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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재피 형하거야(鼠竇在彼, 兄何去也)
쥐구멍은 저기 있는데 형은 어디로 갔는고
鼠 : 쥐 서(鼠/0)
竇 : 구멍 두(穴/15)
在 : 있을 재(土/3)
彼 : 저 피(彳/5)
兄 : 형 형(儿/3)
何 : 어찌 하(亻/5)
去 : 갈 거(厶/3)
也 : 어조야 야(乙/2)
출전 :
역대 조정의 옛 이야기(歷朝舊聞)3 기재잡기(寄齋雜記)3
조선 제11대 왕 중종(中宗) 때 정6품 관직 좌랑(佐郎) 심의(沈義)의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의지(義之), 호는 대관재(大觀齋), 심구령(沈龜怜)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심치(沈寘)이고, 아버지는 풍산군(豊山君) 심응(沈膺)이다. 어머니는 서문한(徐文翰)의 딸이다. 좌의정 심정(沈貞)의 동생이다.
1507년(중종 2)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兵科)로 급제,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조선시대 예문관에서 사초 꾸미는 일을 맡아보던 정9품)이 되었다. 형과 달리 모사(謀士)를 모르고 직언을 잘하였다. 1509년 윤대(輪對)에서 당시의 정세는 군약신강(君弱臣强)임을 진언하였다가 공신들에게 미움을 사서 여주부 교수(敎授)로 좌천되었다.
이 때 정치의 도리를 밝힌 '일의잠(一宜箴)'을 국왕에게 올려 신임을 받고 사헌부감찰에 발탁되었으며, 이어서 공조좌랑이 되었으나 관물을 절취하였다고 하여 탄핵, 파직되었다. 행동이 광패하고 언동이 직선적이어서 사람들의 호감을 받지 못하였다. 다만, 서경덕(徐敬德), 성세창(成世昌) 등은 심의(沈義)의 뜻을 이해하고 친히 지냈다.
그는 문장에 능하여 이조좌랑(吏曹佐郞)에 임명되고 사가독서(賜暇讀書)의 은전을 받았으나 이윽고 성품이 슬기롭지 못하다 하여 드디어 현달하지 못하고 침체되어, 내직으로는 전적(典籍), 외직으로는 개성 교수를 지냈지만, 사가독서의 은전만은 종신토록 지니고 있었다. 사가독서는 조선시대에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학문에 전념하게 한 제도이다.
일찍이 그 형의 지위가 높고 권세가 성하여 전원(田園)을 많이 가지는 것을 보고 마음속에 달갑게 여기지 않아 꾀를 써서 형을 속이려고 하였다. 하루는 이른 아침에 핼쑥하게 슬픈 기색을 하고 얼굴에 눈물 자국이 가득한 채 형 심정에게 가서 말하기를, "어젯밤 꿈에 돌아가신 어머님이 나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너의 형은 매우 부귀한데 너만 유독 이렇게 가난하구나. 아무곳 밭과 아무곳 논은 비록 사당을 위한 몫으로 분배했지만 네 형은 그것이 없어도 넉넉히 제사를 지낼 수 있는데, 왜 네가 가져다가 먹지 않느냐?' 하였습니다" 하였다.
심정도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이 말을 듣고도 어찌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랴. 곧 눈물을 흘리면서, "돌아가신 어머님의 분부가 계신데, 어찌 감히 논밭을 아끼겠는가?" 하고, 곧 문서를 가져다 주었다. 얼마 후에 형 심정이 속은 것을 알아채고 전날의 동생 심의가 하던 말과 같이 대하였더니, 심의가 웃고 일어서면서, "형님의 꿈은 춘몽이니 믿을 것이 못 됩니다" 하므로, 심정도 또한 웃었다.
심정에게 은술잔이 있었는데 심의가 욕심이 나서 심정의 집에 올 때마다 그 잔을 달라 하여 다 마시고 나서는 소매속에 집어 넣으면서, "형님 나 주십쇼" 하였는데 형이, "내 마음에 꼭 드는 것이 돼서 줄 수가 없다"하면, 도로 내어 놓았다. 이렇게 하기가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하루는 그 은잔과 꼭 같은 납으로 만든 술잔을 소매속에 넣어가서 또 술을 달라하여 다 마시고 나서는 또 소매 속에 넣으면서, "나 주시오, 나 주시오" 하였다.
형이 또 좋게 여기지 않으므로, 슬그머니 납으로 만든 잔과 바꾸어 내놓고 바로 일어서면서, "형제간에 은잔 하나를 그렇게 아낍니까?" 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지자, 심정이 이상히 여겨 가져다가 자세히 보니, 과연 납으로 만든 것이었다. 또 형이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누차 말하려 하였으나 그가 어리석다 하여 듣지 않을 것 같았다.
한 번은 심정의 집에 갔다가 쥐구멍을 보고는 그것을 가리키며 형에게 말하기를, "이 구멍은 형이 훗날 나가고 싶어도 나가지 못할 구멍이니, 오늘 시험삼아 한번 나가 보는 것이 어떻소" 하였는데, 심정이 대답하지 않았다. 후에 형이 죄에 걸려 죽자 와서 울면서, "쥐구멍은 저기 있는데 형은 어디로 갔는고(鼠竇在彼, 兄何去也)" 하였다.
(참고) 심의(沈義, 1475 ~ ?)
심의[沈義, 1475(성종 6)~?]는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이다. 자는 의지(義之)이고, 호는 대관재(大觀齋)이다. 본관은 풍산(豊山)으로, 풍산군(豊山君) 응(膺)의 아들이며, 좌의정 정(貞)의 동생이다. 1507년(중종 2) 증광문과에 급제,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형과 달리 모사를 모르고 직언을 잘하여, 1509년 윤대(輪對)에서는 당시의 정세가 군주는 약하고 신하들의 세력이 강하다[君弱臣强]고 진언하였다가 공신들에게 미움을 사서 여주부 교수(敎授)로 좌천되었다. 이때 정치의 도리를 밝힌 '십의잠(十宜箴)'을 왕에게 올려 신임을 받고 사헌부 감찰에 발탁되었다. 이어서 공조좌랑에 임명되었으나, 관물을 절취하였다고 하여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514년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이조정랑(吏曹正郞)을 거쳐 소격서령(昭格署令)에 이르렀다. 행동이 지나치게 호방하고 언동이 직선적이어서 사람들의 호감을 얻지 못하였지만, 서경덕(徐敬德)·성세창(成世昌) 등이 그의 뜻을 이해하여 깊이 교류하였다. 바보로 자처하여 벼슬을 그만둠으로써 사화(士禍)의 피해를 모면하였다. 한때 형이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는데, 꿈을 빙자하여 형의 전답을 빼앗았다는 일화가 있다. 문장이 뛰어나 「대관부」(大觀賦)·「소관부」(小觀賦) 등의 명문(名文)을 지었다.
저서로 대관재난고(大觀齋亂稿), 대관재몽유록(大觀齋夢遊錄) 등이 있다. '대관재몽유록'은 한문체 고대소설로서, '대관재기몽(大觀齋記夢)'이라고도 하는데, 현실의 권력왕국에 대비되는 꿈속의 문장왕국(文章王國)을 그려 문인들의 이상향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작자가 꿈속에서 최치원(崔致遠)이 천자가 되고 역대 문인들이 대신으로 있는 나라에 들어가 벼슬을 하고 결혼도 하여 영화를 누리며 천자의 총애를 받는다는 내용이다.
(참고) 심정(沈貞, 1471년 ~ 1531년)
심정(沈貞)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유학자, 공신으로, 자는 정지(貞之), 호는 소요정(逍遙亭), 시호는 문정(文靖)이고, 봉군호(封君號)는 화천군(花川君)에 봉군되었다가 부원군으로 진봉되어 화천부원군(花川府院君)이 되었다.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1502년(연산군 8년) 알성시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은 병충분의정국공신(秉忠舊義靖國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 행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1506년(연산군 12년) 중종 반정에 동조, 가담하여 정국공신 3등관에 녹선되고 화천군에 봉군되었다.
1507년 중추부지사로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1518년 한성부판윤, 형조판서 등을 거쳐 조광조 일파의 탄핵으로 파직, 정국공신 훈호도 삭탈되자 원한을 품고 홍경주 등과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 인사를 모조리 숙청하였다. 이때 사림파 중에서도 조광조 일파를 부정적으로 보는 남곤, 김전 등을 끌어들이게 된다.
1527년 우의정에 이어 좌의정이 되어 화천부원군에 진봉되었으며 남곤의 사후 조정을 장악하였으나 김안로의 탄핵으로 강서(江西)에 유배, 다시 경빈 박씨와 통정하였다는 모함을 받아 사사되었다. 그러나 조광조 일파를 숙청한 탓에, 김안로가 사사된 뒤에도 복권되지 못하였다. 청렴하였으나 사림의 정적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경서해석과 역사에 밝았으며 학문상으로는 관학파 유학자였다.
출생과 가계
심정은 심응과 정경부인 서씨(徐氏)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태종의 즉위를 도와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에 책록되고 풍천군(豊川君)에 봉해진 심귀령(沈龜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 심치(沈寘)는 가선대부 남원부사를 지냈다.
아버지 심응은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적개공신(敵愾功臣)으로 첨지와 회령부사를 지냈으며 풍산군(豊山君)에 봉군되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사후 아들의 영귀로 영의정에 추증되고 풍산부원군(豊山府院君)으로 진봉되었다. 조부인 심치 또한 거듭 증직되어 호조판서로 추증되었다. 어머니 서씨는 광흥창부승(廣興倉副丞) 서문한(徐文翰)의 딸이다.
심정은 4형제 중 삼남으로, 큰형 심원(沈元)은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정국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고, 둘째형 심형(沈亨) 또한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정국공신 3등에 책록되어, 풍창군(豊昌君)에 봉해졌다. 심형(沈亨)은 성종 때, 무과에 급제하여, 온성부사, 훈련원 첨정, 경원부사를 지내고, 연산군 때, 종성부사, 의주목사를 지냈으며, 중종 때에는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충청도 수군절도사를 지냈다. 동생 심의(沈義)는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호당(사가독서), 이조정랑, 소격서령을 지냈다.
수학과 과거 급제
어려서 저명한 성리학자에게서 학문을 수학하였으나 후일 그가 몰락하여 단죄되면서 그의 스승에 대한 기록은 실전되었다. 그는 경서 해석과 중국어 번역에 능하였고, 고전과 역사 지식 역시 해박하였다.
(연산군 1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고, 곧 성균관에 들어가 성균관유생이 되었다. 성균관유생으로 있을 때 불경한 발언에 연루되어 의금부의 탄핵을 받았다. 이목이 노사신이 세조를 우롱하였다는 말을 발설하였고, 정희량이 먼저 세조께서 불교를 숭상하고 믿었으며 역신이 난(亂)을 선동했다는 말을 할 때 다른 성균관유생들과 함께 그 곳에 있었다 하여 수종(隨從)한 것에 해당된다며 1등(等)을 감하여 장(杖) 1백, 도(徒) 3년에 처하게 할 것을 건의했다.
성균관유생으로 1502년(연산군 8년) 문묘에서 특별히 열린 알성시 문과에 을과 2위(전체 3위)로 급제하였다. 급제 직후 연산군의 명으로 '춘하추동'이라는 주제로 율시를 지어 바쳤다. 바로 승문원 검교에 보임되었다가 사헌부 감찰로 옮겼다.
관료 생활 초기
1503년(연산군 9년) 홍문관 부수찬과 수찬이 되었다. 그해 10월 서산으로 사냥나간 연산군을 수행하였으며, 연산군의 명으로 새 두 마리를 두 대비전에 올렸다. 이후 경연검토관(檢討官)으로 경연에 참여하였으며, 10월 경연에서 강할 때, 고사를 인용해 소격서의 폐지를 건의하였다.
민나라 임금이 도가(道家)의 술법을 숭상하고 믿어, 진수원으로 천사를 삼고 모든 정령(政令)과 형벌을 반드시 자문하여 의논한 뒤에야 결정하다가 끝내는 망하게 되었습니다. 송(宋)나라 때에는 옥청 소응궁(玉淸昭應宮)이 있었고, 우리 나라에는 소격서(昭格署)가 있는데, 모두 이단(異端)으로서 국고의 소비도 적지 않습니다. 성종께서 폐지하려 하는데 대신이 조종 때부터 설치하여 이미 오래되었으니 갑자기 폐지할 수 없다 하므로 중지한 것이니, 혁파(革罷)하시기 바랍니다.
이후 경연검토관으로 경연에서 고서적의 고사를 왕에게 강의하다가 11월 시독관(侍讀官)으로 승진하여 계속 경연에 참석하였다. 왕이 도적을 없앨 수 있는 방안을 그에게 묻자 그는 도둑을 없앨수는 없고, 임금이 모범을 보이는 것이 좋다고 답하였다.
도둑을 법으로 없앨 수는 없습니다. 수(隋)나라 고조(高祖) 때는 오이 한 개를 도둑질한 자도 모두 죽였지만 도둑들이 천하에 가득 찼었으며, 당(唐)나라 태종(太宗) 때는 금하는 법이 허술하였지만 산길이나 물가에 사는 사람도 바깥 문을 닫지 않았으니, 인군이 그 풍속을 바로잡기에 달린 것입니다.
관직생활 초기에 경연에 입시하며 사서육경의 구절을 해석하여 왕에게 강독하였다. 그 뒤 수찬, 부교리, 교리, 부응교를 지냈다.
갑자사화 전후
1504년(연산군 10년) 3월 갑자사화가 발생하여 부교리로 재직 중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났으며, 4월 연산군이 폐비 윤씨 사사 사건 관련자의 처리를 문의할 때 참석하였다. 4월 교리(校理)가 되었으며, 내관 한 사람과 함께 양주(楊州)로 파견되어 폐비 윤씨의 사사사건에 관련된 두대(豆大)의 부관참시를 감독하고 돌아왔다.
1504년 4월 24일 홍문관 교리로 정창손, 한명회의 위패를 종묘에서 내칠 때, 죄가 있다는 말이 불경하다는 이유로 연산군의 명을 받아 종묘에 고하는 제문을 고쳐서 지었다. 그러나 축문의 본문에 '죄있는 신하'라는 구절이 문제가 되어 다음날 문책당하였다.
5월 밤에 숙직근무하던 중 연산군의 명을 받아 홍문관 응교(應敎) 정환(鄭渙)과 함께 선정전 월랑(月廊)에서 '간신을 베어 없애다.'는 뜻으로 율시(律詩)를 지어 바쳤다. 6월 왕이 밤까지 사냥을 나가자, 다른 언관들과 함께 밤늦게까지 사냥을 다니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간했다가 끌려가 공초를 당했고, 바로 태형 40대를 받고 유임되었다.
1504년 8월 활쏘기 대회에서 우승하여 상으로 한자급 특진하였고, 9월에 홍문관 부응교에 임명되었다. 그해 부친상을 당하여 관직에서 사퇴, 갑자사화의 여파로 발생한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중종 반정과 공신 책록
1506년(중종 1년) 박원종, 유순정 등의 반정 거사에 동조, 중종반정에 참여하였다. 중종 즉위 후 응교에 임명되었고, 그해에 중종을 추대한 공로로 당상의 품계에 올랐으며 병충분의정국공신(秉忠舊義靖國功臣) 3등관에 책록되고, 화천군(花川君)에 봉군되었다. 이후 경연관으로 경연에 입시하며 사서 육경의 구절을 해석하여 왕에게 강독하였다.
그는 남곤과 출신배경과 학통이 달랐지만 중종 즉위 초의 박정, 김공저의 음모사건 적발 때에 손을 잡았고, 1507년 유자광을 정계에서 축출할 때에도 함께 힘을 합쳐 유자광을 공격했다.
1507년 부호군(副護軍)이 되었다. 1507년초 박경(朴耕), 김공저(金公著)의 옥사를 고변한 공로로 상을 받았다. 그는 김공저가 삼공을 제거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남곤에게 전하였다. 남곤은 이를 유숭조에게 알렸고, 김공저, 박정 등을 체포, 처벌하였다. 그는 바로 가선대부로 승진하였으며, 그해 다시 화천군(花川君)에 봉군되었다. 그러나 김공저의 옥사로 사류의 비판이 계속되자 사퇴 상소를 올렸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1507년 9월 지중추부사로 명나라에 파견되는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북경에 다녀왔다.
관료 생활
이후 외직을 전전하다 1509년(중종 4) '문무를 겸하여 참으로 쓸만한 인재'라는 성희안의 추천을 받고 성천부사(成川府使)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당일, 경관직에 적당하다는 이유로 체직되었다. 외직에 있을 때 그는 성실하고 신속하게 처결하여 죄수가 적체되는 일이 없어서 옥이 텅 비게 되었으며 따라서 표창을 받았다. 그러나 심정은 당시 훈구세력으로서 새로이 진출하는 신진사류들과 대립했다. 그러나 김종직의 문하생의 한사람인 남곤을 포섭하게 된다.
1509년 5월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을 거쳐 9월 선릉(宣陵)에 왕이 친히 제사드릴 때에 대장(大將)으로 수행하던 중, 표신(標信)을 왕에게 고하지 않고 부대를 해산하여 의금부에 투옥되어 추고당했다. 그해 선공감 제조(繕工監提調)와 한성부 우윤을 거쳐 11월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대간으로부터 낭관(郞官)으로 있을 때부터 내력(來歷)이 없었으며, 당상관(堂上官)이 되어서도 우윤(右尹) 등을 지내는 등 경력이 없다는 점과 전라도는 지역이 넓고 송사가 많아 소임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점이 지적되어 논박받고 체직되었다. 다시 한성부우윤을 거쳐 경연특진관이 되었다.
1510년 3월 17일 경연특진관으로 있을 때 '시경' 소아의 육아편에 있는 육아시(蓼莪詩)의 구절을 인용해 왕에게 효도를 행실의 근본으로 삼을 것을 건의하였다.
지금 육아시(蓼莪詩)를 진강(進講)하는데, 마땅히 성찰하시어야 하겠습니다. 효도는 모든 행실의 근본입니다. 무릇 사람으로서 양친이 구존(俱存)함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편모(偏母)를 봉양할 수 있는 것도 어렵습니다. 문종은 앵두나무를 배양하며 손수 뿌리에 물을 주고, 그 열매를 세종께 드렸습니다. 어찌 진어(進御)할 다른 물건이 없겠습니까마는, 효도를 위해서는 하지 않는 일이 없으므로 그런 것입니다. 성종이 정희 왕후(貞熹王后)3173)를 봉양하는데 하지 않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최경(崔瓊)이 덕종(德宗)의 어용(御容)을 그렸는데, 성종이 특별히 경에게 높은 관품을 제수하였습니다. 대간이 그 부당함을 다투니, 성종이 이르시기를 '최경이 아니면 어찌 부왕을 뵈올 수 있을 것인가?' 하였습니다. 원컨대 이 시의 뜻을 잘 생각하여 덕화의 근원으로 삼으소서.
경연관으로 활동
8월 황해도 관찰사 겸 해주 목사(黃海道觀察使兼海州牧使)로 부임했다가 1512년초 내직으로 돌아와 경영관이 되었다. 1512년 5월 한성부 우윤이 되었고, 충신·효자·의부·절부를 찾아내 포상하고 관직에 임용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해 경연에 입시하였으며, 이후 경연관으로 활동하며 현안 해결에 주력하였다일에는 경연장에서, 변방 5진의 수령들이 체직하여 돌아올 때 현지의 말을 가져오는 것의 폐단을 논하였고, 당일 무과와 파방의 절차를 의논하였다월 다른 경연관들과 함께 간통한 여성을 사형에 처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월 유순정, 송일(宋軼), 이손이 다시 간통한 여성을 사형에 처할 것을 건의하자 신용개 등 다른 경연관들과 함께 입시하여, '간통한 여성을 사형에 처하는 것에 반대한 이유와 풍속을 바로잡으려고 형법을 준엄하게 했다가 사건의 진실이 알려지면 후세의 비웃음을 당하게 될 것'이라며 반대하였다. 10월 말 유순정이 연좌제의 폐지를 건의하자, 다른 경연관들과 함께 친척의 경우 사건의 내막을 알면서도 말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들어 연좌제 폐지에 반대하였다.
1513년 1월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 2월 경연특진관을 거쳐 1513년 3월에는 현덕왕후의 복권을 청하는 송일의 주장에 동조하였다. 그해 6월 형조 참판이 되었다. 전해에 유자광이 죽자 어머니에게 불손하게 대한 그의 아들 유진(柳軫)이 불효죄로 탄핵을 받고 사형에 처하자는 논의가 벌어지자 노공필(盧公弼)·이자건(李自健)은 사형에 처하는 것은 지나치다며 반대하였으나, 그는 다른 경연관들과 함께 강상죄가 크다며 유진의 사형에 찬성하였다. 1514년 10월 이조참판이 되자, 11월 대간이 그가 관직에 임명된지 얼마 안돼 이조참판에 임명된 것을 탄핵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이후 계속 양사의 논박을 받았으나 왕이 들어주지 않았다.
사림과의 갈등
1515년 7월 인사행정 잘못에 책임을 지고 이조판서 안당과 함께 사직을 청했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년 이조판서로 승진했으나 삼사(三司)의 탄핵을 받아 물러났다. 1516년 6월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 8월 형조판서를 거쳐 1518년(중종 13년) 1월 경연특진관이 되었다.
그해 우참찬(右參贊)에 임명되고, 곧 형조판서의 물망에 올랐으나 조광조 등의 사류(士類)로부터 소인(小人)으로 지목되고, 이조판서이던 안당의 거부로 임명되지 못하였다. 이에 관작을 스스로 사퇴하고 한강변에 정자를 지어 시문으로 소일하며 울분을 달래던 중, 아들 심사손(沈思遜)마저 사류의 탄핵으로 파직되자 조광조 등의 사류에 대한 원망이 골수에 맺혀 틈만 노리게 되었다.
그러나 1518년 형조판서가 되었고, 그 뒤 안당을 공격한다. 그해 10월 화천군이 되고, 이후 형조판서, 의정부 우참찬, 한성부 판윤, 지의금부사에 올랐으나, 신진 세력인 조광조의 탄핵으로 파직당하고, 정국공신 책록도 삭탈당했다. 이에 불만을 품고 은거하던 중 관직에 복귀하였다. 12월 9일 한성부 판윤이 되었으나 12월 13일 사간원으로부터 간사한 사람으로 몰려 탄핵당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곧 경연특진관이 되었으나, 12월 15일 경연특진관에 부적합하다는 사간원의 비판을 받았다.
이후 1518년(중종 13년) 12월부터 1519년(중종 14년) 1월까지 사간원의 간관들로부터 계속 탄핵을 당했으나 왕이 들어주지 않았다.
1519년 1월 23일 한성부 판윤에서 체직당하였다. 그러나 사간원에서는 그가 공론에 용납되지 않았다며 경연특진관에서도 해임할 것을 여러번 청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4월 겸지의금부사(兼知義禁府事)가 되었으나, 사헌부와 사간원의 반대로 5월 1일자로 지의금부사에서 해임되었다. 5월 2일 다시 화천군(花川君)에 임명되고, 5월 다시 지의금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계속 탄핵상소를 올렸다.
기묘사화와 사림파 숙청
훈구파 대신으로서, 1519년(중종 14년) 여름 남곤, 홍경주와 모의하여,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와 그의 신진 사류들을 모조리 숙청시키거나 실각시켰다. 이때 한 궁녀가 나뭇잎에 꿀을 발라 쓴 '주초위왕'(走肖爲王), '조씨전국'(趙氏專國)의 말을 퍼트리며 사건을 확대시켰다.
조광조 일파를 숙청한 일로 1519년 이조판서가 된 뒤 남곤, 홍경주 등과 함께 조정을 장악하였다. 의정부 우참찬, 이조판서, 한성부 판윤, 의정부 좌참찬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거쳐 1519년 12월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다. 이조판서가 되자 1520년 1월 상소를 올려 6조의 낭관들 중에 음서 제도로 임명된 낭관들이 많으므로 인사이동시킬 것을 건의하여 성사시켰다. 그 뒤에도 조광조와 친한 김식을 비롯한 조광조 일파에 대한 탄핵을 계속하였으며, 그와 친한 인물들도 수시로 규탄, 비판하였다.
1521년(중종 16년) 2월, 스스로 자질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였다. "전조(銓曹)의 직임(職任)은 반드시 자질이 훌륭한 사람으로 임명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은 본디 성품이 거칠고 게으른 데다가 지식마저 없으니, 더욱 이 중임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주제에 오래도록 정사(政事)10534)의 권리를 맡고 있으면 어진이를 등용하는 길에 매우 해로울 것입니다. 신의 직을 갈아 주소서." 그러나 왕이 듣지 않았고, 거듭 사직 상소를 올려 그해 3월 면직되었다.
신사무옥
조광조 일파가 제거된 이후 일부 사림파 도학자들은 기묘사화의 원흉으로 지목된 몇몇 대신과 협력자들에 대한 제거 계획을 시도했다. 성균관 학유였던 안처겸(安處謙)과 부수찬이었던 안처근(安處謹) 형제가 후에 훈구파의 영수인 심정, 홍경주 등을 제거하고 배신자, 변절자로 지목된 남곤, 김전 역시 제거하려 모의하였다.
그러나 안처겸 형제의 남곤, 심정 제거 모의는 송사련의 밀고로 탄로났다. 송사련에게서 안처겸 형제와 사림파 도학자들의 조정 대신 암살 계획을 접하게 된 그는 바로 조정에 이를 보고하였다. 신사무옥은 1521년(중종 16년) 송사련으로부터 안처겸 형제의 모의를 접한 남곤 등은 안처겸 등의 역모를 주장하여 안당 등의 일파를 숙청하였다.
관료 생활 후반
1521년 3월 지중추부사, 5월 의정부 좌참찬을 거쳐 안당 등의 추국에 참여한 공로로 1계급 특진되자 스스로 사양하였으나 왕은 그에게 1자급을 특진시켰다. 그해 10월 다시 좌참찬에 임명되고, 1522년 4월 왜구가 조선에 침략하자 대책을 논의하였으며, 김전, 남곤 등과 함께 일본에 끌려간 백성들의 쇄환을 건의하였다. 6월에 순변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그해 비변사당상을 거쳐 1522년 11월 숭정대부에 올라 의정부 우찬성이 되었다. 바로 스스로 직임을 감당할 수 없음을 들어 사직상소를 올렸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해에 전라도 순변사, 비변사 제조, 의정부 우찬성, 1523년 모친상을 당하여 3년상을 마쳤다. 1525년(중종 20년) 관직에 복귀하여 화천군(花川君)이 되고, 그해 4월 삼공의 추천으로 비변사당상이 되었으며 5월 예조판서에 제수되었다. 그해 7월 사헌부 대사헌, 형조판서 등을 지냈다. 1526년 3월 다시 형조판서에 임명되고, 9월 예조판서가 되었다.
김안로와의 갈등
1527년(중종 21년) 11월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로 특진하여 의정부 우의정이 되었다. 우의정이 되자 여러 번 사직상소를 청했으나 왕이 사양하였다. 2월 우의정에서 사직하고 영경연관사가 되었다가 3월 다시 우의정이 되었다. 그 해에 남곤의 죽음으로 조정을 홀로 장악하게 되었다. 남곤이 죽은 뒤 의정부 좌의정이 되어 화천부원군(花川府院君)에 올라 이항(李沆)과 김극핍(金克愊), 채무택 등을 수하에 두고 권력을 독점하였다. 이때 세자(후일의 인종)의 누이 효혜공주의 시아버지이자 권력 경쟁자였던 이조판서 김안로와 권력 암투를 벌인다.
이후 대간에서 이항을 계속 탄핵하자 그는 이항을 적극 두둔하였다. 한편 김안로는 신진이라 그는 김안로 등을 쉽게 귀양보내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1528년(중종 22년) 만포첨사로 변방을 지키던 아들 심사손이 여진족에게 살해당했다는 비보를 접하였다. 아들의 전사 소식을 접했으나, 그는 슬픈 기색을 나타내지 않았다고 한다.
의정부 우의정에 이어 1527년 10월 좌의정이 되었다. 1529년 영부사, 전함사 제조(典艦司提調)를 거쳐 다시 의정부 좌의정이 되었으며 한성부 판윤을 거쳐 또 다시 좌의정이 되었다.
1530년 김안로는 은밀히 복직을 도모하였다. 당시에, 심정은 의정부 좌의정에 있었고 아들인 심사순(思順)은 홍문관 부제학으로 있었는데, 이때 김안로의 복직을 놓고 의정부와 홍문관에서 모두 불가하다고 아뢰자 김안로는 심정과 그의 아들이 자신의 복직을 방해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앙심을 품게 된다. 곧 유배에서 풀린 김안로는 일찍이 찬출되었던 원한을 품고 그를 공격하였다. 1530년(중종 33년) 행 형조판서에 이르렀으나 그를 실각시키기 위해 김안로가 사람을 심어, 그가 경빈 박씨와 간통했다는 소문을 날조하여 확산시켰다.
유배와 죽음
김안로의 사주를 받은 채무택이 자기 가신을 시켜 당시의 정치를 비방하는 익명서를 종로에 내걸고 대간에 은밀히 밀고하여, 익명서를 심사순의 소행이라 하여 국문을 청했다. 그 뒤 경빈 박씨와 관련되었다는 소문을 입수한 것처럼 조작한 김안로로부터 거듭 탄핵을 받았다. 이후 양사의 탄핵을 받다가 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경빈 박씨의 동궁 저주의 관련사실이 드러나게 되었으며 이후 김안로의 사주를 받은 사헌부 대사헌 김근사(金謹思), 사간원 대사간 권예(權輗) 등의 탄핵으로 아들 부제학 심사순과 함께 탄핵 청국하여, 사순은 고문으로 죽고 그는 강서로 유배당하였다.
이후 양사에서 여러 번 그를 사사, 처형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중종이 이를 무마하려 했다. 그러나 1531년(중종 26년) 이항·김극핍 등과 함께 신묘삼간(辛卯三奸)으로 지목되고, 그해 11월 양사로부터 계속해서 탄핵당하였다. 이후 경빈 박씨와 통정했다는 누명을 쓰고 양사의 탄핵을 받고 분노한 중종에 의해 12월 1일 사사의 명이 내려졌으며, 그해 12월 3일 배소에서 금부도사가 준 사약을 받고 사사당했다. 향년 60세였다.
사후
이후 병을 얻은 정경부인 하양 허씨(河陽 許氏)는 1534년(중종 29년) 4월 19일에 사망하여 이해 6월에 심정의 묘에 합장하였다. 그 뒤 정적인 김안로가 패사(敗死)한 뒤 김안로의 형 김안정(金安鼎)이 사건의 진상을 밝히자 부자가 함께 신원 복작되었다.
그러나 훈구파가 몰락한 후, 다시 추탈되었다. 그만은 사림의 미움을 받아 신원되지 못하고 남곤과 함께 '곤정(袞貞)'으로 일컬어져 소인의 대표적 인물로 길이 매도되었으며, 곤쟁이 젓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손자 심수경은 연좌되지 않고 명종과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다. 1910년(융희 3년) 조선이 멸망하고 난 뒤에야 그의 저서와 작품이 간행되었다.
평가
조광조, 안당 등에게 사적인 원한과 반감을 가졌으나, 정치적으로는 청렴하였다. 형제간에 우의는 지극하여 곤경에 처한 동생 심의(沈義)를 끝까지 보살펴 주었다고 하며, 교묘한 꾀를 잘 내어 지혜주머니(智囊)라 불렸다고 한다. 아들 심사손 등을 변방에 보내 국경을 지키게 하는 등, 자제들의 변방 근무를 기피하던 당시 양반관료들과는 다른 면모를 보였다. 그의 손자 심수경은 청백리로 인정되었다.
심정의 장남은 중종 때, 문음(門蔭)으로, 호조정랑을 지내고, 명종 때, 내자시 정(內資寺正)을 지낸 심사공(沈思恭)이고, 차남은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翰林), 사관(史官), 사간원 정언, 옥당(玉堂), 병조정랑, 비변사 낭관, 의정부 사인, 암행어사, 사헌부 집의, 홍문관 직제학, 만포진 첨절제사(정3품 당상관)를 지낸 심사손이며, 삼남은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호당을 거쳐, 승지, 홍문관 부제학을 지낸 심사순이다. 또, 심사손의 아들 심수경은 명종 때, 문과에 장원 급제하고, 호당을 거쳐, 선조 때, 팔도관찰사, 병조판서, 우의정, 좌의정을 지냈다.
글재주가 뛰어나 여러 작품이 있었으나 조광조, 김식 등의 처형에 가담한 인물이라 그의 저서와 작품, 글씨들은 소각되고 인멸되어 실전되었다. 사서 육경과 고문 해석에 재능이 있었으며, 정호와 주자 등에 대한 지식도 뛰어났다. 학문상 그는 유학자로 김안로와 함께 역성혁명파로부터 이어지는 관학파(官學派)의 주도 인물이었으며, 경학과 사장학(詞章學)을 주도한 인물이기도 했다. 이는 김종직의 제자인 남곤, 김전, 박원종, 김굉필, 성희안, 유순정, 조광조 등의 사림파와는 또다른 학통이었다.
歷朝舊聞[三]
역대 조정의 옛 이야기 (3)/寄齋雜記
中宗
林嵩善大夫人性嚴莊. 有五子, 必就賢師以受學.
임숭선(林嵩善)의 어머니는 성품이 엄숙하였다. 다섯 아들을 두었으며, 반드시 어진 스승에게 나아가 배우게 하였다.
第二爲石川, 名億齡字大樹.
둘째 아들은 석천(石川)이다. 이름은 억령(億齡), 자는 대수(大樹)다.
第三爲嵩善, 名百齡字仁順.
셋째 아들은 숭선(嵩善)이다. 이름은 백령(百齡), 자는 인순(仁順)이다.
俱受業於朴訥齋.
모두 눌재(訥齋) 박상(朴祥)에게서 수업하였다.
訥齋嘗授石川莊子曰; 爾必爲文章. 授嵩善論語曰, 足爲館閣之文.
눌재가 일찍이 석천(石川)에게 '장자'를 가르치면서, "너는 반드시 문장가가 되리라"고 하였고, 숭선(嵩善)에게 '논어'를 가르치면서는, "관각(館閣)의 문장이 될 것이다"고 하였다.
石川性疏脫, 且不拘檢束, 嵩善端詳無雜, 大夫人極愛之, 枕席臥起, 皆令嵩善扶掖, 事事稱意, 石川則目以粗率, 不任以事.
석천은 성격이 소탈하며 또한 검속하려 하지 않았는데, 숭선은 단정하고 자상하여 잡된 데가 없으므로, 그 어머니가 극히 사랑하여 자리에 눕거나 일어날 적에는 언제나 숭선을 시켜 부축하게 하였는데, 일마다 마음에 들었고, 석천은 거칠고 경솔하다고 하여 일을 맡기지 않았다.
己卯嵩善年二十二, 明經爲探花, 就試之曉.
기묘년(1519, 중종 14)에 숭선이 22세로서 명경과(明經科)에 3등으로 합격하였다.
夢有人來謂曰, 爾字我改以槐馬, 對之.
과거 보러가는 날 새벽에 꿈을 꾸니, 어떤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네 자(字)를 내가 '괴마(槐馬)'라고 고쳐 주마" 하므로 그러라고 하였는데
旣入試席, 官問曰; 爾字爲何. 曰槐馬, 諸試官皆曰; 此其人也. 無不屬視有喜色.
시험장에 들어가자 시험관이, "네 자가 무엇이냐?"고 물으므로, '괴마'라고 대답하였더니, 여러 시관이 모두, "이 사람이 그 사람이로구나" 하고, 모두들 기쁜 기색으로 그를 주목하였다.
講畢, 試官謂曰; 夢有人來戒曰, 有儒生字槐馬者, 後當爲宰相, 恐失之也. 諸夢皆符合, 爾當爲宰相矣.
강(講)이 끝나자 시관이 말하기를, "내 꿈에 어떤 사람이 와서 이르기를, '괴마라는 자를 가진 유생이 있을 것인데 그 사람이 뒤에 재상이 될 사람이니, 놓칠까 두렵다' 하였다. 그런데 여러 사람들의 꿈이 모두 부합되었으니, 네가 마땅히 재상이 될 것이다" 하였다.
後爲安老所扼, 處散地十年, 丙午以右相赴京, 到遼東卒.
뒤에 김안로에게 걸려 10년 동안이나 한가한 자리에 있다가 병오년에 우의정으로 북경에 갔다가 요동에서 죽었다.
人以爲, 槐者三公之象也, 馬者午也, 此其驗也. 然亦不可知也.
사람들이, "괴(槐)라는 것은 삼공의 상징이요, 마(馬)는 오(午)인 것이니, 이것은 그가 삼공의 한사람이 되었다가 병오년에 죽는다는 징험이다" 하였다. 그러나 또한 알 수 없는 일이다.
洪正士俯, 卽大司憲興之子, 先大夫外王父也.
홍정(洪正) 사부(士俯 홍정의 자)는 대사헌 흥(興)의 아들이며 돌아가신 우리 아버님의 외조부이시다.
以才行, 見重於己卯善類, 嘗拜爲安東府使.
재주와 행실로 기묘년의 선류(善類)들에게 중요시되어 일찍이 안동 부사가 되었다.
國制, 堂下官必兩司署經, 然後乃赴任, 掌令朴世熹曰; 以某之爲人, 亦署經耶. 亟言于兩司, 破格除署經送之.
우리 나라의 제도에 당하관은 반드시 양사(兩司)의 서경(暑經)을 거친 다음에야 부임하게 되는데, 장령 박세희(朴世熹)가, "아무개와 같은 사람됨으로도 또한 서경하여야 할 것인가" 하고, 곧 양사에 말하여 격식을 깨뜨리고 서경을 거치지 않고 보냈다.
己卯諸賢作事之銳, 推此一端, 亦可知也.
기묘 제현들의 일 처리한 예기(銳氣)를 이 한 가지로 미루어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이다.
洪正公, 與成右相世昌, 相許爲友.
홍정 공은 우의정 성세창(成世昌)과 서로 통하는 친구였다.
嘗於正月雪後, 乘夕訪之, 就東園別室, 閉窓穩話, 夜半有琴韻出庭際.
그가 일찍이 정월 어느 날 눈내린 밤에 찾아가 동원(東園) 별실 한가한 창문 아래서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한밤중에 뜰가에서 거문고 소리가 들렸다.
潛穴窓視之, 有老翁, 就梅花下, 掃雪而坐, 露白髮橫短琴.
창 구멍으로 가만히 내다 보았더니, 한 늙은이가 매화나무 밑에 눈을 쓸고 앉아, 하얀 백발을 날리면서 거문고를 탔다.
淸音響指, 殊極奇絶.
그 손가락 끝에서 울려 나온 맑은 소리는 지극히 기이하였다.
成曰, 吾大人也, 俄知有客在堂, 輒顚倒輟之以入.
성세창 자신의 아버지라고 하였는데, 어느새 손님이 당에 있는 줄을 알았는지 바로 분주하게 거두어 가지고 들어 갔던 것이다.
後公每謂人曰; 方其月色如晝, 梅花盛開, 白髮飄然, 淸徽間發, 漂渺若眞仙下降, 不覺爽氣滿身, 慵齋可謂仙風道骨云.
뒤에 홍정 공이 매양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달빛은 대낮 같고 매화는 활짝 핀 바로 그때에, 백발이 흩날리고 맑은 가락이 그 사이에서 발산되었는데, 아득히 진짜 신선이 내려온 것 같아 상쾌한 기분이 온몸에 가득 차는 것을 깨닫지 못했으니, 용재(慵齋 성현(成俔))야말로 신선의 풍채와 도사의 기골이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佐郞沈義字義之, 貞之弟也.
좌랑 심의(沈義)의 자는 의지(義之)이니 정(貞)의 아우이다.
能文章, 拜吏曹佐郞, 被賜暇讀書堂之選, 俄以性品不慧, 遂沈滯不達, 入則典籍, 出則開城敎授, 而讀書堂終身猶在也.
문장에 능하여 이조 좌랑에 임명되고 사가독서의 은전을 받았으나 이윽고 성품이 슬기롭지 못하다 하여 드디어 현달하지 못하고 침체되어, 내직으로는 전적(典籍), 외직으로는 개성 교수를 지냈지만, 사가독서의 은전만은 종신토록 지니고 있었다.
嘗見兄之位高權盛, 多置田園, 心中不悅, 欲以計瞞之.
일찍이 그 형의 지위가 높고 권세가 성하여 전원을 많이 가지는 것을 보고 마음속에 달갑게 여기지 않아 꾀를 써서 형을 속이려고 하였다.
一日早朝, 愀然抱悲, 淚痕滿面, 而謂貞曰; 夜夢先夫人, 撫吾背曰, 余兄極富貴, 爾獨寒如此. 某處田某處田, 雖分於祠堂, 而爾兄無此, 亦足備祭祀, 何不取以爲食云矣.
하루는 이른 아침에 핼쑥하게 슬픈 기색을 하고 얼굴에 눈물 자국이 가득한 채 심정에게 가서 말하기를, "어젯밤 꿈에 돌아가신 어머님이 나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너의 형은 매우 부귀한데 너만 유독 이렇게 가난하구나. 아무곳 밭과 아무곳 논은 비록 사당을 위한 몫으로 분배했지만 네 형은 그것이 없어도 넉넉히 제사를 지낼 수 있는데, 왜 네가 가져다가 먹지 않느냐' 하였습니다" 하였다.
貞有人心, 安得不動. 輒潸然曰; 先妣有命, 何敢靳耶. 遂取券以與之.
심정도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이 말을 듣고도 어찌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랴. 곧 눈물을 흘리면서, "돌아가신 어머님의 분부친데, 어찌 감히 논밭을 아끼겠는가?" 하고, 곧 문서를 가져다 주었다.
貞久而覺之, 又對義如前日之言以試之, 義乃笑而起曰; 兄之夢, 是春夢, 不足信也. 貞亦笑之.
얼마 후에 심정이 속은 것을 알아채고 전날의 심의가 하던 말과 같이 대하였더니, 심의가 웃고 일어서면서, "형님의 꿈은 춘몽이니 믿을 것이 못 됩니다" 하므로, 심정도 또한 웃었다.
貞有銀杯, 義欲之, 每到貞家求飮, 飮訖, 輒袖之曰; 願兄給之. 兄曰; 於我甚相適, 不可給也. 遂還出之.
심정에게 은술잔이 있었는데 심의가 욕심이 나서 심정의 집에 올 때마다 그 잔을 달라 하여 마시고 나서는 소매속에 집어 넣으면서, "형님 나 주십쇼!" 하였는데, 형이, "내 마음에 꼭 드는 것이 돼서 줄 수가 없다"하면, 도로 내어 놓았다.
如是者非一, 一日以鑞造杯, 酷類其制, 袖而去, 又求飮, 飮訖, 又袖之曰; 願給願給.
이렇게 하기가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하루는 그 은잔과 꼭 같은 납으로 만든 술잔을 소매속에 넣어가서 또 술을 달라하여 다 마시고 나서는 또 소매 속에 넣으면서, "나 주시오, 나 주시오!" 하였다.
兄又不可之, 乃潛以鑞杯換出之, 卽起曰; 兄弟間, 一銀杯且相惜耶. 望望而去, 貞疑之, 取來諦視之, 果鑞造也.
형이 또 좋게 여기지 않으므로, 슬그머니 납으로 만든 잔과 바꾸어 내놓고 바로 일어서면서, "형제간에 은잔 하나를 그렇게 아낍니까?" 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지자, 심정이 이상히 여겨 가져다가 자세히 보니, 과연 납으로 만든 것이었다.
又恐兄之不免於禍, 屢欲言之, 以其癡而不省也.
또 형이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누차 말하려 하였으나 그가 어리석다 하여 듣지 않을 것 같았다.
嘗到貞家, 見鼠竇, 指而謂兄曰; 此兄他日求出而不可得者也, 今日試出之如何. 貞不答.
한 번은 심정의 집에 갔다가 쥐구멍을 보고는 그것을 가리키며 형에게 말하기를, "이 구멍은 형이 훗날 나가고 싶어도 나가지 못할 구멍이니, 오늘 시험삼아 한번 나가 보는 것이 어떻소" 하였는데, 심정이 대답하지 않았다.
後兄被法, 乃來哭曰; 鼠竇在彼, 兄何去也.
후에 형이 죄에 걸려 죽자, 와서 울면서, "쥐구멍은 저기 있는데 형은 어디로 갔는고" 하였다.
與成世昌爲隔隣.
심의는 성세창(成世昌)과 이웃간에 살았다.
見其園上浣三紬系樹枝, 潛取以懷之, 一婢呼曰; 沈佐郞盡取紬去矣.
그 집 정원의 나뭇가지에 명주 세 폭을 빨아 넌 것을 보고 가만히 걷어서 품 속에 집어 넣었는데, 한 계집종이, "심 좌랑이 명주를 모두 걷어 갔다"고 외쳤다.
成夫人亟以他三紬送曰; 此欲爲衣表, 願換此內也.
성세창의 부인이 얼른 다른 명주 세폭을 보내면서, "그것은 옷 거죽을 하려던 것이니, 이 안감과 바꾸어 주시오" 하자,
回謝曰, 旣得表, 又得內, 夫人知我心也. 割之爲五六, 分與路人, 盡而後止.
그는 도리어 고맙다고 인사하며, 이미 거죽감이 생겼는데 또 안감을 주시니, 부인께서 내 마음을 알아주십니다" 하고는, 잘라 대여섯쪽을 만들어 길가는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주고 말았다.
以開城敎授, 每會諸生, 爲白日場試, 其製述只一人三下, 其餘數百皆次上, 諉以落幅自取之.
개성 교수를 지낼 적에 매양 여러 유생들을 모아 놓고 백일장 시험을 보였는데 그 지은 글들이 다만 한 사람이 삼하(三下)일 뿐, 그 나머지 수백 편은 모두 차상(次上)으로 하여 낙폭(落幅 과거에 떨어진 글)이라 핑계하고 자신이 취득하였다.
又得數十雞子, 烹之使熟, 分給諸校生曰; 春育雛, 夏秋又育, 一年三育, 可得百餘. 及期照數督之, 人不能支.
또 언젠가는 달걀 수십 개를 익도록 삶아서 여러 교생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봄에 새끼를 깨고 여름과 가을에 또 새끼를 깨어 1년에 세 번 만하면 백여 마리가 될 수 있다" 하여 제때가 되자 머리 수를 헤아려 독촉하므로 사람들이 견디지 못하였다.
然徐花潭成右相曁洪正爲友, 自號大觀齋, 著大觀小觀賦以示意.
그리고 서화담과 우의정 성세창 및 홍정 사복 등과 벗이 되었으며 대관재(大觀齋)라 자호하고 대관부(大觀賦)와 소관부(小觀賦)를 지어서 자기의 뜻을 보였다.
又著記夢以寓言, 花潭亦有送大觀子序, 見之可知其爲人.
또 기몽(記夢)이란 글을 지어 우언하였고, 화담(花潭)도 '대관자를 보냄'이라는 서(序)를 지어 주었으니, 그것을 보면 그 사람됨을 알 수 있다.
成公洪公, 與之同登後園, 月夕携手, 縱橫談論, 無所不及, 夜半乃罷, 久以爲常.
성공과 홍공은 같이 뒷동산에 올라가 달밤에 손을 잡고 종횡무진한 담론을 마구 하다가 밤중에야 파하는데 오래도록 떳떳한 일과로 삼았었다.
成洪二人, 非妄交之人, 若非曼倩玩世之徒, 則其亦自汙以取容者.
성, 홍 두 분은 함부로 벗을 사귄 사람이 아니니, 만청(曼倩; 동방삭東方朔)처럼 세상을 희롱하는 무리가 아니면, 그 또한 자기 자신을 더럽혀 세상에 용납되게 한 사람일 것이다.
中廟朝, 任四宰由謙以特進官, 任推以副提學, 任虎臣以都承旨, 任權以掌令, 任柄以修撰, 俱入侍, 權又侃侃論人過失.
중종 때에, 사재(四宰) 임유겸(任由謙)은 특진관, 임추(任推)는 부제학, 임호신(任虎臣)은 도승지, 임권(任權)은 장령, 임병(任柄)은 수찬으로 함께 입시하였는데, 임권이 또한 강직하게 남의 과실을 말하였다.
四宰出謂諸子曰; 吾家極盛滿, 入侍者十二人, 吾父子孫居其半, 權又喜斥人, 不敗而何. 愀然不樂者久.
사재가 나와서 여러 아들에게 말하기를, "우리 집이 매우 융성하여 입시한 사람이 12명이었는데 우리 부자와 손자가 그 반을 차지하였고, 임권이 또 남 배척하기를 즐겨하니, 어찌 화를 입지 않겠는가" 하고 정색하며 즐거워하지 않기를 오랫동안 하였다.
我王父在天曹, 見李晦齋滯芸閣, 急引爲說書司書, 遂迭爲銓郞弼善文學, 竟代爲司諫.
우리 할아버님(박응복/朴應福)이 이조에 계실 때 이회재(李晦齋)가 승진을 못하고 예각(藝閣)에 머물러 있는 것을 보고 급히 끌어다가 설서와 사서를 시켰는데, 드디어 전랑(銓郞)과 필선(弼善)과 문학(文學)을 거쳐 마침내 할아버지 대신 사간이 되었다.
嚴舍人昕, 少有詩名, 王父爲輪次官, 必致昕製之, 連中進士及第.
사인 엄흔(嚴昕)이 젊어서부터 시로 이름을 날렸는데 할아버님이 윤차관으로 있을 때에 꼭 엄흔을 불러다가 글을 짓게 하였으며, 잇달아 진사에 합격하고 급제를 하였다.
王父在天曹時, 嚴已爲佐郞, 嚴常許王父爲知己云.
할아버님이 이조에 있을 때에 엄흔이 이미 좌랑이었는데 엄흔이 항상 우리 할아버지를 지기(知己)로 여겼다고 한다.
許硡爲吏曹判書, 許礦爲參議, 沈連源與王父爲正郞, 許沆爲佐郞, 礦辭曰; 一家再從, 同在銓曹, 古無此比, 請遞臣判書.
허굉(許硡)은 이조 판서, 허광(許礦)은 참의, 심연원(沈連源)과 할아버지는 정랑, 허항(許沆)은 좌랑이 되었었는데, 허광이 사퇴하면서, "한 집안 재종끼리 같이 이조에 있는 것은 옛날에도 이런 일이 없으니 청컨대 신의 판서 벼슬을 체차해 주소서" 하였다.
中廟答曰; 皆非相避, 有何妨乎, 然若以爲未安, 則參議可遞之. 蓋一家五人, 同入政曹, 古今所無云矣.
중종이 답하기를, "모두들 상피(相避)할 처지가 아닌 바에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러나, 만약에 미안하게 여긴다면 참의를 바꾸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으니, 대개 한 가문에서 다섯 사람이 함께 이조에 들어간 것은 고금에 없는 일이라고 하겠다.
沈忠惠公連源, 以副提學, 出爲濟州牧使, 安老擠之也.
충혜공(忠惠公) 심연원(沈連源)이 부제학으로서 외직인 제주 목사가 된 것은 김안로가 밀어낸 것이었다.
拜辭之日, 安老以壺酒, 送之於漢江上, 執杯嘆詑, 以示難別之色.
하직하던 날, 안로가 술병을 가지고 한강 가까이 전송나와 술잔을 들고 거짓 탄식하면서 작별하기 어려운 기색을 보였고,
且曰; 君之此行, 吾實不知. 君有弟幾人可堪作官者乎.
또한 말하기를, "그대의 이번 길은 사실 나는 알지 못하였소. 그대의 아우가 몇 사람이나 관원될 만한 사람이 있소" 하므로,
公曰; 雖有二弟, 通源業科, 逢源多病, 不堪仕矣.
공이 말하기를, "비록 두 아우가 있으나 통원(通源)은 지금 과거 공부를 하고 있고, 봉원(逢源)은 병이 많아서 벼슬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오" 하였다.
未數日, 拜逢源爲金吾郞, 病不能出, 遂移拜副率, 公曰; 平生所不知者此也.
그런지 며칠이 못 되어 봉원이 금오랑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나가지 못하자 다시 부솔(副率)로 옮겨 주었는데 공이 말하기를, "내 평생 알 수 없는 것이 이 일이다" 하였다.
旣出其兄, 又用其弟, 何心也.
이미 그 형을 내어쫓고 또 그 아우를 써 준 것은 무슨 마음이었을까?
丁酉殿試, 安老爲試官, 沈通源與其兄逢源, 亦在場中.
정유년(1537, 중종 32)의 전시 때 김안로가 시관이었는데 심통원(沈通源)이 그 형 봉원(逢源)과 함께 과거 보러 갔었다.
見策題, 輒搆草將半, 出而示之曰; 須效我作, 及第可作也.
통원이 책문의 제목을 보고 바로 쓰기 시작하여 반쯤 썼을 때에 내어 보이면서, "꼭 나 지은 대로 하면 급제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는데,
有曰; 忠黨奮起, 正論堂堂. 其兄不悅曰; 莫非有數。安可容力乎.
유왈 "충성스러운 당(黨)이 분기하매, 정론이 당당하다"는 말이 그 속에 있으므로 그 형이 불쾌하게 여겨, "모두 운수가 있는 것인데 어찌 인력으로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通源遂擢爲壯元, 士論鄙之.
통원이 드디어 뽑혀 장원이 되므로 선비들의 공론이 그를 비루하게 여겼다.
鄭林塘, 與李洪男爲友壻.
정임당(鄭林塘)은 이홍남(李洪男)과 동서간이었다.
戊戌謁聖表題, 擬本朝禮曹, 請撰東國名臣言行錄.
무술년(1538, 중종 33) 알성시의 표제(表題)가 '본국 예조에서 동국명신언행록(東國名臣言行錄)의 편찬을 청하려고 한다'는 것이었는데,
李以學而仕, 仕而學, 言顧行, 行顧言爲首. 偶以示之.
이홍남이 '배우면서 벼슬하고 벼슬하면서 배우며 말은 행동과 같게 하고 행동은 말과 같게 한다'는 말로 첫머리를 시작해 놓고 우연히 보여주자,
佯曰; 此極賤人誰不爲. 李改之, 林塘乃用其句爲壯元, 李爲副, 一時稱好事.
임당이 그것을 보고, "이 말은 지극히 천박한 말이네. 어느 누가 못하겠는가?" 하였는데, 이홍남이 고쳐 버리므로, 임당이 그 문구를 사용하여 장원이 되고 이홍남이 차석이 되니, 당시 사람들이 재미있는 일이라 하였다.
兵曹佐郞尹春年上疏曰; 敦寧都正尹元老, 縱濫多氣, 好弄朝權, 請早除之, 以安國家. 命會大臣二品以上於賓廳議之.
병조 좌랑 윤춘년(尹春年)이 상소하기를, "돈녕도정 윤원로(尹元老)가 외람됨이 지나치고 기습(氣習)이 많아 조정의 권세를 농간질하기 좋아하니, 청컨대 속히 제거하여 나라를 편안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대신과 2품 이상의 관원을 빈청에 모여 의논하게 하였다.
李忠正公浚慶, 以工曹參判, 在二品之末, 或言具法正刑可也.
충정공(忠正公) 이준경(李浚慶)이 공조 참판으로 2품의 말석에 있었는데, 어떤 이는, "법대로 처형하는 것이 옳다" 하고,
或言不可緩也, 卽於諸會處, 撲殺之可也. 或言刑物預具可也.
어떤 이는, "처형을 늦추어서는 안 되니, 모두 모인 자리에서 박살내야 한다" 하였으며, 또 어떤 이는, "미리 형틀을 차려 놓아야 한다" 하였다.
公曰; 安有國母在上, 而無端殺其弟乎. 況未有顯罪, 而撲殺士大夫可乎. 決不可爲也.
충정공이 말하기를, "국모가 위에 계시는데, 어찌 까닭없이 그 동생을 죽입니까? 하물며 드러난 죄가 있지도 않은데 사대부를 박살내어도 됩니까? 절대로 안 되오" 하였다.
蓋國論已定於外, 而公之言如此, 衆議遂沮, 只論以賜死而罷.
대개 나라의 공론이 밖에서는 이미 결정되었으나 공의 말이 이러하므로 여러 사람들의 의론이 저지되고 다만 사사(賜死)하기로 결론하고 파하였던 것이다.
然諸宰相莫不歸咎於公, 曰; 使宗社罪人失刑. 面面相視, 爲公甚危之, 公望見一宰相, 呼與同行, 乃若不聞, 終亦避去.
그러나, 여러 재상들이 모두 그 허물을 공에게 돌리면서 말하기를, "종묘사직의 죄인을 처형하지 못하게 하였다" 하여, 서로들 얼굴을 쳐다보면서 공을 위하여 매우 위험스럽게 여기므로, 공이 한 재상을 바라보며, 그를 불러 함께 가자고 외쳤으나 못들은 척하고 끝내 피해 나가 버렸다.
公言平生無所懼, 當日氣色凜凜然, 殊可懼也.
공이 말하기를, "나는 평생 두려워한 일이 없었는데 그날의 분위기는 무시무시하여 자못 두려웠었다"고 하였다.
(仁宗)
仁廟大漸之日, 權政丞轍以舍人, 持公事, 詣二相尹任, 則方於大明殿上, 脫團領臥寢, 不覺竦然而退也.
인종의 병이 매우 위독하였을 때 정승 권철(權轍)이 사인으로 공사를 가지고 이상(二相) 윤임(尹任)에게 갔었는데 마침 대명전(大明殿) 마루에서 단령(團領)을 벗고 누워서 자고 있으므로 깜짝 놀라 물러나왔다.
鄭北窓, 與內醫諸提調入診, 則上候已奄奄, 而獨尹興仁一人, 在側扶掖而坐, 人莫不駭視, 以爲大禍不遠也.
북창(北窓) 정렴(鄭)이 내의의 여러 제조들과 들어가 진찰해 보니, 상감의 병세가 벌써 숨이 가물가물하고 있는데, 유독 윤흥인(尹興仁) 한 사람 만이 옆에서 부축하고 앉아 있으므로 보는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라며 큰 화가 멀지 않았다고 하였다.
仁廟賓天, 尹興仁柳灌柳仁淑, 或黜或罷或遞而已.
인종이 승하한 뒤 윤흥인, 유관(柳灌), 유인숙(柳仁淑) 등이 혹은 쫓겨나고 혹은 파직되고 혹은 벼슬이 갈렸을 뿐이오.
林嵩善旣參北門之啓, 外祖以其季弟, 方爲禁火司別提.
임숭선(林嵩善)은 이미 북문(北門)의 계(啓)에 참여하였었는데, 우리 외조부가 그의 막내아우로서 그때 금화사별제(禁火司別提)로 있었다.
而先妣年纔十五, 常在其側, 頗記其一二語云, 尹元衡以禮曹參議, 短小不揚, 常訪嵩善於外祖第, 繼有大司憲閔齊仁來訪, 則尹自後門避去, 不相見也, 嵩善每嘆曰, 得無不免乎.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가 그때 나이 겨우 15세로 늘 그의 곁에 있었기에, 한두 가지의 기억난 것을 말씀하시기를, "윤원형(尹元衡)은 예조 참의로 키가 작고 풍채가 초라하여 늘 숭선을 외조부댁으로 찾아다니는데 뒤따라 대사헌 민제인(閔齊仁)이 찾아오자, 윤원형이 뒷문으로 피해버리고 서로 만나주지 않으므로, 숭선은 매양, '면할 수 있을까' 탄식하였고,
又有柳灌柳仁淑, 潛言大君有眼疾, 不可立之語.
또 유관, 유인숙은 남몰래, '대군은 눈병이 있어 임금 자리에 설 수 없다'는 말을 했으며,
又有尹興仁, 抱上腰, 請立桂林君, 仁廟掉頭曰, 有大君在, 決不可爲也之語. 其後毛麟李德應之招, 略與相同.
또 윤흥인은 상감의 허리를 붙들고 계림군(桂林君)을 세우자고 청하자, 인종이 고개를 저으면서 '대군이 있으니, 결단코 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 뒤에 모인(毛麟; 윤임의 계집종), 이덕응(李德應; 윤임의 사위)의 공초도 대략 들어맞았던 것이다.
又有彼輩率壯士, 先殺北門諸宰, 次擧大事之語.
그리고 또, '그 사람의 무리들이 장사를 인솔하고 먼저 북문 사건의 여러 재상들을 죽인 다음에 큰 일을 일으킨다'는 말이 있었다.
故外祖方直禁火司, 聞有人馬聲, 輒提燈檠, 當門而立, 擬爲迎擊之擧.
그러므로 우리 외조부가 그때 금화사에 입직하고 있다가 인마(人馬)의 소리가 들리더니, 즉시 초롱불을 들고 문을 가로막아 서서 요격하려는 태세를 취하곤 하였다.
如此者非一, 不知何物奸鬼, 先爲飛語, 次投封書以實之, 又爲恐動之語, 使人人不得自安, 不測之禍, 若將出於朝夕, 雖以當事諸宰, 亦在脅誘之中, 不辨眞僞, 而意有是事, 甚者則因其說而售其私, 遂成斬伐之禍.
이렇게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알 수 없는 어떤 악한 귀신 같은 자가 먼저 유언비어를 퍼뜨린 다음 투서하여 유언비어를 사실화하고 또 공갈하여 선동하는 말을 하여, 사람들을 불안에 떨게 하여, 불측한 화가 당장에 일어나는 것 같게 하자, 국사를 담당한 여러 재상들까지도 또한 위협과 유혹 속에 빠져 그 진위를 분별하지 못하고 이런 일이 있으리라 여기고, 심한 자는 그 말을 믿고 사감을 갚으려고 하여 드디어 죽이고 치는 화(을사사화를 가리킴)를 일으켰던 것이다.
吁可痛矣. 或言, 安世遇寶城守等所造云.
아아! 참 통탄스러운 일이었다. 누군가 말하기를 '안세우(安世遇), 보성 군수(寶城郡守) 등이 조작해 낸 것이다' 하더라"고 하였다.
(明宗)
余嘗見安名世史記及供辭, 史記只記其三條, 供辭多不記.
내가 일찍이 안명세(安明世)의 사기(史記; 을사일기/乙巳日記)와 공사(供辭)를 보았는데, '사기'는 단지 세 조목만이 적혔고 공사는 기록되지 않은 것이 많았다.
一曰, 尹任等已死. 註曰, 梓宮在殯, 一日殺三大臣. 初則曰, 其心不安, 只可罷遞. 後則曰謀危宗社, 果可以服人心乎.
첫째 조목은, "윤임 등이 이미 죽었다" 하고 주 달기를, "인종의 재궁(梓宮)이 아직 빈소에 있는데, 하루 동안에 대신 세 사람을 죽였다. 당초에는 '그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였으니 다만 파면되어 가는 것이 좋다'고 하고, 뒤에는 '음모를 꾸며 종묘사직을 위태롭게 하였다' 하였으니, 과연 인심을 복종시킬 수 있겠는가" 하였고,
二曰, 王大妃曰, 如白仁傑輩. 註曰, 辭甚厲, 惡之.
둘째 조목은, "왕대비가 말하기를, '백인걸(白仁傑) 같은 무리이다'고 하였다"고 하고, 주 달기를, "말이 몹시 거세서 미워하였다" 하였으며,
三曰, 諸臣之在上前者, 自在潛邸時, 極其推仰, 常有願死之心. 群言雜起, 口之鈍者, 或爲利口所奪, 而獨兵曹判書李芑, 默無一言. 蓋以首事之人, 爲無以加云.
셋째 조목은, "지금 임금 앞에 있는 여러 신하들은 임금이 동궁에 있을 때부터 지극히 추앙하여 항상 임금을 위하여 죽으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다. 여러 말들이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나자 입이 둔한 사람은 더러 언변 좋은 사람에게 탈취되기도 하였는데, 유독 병조 판서 이기(李芑)만은 잠자코 한 마디의 말도 없었다" 하였으니, 대개 일을 앞장선 사람으로 더 나올 사람이 없다고 여긴 것이다.
及正郞韓智源, 激之以發其史記, 遂就鞫獄, 供曰; 臣與李德應, 性稟各異, 臣則孱弱, 德應多氣. 同在山寺, 目臣以孱生, 故臣亦厭其多氣不取也. 及同爲及第, 德應家設齊馬首, 而臣則不往. 以此任亦惡之, 絶無往來相議之分, 安有庇護逆賊之理, 史記則不過記其一時所見而已, 及見德應之招, 然後始知其逆賊也, 豈敢知情而故爲庇護哉.
정랑 한지원(韓智源)이 충격을 주어 그 '사기'를 적발하게 되자, 드디어 국문을 받게 되었는데 진술하기를, "신과 이덕응(李德應)은 기질이 제각기 달라 신은 잔약한데 덕응은 기운이 셉니다. 산골 절에 같이 있을 적에 신을 잔약하다고 지목하였기 때문에 신도 그가 기운이 센 것을 싫어하여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함께 급제하게 되자 덕응의 집에서 도임하는 말머리 앞에서 불공을 베풀었지마는 신은 가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윤임이 또한 나를 미워하게 되어 왕래하며 상의하는 교분이 전연 없었는데 어떻게 그 역적을 비호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사기'는 그 당시의 소견을 기록한 데 불과할 뿐입니다. 덕응의 공사를 보게 된 뒤에야 비로소 그가 역적임을 알았는데, 어찌 감히 실정을 알면서 짐짓 비호하였겠습니까?" 하였다.
李芑亦以辭明義直欲活之, 顧議諸推官, 而業已承服, 遂取結案.
이도 또한 사연이 분명하고 의리가 바르므로 그를 살리려고 하여 여러 추관들을 돌아보고 의논하였으나 이미 자백한 것이라 하여 드디어 죄안대로 결정지었다.
臨刑, 其友安自裕, 飮之酒以訣, 名世曰好在, 因顧謂家人曰; 勿敎子讀書.
형을 받을 때에 그의 친구 안자유(安自裕)가 술을 대접하여 영결하자, 명세가 '잘 있게'라고 말하고, 이어 가족들을 돌아보면서 이르기를, "자식들에게 글을 가르치지 말라" 하였다.
有二子千之百之, 皆不知一字云.
아들 천지(千之)와 백지(百之) 둘이 있었으나 모두 일자 무식이었다고 하였다.
朴訥齋爲羅州牧使, 林石川爲敎授, 相得驩如也.
눌재(訥齋)는 나주 목사가 되고 임석천(林石川)은 교수가 되었는데 서로 사이가 좋았다.
訥齋之子敏中家, 素豪能文章喜任俠, 顧訥齋性嚴簡, 不敢出入, 石川欲見之, 亦不過使瞥然交語而已.
눌재의 아들 민중(敏中)은 가세가 본래부터 부유하고 문장에도 능하며 호협심이 있었으나, 반대로 눌재는 성품이 엄격하고 간소하므로 감히 드나들지 못하였고, 석천이 만나보려고 하여도 역시 잠깐동안 말을 주고 받게 하는데 지나지 않을 뿐이었다.
一日當赴擧, 邀石川於光州私第, 盛設酒席, 執禮甚恭.
어느 날, 과거를 보러 가게 되어 석천을 광주에 있는 자기 집으로 맞이하여 성대한 술자리를 베풀고 예절을 차림이 매우 공손하였다.
酒旣半, 敏中起請曰; 今先生以試官臨圍, 當出何題.
술자리가 반쯤 되었을 무렵 민중이 일어나며 석천에게 청하기를, "이번에 선생님께서 시관으로 가실 것인데 어떤 제목을 내시렵니까?" 하므로,
石川訝之曰; 觀近日士子製述, 無出子之右, 今日壯元, 非子而誰. 年少有志之士, 尙有此問耶.
석천이 의아하게 여기면서, "요즈음 선비들의 글솜씨를 보면 자네보다 나은 사람이 없으니, 이번의 장원은 자네가 아니면 누가 하겠는가? 나이 젊은 뜻있는 선비도 오히려 그런 것을 묻는가" 하였다.
朴曰; 自念此膝, 先生之外, 平生不可屈也. 萬一不如意, 何面目立於世, 以此爲區區請也.
박민중이 말하기를, "제가 이 무릎을 선생님 이외에는 평생 꿇지 않으려고 생각합니다. 만일 과거가 뜻대로 되지 않으면 무슨 면목으로 세상에 나가 그것 때문에 구차한 요청을 할 것입니까?"
하였으나,
石川慰勉而已, 終不言而去, 果居魁, 年二十六, 早夭. 文章之士, 好勝蓋如此.
석천이 위로하여 격려했을 뿐, 끝내 말하지 않고 가버렸었는데, 과연 장원급제하였다가 나이 스물 여섯에 일찍 죽었다. 문장하는 선비들의 이기기 좋아함이 대개 이러하였다.
金河西麟厚, 文章學術, 爲一時所推.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는 문장과 학술로 당시의 추앙을 받았다.
嘗以玉堂兼春坊, 特被中仁二聖恩遇.
일찍이 옥당으로 춘방을 겸임하여 특히 중종과 인종 두 임금의 은혜로운 대우를 받았었다.
爲親乞縣之日, 値二聖繼陟, 因棄官還鄕, 遂稱蹇濕, 不出戶庭.
어버이를 위하여 현령을 희망하던 중 두 임금이 잇달아 승하하게 되자, 따라서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드디어 한쪽 발에 습증(濕症)이 생겼다고 핑계하고 뜰에도 나오지 않았다.
常以六月晦前至七月之終, 痛飮沈醉, 一切不省人事, 有時痛哭, 悲悼不自勝.
언제나 6월 그믐 전부터 7월 그믐께까지는 술을 흠뻑 마시고 가누지 못하게 취하여 일체 인사를 차리지 않았으며, 때로는 통곡하기도 하여 슬픔을 감당하지 못하였다.
蓋有至痛於仁廟上賓之日, 而爲難言也.
아마 인종이 승하하신 날에는 지극한 애통이 있어 말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林牧使亨秀, 倜儻有氣節, 能文章, 善騎射, 一時以文武全才許之.
목사 임형수(林亨秀)는 뜻이 크고 기개와 지조가 있었으며, 문장에도 능하고 말타기와 활쏘기도 잘하였으므로 당시에 문무를 겸비한 인재로 인정되었다.
乙巳以後, 爲權凶所忤, 自副提學, 出爲濟州牧使, 發船之日, 風浪不順, 雖舟人皆縮入, 不敢出頭.
을사 이후 권세 잡은 간흉들의 뜻에 거슬리게 되어 부제학으로서 외직인 제주 목사로 가게 되었는데, 배가 떠나던 날 풍랑이 거세어 뱃사람들도 모두 움츠리고 들어가 감히 고개를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公上舷橫走, 自此至彼, 數過而猶不止.
공이 뱃전에 올라가 이쪽에서 저쪽까지 몇 번을 왔다갔다 하고도 오히려 그치지 않았다.
篙工急抱之曰; 此外卽彼生也, 何輕視也. 公笑曰; 唉我豈止此而死者乎.
사공이 급히 끌어안으며, "여기를 벗어나면 바로 저승인데 왜 이렇게 함부로 하십니까" 하니, 공이 웃으면서, "뭐 내가 어찌 여기에서 죽을 사람이겠느냐" 하였다.
未幾罷還, 俄有賜死之命.
그 뒤 얼마되지 않아 파직되어 돌아 왔었는데 이내 죽음을 받았다.
具衣冠拜於庭, 與老母永訣, 出就死, 揚揚若平昔.
이때 의관을 갖추고 뜰에서 절하여 늙은 어머니와 영결하고 나와 사약을 받는데 태연하여 평소와 같았다.
引藥跪飮, 有一奴, 飮泣進安酒, 公却之曰; 香徒用罰, 亦不許安酒, 此何酒耶. 怡然而盡.
약을 당겨다가 꿇어앉아 마시는데, 한 종이 눈물을 삼키면서 안주를 드리자, 공이 물리치면서, "상두꾼들이 벌 받을 때에도 안주를 안주는 것인데 이 술이 어떤 술이냐" 하고, 태연하게 죽었던 것이다.
林嵩善百齡, 許判書磁, 當初同參忠順堂之對, 謂以任等不自安, 遞罷灌仁淑, 竄任而已, 厥後因鄭順朋之疏, 遂以謀危宗社論, 以謀逆正刑.
숭선 임백령과 판서 허자(許磁)가 당초 충순당(忠順堂)의 입대에 함께 참여하였을 적에는 윤임 등이 아무래도 불안할 것이라 하여, 유관(柳灌)의 벼슬을 체차하고, 유인숙(柳仁淑)을 파직시키고, 윤임을 귀양보내고 말았었는데, 그 뒤 정순붕(鄭順朋)의 상소 때문에 드디어 종묘사직을 위태롭게 모의하였다고 논단하여, 반역죄로 처형하였다.
錄勳之後, 頗有伸救士類之意, 至曰謀危宗社, 罪名過重.
숭선이 녹훈된 뒤에는 자못 사류(士類)들을 신원하여 구해줄 뜻이 있어, "종묘사직을 위태롭게 모의하였다는 것은 죄명이 너무 과중하다"고 말하기까지 하였는데,
磁則常曰; 我其不免小人矣, 昌論陳復昌, 反爲尹元衡所劾而竄死.
허자는 늘 말하기를, "나는 소인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 하여, 진복창(陳復昌) 일을 떠버리다가 도리어 윤원형의 탄핵을 받아 귀양가 죽었다.
嵩善則未幾赴京, 道卒, 林亨秀在濟州, 聞訃痛哭曰; 斯人死, 我其死矣. 蓋嘗保護, 只使謫宦也.
숭선은 얼마 아니되서 북경에 갔다가 도중에서 죽었는데 임형수(林亨秀)가 제주에서 그 부고를 듣고 통곡하면서, "이 사람이 죽었으니 나도 죽는다" 하였다. 이것은 일찍이 그가 보호하여 다만 귀양살이만 하게 하였기 때문이리라.
洪判書曇亦曰; 吾爲舍人, 嘗於闕庭之會, 在外幕聞之, 嵩善言, 近日治獄, 與齊仁本意, 漸漸頓異, 此何爲哉, 人心其可服乎. 若使嵩善久在, 其受禍必不下於許判書云.
판서 홍담(洪曇)도 말하기를, "내가 사인으로 일찍이 대궐 뜰의 모임에 참석하였을 때 막외에서 들었는데, 숭선의 말이, '요즈음 옥사 다스리는 것이 당초의 본뜻과는 점점 판이해지고 있으니, 이 어찌된 일이며 인심이 복종될 수 있을까' 하였으니, 만약 숭선이 오래 살아 있었더라면 반드시 허 판서 못지 않은 화를 받았을 것이다" 하였다.
仁廟賓天, 大臣以右尹崔輔漢, 差守陵官, 輔漢親自往愬於大臣, 至以脛骨出示之曰, 羸瘁如此, 而能勝三年喪乎. 哀怨不已, 大臣乃改之.
인종이 승하하였을 적에, 대신들이 우윤 최보한(崔輔漢)을 수릉관(守陵官)으로 임명했었는데, 보한이 직접 대신들에게 가서 사정하되 정강이 뼈를 내보이기까지 하면서, "이렇게 여윈 몸으로 능히 삼년상을 감당해 낼 수 있겠습니까?" 하여, 애원하기를 마지 않으므로, 그제야 대신이 바꾸어 주었다.
有一臺諫, 將論輔漢隱過, 白參贊仁傑爲持平, 止之曰; 此雖非公論所許之人, 不近情理之說, 橫加於人, 甚不可也. 以此獲免, 平生感之.
대간 한 사람이 보한의 숨은 과실을 들어 논박하려 하므로 참찬 백인걸(白仁傑)이 그때 지평으로 그를 말리면서, "이 사람이 비록 공론으로 허락해 준 사람은 아니지마는 인정과 사리에 맞지 않는 말을 가지고 남을 공격하는 것은 매우 옳지 못한 일이다" 하였다. 이 때문에 죄를 모면하였는데 평생토록 이 일을 고맙게 여겼다.
乙巳密旨之下, 公獨啓之, 至以大司憲閔齊仁爲有同傳令軍卒. 文定盛怒, 禍將不測, 輔漢方爲同義禁, 終始力救, 止付處而已.
을사년의 밀지가 내렸을 때, 백인걸 공이 단독으로 아뢰되, '대사헌 민제인(閔齊仁)을 명령을 전달하는 군졸 같다'고 말하기까지 하자, 문정왕후가 크게 노하여 화가 장차 예측할 수 없게 되었는데, 보한이 그때 동의금으로 있으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힘껏 구원하여 중도부처로 끝나게 하였다.
公初非有意於救崔, 而彼之爲恩, 至於刻骨, 君子一言之惠亦大矣.
공이 당초에 뜻이 있어 죄를 구원한 것이 아닌데, 그가 은혜스럽게 여겨 뼈에 새기게 되었으니, 군자의 한 마디 말의 혜택도 또한 큰 것이로다.
金參判鸞祥, 乙巳名士也.
嘗以正言在家.
참판 김난상(金鸞祥)은 을사년의 명사(名士)이다. 언젠가 정언으로 집에 있을 때의 일이다.
大憲閔齊仁在洞內, 年紀絶高, 而善類誅殺之後, 自知爲少年淸論所不與, 常不安於心.
대사헌 민제인(閔齊仁)이 그 동네 사는데 나이가 몹시 많았으며 착한 선비들을 죽인 뒤여서 젊은이들의 참신한 공론이 자신을 용납하지 않을 것을 스스로 알아차리고 늘 마음이 불안했었다.
一日赴任, 歷入金公家, 先投名緘, 俄有一小婢, 持而出曰; 方梳頭, 姑立門內.
어느 날 출근길에 김공의 집에 들려 우선 명함을 들여 보냈더니, 잠시 후에 한 계집종이 가지고 나와서, "지금 머리를 빗고 계시니, 잠깐 문안에 서 계십시오" 하였다.
閔大慚恚, 卽命還家, 嘆曰; 我爲人所浼, 不忍一朝之死, 終見辱於隣里少年, 尙誰咎哉.
민이 몹시 부끄럽고 분하게 여겨 곧 집으로 돌아와서 한탄하기를, "내가 남에게 끌려 차마 하루 아침에 죽어버리지 못하고 마침내 동네 젊은이에게 모욕을 당하였으니, 이러고서 누구를 탓하랴" 하였다.
閔陞二相, 常自憤恨, 對人嘆曰; 當初只欲黜任而已, 豈知輾轉至此乎, 錄勳論賞, 豈不愧乎. 語洩, 削勳奪其官爵.
민이 이상(二相)이 되었으나 항시 분하고 한탄스럽게 여겨 사람을 대하면 탄식하기를, "당초에는 오직 윤임을 물리치려고 하였을 뿐이었는데 어찌 엎치락 뒤치락 이 지경이 될 줄 알았으랴. 공신이 되어 상을 받은 것이 어찌 부끄럽지 않은가?" 하였는데, 말이 새어 공신도 삭제되고 벼슬도 삭탈되었다.
乙巳錄勳之日, 大提學當製敎書, 而申光漢把筆呻吟, 仍謂提學崔演曰; 老夫自去夜得病, 氣甚不平, 未能構思, 令公須速製進, 使無窘急之弊. 崔遂代製.
을사년에 간신들이 공로를 기록하던 날, 대제학이 마땅히 교서를 지어야 하는데 신광한(申光漢)이 붓을 잡고 일부러 끙끙거리다가 제학 최연(崔演)에게 이르기를, "내가 어젯밤부터 병이나 몸이 불편하여 구상할 수가 없으니, 영공이 부디 빨리 지어 올려 군색하게 당황하는 폐단이 없게 하시오" 하므로, 최연이 드디어 대신 지었다.
申旣錄勳之後, 所分逆賊子孫及奴婢等, 皆許自便行止, 一切不使應役, 而其時人無得以知之.
신광한이 이미 공신이 된 뒤에, 나누어 받은 역적의 자손과 종들을 모두 제 마음대로 행동하도록 허락해 주어 일체 사역을 시키지 않았었는데, 그때에는 사람들이 그런 줄을 알지 못하였다.
平生以歇後得名, 而處事如此, 所不可及也.
평소에 좀 모자란다는 평판이 있었으나 일처리가 이러하였으니 따라가지 못할 일이다.
公酷耽文翰, 不事活計.
공이 문필을 몹시 좋아하여 생계를 일삼지 않았다.
有頑奴不修貢, 乃以詩題送曰; 平海郡居奴莫同, 年年身貢聽如聾. 官威捉致非難事, 須趁明年二月中.
고집 센 종 하나가 신공(身貢)을 바치지 않으므로 시를 지어 보냈는데, "평해골 사는 종 막동이는(平海郡居奴莫同), 해마다 바치는 신공을 귀먹은 체하도다(年年身貢聽如聾). 관리로 잡아오기 어렵지 않을 것이니(官威捉致非難事), 부디 명년 2월까지 치르도록 하라(須趁明年二月中)" 하였다.
嘗爲刑曹判書, 不能辨決, 罪人多滯, 獄不能容, 請加造典獄.
일찍이 형조 판서로 있을 적에 판결을 잘 하지 못하여 죄인이 많이 밀려 감옥이 다 수용할 수 없으므로 옥사(獄舍)를 더 짓자고 하여 한때 조롱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一時譏之, 以此揆彼, 歇後之中, 亦極善處, 人固可以一槪論哉.
이 일로써 저 일을 보면 모자라는 속에서도 또한 일을 매우 잘 처리하였으니, 사람이란 참으로 한편만 가지고 논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李大憲瀣, 退溪先生之兄也.
性敢於有爲, 常以功名自許.
대사헌 이해(李瀣)는 퇴계선생의 형이다. 성격이 추진하는데 과감하여 항시 공명을 세우기를 장담하였다.
李芑仁廟初, 新除右相, 公劾之, 遞之而止.
이기(李芑)가 인종 초기에 새로 우의정에 임명되자 공이 탄핵하여 갈고서야 그만두었다.
貽書退溪, 責以一向恬退, 何時展盡平生所學耶. 退溪貽書, 勸其還鄕自守.
퇴계에게 글을 보내어, "언제나 한가하게 물러서 있기만 하면, 일평생 배운 것을 언제 펴 보게 될 것이냐"고 책망하자, 퇴계가 답서를 보내어, "고향으로 돌아와 분수지키십시오" 라고 권고하기도 하였다.
有忠州徙民崔賀孫者, 竊取一鄕品官鄕會名目, 將上變, 爲人所捕告, 邑倅李致, 轉報監司, 公以監司命刑之, 遂斃.
충주에 이사 온 최하손(崔賀孫)이라는 사람이 그 고을 벼슬아치와 향회(鄕會)의 명단을 훔쳐내어 그것을 가지고 장차 고변하려다가 어떤 사람에게 잡혀 고발되므로 원님 이치(李致)가 감사에게 보고하자, 공이 감사로 처형하라 명하였는데 그가 마침내 죽었다.
李洪男嘗有嫌於公, 乃嗾臺諫, 諉以滅口護逆, 拿公下獄.
이홍남(李洪男)이 전부터 공에게 감정이 있었는데 이 일이 있자 대간을 부추기어 이해가 비밀을 보장하려고 사람을 죽여 역적을 옹호한 것이라고 밀어대어, 공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다.
受訊道死, 時方盛夏, 尸體糜爛.
自古受禍之慘, 未有如此者.
고문을 당하여 도중에서 죽었는데 때가 마침 한 여름이어서 시체가 불어터졌다.
예로부터 화를 받는 참상은 이처럼 심한 적이 없었다.
退溪先生長往之意, 於是乎益, 浩然不回矣.
퇴계 선생의 영원히 벼슬에서 떠나려는 뜻은 이때에 더욱 결연하여 돌아서지 않았을 것이다.
正郞韓智源, 與乙巳史官, 嘗有私嫌, 聞其有直筆, 意爲其人而洩之.
정랑 한지원(韓智源)은 을사사화 때의 사관(史官)과 전부터 사사로운 감정이 있었는데, 사관이 직필(直筆)한 일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 사람일 것이라고 짐작하여 누설하여 버렸다.
安名世自史官遷弘文博士, 雖不敢自言, 而知其必不免.
안명세(安名世)가 사관에서 홍문 박사로 옮기게 되어, 비록 자신이 감히 말하지 못하였으나 반드시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았다.
及其被禍, 名世爲首罪, 趙濮杖流道死, 孫弘績流濟州, 而皆非智源所欲搆者也.
그 화를 입을 때에 당하여 안명세는 주모자로 처벌되고, 조박(趙璞)은 곤장을 맞고 귀양가다가 도중에서 죽었으며, 손홍적(孫弘績)은 제주로 귀양갔는데, 모두 한지원이 얽어 넣으려고 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修撰尹潔, 與綾原尉具思顏正字林復爲酒黨, 日夜相從縱飮, 語及時事, 有指斥文定垂簾之事.
수찬 윤결(尹潔)이 능원위 구사안(具思顔), 정자 임복(林復)과 술친구가 되어 밤낮으로 어울리어 방종하게 마시기가 일쑤였는데, 이야기가 시사에 언급되어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하는 것을 지탄한 일이 있었다.
未幾語洩, 具恐禍及, 先啓之.
얼마 안 되어 그 말이 누설되자 구사안이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우선 아뢰었다.
尹與林俱下獄, 在獄亦取林家酒, 痛飮爲永訣.
윤결과 임복이 모두 옥에 갇히었는데 옥 안에 있으면서도 임복의 집에서 술을 가져다가 실컷 마시고 영결하였다.
尹死杖下, 林亦竄遠方.
윤결은 곤장을 맞다 죽었으며, 임복은 또한 먼 데로 귀양갔다.
安尹二學士, 年少有才華, 俱死於非命, 士林痛惜之.
안, 윤 두 학사가 젊은 나이에 재주가 있었는데 모두 비명에 죽으므로, 선비들이 몹시 아깝게 여겼다.
乙卯倭賊六十餘艘來寇, 陷於蘭達梁兵營康津, 靈岩郡守李德堅被虜.
을묘년(1555, 명종 10)에 왜적의 배 60여 척이 침범해 들어와 오란(於蘭), 달량(達梁), 병영(兵營), 강진(康津)을 함락시키니, 영암 군수 이덕견(李德堅)이 포로가 되었다.
賊進圍長興, 九官救兵, 一時潰散, 兵使元績敗死, 府使韓蘊, 城陷死之.
적이 진격하여 장흥을 포위하자 9고을의 구원병이 한꺼번에 무너져 분산되었는데, 병사(兵使) 원적(元績)은 패전하여 죽고, 부사 한온(韓蘊)은 성이 함락되어 죽었다.
監司金澍馳到靈岩, 不知所以爲計, 聞我外王父以前牧使在家, 急召問方略.
감사 김주(金澍)가 영암에 달려와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우리 외조부가 전임 목사로 집에 있다는 말을 듣고 급히 불러 방략을 물었다.
乃曰; 公以一道之主, 不可在此, 退住中道, 以爲策應之計, 但長興新破, 賊勢大熾, 若失靈岩, 則羅州以上, 盡皆搖動, 雖元帥下來, 亦無設鎭駐軍之所矣, 全州府尹李潤慶, 位望並隆, 且有將略, 南原判官梁某, 亦有可用之才, 公可急召使守靈岩, 終能破賊.
이에 말하기를, "공이 한 도(道)의 주인으로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니, 도에 물러가 있으면서 대응책을 강구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장흥이 막 무너져 적의 기세가 대단히 치열하니 만약 영암을 잃게 되면 나주 이상의 고을이 모두 다 동요하게 되어 비록 원수(元帥)가 내려온다 하더라도 진(鎭)을 설치하여 군대를 주둔할 곳이 없게 될 것입니다. 전주 부윤 이윤경(李潤慶)은 지위와 덕망이 모두 높고 또한 장수의 지략이 있으며, 남원 판관 양(梁) 아무도 또한 쓸만한 재간이 있는 사람이니, 공이 그들을 급히 불러다가 영암을 지키게 하면 끝내는 적을 깨뜨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金曰; 公亦可守此城. 辭曰; 我鄕人也, 不足以有爲. 許之.
김주가 말하기를, "공도 이 성을 지키는 것이 어떻겠소" 하였는데, 사양하기를, "나는 시골에 있는 사람이어서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그러라고 허락하였다.
李公潤慶, 卽擇才人四五百名, 盡俱綵服, 去入城, 爲防守計, 朝廷聞之, 以李公浚慶, 爲都元帥, 沈守慶金貴榮爲從事官, 金景錫南致勤爲左右防禦使, 進駐光州羅州, 爲左右掎角之勢.
이윤경이 즉시 재인(才人) 4~5백 명을 선발하여 모두 색옷을 입히고 성안으로 들어 보내어 방어할 계책을 하니, 조정에서 듣고 이공 준경(浚慶)을 도원수, 심수경(沈守慶), 김귀영(金貴榮)을 종사관, 김경석(金景錫), 남치근(南致勤)을 좌우 방어선으로 삼아 광주와 나주로 진주하여 좌우 양쪽으로 공격해 들어가는 태세를 갖추게 하였다.
賊圍靈岩, 城中嘗夜驚, 潤慶張燭出大廳, 戒勿虛動.
적이 영암을 포위하였는데, 밤이 되자 온 성안이 소동하므로 윤경이 촛불을 켜들고 대청에 나와, "공연히 동요하지 말라" 하였다.
如是者日三四, 久而乃定.
이렇게 하기를 하루에 3~4차례씩 하였는데 오랜 뒤에야 성안이 안정되었다.
浚慶以書勸出城, 潤慶飭毋納, 再來使射之, 遂不復來.
준경이 글을 보내어 성에서 나올 것을 권하였으나, 윤경이 사자를 성안에 들여보내지 못하게 하고, 다시 오면 쏘라고 하자 다시는 오지 않았다.
方浚慶貽書之日, 城中聞其將出荷握, 有土崩之形, 及射而絶之, 人心遂安.
준경이 글을 보내던 날 성안 사람들이 장차 나갈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짐을 꾸려 흙무너지듯 분산될 형편이었다가 사자를 쏘아 다시 못오게 하자 인심이 드디어 안정되었다.
南致勤使軍官蘇達突賊陣, 馬蹶被殺, 衆方洶懼, 潤慶先伏弩, 且設菱鐵於道, 使才人盡着綵服, 出入於弩鐵之間, 踊躍爲呈才之狀, 賊張其翼而退之或死於弩, 或傷於鐵, 不敢復退, 盡入鄕校, 列隊而出, 爭觀優戲.
남치근(南致勤)이 군관 소달(蘇達)을 시켜 적진에 돌진하게 하였다가 말이 넘어져 피살되므로 여러 사람들이 소동하여 공포심을 갖게 되었는데, 윤경이 재빠르게 복병을 설치하고 또한 마름쇠를 길에 깔아 놓고 광대들을 시켜 모두 색옷을 입고 복병과 마름쇠 사이를 왔다갔다 하여 뛰놀며 재주풀이 하는 모양을 하게 하니, 적이 대열을 날개처럼 벌리고 쫓아오다가 혹은 복병에게 죽고 혹은 마름쇠에 부상하여 감히 더 쫓아오지 못하고 모두 다 향교로 들어가 대열을 정돈하고 나와 광대놀음을 다투어 구경하고 있었다.
南致勤等, 分軍爲左右翼, 掩其不意, 賊不能支, 遂潰乃盡殲之.
이때 남치근 등이 군대를 좌우로 나누어 불의에 엄습하니, 적이 감당하지 못하고 드디어 붕궤되므로 모조리 섬멸시켜 버렸다.
海南縣監邊協, 自長興敗回本縣, 修城設伏, 十餘賊入境被殺, 一賊逃回, 自後不敢更犯其境.
해남 현감 변협(邊協)이 장흥에서 패하여 본 고을로 돌아와 성을 수축하고 복병을 배치하였는데 10여 명의 적이 침입하였다가 피살되고 한 명만이 도망쳐 돌아갔고, 이 뒤로는 감히 다시 그 경내를 침범하지 못하였다.
朝廷以金澍爲臨賊失措, 罷之, 以潤慶代之, 以邊協爲全其城, 超爲長興府使, 斬德堅于軍中以徇.
조정에서는 김주를 적군과 싸움에서 조처를 잘못 하였다 하여 파면하고 윤경으로 대신하게 하였으며, 변협은 그 성을 완전히 지켰다고 하여 장흥 부사로 승전시켰으며, 이덕견의 머리를 군중에서 베어 조리 돌렸다.
成笑仙悌元, 趙龍門昱, 俱以遺逸, 出六品, 成爲報恩縣監, 趙爲長水縣監.
소선(笑仙) 성제원(成悌元)과 용문(龍門) 조욱(趙昱)은 모두 덕망과 학식이 높은 초야의 선비로 6품 벼슬을 하여, 성제원은 보은 현감이 되고, 조욱은 장수 현감이 되었다.
乙卯南警, 報恩方到公州聞變, 卽以一小紙, 使下人送之鄕所, 軍人及軍器軍粮一應軍需, 無不立辦, 而盡皆精緻.
을묘년의 호남 왜변이 일어났는데, 보은 현감인 성제원이 공주에 당도하자마자 변란이 일어났다는 것을 듣고 곧 하인을 시켜 쪽지 한 장을 향소에 보내어 군인 및 군기와 군량 등 모든 군수품을 즉시 마련하게 하였는데 모두 다 정밀하고 치밀하였다.
長水軍用頗缺, 南致勤縛致之, 塗蠣灰於面, 將斬之, 已而杖而黜之, 遂得狂易, 棄官還家. 世以此爲公之短.
장수에서는 군용이 너무도 정비되지 못하였으므로 남치근이 조욱을 결박하여 굴껍질 재를 얼굴에 발라 목을 베어 죽이려다가 그만 두고 곤장을 때리고 쫓아내니, 드디어 미쳐서 벼슬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세상에서 이것을 공의 단점으로 여겼다.
朴參判民獻, 幼有孝行, 政府啓之, 擢爲參奉不就.
참판 박민헌(朴民獻)은 어려서부터 효행이 있으므로 정부에서 임금께 아뢰어 참봉으로 뽑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善屬文, 士子求與同接, 入試場, 競坐於其近處者, 幾一場之半.
글짓기를 잘하므로 선비들이 그와 같이 공부하기를 희망하였으며, 과장에 들어가면 그와 가까운 자리에 앉으려고 다투는 사람이 거의 과장에 모인 사람의 절반을 차지하였다.
丙午春榜初試, 賦以潮汐爲題, 詩以金聲玉振爲題, 士子閣筆斂手, 只待民獻出草, 以爲依樣葫蘆之計, 民獻托以霍亂不執筆, 心中暗草, 天又雨, 士子無可奈何.
병오년 봄 과거의 초시에, 부(賦)는 제목이, '밀물과 썰물'이었으며, 시는 제목이, '금으로 시작하고 옥으로 거둠(金聲玉振)'이었는데, 선비들이 붓을 놓아 두고 손을 거두고 앉아 다만 민헌이 써내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가 모방하려는 꾀를 쓰려고 하므로, 민헌이 배가 아프다 핑계하여 붓을 들지 아니하고 마음속으로 구상만 하고 있었으며 날씨가 또 비가 내려서 선비들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日將沒, 民獻曰; 當走筆免拖白, 遂詩賦俱成篇.
해가 질 무렵에야 민헌이, "아무렇게나 써서 백지로 내는 것이나 면해야지" 하고는, 드디어 시와 부를 모두 완성하여 동당(東堂)에서 장원하였다.
居魁, 東堂與康上舍惟善爲同接, 表以請汰原從功臣爲題.
민헌이 상사(上舍) 강유선(康惟善)과 같이 공부하는데 표의 제목이, '원종공신(原從攻臣)의 도태를 청함'이라는 것이었다.
康慷慨曰; 此豈士子可製者乎, 束紙而出.
강유선이 슬퍼하고 한탄하면서, "이것을 어찌 선비가 지을 수 있는 것인가?" 하고는, 종이를 묶어 놓고 나가버렸는데,
民獻以安劉氏必勃屬對, 又居魁. 自後淸議, 以不正目之.
민헌은, '유씨(劉氏)를 안정시킬 사람은 반드시 발(勃)이다'는 것으로써 대구를 지어 또 장원을 하게 되니, 이로부터 청의(淸議)하는 사람들이 민원을 바르지 못하다고 지목하게 되었다.
國法式年文科, 則取三十三人, 武科則取二十八人.
국법에 식년 문과(式年文科)는 33명을 뽑고, 무과는 28명을 뽑기로 되어 있다.
如有恩賜直赴殿試之命者, 則數外加參, 乃流例也.
만약 특명으로 바로 전시를 보게 한 사람이 있으면 정원 외로 참여하게 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다.
生員朴謹元, 以太學生, 見忤於元衡, 壬子式年講經, 謹元居末, 元衡嗾臺官, 以式年只取三十三人, 乃國典也, 旣有直赴殿試之人, 則已滿其數, 不可更加一人, 請依法削其一人, 論之逾月而止, 蓋知謹元不付已也.
생원 박근원(朴謹元)이 태학생으로 윤원형에게 거슬림을 받아 임자년 식년 강경(講經) 과거에서 말석으로 합격하자 원형이 대관을 부추기어, 식년 과거에는 33인만을 뽑는 것이 나라의 법인데, 이미 전시에 바로 가게 된 사람이 있어 이미 정원이 찼으니, 한 사람도 더 붙일 수 없다고 하여 법에 의하여 그 한 사람을 삭제할 것을 청하였는데, 달이 넘도록 논쟁하다가 그쳤으니 이것은 근원이 자기에게 붙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其後爲翰林, 頗書其惡, 同官懼其有禍, 盡抹去之.
그 후에 박근원이 한림이 되어 자못 그의 악한 일을 사기(史記)에 써 놓으므로 동료가 그의 화가 자신에게 미칠까 두려워하여 모조리 지워버렸다.
謹元再書之, 其人又抹之, 書曰; 上官自有所見. 謹元又書之曰; 下官亦有所見, 竟不從.
근원이 다시 써 놓자 그 사람이 또 지워버리고, "상관 자신이 보는 바가 있다"고 써 놓았더니, 근원이 또, "하관도 또한 보는 바가 있다"고 써 놓아 끝내 따르지 않았다.
謹元之父, 爲江華府使, 以親病, 受由歸覲.
근원의 아버지가 강화 부사였는데 근원이 아버지의 병환 때문에 말미를 받아 문안갔었다.
凡在官者, 必諉親病, 呈告受由, 亦流例也, 元衡又嗾臺諫, 論之曰; 翰林朴謹元, 以無病之父爲有病, 至於呈辭受由, 是欺君也, 以無病之父爲有病, 而欲爲往來遊衍之計, 是不孝也. 請削仕版.
모든 관원들이 반드시 부모의 병환을 구실로 위에 고하여 말미를 받는 것이 또한 예사였으므로, 원형이 또 대간을 부추기어, "한림 박근원이 병 없는 아비를 병이 있다고 하고 글을 올려 말미를 받기까지 하였으니, 이것은 임금을 속인 것이요, 병이 없는 아비를 병이 있다고 하여 왔다 갔다 하면서 마음껏 놀려는 꾀를 부렸으니, 이는 불효인 것이다"고 논박하게 하여, 사판(仕版; 관원의 명부)에서 삭제하기를 청하였다.
謹元爲人傾危, 本無可取之端, 而終始淸顯, 元衡有以成就之也.
근원의 사람됨이 편견되고 위태로워 본래 취할 만한 장점이 없었으나 시종 좋은 자리에 있으니, 결국 원형이 그렇게 만들어 준 것이 된다.
壬子式年, 朴謹元朴仁元堂兄弟也, 同講經登第, 朴啓賢從姪也, 以直赴殿試, 亦上第, 武科李元成, 謹元等堂姊夫也.
임자년 식년 과거에 박근원, 박인원(朴仁元)은 사촌형제인데, 같이 강경과에 급제하였고, 박계현(朴啓賢)은 당질인데, 바로 전시를 보게 되어 또한 급제하였으며, 무과의 이원성(李元成)은 근원의 사촌 자형이었다.
一家四人, 同設慶席, 衆賓盛集, 桂花燦爛, 見者榮之.
한 가문의 네 사람이 함께 축하연을 베풀었는데 여러 손님이 많이 모이고 계화(桂花)가 찬란하여 보는 사람들이 영화롭게 여겼다.
朴二相忠元, 啓賢之父也, 把酒謂諸弟曰; 吾一家太盛, 不可不小心處也.
이상(二相) 박충원(朴忠元)은 계현의 아버지인데, 술잔을 들고 여러 아우들에게 이르기를, "우리 한 집안이 너무 성하니 조심하여 처신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하자,
仁元輒曰; 各以其才取第, 出於分內事, 有何盛乎. 忠元聞之, 甚不樂.
인원이 바로 대꾸하기를, "각자의 자기 재주로 과거한 것은 자기 분수대로 된 것인데 무엇이 너무 성합니까?" 하므로 충원이 그 말을 듣고 몹시 즐겁지 않게 여겼다.
厥後三人, 或陞宰列, 或至堂上, 仁元獨不達, 官至禮賓正, 早歿.
그 뒤 세 사람이 더러는 재상의 반열에 오르기도 하고 혹은 당상관이 되기도 하였는데, 인원만이 영달하지 못하고 벼슬이 예빈 정에 이르렀다가 일찍 죽었다.
明廟在潛邸時, 嘗受學於愼希復.
명종이 잠저에 있을 적에 일찍이 신희복(愼希復)에게서 글을 배웠다.
戊午別試, 希復入殿試, 試官考畢, 以其試券上之, 希復之名不在焉.
무오년의 별시에 희복이 전시에 응시하였는데 시관이 채점을 마치고 합격한 시권을 올리는데 희복의 이름이 없었다.
特命次中以上盡入之, 許令盡賜及第, 希復始得參其榜.
특명을 내려 차중(次中) 이상의 사람을 모두 넣어 급제를 주게 하니 희복이 비로소 방에 끼게 되었다.
有老微弱公私賤並參之語, 愼希復年過六十, 老也, 柳祖詢門地不顯, 微也, 尹根壽年二十二, 弱也, 姜文祐新良人, 賤也.
그때 노(老), 미(微), 약(弱) 자와 공사천(公私賤)이 모두 합격하였다는 말이 있었으니, 신희복은 나이가 60이 넘어 노요, 유조순(柳祖詢)은 문벌이 드러나지 않았으니 미요, 윤근수(尹根壽)는 나이가 22세이니 약이며, 강문우(姜文佑)는 갓 양민이 된 사람이니 천인이었다.
吏曹判書尹春年, 門無雜客, 時時邀山人, 如休靜者, 引就草堂, 爲山水談, 常若有遺世出塵之思.
이조 판서 윤춘년(尹春年)은 드나드는 잡객이 없었고, 가끔 산인(山人)인 휴정(休靜) 같은 사람을 맞아들여 초당으로 가 산수 이야기나 하여 항상 세상을 떠나고 세속을 벗어날 생각이 있는 것 같았다.
注擬之際, 必用淸明之士, 廣置臺閣, 雖有一二權奸鷹犬, 厠於其間, 而士類洽然, 稱爲淸論之人, 實不知盡囿於籠絡之中.
주의(注擬)할 때에도 반드시 청렴하고 현명한 선비를 등용하여 널리 대각에 배치해 놓으니, 비록 한두 권간(權奸)의 앞잡이들이 그 사이에 끼어 있으나, 선비들이 흡족하게 여겨 청론(淸論)을 하는 사람들이라 하여 사실 자신들이 모두 그의 농락하는 속에 포위되어 있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嗚呼自在郞署, 承弟之嗾, 殺其兄, 以取美爵, 內與潛結, 外持公論, 以爲欺世地, 一世或可欺, 後世其可欺乎.
아아! 낭서에 있을 적부터 아우 윤원형의 부추김을 받고 그 형 윤원로를 죽여 좋은 벼슬을 차지하여, 안으로는 간신들과 몰래 결탁하고 겉으로는 공론을 갖는 체하여, 세상을 속이는 바탕을 지었으니, 한 때의 세상은 혹 속일 수 있을망정 후세까지도 속일 수 있을 것인가.
文定王后, 嘗與諸功臣夫人, 設宴於後苑, 雖寡夫人, 幷許入參.
문정왕후가 언젠가 모든 공신의 부인들과 후원에서 잔치를 베풀었는데 비록 과부된 부인일지라도 모두 참석하게 하였다.
文定先揷花, 以此勸之, 林嵩善夫人低首不應.
문정왕후가 먼저 꽃을 꽂고 다른 부인들도 그렇게 하기를 권하였는데, 임숭선의 부인이 고개를 숙이고 응하지 않았다.
文定諭曰; 諸功臣, 義同一家, 今欲與諸夫人穩敍同事之意, 予亦未亡人, 猶自先揷, 以爲從容歡洽之地, 夫人不可不勉循之也. 必以不敢稱之, 固辭竟不從.
문정왕후가 타이르기를, "모든 공신들은 정분상 한 집안과 같소. 내가 지금 여러 부인들과 함께 일을 같이하던 뜻을 이야기하려고 하므로 나도 미망인이지마는 오히려 먼저 꽂아 조용히 즐겁게 놀 분위기를 만든 것이니, 부인도 억지로라도 따르지 않아서는 안 되겠소" 하였으나, 기어이 감히 그렇게 따르지 못하겠다고 굳이 사양하여 끝내 따르지 않았다.
蓋其天性嚴厲, 有若男子, 文定極其厚待, 而亦甚憚之.
대개 그 천성이 엄격하고 세어 남자 같은 데가 있으므로 문정왕후가 그를 지극히 후대도 하였고 또한 매우 꺼려하였다.
凡宰臣請謚者, 將一家所錄, 或師友所撰行狀, 投呈于奉常寺, 其頭辭曰, 某官某, 爲請謚事.
무릇 재신(宰臣)의 시호를 청할 때에는 그 가문에서 기록해 둔 것이나 혹은 그의 스승이나 벗이 지은 행장을 봉상시에 올리는데 그 첫 머리에, 무슨 벼슬인 아무개의 시호를 청하는 일이라 적는다.
奉常寺送于吏曹, 考勳司取考平生所歷官階並行狀, 送于弘文館.
봉상시에서 이조로 보내면 고훈사(考勳司)에서 시호받을 사람의 일생 동안 역임한 관계(官階) 및 그 행장을 조사하여 홍문관으로 보낸다.
撰其謚, 備三望, 以落點後, 弘文館吏曹會同奉常寺, 方撰謚, 議送于兩司, 議政府署經焉.
그러면, 그 시호를 지을 적에는 세 가지를 만들어 올려 낙점된 뒤에 홍문관과 이조가 봉상시에 모여 그제야 시호를 결정하여 양사(兩司)와 의정부에 보내어 서경(暑經)을 그치는 것이다.
林嵩善賜謚曰昭夷, 謚法, 容貌端雅曰昭, 擧止安詳曰夷.
임숭순(林嵩善)에게 줄 시호를 '소이(昭夷)'라고 지었는데, 시호 짓는 법에 용모가 단아한 것을 '소(昭)'라고 하고 행동거지가 차분한 것을 '이(夷)'라 하는 것이다.
文定震怒, 同參議諡三司, 並令罷職, 弘文館則應敎朴淳也, 吏曹則佐郞朴謹元, 欲以非色郞求免, 公議藉藉, 竟亦罷去.
문정왕후가 벼락같이 노하여 같이 모여 시호를 의논한 삼사를 파직시켰는데, 홍문관에서는 응교인 박순(朴淳)과, 이조에서는 좌랑인 박근원(朴謹元)이 색랑(色郞)이 아니라 하여 모면되려고 하였으나 공론이 자자하여서 마침내는 또한 파직되었다.
遂使改謚, 三司方議于奉常寺, 參奉張應禎出曰; 此謚之定, 恐非難也.
드디어 시호를 고치게 하므로 삼사가 봉상시에서 한창 의논하는 판에 참봉 장응정(張應禎)이 나와 말하기를, "이 시호의 결정은 어려울 것이 없을 것 같소" 하였다.
僉曰何也, 曰愚意, 文正最爲合當也. 無不竊笑之, 亦被論罷. 然以文忠改之也.
모두들 어째서냐고 하자, "내 생각에는 ‘문정(文正)’이라 하는 것이 가장 합당하겠소" 하므로, 모두 속으로 웃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그도 또한 논박되어 파직당하였다. 그러나 '문충(文忠)'이라고 고치게 되었던 것이다.
景福宮, 癸丑年火.
경복궁이 계축년(1553, 명종 8)에 불이 났었다.
重修垂畢, 沈忠惠以首相, 禮曹判書尹漑以都監提調, 往審, 觀其外閣窓戶, 皆用班子朱紅銅綠等眞綵.
그 중수가 거의 끝날 무렵 충혜공 심연원(沈連源)은 수상으로, 예조 판서 윤개(尹漑)는 도감 제조로서 공사한 것을 둘러보려 갔었는데 외각(外閣)의 창호(窓戶)를 보니, 그 반자(班子)를 모두 주홍색, 동록색(銅綠色) 등의 무늬놓은 비단을 썼다.
尹公大怒, 卽捉致該郞李仁健, 鎖項脫帽而責之曰; 惟大向寢室, 乃用以眞綵, 而幺麽一微官, 敢欲取媚要譽, 毀法至此, 不可不重治, 當論以毀棄制書之律, 辭氣勃勃. 仁健乃忠惠之壻也.
윤 공이 크게 노하여 곧 해당 낭관 이인건(李仁健)을 잡아다가 목에 쇠사슬을 채우고 사모를 벗긴 다음 꾸짖기를, "오직 대내(大內)의 침실에만 비단을 쓰는 법인데, 하찮은 일개의 하급관원이 감히 귀염받고 칭찬받으려고 하여 법을 이같이 깨뜨렸으니, 중한 죄로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 마땅히 국법을 파괴한 죄로써 다스려야 한다"하여, 말하는 기색이 엄중하였다. 이인건은 즉 심 충혜공의 사위였다.
忠惠聞若不聞, 待其從沙地, 哀辭苦語, 請死求乞, 極其困辱, 然後沈曰 此乃愚壻也, 年少新進, 不知國制有限, 自陷於妄作, 似非有情, 而毀制之律, 無乃太重乎, 幸思其次, 遂止推考而已.
그런데도, 충혜공은 듣고도 못들은 척하다가 그가 땅에 엎드려 애걸복걸 죽여달라고 구걸하여, 극도로 곤욕당함을 기다린 뒤에야 말하기를, "이 사람은 내 사위인데 나이 젊고 갓 벼슬한 사람인지라 국법에 제한이 있음을 알지 못하여, 스스로 망령된 일을 저지른 것이요, 일부러 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국법을 파괴하였다는 죄는 너무 무겁지 않겠습니까? 그 다음 법을 생각해 주면 고맙겠소" 하여, 드디어 심문을 중지하여 추고만 하였던 것이다.
其與今之士大夫家, 眞綵丹靑, 照耀隣里, 而肆然不知爲自犯大辟者, 不可同年而語也.
그들은 오늘날 사대부의 집들이 비단과 단청을 이웃 마을까지 비치게 하면서도 방자하게 자신이 큰죄를 범하고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것과는 동등하게 말할 수 없는 것이다.
奢侈日甚, 習俗日壞, 末流橫瀾, 其孰障之歟.
사치가 날로 심해지고 미풍이 날마다 파괴되어 말류의 폐단이 범람하는데 그 누가 막을 것인지?
舍人金弘度應敎金繼輝, 以才華意氣, 自少相善, 而弘度疏脫不拘檢, 且喜言人過, 而所與友者, 皆一時名流.
사인 김홍도(金弘度)와 응교 김계휘(金繼輝)는 재주와 의기로써 젊었을 적부터 서로 좋아하였는데, 김홍도는 소탈하여 매인 데가 없고 또한 남의 과실을 말하기 좋아하였으나 서로 사귄 벗이 모두 당대의 명사들이었다.
與司諫金汝孚交惡, 執義金戣, 嘗以汝孚隱過, 言于弘度, 汝孚聞之, 又言弘度方居喪, 往娼家醉倒, 輾轉相訐.
그는 사간 김여부(金汝孚)와는 사이가 나빴는데, 집의 김규(金戣)가 언젠가 여부의 숨은 허물을 홍도에게 말하였더니, 여부가 그 말을 듣게 되자 또한 홍도가 거상 중에 창녀집에 가서 취해 쓰러졌었다고 말하여, 엎치락 뒤치락 서로 헐뜯었는데,
汝孚遂與其黨大諫金百鈞司諫趙德源論之, 竄弘度于甲山, 繼輝削黜, 金戣至於下獄杖竄, 或罷或補外者亦多.
여부가 드디어 그의 당파인 대사간 김백균(金百鈞), 사간 조덕원(趙德源)과 함께 탄핵하여, 홍도는 갑산(甲山)으로 귀양보내고 계휘는 삭출하였으며, 김규는 옥에 가두고 매 때려 귀양보냈는데, 혹은 파직되고 혹은 외직으로 가게 된 사람도 또한 많았다.
汝孚旣得志, 行事恣橫, 人皆側目, 首相沈忠惠啓曰; 金汝孚敢以私怨, 自相攻擊, 使朝廷不寧, 金弘度所爲, 亦未必盡非, 而斥逐名士, 殆至空國, 請罪之.
여부가 뜻을 얻게 되자 하는 일이 방자하고 횡포하므로 사람들이 모두 눈을 흘겼는데, 수상 심 충혜공이 아뢰기를, "김여부가 감히 사사로운 원한을 가지고 서로 공격하여 조정을 불안하게 합니다. 김홍도의 행위가 반드시 다 그른 것도 아닌데, 여부가 명사들을 배척하여 나라가 거의 비게 되었으니 그를 죄주소서" 하였다.
汝孚德源黜, 百鈞罷職, 朴民獻亦以迹涉兩間, 並被削奪.
그리하여 여부는 덕원(德源)으로 내쫓기고 백균은 파직되었으며, 박민헌(朴民獻)은 또한 두 사이에 관여되었다 하여 관직을 삭탈당했다.
强賊林巨正, 楊州白丁也, 性狡黠且驍勇.
강포한 도적 임꺽정(林巨正)은 양주 백정으로서 성격이 교활한데다가 날쌔고 용맹스러웠다.
與其徒數人, 皆極趫捷, 起而爲賊, 焚燒民居, 亂搶牛馬, 若有抗之者, 則剮裂屠翦, 極其殘酷.
그 도당 몇 명도 모두 지극히 날래고 민첩했는데, 그들과 함께 일어나 적단이 되어 민가를 불사르고 마소를 닥치는 대로 약탈하되 만약 항거하는 사람이 있으면 살을 발라내고 사지를 찢어 죽여 잔인하기가 그지없었다.
自圻甸至海西, 一路吏民, 與之密結, 官欲措捕, 輒先漏通, 以此橫行無忌, 官不能禁.
경기와 황해도 일대의 아전과 백성들이 그와 비밀리 결탁되어 관에서 조치하여 잡으려고 하면 언젠가 내통되었다. 이 때문에 거리낌없이 날뛰었으나 관에서 금할 수가 없었다.
朝廷使宣傳官哨探, 賊倒着麻鞋, 使見者入則謂之出, 出則謂之入, 以亂其蹤跡.
조정에서 선전관으로 하여금 정탐하게 하였는데, 도적들은 미투리를 거꾸로 신고 다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들어간 것은 나갔다 하게 하고 나간 것은 들어왔다 하게 하여 그들의 발자취를 혼란스럽게 하였다.
宣傳官往九月山見其迹, 以爲出而徑還, 賊在後射殺之.
선전관이 구월산에 갔다가 그들의 발자국을 보고 이미 나간 줄 알고 바로 돌아오는데 도적이 뒤에 있다가 쏘아 죽였다.
朝廷又使長淵瓮津豐川等四五官武臣守令, 領兵往捕, 聚于瑞興, 吏民已通之, 夜率六十餘騎, 乘高俯瞰, 亂矢如雨, 五官軍不能支潰, 而尤橫無忌.
조정에서 또 장연(長淵), 옹진(瓮津), 풍천(豐川) 등 4~5 고을의 무관과 수령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잡게 하므로 서흥(瑞興)에 모였었는데, 아전과 백성들이 벌써 내통하여 밤에 60여 명이 말을 타고 높은데 올라가 내려다 보며 활을 비오듯 쏘아대니, 다섯 군사가 지탱하지 못하고 분산되자 더욱 거리낌없이 날뛰었다.
伯父方爲鳳山郡守, 處事有緖, 賊憚之.
우리 큰아버지(박응천(朴應川))가 마침 봉산 군수(鳳山郡守)로 있었는데 일처리가 두서가 있었으므로 도적들이 꺼려하였다.
有少年衙族, 自鳳山還京, 賊之伏於路者, 到安城站嶺下欲犯之, 後有一騎, 馳呼曰; 此自鳳山出者, 愼無犯.
젊은 아족(衙族) 한 사람이 봉산에서 서울로 돌아가는데 안성참(安城站) 고개 아래 도달하자 길가에 잠복하고 있던 도적이 침범하려 하는데 말탄 사람 하나가 뒤에 있다가 외치기를, "그 사람은 봉산에서 오는 사람이니 조심하여 범하지 말라" 하였다.
然苦其不能任意行走, 使其黨捌作金吾郞模樣, 乘傳急到郡, 呼郡守出就命.
그런데 그 마음대로 행동할 수 없는 것을 고통스럽게 여겨 자기들의 도당으로 하여금 금부도사와 같이 가장하고 역마를 타고 급히 군청에 달려와, "군수는 빨리 나와서 명을 받으라"고 외쳤다.
伯父已知之, 潛聚軍人, 賊又詗知而逃, 乃以武臣尹之淑代之.
큰아버지가 벌써 알아차리고 몰래 군인을 집결시키니, 도적들이 또한 눈치채고 달아나므로 곧 무신 윤지숙(尹之淑)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尹到臨津乘船, 有六七商人, 載物而驅, 衝撞不顧而上, 尹怒欲捕治, 其人等遂開其裹, 皆弓矢刀槍也.
윤이 임진강에 이르러 배를 타는데 6~7명의 장사치가 물건을 싣고 몰려와 부딪치고도 돌아보지도 않고 배에 오르므로 윤이 노하여 잡아다가 다스리려고 하자 그 사람들이 드디어 짐을 풀어 보였는데 모두 활, 살, 칼, 창이었다.
尹始知其爲賊, 策馬下船, 諸賊追之, 僅而得免.
윤이 비로소 그들이 도적들임을 알고 말을 채찍질하였는데 배에서 내려 여러 도적들이 뒤쫓았으나 겨우 위기를 모면하였다.
宗室端川令, 善吹笛, 行到開城靑石嶺被拘, 賊問曰; 爾爲誰也, 得非善吹笛端川令乎. 曰然. 今始勸之.
종실 단천령(端川令)은 피리를 잘 불었다. 개성 청석령(靑石嶺)에까지 갔다가 도적들에게 붙잡혔는데 도적이 묻기를, "네가 누구냐. 피리를 잘 부는 단천령이 아니냐?"고 하자, '그렇다'고 했더니, 금시에 피리 불라고 권하였다.
時月正明, 賊數十環擁而聽之.
그때 달이 마침 밝았는데, 도적들 수십 명이 빙 둘러 앉아 들었다.
笛是鶴脛, 軆短而韵響淸越.
피리는 학경(鶴脛)이었는데 길이가 짧으나 소리가 맑고 가락이 높았다.
出自袖中, 弄之作羽調, 賊聞之, 咸曲踊飛動, 有衝天之勢, 徐變而作界面調, 曲未終, 皆嘻噓嘆息, 至有流涕者.
소매 속에서 꺼내어 흥겹게 우조(羽調)로 부니, 도적들이 듣다가 모두 이리뛰고 저리뛰며 나놀아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이자 서서히 가락을 바꾸어 계면조를 불어대니, 가락이 끝나기도 전에 모두 한숨을 내어쉬며 탄식하여 눈물을 흘리는 자까지 있었다.
巨正觀諸賊動靜, 急揮手止其笛曰; 宗室之人, 留之無任, 可使還送. 因解其所佩小刀, 給之曰; 道路如有梗, 以此示之.
꺽정이 여러 도적들의 동정을 보더니, 급히 손을 저어 피리를 멈추게 하면서, "종실 사람은 여기에 머물러 두어도 소용이 없으니 돌려 보내야 한다" 하고는 이어 그가 차고 있던 작은 칼을 풀어 주면서, "길을 가다가 만일 막는 자가 있거든 이것을 보이라" 하였다.
翌日到長湍, 果有數騎, 欲犯之, 見其刀, 嘖嘖而散曰, 何從得此耶.
이튿날 장단(長湍)에 오니, 과연 말탄 자 수명이 범하려 하다가 그 칼을 보고는, "이것을 어디서 얻었을까?" 하여 떠들어대면서 흩어져 버렸다.
自後形勢越大, 數百里之間, 道路幾絶, 或言賊黨, 充滿都城.
그 뒤 세력이 월등하게 커져 수백리 사이에 길이 거의 끊어졌고, 혹은 도적의 무리가 서울에 가득하다고도 말하였다.
朝廷令五部作統, 以譏察之, 以南致勤爲討捕使, 出鎭于載寧郡, 賊領衆入于九月山, 只率親切驍健者, 餘皆散遣, 分據險阨, 以爲距捕之計.
조정에서 5부에서 통(統)을 만들어 순찰하게 하고, 남치근(南致勤)으로 토포사를 삼아 재령군(載寧郡)에 나가 진을 설치하게 하니, 도적은 무리들을 거느리고 구월산으로 들어가, 다만 임꺽정과 절친한 날쌔고 건장한 자만을 데리고 있고 나머지는 모두 분산해 보내어 험악한 곳을 분담하여 차지하여 체포를 방지하는 계책을 하였다.
致勤盛集軍馬, 漸逼于山下, 使一賊不敢下山, 賊之謀主徐林, 知終不免, 遂下山來降, 盡言其虛實情形.
남치근이 군마를 많이 모아 점점 산 밑으로 좁혀들어가 한놈의 도적도 감히 산에서 내려오지 못하게 하니, 도적들의 주모자 서임(徐林)이 결국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드디어 산에서 내려와 투항하여 도적들의 허한 데와 실한 데의 상황을 모두 말하여 주었다.
乃進軍, 搜林敭藪而上, 諸賊皆降, 五六終始相隨, 使徐林往誘之, 旣來, 盡斬之.
이에 군사를 전진시켜 숲과 늪을 뒤지며 올라가니, 모든 적들이 모두 항복하였으나 5~6명은 끝내 임꺽정을 따르므로 서임을 시켜 유인해 오게 하고 오자마자 모두 베어 죽였다.
巨正越壑而逃, 致勤令自黃州至海州, 盡發民丁作人城, 自文化至載寧, 一戶一幕, 箇箇搜探, 賊始計窮, 投入一村家.
꺽정은 골짜기를 넘어 도망하였는데 치근이 황주(黃州)에서 해주까지의 모든 장정들을 동원하여 사람으로 성을 쌓고, 문화(文化)에서 재령(載寧)까지를 한 호(戶), 한 막(幕) 할 것 없이 샅샅이 뒤지게 하니, 꺽정이 비로소 할 수 없게 되어, 한 촌가에 뛰어 들어갔다.
致勤進圍之, 巨正劫其家主老嫗曰; 汝不急呼而出, 則當殺之, 遂呼賊而出門, 則巨正帶弓矢, 爲軍人狀, 拔劍逐其嫗出曰, 賊已走矣, 諸軍不知彼爲賊魁, 一時齊呼走.
치근이 전진하여 포위하니, 꺽정이 그 집 주인 노파를 위협하기를, "네가 급히 외치면서 뛰쳐 나가지 않으면 죽이겠다" 하므로 드디어 노파가 '도적이야' 하고 외치며 문 밖으로 뛰쳐 나가자, 꺽정이 활과 살을 차고 군인차림으로 칼을 빼어 들고 그 노파를 쫓아오며, "도적은 벌써 달아났다"고 하니, 군인들이 그가 도적의 괴수임을 알지 못하고 일제히 외치며 뛰어갔다.
擾攘喧聒之中, 已扶下一軍士, 而奪其騎馬, 馳入衆中, 亦不知何人奪去也.
그러는 북새통에 한 군사를 끌고 내려가 그가 탄 말을 빼앗아 타고 군중 속으로 달려 들어가니, 역시 누가 빼앗아갔는지 몰랐다.
俄有一人, 徐出陣向山後去曰; 卒病欲臥治. 一人曰; 安可離陣一步, 此可疑. 五六騎追之, 徐林遙呼曰; 賊也. 亂箭射之, 創甚.
이윽고 한 사람이 천천히 진중에서 나와 산 뒤를 향하여 가면서, "갑자기 아프니 좀 누워서 치료해야겠다" 하자,
다른 한 사람이, "어찌 한 걸음이라도 진을 떠난단 말인가? 이놈이 의심스럽다" 하고, 5~6명의 말탄 군사가 그를 추격하였는데, 서임이 멀리서, "도적이다" 외치며, 마구 활을 쏘아대니 상처가 심했다.
乃曰; 吾之此計, 皆徐林所爲也. 徐林徐林, 終能投順乎. 蓋憤其先投降, 欲以見戮也.
그제야,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모두 서임의 행위 때문이다. 서임아, 서임아, 끝내 투항할 수가 있느냐" 하였다. 이것은 그가 먼저 투항하여 죽임을 당하게 한 것을 분하게 여긴 것이다.
賊發三年, 五官見殘, 官軍敗潰, 動數道之兵, 僅能捕一賊, 而良民死者, 罔有紀極, 其時軍政之玩愒, 良可嘆也.
도적들이 발동하게 된 3년 동안에 다섯 고을이 피폐해지고 관군이 패하여 분산되었으며, 여러 도(道)의 병력을 동원하여 겨우 한 명의 도적을 잡았는데, 죽은 양민은 한이 없었으니, 그 당시 군정의 해이됨이 참으로 개탄스러울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