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남한산성을 보고
- 미래의 한중관계를 성찰할 기회다 -
지난 10월3일 개봉영화 남한산성을 관람했다. ‘남한산성(南漢山城)’은 지금부터 381년 전인 1636년 병자호란을 재현한 전통사극으로 고립무원의 남한산성에서 조선의 운명이 걸린 가장 치열했던 47일간의 항전(抗戰)기록영화이다. 이 영화는 ㈜ 싸이런 픽쳐스가 150여억 원을 투입하여 제작한 대작으로 CJ 엔터테인먼트가 배급하였으며, 출간 후 70만부를 판매한 김훈 작가의 베스트셀러 “남한산성” 원작을 황동혁 감독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카리스마 넘치는 이병헌과 김윤식 그리고 연기파 박해일, 고수, 박희순, 조우진 등 배우들을 등장시켰다.
영화줄거리는 정묘호란에서 청(淸)과 형제(兄弟)관계의 강화조약을 맺은 청은 조선에 다시 군신(君臣)관계로 바꿀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조선이 불응하자 1636년(인조 14년) 12월1일 청 태종이 직접 10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입하였다. 조선은 청의 공격을 피해 임금과 조정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청과 화친을 통해 후일을 도모하자는 주화파(主和派)와 청과 맞싸워 대의를 지키자는 척화파(斥和派)간에 대립하면서 항전 47일 만에 항복하는 우리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내용이다.
영화에서 같은 충성심을 가졌지만 명분보다 당장의 삶이 중요하다는 주화파인 이조판서 최명길(이병헌)과 대의를 지키지 못하는 삶은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척화파인 예조판서 김상헌(김윤석)의 서로 다른 신념으로 첨예하게 맞서는 연기가 일품이었다. 두 사람은 왕을 앞에 두고 “죽음은 견딜 수 없고 치욕은 견딜 수 있다. 만백성과 함께 죽음을 각오하지 말라.” 는 최명길과 “ 한나라의 군왕이 오랑캐와 맞서 떳떳한 죽음을 맞을지언정 어찌 만백성이 보는 앞에서 치욕스러운 삶을 구걸 하려는가”라는 김상헌의 주고받는 날카로운 말이 큰 감동을 주고 있다. 그리고 대신들 사이에서 고뇌하는 인조대왕(박해일), 대장장이의 천한 신분으로 왕의 격서를 운반하는 중책을 맡은 서날쇠(고수), 혹한의 추위 속에서도 적의 공격을 막아내는 수어사 이시백(박희순), 청나라 역관 정명수(조우진) 등의 연기도 돋보였다. 그리고 작년 11월부터 5개월간 강원 평창에서 세트를 지어 남한산성의 모습을 생생히 담은 제작진의 노력과 영화 ‘마지막황제’에서 아카데미 작곡상을 수상한 시카모토 류이치 음악감독의 참여도 눈여겨 볼 수 있다.
이 영화는 전통사극으로 익살스럽고 코믹한 캐릭터는 없었으며 모든 관람객이 시종일관 진지하였다. 그리고 황감독이 시사회 직후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밝힌 대로 “380여년 전역사와 현재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통하여 과거를 되새기며 현재를 돌아보고 고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듯이 힘없는 국가의 슬픔을 뼈저리게 느끼게 하는 역사적 교훈과 현대사의 성찰(省察)을 어필하고 있다.
병자호란 당시 조선은 임진왜란이 끝난 40여년이 지나, 남쪽으로 왜구들의 침입을 막고, 북쪽으로는 한족(漢族)의 명(明)과 여진족의 청(淸)과 균형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은 명과 사대(事大)주의를 고수하면서 청에 대해서는 야만족으로 천시하였으며, 청이 세력을 확장하면서 친명(親明)정책을 포기하고 친청(親淸)정책을 강요하면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정묘호란은 1627년(인조5년) 청군(당시 後金)의 1차 침입으로 인조대왕은 강화도로 피난하였으나 청군의 위세에 대항도 못하고 형제(兄弟)관계의 강화조약을 맺었다. 그 후 청은 다시 군신관계로 바꿀 것을 요구하였으나 불응하자 1636년 12월1일 청태종이 직접 10만 대군을 이끌고 심양을 출발하여 압록강을 도하 후 10여일 만에 서울근교까지 왔다. 당시 조정는 비빈(妃嬪)과 두 왕자 봉림, 인평대군을 강화도로 보내고 인조는 길이 막혀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
청군은 서울을 함락 후 12월16일 남한산성을 포위하였으며, 산성 내 1만2천여 병력은 혹한과 기아에 시달려 전의(戰意)도 저하되었다. 1월23일 강화도가 함락되자 주화파의 건의로 1월30일 성문을 열고 삼전도(三田渡: 지금 송파)에 나아가 청 태종에게 치욕적인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세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는)의 예를 행하면서 항복하였다. 조약에서 명나라와 국교단절, 연호 폐지, 조선왕자들과 3학사(홍익한, 윤집 오달제) 등 척화파 대신들을 포로로 하고, 매년 정기적 사절파견과 금은 등 세폐(歲弊:공물)를 보내기로 하였다. 그리고 병자호란기간 청군은 양민학살, 재물약탈 등 온갖 만행을 자행하고 5만여 명의 젊은 부녀자를 성노리개로 끌고 가서 소위 속가(贖價 몸값)를 받고 팔며 도망쳐온 환향녀(還鄕女) 용어까지 나왔다.
영화 남한산성은 작금의 국내정치와 한중관계에도 시사(示唆)하는바가 크다. 병자호란 당시 조선조정은 계속된 당쟁(黨爭)으로 외교적 해결노력과 전비태세도 취약하였고 의병활동도 미약하였다. 오늘날 우리의 안보실정도 다름이 없다. 중국이 경제 군사강국의 패권대국이 되자 또다시 한반도에 영향력행사를 노리고 있다. 시진핑 주석이 미중정상회담에서 노골적으로 한반도는 옛날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말 한바 있다. 2002년부터 시작된 ‘동북공정(東北工程)’으로 북한을 중국 변방국가로 조장하려 하고 있으며, 작금의 사드 보복행태는 국제질서와 우리나라를 무시한 처사이다.
남한산성은 개성, 수원, 강화와 더불어 예부터 서울 외곽의 요충지였다. 현재 국가사적 57호로 지정되어 패배와 치욕의 역사를 극복할 겨레의 상징이 되고 있다. 그러나 경기도립공원 158호로 지정하여 국민관광지나 유흥지로 변모가 우려된다. 얼마 전 남한산성에 올라가서 병자호란당시 인조대왕이 산성에서 직접군사를 지휘했던 수어장대(守禦將台)에 올라가서 무망루(舞忘樓) 현판에 새겨진 ‘호란의 피맺힌 한을 잊지 말자’는 글을 보고 많은 생각을 하였다. 아무쪼록 병자호란의 치욕 역사를 담은 영화 ‘남한산성’이 모든 국민들에게 국가안보의 중요성을 다시인식하고 유비무한의 자세를 가다듬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그리고 새로운 대중(對中)경각심과 국민통합, 애국심의 발로를 기대한다.
♣제가 경기도 광주에 이사와서 12년을 살며, 가까운 남한산성을 자주 오르 내릴때 마다 역사관에 전시된 자료를 숙독하며 느꼈던 울분과 회환이 윗글에 잘 그려져 있어, 올려 드렸읍니다. 유상식
첫댓글 역사를 배우고 알아야 치욕의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고.....!
역사를 안 배우고 모르면 멸망한다.
오늘의 현실을 뚫고 나갈 교훈을 얻는 좋은 계기가 되길...!
연휴에 시간나시면 가족들과 "남한산성" 영화 관람하시는것도 좋을겁니다. 7,8년전에 김훈 작 "남한산성" 소설을 밤새워 읽으면서도 당시 우리나라가 얼마나 어리석고 불쌍하였는가 울화가 치밀었어요. 임진왜란때 당한 약탈과 능욕은 더욱 참담했다지요. 요즘 우리정부가 외부세력으로부터 왕따당하는 모습을 볼때 우매한 역사가 되풀이 될가 염려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