내면화한 이는 어떠한 거센 저항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생명을 지키는 일이니까요.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신앙과 사랑을 고백하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때때로 세상은 장애물과 걸림돌을 던집니다.
모두가 열광하고 추구하는 물질주의가 경쟁과 약육강식의 폭력을 부추기고, 서로 사랑하라는 하느님 말씀을 낡은 종교적 관념 안에 가두어 버리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하느님의 자녀로 신의를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마카베오 시대 못지않게 어렵기도 하고, 그렇기 때문에 각자 희생과 결단을 마냥 미룰 수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꾸짖음과 저지에도 자신의 갈망을 존중하고 에수님을 불렀던 예리코의 눈먼 이나, 죽음의 위협 앞에서 신앙의 항쟁사를 이어간 순교자들처럼 충실함과 용기를 청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가 하느님 뜻 안에서 바라는 바를 그분께서 반드시 이루어주실 것이라 믿고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 작은형제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잠자코 있어서는>
오늘 복음은 중도 맹인이 다시 시력을 찾는 얘기입니다.
길가에 앉아 구걸하다 지나가시는 주님을 만난 것을 보면 주님을 만날 것을 기대하지도 부러 찾아간 것도 아니지요.
그리고 주님을 만나지 않았으면 다시 시력을 찾을 생각도 하지 않았겠지요.
그러고 보니 너무 당연한 얘기지만 주님이 없으면 시력을 되찾는 은총은 꿈도 꾸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맹인에게 은총은 그야말로 생각지도 않은 선물이요, 꿈도 꾸지 않았는데도 주어진 선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은총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의 그는 미적거리다 기회를 놓치거나 은총을 얻고자 하는 열망이 없었던 사람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잠자코 있으라는 사람들의 꾸지람에 간청을 그치지 않고 오히려 더 큰 소리로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외칩니다.
이는 하느님 은총을 받게 될 때 우리가 갖춰야 할 양면적 태도, 곧 수동성과 적극성을 잘 보여주는 예입니다.
앞서 봤듯이 은총이란 뜻하지 않게 주어지는 선물이기에 은총을 받기 위해 놀부가 제비 다리 부러트리듯 해서는 안 되고, 흥부처럼 전혀 생각지도 않다가 주어지는 수동적인 것이어야 하지만 기도하지도 청하지도 않고 잠자코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칼 라너라는 분은 기도에 대해 이렇게 정의를 내렸지요.
"기도는 성사보다 중요하다.
많은 영혼이 성사를 받지 않고도 구원되지만, 기도 없이 구원받은 영혼은 결코 없기 때문이며, 하느님의 은총은 본래 사람의 공로로 주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은총이 우리 행동에 선행되어 무상으로 주어짐이 사실이라면, 그 은총이 제일 먼저 일으키는 반응이 마음의 움직임인데, 이 움직임을 가장 간단하고 정확하게 일컬어 ‘기도’라고 한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잠자코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욕심이 일 때는 잠자코 있어야겠지만 은총이 주어질 때도 잠자코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은총에 맞갖은 열망과 갈망이 마음 안에서 일어나야 하고, 받고 난 뒤에는 오늘 맹인처럼 감사와 찬양이 솓구쳐야 하며, 입술로만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이렇게 하여 맹인에게 베풀어진 자비는 단지 눈의 치유가 아니라 구원이었고,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보는 것이었는데, 오늘 우리는 이런 맹인을 부러워하고 또 본받아야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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