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어디에서 사시는가?” -존엄한 품위의 우리 안에, 우리와 더불어- “우리가 바로 성전입니다”
2024.2.6.성 바오로 미키(1564-1597)와 25위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1열왕8,22-23.27-30 마르7,14-23
어제 오후 뜻밖에 선물처럼 내린 흰눈으로 나무마다 눈꽃들이 만발합니다. 눈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살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강론쓰기 위해 자리에 앉을 때마다 숙제거리를 가득 안고 시작하는 느낌입니다. 참 공부할 것이, 배울 것이 많은 하루하루입니다. 한 일간신문은 “가족파산-조여오는 빚, 가족의 파멸” 1면의 톱기사에 이어 두면에 걸처 상세히 소개되고 있었습니다. 각자도생의 야만의 위기의 시대입니다.
또 다른 일간신문은 “내몸과 함께 잘 살고 있습니다” 주제로 5회에 걸쳐 몸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내용별 시리즈 목차는- 1.시간이 새겨진 나이든 몸, 2.크고 아름다운 살찐 몸, 3.다름을 알려준 장애가 있는 몸, 4.이대로도 괜찮은, 아픈 몸, 5.규정을 거부하며 존재하는 몸-으로 이루어 졌으며, 어제는 4번째 항목을 다루고 있는 특집기사였습니다. 삶은 몸이라 할만큼 몸에 대한 정확한 이해의 지혜가 참 필요한 시대입니다.
이 모두가 공부의 대상입니다. 공부중의 평생 공부가 하느님 공부, 예수님 공부, 참나를 아는 공부입니다. 공부의 궁극 목표는 무지에서의 해방입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인간 무지에 대한 답은 하느님의 지혜인 예수님뿐임을 깨닫습니다. 참 무지한 인간입니다. 인간이 겪는 대부분의 불행이나 비극은 거의 대부분이 무지에서 기인합니다.
무지의 죄, 무지의 악, 무지의 병, 동방영성에서 한없이 강조하는 인간의 무지입니다. 불가의 삼독(三毒)이라 일컫는 탐진치(貪瞋癡)도 무지의 결과입니다. 지금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전쟁도, 기후위기의 원인도 결국은 인간 무지의 탐욕에서 기인합니다. 그러니 우리의 궁극의 필생 공부는 무지에서의 해방에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전쟁도 결국은 무지와의 전쟁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자 지혜이신 예수님과 하나될 때 무지에 대한 승리입니다. 하느님 지혜의 빛, 말씀의 빛만이 무지의 어둠을 퇴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매일미사가 그리도 고마운 것입니다. 무지의 병에 대한 최고 처방이 이 거룩한 미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조상들의 전통에 대한 논쟁입니다. 여기서 무지와 지혜가 첨예하게 대립하는바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과 예수님입니다. 조상들의 전통과 관습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무지로 인해 하느님의 계명이 덮여 버리면 완전히 주객전도, 본말전도의 현실이 되어 버립니다. 하느님 계명의 지혜로 분별되어야 하는 전통이요 관습입니다. 예수님은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전통과 계명간 관계를 깨끗이 정리해 주십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의 무지를 밝히는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바로 인간 무지의 보편적 현실을 가리킵니다. 무지에 눈이 멀어 하느님의 계명이 아닌 사람의 규정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코르반의 예를 들면서 하느님을 섬긴다는 구실로 교묘하게 부모 공경을 거스르는 이들의 위선과 무지를 꾸짖습니다. 무지로 인해 마음이 주님께로부터 멀리 떠나 있어 헛되이 주님을 섬기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지요!
그러니 사람되는 공부가, 지혜로운 사람되는 공부가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 평생공부인지 깨닫습니다. 이런 지혜로운 사람이 진정 교회 공동체의 보물입니다. 아무리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전의 건물도, 전통좋고 자연경관 수려한 수도원도 그 안에 지혜로운 사람이 없으면 다 공허할 뿐입니다. 그래서 제가 어느 수도원이나 사찰을 찾든지 우선 찾아 확인해 보는 것이 참으로 깨어 있는 지혜로운 고승(高僧)입니다.
우리 교회나 수도원을 저는 서비스업이라 합니다. 서비스업의 삼대필수조건도 첫째도 사람이요 둘째도 사람이요 셋째가 환경입니다. 첫째 사람이 친절하고 거룩하고 좋아야 하며, 둘째 실력이 있어 유능해야하고, 셋째 안팎의 환경이 좋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비스업에는 병원의 예가 적절합니다.
이 서비스업의 세 조건을 완벽하게 구비하고 있는 분이, 26동안 제 치아를 치료해주고 있는 독실(篤實)한 믿음의 치과의사 형제입니다. 감히 명의(名醫)요 성인(聖人)이라 칭해도 손색이 없는 분입니다. 사람 좋고 실력 좋은 의사에 환경 좋으면 최상이겠지만, 사람이 친절하고 좋아도 실력이 없어 무식, 무능한 의사라면 정말 문제입니다. 무식, 무능한데다 자기를 몰라 용감하면 정말 답이 없습니다.
제1독서의 솔로몬의 기도가 참 멋집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거대하고 화려한 건물에 너무 중심을 두는 듯 솔로몬의 무지가 엿보입니다. 저는 거대한 건물의 성전을 볼때마다 믿음의 위력과 더불어 얼마나 많은 민초들이 땀과 피를 흘렸겠나 생각하곤 합니다. 솔로몬은 성전 제단 앞에 서서 하늘을 향하여 두 손을 펼치고 기도합니다. 유대인이나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의 전통적 기도 자세입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 위로 하늘이나 아래로 땅 그 어디에도 당신 같은 하느님은 없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당신 앞에서 걷는 종들에게 당신은 계약을 지키시고, 자애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어찌 하느님께서 땅위에 계시겠습니까? 저 하늘, 하늘 위의 하늘도 당신을 모시지 못할 터인데, 제가 지은 이 집이야 오죽하겠습니까?”
마음을 다하여 갈림없는 순수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것은 옳고 마땅합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엄청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건물이 아닌 땅위의 존엄한 품위의 사람들 안에 있음을 몰랐습니다. 참 거룩하고 좋은 형제들의 공동체가 바로 하느님이 거하는 집임을 몰랐습니다. 성지가 있어 성인이 아니라, 성인이 있어 성지임을 몰랐습니다. 사람이 잘 살면 묻히는 어느 곳이나 명당이라 합니다.
<어린왕자>에 사막이 빛나는 것은 그 안에 샘을 품고 있기 때문이란 말도 있듯이, 명산대찰이 빛나는 것은 그 안에 고승(高僧)이 있어서 이고, 외적 건물이 성전이 빛나는 것은 그 안에 참 좋은 거룩한 신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참 거룩하고 좋은 사람들이 없는 건물뿐이라면 참 공허하고 쓸쓸하기 짝이 없을 것입니다. 이점을 솔로몬은 착안하지 못했습니다. 정말 성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전안에 있는 솔로몬입니다. 시작도 웬지 불안하고 불길한 느낌을 주는 솔로몬입니다.
하느님은 어디에 사십니까? 창세기에 하느님은 당신 모상대로 인간을 창조했다 하셨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은 화려한 건물이 아닌 끊임없는 회개로 원래의 순수한 마음을 회복한 우리들 안에, 우리들과 함께 사십니다. 우리가 있는 곳이 하느님의 현주소입니다. 솔로몬의 성전과 같은 거룩한 장소나 어떤 바리사인들의 손씻는 거룩한 행위도 인간의 거룩한 품위의 존엄에 비교하면 모두 빛을 잃습니다. 순수한 마음을 지닌 이들의 공동체 성전에서 찬연히 빛나는 하느님 자비와 지혜의 빛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제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에 이어 일본의 순교자들 기념미사를 봉헌합니다. 당시 일본은 임진왜란의 원흉 토요토미 히데요시 치하에서 박해중 예수회 회원인 성 바오로 미키는 33세에 체포되어 교토의 옥에 갇혔다가 작은 형제회 수사 6명, 예수회 수사 2명, 일본인 신자 15명 등 23명과 함께 1597년 1월3일부터 오사카를 거쳐 1월9일에는 나가사키로 출발합니다.
이들은 무려 한달이상 혹한속을 걸어서 2월5일, 도중에 자진하여 합류한 신자 2명과 함께 모두 26명의 신자들은 나가사키 해안 근처에 있던 니시사카 언덕으로 끌려가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합니다. 동시대의 저자가 쓴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의 순교 사기를 보면, 이들의 순교장면시 신앙고백을 대하면 감동 그 자체입니다.
순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 됩니다. 일본 순교자 26명의 순교성인 공동체 성전을 통해 영원히 찬연히 빛나는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성 바오로 미키가 포함된 순교자들 26명은 1862년 6월8일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시성되었습니다. 오늘의 우리 안에 면면히 계승되고 있는 성인영성의 디엔에(DNA), 순교영성의 디엔에(DNA) 같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회개로 깨끗해진 우리 모두의 공동체를 당신이 머무시는 거룩한 거처로, 성전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아멘.
- 이수철 신부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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