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 끈을 풀기도/눅 3:15-17
성경본문 누가복음 3:15-17
15.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의논하니
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17.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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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이종윤목사
세례요한은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지 않고 오직 주님께 맞추었다.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로, 그리스도의 전령사로
`그는 흥해야겠고 나는 쇠해야 한다`(요3:30) 했다.
`나 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눅3:16) 했다.
그리스도의 천한 종이 되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생각했다.
세례요한은 실은 큰 자였다.
`여인이 낳은 자 중 그 보다 큰 자가 없었다`(마11:11)
`선지자 보다 더 나은 자며`(마11:9)
`오리라 한 엘리야(철의 사람, 우뢰의 아들)가 곧 이 사람이라`(마11:14)
`바람에 나는 갈대가 아니다`(마11:7)
그는 사자처럼 외쳤고 반짝이는 빛을 비추었으나 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 앞에서는 빛이 없다고 스스로 낮아지셨다.
그리고 `나는 당신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습니다`라고 엎드렸다.
민족의 대 스승, 지도자로서 그러나 주님의 종 되는 것이 그에겐 너무도 높이 보였다.
설교자요 세례자로 백성에게 영향을 계속 미쳤다.
I. 거룩한 봉사를 작다고 가볍게 여기지 말라
신발 끈 푸는 일은 아주 하찮은 일처럼 보인다.
1. 종이 몸을 굽혀 행하는 것은 자기 존엄성을 상실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나는 그리스도를 배우고, 그리스도를 위해 군중들에게 떡을 나누어주며 주님이 설교하시도록 배를 제공하고, 승리의 입성을 하시도록 나귀를 끌어 올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종 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들이다.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이 모독을 받거나 낮아질 필요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나 자신의 위엄을 밑에 깔고는 경건한 일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섬기는 것이, 그리고 섬기는 하찮은 일들이 우리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높게 평가된다.
2. 그리스도를 위한 작은 일
`그의 신발 끈을 풀어주는 것`이 우리가 크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귀하다는 것이다.
장터에서 신실하게 일하고 가정을 지키는 것이 방송이나 신문 매체에 날마다 이름이 쓰여지는 이들보다 더 큰 애국자다.
아비의 용돈보다 자식을 만져주고 사랑의 교감을 갖는 것이 더 중요하다.
구제하는 것보다 그들 위해 기도하는 것이 더 큰일이다.
3. 작은 일을 큰 일처럼 행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의 발 씻기는 일, 신발 끈 푸는 일이라 할지라도 죽은 자를 살리는 일보다 소홀히 여기지 않는다.
이 작은 일은 복음을 전하시는 그리스도를 돕는 일이 된다.
어린아이 하나에게 바른 예배, 바른 신앙을 가르치는 것이 목숨보다 작은 일이 아니다.
4. 그리스도를 위한 작은 일이 우리 신앙의 시금석이다
작은 일에 순종하는 것이 충성이다.
(기도, 찬송, 성경 읽기 등)
바리새인은 예수님 초청하고 신발 끈 풀어 드리지 못했다.
마리아, 마르다는 예수의 발까지 씻겨드렸다.
당신의 작은 사랑이 당신이 신앙인 인지 아닌지를 가릴 수 있다.
5. 신발 끈을 푸는 일은 인격적 교제를 말한다
주님의 발에 손이 닿아야 한다.
귀신을 내쫓고 병자를 고치고 복음 전하는 일과 신발 끈 푸는 일 중 하나를 택하려면 어느 것이 더 좋을까?
전자는 유다가 한 일이다.
그는 사탄이 하늘로부터 떨어지는 것도 보았다.
그러나 실패했다.
주님과 만남(교제)이 없었기 때문이다.
머리털을 풀어 주님의 발을 닦은 여인과 같이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
겨자씨 만한 믿음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바다로...
주님의 신발 끈을 푸는 일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II.`무익한 종이로소이다` 하자
봉사할 때 자기를 드러내려는 유혹을 받는다.
탕자가 신발 끈을 풀 수 있었을 때 아버지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종의 하나로 보소서 할 수 있었다.
그때 아버지의 사랑이 회복되었다.
사실 신발 끈 풀 자격도 없다.
무익한 종이기 때문이다.
전도도 내 맘대로 안된다.
모세의 입을 지으신 이가 그 입에 말을 넣어주실 때 바로를 이길 수 있었다.
예수님은 제자의 발을 닦으신 겸손의 본을 보이셨다.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주님 위해 한 일, 신발 끈을 푸는 일은 가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 일한 후 나는 무익한 종이로소이다, 할 수 있어야 한다.
끝까지 자기보다 주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자.
III. 우리를 격려하는 것이지 절망케 하는 것 아니다
우리 봉사가 무가치해졌다 해도 우리를 종으로 일 시키신 것 감사하자.
세례요한은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살았다.
왕궁에서 사는 이들처럼 부드러운 옷을 입지 않았다.
약대의 가죽을 입고 가난하게 살았다.
마침내 헤롯의 칼에 목이 잘리웠다.
그러나 그는 의의 증인으로 주님 높이다가 죽었다.
모라비안 선교사들은 서인도 지역에서 복음 위해 노예가 되었다.
문둥이에게 전도하려고 나병환자된 이도 있다.
주님 위해 손해를, 부끄러움을 당해 본적 있는가?
주님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다는 심정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