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사업은 시간과의 싸움" 스피드 경영에 박차
"2등은 망한다"며 몇 배 빠른 속도로 과감하게 투자
품목 및 해외 다각화로 삼성 반도체 불패 신화 이어가
1970년 미국 인텔이 1K D램을 개발한 이후 PC 시장 성장과 함께 반도체 산업은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한다. 초기 10년은 텍사스인스트루먼트, 페어차일드, 마이크론테크놀러지 등 미국 기업들이 반도체 시장을 주도했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점차 일본의 NEC, 히타치, 도시바 등이 선두주자로 나서기 시작했다.
1970년대 초반, 삼성전자에서는 이건희 회장을 중심으로 반도체 산업이 추진됐다. 그러나 시기상조라는 부정적 견해와 미국, 일본을 어떻게 이길 수 있겠냐는 자조 섞인 푸념이 팽배했다. 그러던 1973년 전 세계는 오일 쇼크의 충격에 휩싸였고, 그 여파로 국내 최초의 반도체 기업이었던 한국반도체가 경영 위기에 처하면서 인수자를 찾고 있었다. 반도체를 주식회사, 원자력과 함께 인류의 3대 발명품으로 꼽았던 이 회장에겐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이 회장은 인수를 추진했지만 삼성은 여전히 반도체 사업 진출에 대한 시기를 저울질하고만 있었고 자금 부족을 이유로 인수 반대를 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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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삼성 반도체 30년을 맞아 기념서명을 하는 이건희 회장.
사재 털어 한국반도체 인수반도체 산업에서 출발이 늦어지면 일본, 미국을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진 이 회장은 정면돌파를 선택했다.
“제 사재를 보태겠습니다.”
결국 이 회장의 사재 출연과 함께 삼성은 한국반도체를 인수하고 본격적으로 반도체 사업에 나선다. 그러나 자본, 기술, 시장 어느 것 하나 변변치 못한 상황에서 시작한 삼성 반도체에 대한 외부의 시각은 냉랭했다. 미국과 일본의 전자업계는 삼성의 한국반도체 인수를 놓고 “걸음마도 못하는 아이가 날려고 한다”며 비아냥거렸다. 일본의 한 기업 연구소는 ‘삼성이 반도체를 할 수 없는 다섯 가지 이유’라는 보고서를 내놓으며 비판하기도 했다.
모두가 불가능이라고 등을 돌릴 때, 이 회장은 거의 매주 일본으로 가서 반도체 기술자들을 만났다. 기술자들을 호텔로 불러 밤새도록 토론했다. 반도체 엔지니어를 찾아 미국 실리콘밸리도 드나들었다. 그들을 통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직접 배우면서 기술 확보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1981년 초 컬러TV용 색신호 IC 개발에 성공했고, 이를 통해 VLSI(초고밀도 집적회로) 기술 개발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러한 이 회장의 노력을 인정한 삼성그룹은 1982년 당시로서는 거금인 27억원을 들여서 반도체 연구소를 건립했다. 당시 우리나라 전체 예산이 9조원에 불과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투자였다. 이듬해인 1983년 삼성은 반도체 사업 진출을 공식화했다. 10년 만에 핵심사업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연구개발과 생산을 한 곳에 모아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시도조차 하지 않을 때 한 발 앞선 선택과 도전은 반도체 산업이 결국 시간 싸움이라는 이 회장의 판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시간 싸움에서 앞서기 위해서는 모두가 한 자리에 모이는 복합화가 선결과제임을 파악한 이 회장은 1983년 연구개발(R&D)과 생산을 한 곳으로 모은 기흥 복합화 단지를 준공한다. 이 회장은 기흥에 부지를 마련할 때부터 직접 정부를 찾아가 사업 설명을 할 정도로 열정을 쏟았다.
삼성은 영하 15도의 혹한 속에서 6개월 만에 기흥공장을 완공하고 일본이 6년이나 걸쳐 개발한 64K D램을 6개월 만에 개발했다. 전문가들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은 스피드였다. 이후 미국과 일본의 반도체 업체를 따라잡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후발주자가 선두주자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몇 배 더 빠른 속도를 내야 한다. 여기에 반도체 산업 특성상 2등은 의미가 없다. 이 회장은 “투자시기가 6개월만 늦어도 몇 천억 원의 이익을 날려 버리는 것이 반도체 사업이다. 선두기업만이 이득을 챙길 수 있는 업종의 특성상 2등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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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인치 웨이퍼를 적용한 16메가 D램 양산공장 준공식 모습.
경쟁사 머뭇거릴 때 과감하게 결단기술을 선도하는 1등 제품만이 채택되는 상황에서 누구보다 한 발 앞서 최고 성능의 제품을 내놓지 못하면 기업의 생존 자체가 불투명해지는 형국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선두주자 역시 추월의 틈을 내주지 않기 마련이다.
삼성이 그 틈을 비집고 추월을 시도한 첫 번째 결정적 순간이 1987년에 있었다. 4메가 D램 개발 시 회로를 파 내려가는 트렌치 방식과 회로를 쌓아가는 스택 방식으로 의견이 양분될 때 이 회장은 엔지니어적인 감각을 발휘해 스택을 선택한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당시 트렌치 방식을 선택했던 경쟁업체는 선두경쟁에서 완전히 밀려났다.
삼성의 반도체 신화 창조 과정에서 분수령이 된 두 번째 결정적인 순간은 8인치 웨이퍼를 적용한 16메가 D램 생산이었다. 그때 까지만 해도 6인치 웨이퍼가 반도체 생산의 대세였다. 8인치 웨이퍼는 6인치보다 생산성은 1.8배 높았지만 공정이 복잡하고 수율 확보가 어려웠다. 어느 누구도 선뜻 8인치 웨이퍼로 전환하지 못한 건 그만큼 기술적인 한계와 위험요소가 컸기 때문이다. 1위 기업들도 머뭇거리고 있는 순간, 추월의 기회를 엿보던 이 회장은 과감하게 8인치 웨이퍼 투자를 결정했다.
이 회장은 이후 에세이에서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고심 끝에 8인치로 결정했다. 실패하면 1조원 이상의 손실이 예상되는 만큼 주변의 반대가 극심했다. 그러나 우리가 세계 1위로 발돋움하려면 그때가 적기라고 생각했고, 월반하지 않으면 영원히 기술 후진국 신세를 면치 못하리라고 판단했다.”
1992년 세계 최초 64M D램 개발 성공에 이어 1993년 8인치 웨이퍼 시대를 연 삼성 반도체는 개발과 생산에서 명실상부한 세계 1위의 자리에 올라섰다. 삼성이 치고 나간 6개월에서 1년 후 일본 업체들이 쫓아왔다. 하지만 그땐 이미 삼성이 시장 대부분의 수익을 거둬간 이후였다. 삼성은 1996년부터 1998년까지 반도체 시장에 깊은 불황이 닥쳤을 때도 투자를 멈추지 않았다. 삼성은 불황일 때 다가올 호황국면을 내다보고 과감하게 투자를 늘렸고, 일본·대만 업체들은 호황일 때 투자에 나서 제품을 양산할 때쯤 불황을 맞는 악순환을 거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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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5월17일 경기도 화성 삼성전자 반도체 16라인 기공식에 참석한 이건희 회장이 기공 기념 시삽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권오현 사장, 이 회장, 최지성 사장, 이재용 부사장, 윤주화 사장(당시 직책).
경영복귀 후 반도체 생산라인 기공식 가장 먼저 방문D램 분야에만 지나치게 의존한 사업구조에서 탈피해 품목도 다각화했다. 메모리 분야에서 D램 의존도를 줄이면서 낸드플래시 등으로 시장을 확대하고, 시스템LSI 투자에 나서는 투 트랙 전략을 펼쳤다.
삼성 낸드플래시 사업의 분수령은 2000년 초에 찾아왔다. 일본 도시바가 자사의 D램 부문 인수와 낸드플래시 분야에서의 합작을 제안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회장은 두 가지 제안을 모두 거절했다. 안정적인 2위보다는 독자적으로 시장을 개척하기로 결심했다. 이 회장의 결정은 1년도 지나지 않아 옳은 판단이었다는 것이 입증됐다. 2001년 삼성은 세계 최고 집적도를 가진 1기가 낸드플래시 메모리 개발에 성공하면서 낸드플래시 세계 1위에 올랐다. 낸드플래시 시장 장악은 몇 년 뒤에 만개한 모바일 시장에서 삼성의 대약진을 이끌었다.
이건희 회장은 지난 2011년 반도체 사업에 또다시 승부수를 던졌다. 경기도 화성공장에서 메모리 반도체 생산라인 등에 11조원을 쏟아 부었다.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세계 1위 입지를 더욱 굳히고, 경쟁사들의 허를 찌르는 전략이었다. 이 역시 경쟁업체보다 한 발 빠른 대규모 투자를 통해 시장 지배력을 키우기 위해서였다. 경영 일선을 잠시 떠났던 이 회장은 경영복귀 후 화성공장 메모리 반도체 생산라인 기공식에 가장 먼저 방문해 반도체 사업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반도체 진출 이후 지금까지 삼성 반도체는 불패신화를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불패신화의 비결인 스피드는 비단 반도체뿐만 아니라 삼성 전반에 걸쳐 확산되면서 빠른 경영 판단과 행동으로 거대 조직임에도 세계 시장 변화에 민첩하게 대응하는 삼성의 강점으로 자리잡게 됐다.
반도체 사업 시작하며 글로벌화 꿈 꿔삼성은 지난해 연말 중국 시안 반도체 공장에서 V낸드 플래시 메모리 시범생산에 돌입했다. 기술유출을 이유로 국내 생산을 고수해온 삼성이 중국 시안에 해외 첫 메모리 반도체 공장을 건설했고, 이제 시범생산에 들어간 것이다. 중국의 수요가 증대하면서 중국측의 요구를 수용하는 차원에서 현지 생산을 결단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이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이건희 회장의 거대한 밑그림 속에 들어가 있던 계획이었다.
1983년 반도체 산업을 현장에서 진두지휘하던 이 회장은 임원들과 함께 도시바의 최신 반도체 공장인 요까이치 공장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다음 행선지로 이동하는 헬리콥터 안에서 임원들에게 반도체 산업에 대한 글로벌 전략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국내 공장을 제2의 기흥단지(현 화성 단지)로 확장하고 미국과 유럽, 그리고 동남아 지역에 대규모 반도체 공장을 차례차례 지어나가자.”
당시 삼성은 한국 내에서 고작 5개의 반도체 생산 라인을 운영하는 수준이었다. 그야말로 헬리콥터를 타고 가면서 언젠가는 우주선을 따라잡겠다는 원대한 포부였다. ‘신화’로 불릴만한 이러한 삼성 반도체 산업이 보여준 스피드는 우리 민족이 갖고 있는 ‘빨리빨리’ 근성에 철저한 미래 예측과 도전 정신이 결합돼 나온 결과물이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