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묵상]: 고린도후서(1장~3장) 묵상
1. 고린도후서는 어떤 책인가?
고린도후서는
바울의 개인적인 간증이 가장 많이 나오는 책이다.
심지어 14년 전에 셋째 하늘에 올라가
말로 다할수 없는 신비한 천국의 광경을 본
비밀스런 개인 간증까지 다 꺼내놓는다.
그 이유는 고린도 교회가 바울의 사도성을 의심했기 때문이다.
다른 사도들은 모두 예수님과 동거동락 했던 분들인데 바
울 사도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다메석 도상에서 주님을 만났으며
주님에게 직접 이방인들의 사도로 보냄을 받은 것을 설명한다.
자신의 사도 된 표시는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고 말했다(고후12:12).
이는 마치 예수님이,
“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내가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것이요(요5:36)”라고 말씀하셨던 것과 같다.
바울은 고린도후서를 시작하자마자 자신이 너무나 큰 어려움을 당하여
죽음의 순간까지 갔던 적이 있었노라고 어려움을 토로 한다.
사형선고를 받은 것 같은 막막한 순간이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위로에 능하신 하나님이
그 모든 환란에서 건져 내어 주셨다고 기록한다.
이와 같이 고린도후서에는 바울 사도의 인간적인 고뇌와
솔직한 변명과 비밀스런 간증
그리고 교회를 향한 가득한 사랑이 진솔하게 드러나 있다.
특히 8장, 9장에는 `연보장`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자세하게 헌금에 대해 가르쳐 주고 있다.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두고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둔다.
결국 없어질 세상 것으로 헌금하여 심으면
없어지지 않을 영원한 영광으로 갚음을 받을 것이다.
가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천국대사로서 예수의 향기를 풍기며
복음을 전파한 기독교의 가장 위대한 복음 전도자의
진솔한 속마음을 리얼하게 보여 주고 있는 고린도후서를 읽을 때마다
감동이 밀려오고 마음이 짠해 온다.
그는 마지막을 이렇게 축도로 맺고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고후13:13). 아멘.
2. 모든 위로의 아버지
고후서를 펼치면 1장에 무려 10번 이상이나 `위로`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4절의 짧은 한 구절 안에도 무려 세 번이나 `위로`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한마디로 고후 1장은 성도의 `고난`과 하나님의 `위로`가 반복되는 장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이 세상을 살 때
고난을 전혀 안 당하도록 하시지는 않는다.
대신에 고난을 감당할 대책을 준비하고 계시는데 그 대책 중 하나가
하나님 아버지의 강력한 `위로하심`이다.
하나님은 자비의 아버지이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다.
그 위로가 얼마나 효력이 큰지 크나큰 고난도 감당하게 할뿐더러
오히려 환란 중에 있는 사람들까지 찾아가
위로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성경 고후 1장은 증거한다.
자비로운 아버지는 자식이 아파하면 잠을 못 이루고 함께 아파하신다.
사도행전을 읽다 보면 바울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을 당하여 감옥에 갇히게 된 장면이 나온다.
천부장이 바울이 사람들에게 잡혀 살해당할까 싶어
얼른 잡아서 감옥에 가두어 두었다.
하루 종일 성난 군중들에게 시달리느라
바울의 온 몸은 쑤시고 천근 만근 무겁고 아팠을 것이다.
끙끙 신음하며 차디찬 감옥에서 잠 못 이루며 고통 중에 있었다.
바로 그 때 위로의 주님이 그에게 나타났다.
“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행23:11).
너는 이 곳에서 안 죽는다는 것이다. 로마에도 갈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걱정 말고 담대하라는 주님의 위로의 음성을 듣고
바울이 얼마나 힘을 얻었겠는가 생각해 보라.
늘 이런 식이었다. 바울이 전도하다가 힘들어 지치면
주님은 어김없이 그에게 위로와 성령의 권능을 부어 주시어
그 어려움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해 주셨다.
이것이 자기 자녀들을 향한 자비로운 아버지의 마음이다.
나는 어떤 책에서 경북대 총장을 역임하신
박찬석 교수님이 쓰신 글을 읽어 본 적이 있다.
" 저는 경상도 두메산골 산청이라는 곳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의 권유로
대구라는 대도시의 한 중학교를 부푼 꿈을 갖고 들어갔습니다.
첫 시험을 쳤는데 반 68명중에서 68등을 하였습니다.
기대하시며 기다리실 산청의 아버지께 차마 그걸 보낼 수가 없어
68/68을 68/1로 고쳐서 보내드렸습니다.
그 소식이 퍼지게 되어...
동네 사람들은 보는 사람마다 아버지께 축하 인사를 했고
아버지는 집에서 기르시는 큰 돼지를 잡고
동네 잔치를 한바탕 벌였다고 합니다.
저는 그럴수록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고
정말 죽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
오랜 세월이 덧없이 흘러 저는 대학 교수가 되었고
중학생인 아들 녀석을 데리고
고향 산청의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습니다.
그리고 수십 년을 가슴에 묻어두고 차마 얘기하지 못했던
그 얘기를 힘겹게 꺼내었습니다.
" 아부지에... 저~ 제가 중학교 때...“
" 그만 말하지 말거래이.... 쟈(손자)가 듣는다 아이가...."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이다.
아버지는 처음부터 그 사실을 알았지만
자식에 대한 기대와 사랑으로 평생 모른 체 하고 계셨던 것이다.
비록 시골 산골의 못 배운 아버지 이셨지만
자식을 아끼는 사랑만큼은 하늘처럼
크신 분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시고기라는 어족이 있다.
그 고기는 새끼들을 보호하고 키운 다음에
자신의 살을 자식들에게 먹이고
자기는 가시만 남아서 죽는다는 고기다.
그래서 어느 시인은 이런 글을 남겼다.
“가시고기 같은 아버지.
나의 아버지.
먼 바다에서 돌아와
기둥을 세우고 서까래를 얹고
방 한 칸 마루 한 칸
강물 속에 집을 하나 지었네.
처자 하나 맞아 들여
논밭 갈며 알콩달콩 살다가
집안에 포도송이 같은 알
주렁주렁 매달렸으니
살 마르고 뼈 빠지게 몸 던져
밖으로 내보낼 몫이 태산 같네.
혹시 병들까, 누가 앗아갈까
밤낮으로 가시의 창을 들고
외적과도 맞서 싸웠네.
하루같이 추운 겨울이라
양 팔로 연신 날개 짓 하여
따뜻한 밤을 만들어주는
가시고기 아버지.
험난한 세상 구경하겠다고
이른 새벽부터
우루루 집밖으로 뛰쳐나오는
어린 새끼들 바라보노라니
어느새 머리 하얗고
검버섯 살갗의 팔순이네.
그런 당신의 몸마저
살 발라 자식에게 보시하고
가시만 남기고 떠나가는 아버지.
가시고기 나의 아버지...”
바울은 고후 1장에서
이러한 자비로운 아버지를 체험했다고 간증한다.
우리에게는 위로의 아버지가 우리 곁에 계신다.
독생자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위해 희생하신 아버지이시다.
이 세상 어떤 부모보다도 하늘 아버지의 사랑은 높고 깊다.
이 위로가 우리 속에 역사하기
에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감당 해 갈 수가 있는 것이다. 아멘.
- 꿀송이 보약 큐티, 1년1독 성경 통독
남아공 노록수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