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 / 하린 (시인)
8. 상상 테마7 - 위치나 방향 관련 요소로 상상하며 시 쓰기
@ 소재나 모티브가 갖는 특징과 상상 적용 방법
만물은 언제나 위치와 방향을 갖는다. 그 위치나 방향에 따라 태도(시선)나 목적, 가능성이 달라진다. 현대 서정시 자체가 갖는 정서적 태도를 암시적으로 그려내는 것이 목적이므로, 같은 공간 안에서도 어느 위치에 놓여 있느냐, 어떤 방향성을 띠느냐에 따라 화자나 대상이 갖는 미묘한 심리적 맥락은 달라지게 된다. 여기 자동차 부품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오늘 해고 통보를 받은 가장이 있다고 치자. 공장을 빠져나오는 장면으로 시를 쓸 때 그가 근무하던 생산 라인을 바라보게 할 것인가, 뒤도 안 돌아보고 집 쪽만 바라보게 할 것인가, 공장 앞에서 시위 중인 다른 해고 노동자를 바라보게 할 것인가, 공장 앞 도로를 지나가고 있는 티끌 하나 없는 새 차를 바라보게 할 것인가, 자신의 처지와는 상관없이 흐드러지게 꽃들이 피어 있는 화단을 바라보게 할 것인가에 따라 가장의 심리 상태를 드러내는 농도와 좌표는 달라진다. 생산 라인을 바라보면 아쉬움이나 서운함이 될 것이고 집 쪽을 바라보면 막막한 상태에서 생계를 걱정하는 심리가 될 것이다. 시위 중인 해고 노동자를 바라보면 연민과 공감이 생길 것이고, 새 차를 바라보면 여러 감정이 교차할 것이다. 만개한 꽃들로 가득 찬 화단을 바라보면 자신의 처지와 상관없이 웃고 있어서 비애감이나 인생무상의 감정이 느껴질 것이다. 이처럼 시적 대상이 갖는 위치나 방향성은 곧 대상의 심리적 무늬를 나타내는 중요한 지표가 되므로 시적 대상의 위치나 방향성도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
위치나 방향에 대한 상상력을 동원할 때 시적 대상이나 사물에 익숙한 공간에 존재하게 되면 상상이 소극적 태도를 취하게 된다. 의자가 교실, 사무실, 재활용센터, 기구점 등에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런데 구름 위나 허공 위에 낡은 의자 혹은 한쪽 다리가 망가진 의자가 놓여 있다면 어떨까? “나는 상상하기를 좋아해요/ 나의 상상이 뛰어다닌 광장은 구름/ 구름 속엔 7살 때 내가 앉았던 의자가 놓여 있어요”라는 구절로 시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상상을 할 때 주의할 점은 상상이 억지스럽지 않게 하고 동화를 쓰듯 무조건 의인화를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상상을 하라니까 사물을 의인화시키는 경우가 많다. “의자 사장이 의자 과장에게 말했다” 이런 식의 의인화는 뻔한 정황을 나타내기 때문에 시적 재미가 없다. 그러니 최대한 의인화를 하지 않는 상태에서 상상을 동원하되, 그것이 억지스럽지 않게 펼쳐 나가도록 신선한 발상을 해야 한다.
필자의 시를 통해 그 소재가 어떻게 상상과 만나 펼쳐지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자.
위로 떨어지는 사람 / 하린
넌 키 작은 4번일 뿐이야 4번 타자는 좋지만 4번은 나쁜 것, 첫 번째 앞 줄 발각되기 좋은 자리, 분필 가루 먹기 좋은 자리, 안경도 없이 준비물도 없이
‘새나라’ ‘새마을’ ‘새엄마’ ‘새아빠’ 의 ‘새’는 날아다니는 새가 아니니까 자꾸 ‘새아들’이 되기 싫어도 어쩔 수 없어
철봉이 네게 4교시 끝나고 했던 말, 넌 이제 그만 매달렸으면 좋겠다, 태어날 때부터 4번
대롱대롱이란 말은 결코 위로가 되지 않아, 아래로 머리를 향한 채 쏠림의 방식을 즐기는 수밖에
구름 사이로 장딴지들이 지나갈 때 물이 오른 계집애들의 치맛자락은 늘 황홀했지, 휘파람을 부는 수밖에
그냥 4번을 끝내고 싶지만, 다리를 풀고 완전히 떠나고 싶지만 관심사는 오직 떨어진 후에 다가올 비웃음
노을 속으로 한 방울 한 방울씩 뒤틀린 생각들이 빠져나갔지, 너무 일찍 판단 중지된 세상, 정수리가 닫히고 있었지 꿈의 성장판과 함께, 담임이 다가왔지 4번 이 자식, 10분 더 추가! ― 『1초 동안의 긴 고백』, 문학수첩, 2019.
1단계 - 스스로 점검하기 – 메시지 분명히 하기 + 내 시만의 장점 찾기
너무나 어린 나이에 ‘새아들’이 되어야 하는 상황에 놓인 화자가 있다. 그 화자는 현실을 과감히 헤쳐 나갈 힘을 가지고 있지 않은 ‘4번’이다. 그럴 때 느끼는 현실에 대한 불만 내지는 이탈 심리를 「위로 떨어지는 사람」을 통해 표현하려고 했다.
「위로 떨어지는 사람」의 장점은 발상의 전환이다. 현실에서는 ‘위로 떨어지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만약에 누군가 자살을 하고 싶다면 ‘하늘이 있는 위로 떨어지고 싶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했다. ‘아, 죽으면 위로 떨어지는 사람도 있겠구나.’하는 메시지가 발상의 전환으로 자리하게 된 것이다.
2단계 - 객관적 상관물(현상)을 찾기+관찰과 조사 정밀하게 하기
「위로 떨어지는 사람」의 객관적 상관물이나 상관 현상은 ‘4번’과 ‘철봉에 거꾸로 매달리는 현상’이다. ‘4번’은 당당하게 현실을 헤쳐 나갈 정도로 키가 크지 않고 주목받지 못한 자리에 놓은 있는 화자를 대변하고, ‘철봉에 거꾸로 매달리는 현상’은 현실을 망각하고 싶어서 세상을 색다르게 보려는 화자의 심리 상태와 이탈 심리(이것이 확장되면 자살 심리)를 대변한다.
‘위로 떨어지는’ 상황에 놓인 어린 화자를 설정한 후 필자는 그 화자가 가진 요소들을 관찰했다. 4번, 앞자리, 준비물, 새엄마, 새아빠, 철봉, 매달리다, 대롱대롱, 체벌, 비웃음 등의 단어와 이미지가 떠올라서 메모를 했다.
3단계 - 확장하기 – 상상적 체험을 섬세하게 극적으로 하기
「위로 떨어지는 사람」에서 어린 화자의 상상적 체험은 필자의 경험과 합성이 되어서 증폭되었다. 실제로 필자는 초등학교 때 키가 작아서 4번인 적이 많았다. 그런 4번의 경험에다가 일찍 ‘새아들’이 되어야 하는 상황에 놓인 화자의 처지가 결합되어 극적인 상상이 펼쳐졌다. 단순한 4번이 아니라 담임 선생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준비물도 없이 가난한, “태어날 때부터 4번”인 존재. 자신이 가진 현실에 대한 불만스러운 반응으로 불량 학생인 척하는 성희롱적인 상황도 일부러 설정했다. 그래서 체벌을 끝없이 받게 되는 상황에 도달하게 된 것이고, 궁극적으로 하늘이 있는 ‘위로 떨어지고 싶은 사람’이 되게 만든 것이다.
* 또 다른 예문
맹목 / 김네잎 너의 서식지는 날짜 변경선이 지나는 곳, 어제와 오늘을 동시에 가질 수 있다 가방 속에 접어넣은 지도의 모서리가 닳아서 어떤 도시는 갑자기 사라지고 만다 오늘의 해가 다시 오늘의 해로 떠오른 적도 부근에 숙소를 정한다 날개를 수선할 때에는 길고양이의 방문을 정중히 거절해야 한다 난 철새도 아니고 지금은 사냥철도 아니니까 너에게 이미 할퀸부분을 다시 또 할퀴는 일 따윈 없어야 하니까 기착지를 뒤적이다 마지막 편지를 쓴다 마지막이 마지막으로 남을 때까지 쓴다 나를 전혀 마지막이라 생각하지 않는 너에게 삼일전에 보낸 안부가 어제 도착한다 너는 나를 뜯지 않는다 흔한 통보도 없이 너는 멀어졌고 난 네가 떠난 지점으로부터 무작정 흘러 왔다 너의 안부는 고체처럼 딱딱하고 나의 안부는 젤리처럼 물컹하다 몸 밖으로 빠져 나오려고 하는 기미조차 미약하여 난 비행非行이 너무나 쉽다 싸구려 여관방에서 보이는 야경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오늘도 나의 다짐은 추락하지 않고, 가벼워질대로 가벼워진 나의 착란은 뼈마저 버린다 너는 결코 이방異邦이 아니다 태초부터 회귀점이다 - 2016 〈영주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안과 밖 / 고광식 내가 전철 안에 있을 땐 전철은 안의 세계고 전철 밖은 밖의 세계다 나는 전철 안에 있었으므로 마주앉은 당신의 웃음으로 경주마도 만들고 인형도 만들고 솜사탕도 만들어 당신에게 줄 것이다 하지만 창밖의 세계는 소리가 지워져 있어 그것이 두려운 나는 몸을 떤다 그때 나는 안과 밖으로 각인된 갓 태어난 한 마리 조류이므로 내가 전철 밖에 있을 땐 전철 안은 밖의 세계고 전철 밖은 안의 세계다 나의 임무는 고속으로 달려오는 미친 속도를 막는 것 일정한 거리마다 쏟아놓는 소문을 항아리 속에 넣고 영원히 밀봉하는 것 전철 밖에 있는 건 두 다리를 가진 자의 특권이므로 그때 나는 당신에게 내 귀를 떼어줄지도 모른다 전철은 공간을 찢으며 달린다 안과 밖을 나누는 고속의 전철이 커다란 항아리 앞에 정차한다 ― 『외계 행성 사과밭』, 파란, 2020.
날짜변경선 / 전형렬
너는 좌우가 대칭이다 보이지 않는 선을 지나 시차는 생겨나고 좌든 우든 방향을 정해 날아야 한다 머뭇거린다 비뚤어진 치열을 딱딱거리며 나선으로 기울어진 추를 따라 순서대로 눈을 감는 영혼들 우주를 향해 튀어오른다 사탑이 없었더라면 납으로 만든 공과 떡갈나무 공은 다른 하루를 살았을 것이다 잘개 중앙을 가르고 여러해살이는 대칭을 잃고 기운다 나이테를 따라서 오른손을 따라서 자전하는 지구에 말뚝을 박아 꼭 쥐고 있으면 너는 어제의 너일 수도 있고 내일의 너를 붙들 수도 있다 - 『이름 이후의 사람』, 파란, 2020.
- 출처 : 『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 (더푸른, 20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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