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학생이 되어
퇴직하고 맞은 첫해였던 재작년 봄은 코로나로 움츠렸던 세상이 조금씩 기지개를 켜던 때였다. 물리적인 공간의 거리두기는 물론 사람 사이 마음의 거리두기도 조금씩 풀려가는 즈음이었다. 겨울방학에 듦과 동시에 퇴직으로 이어져 신학기를 맞아 자연인이 되었다. 그간 이중 신분이었는데, 이제 가르치는 직은 내려놓고 학생으로 돌아가 본연의 임무에 최선을 다하려 마음먹었다.
퇴직 이전 생활이 주중 평일은 아이들 앞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교사였다. 주말 이틀과 방학이면 산과 들에서 자연과 교감하거나 도서관에서 한 수 배우는 학생이었다. 철 따라 피고 지는 야생화를 탐방하고 지명에 얽힌 유래를 찾아내 글로 남겼다. 궂은 날씨이거나 너무 춥거나 더우면 도서관을 찾아 책을 펼쳐 읽었다. 퇴직과 동시 이중 신분에서 벗어나 학생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평생토록 직장에 얽매여 집안일 돌보기가 미흡했고 세상사에 어두웠다. 퇴직 후 거소를 옮기는 전원생활은 언감생심이고 번듯한 동네로 이사 갈 여건이 되지 못했다. 낡고 좁은 아파트라도 리모델링을 해 살아야 해, 시공자에 의뢰해 한 달 걸려 수리를 마쳤다. 삐꺽거리는 장롱이나 서가는 정리하고 세간과 책은 묶어 아파트 비상계단에 두고 원룸으로 나가 잠시 머물다 돌아왔다.
내가 퇴직하기를 기다렸다는 듯 문학 동아리 회원 몇이 혼자 걷는 길에 동행해 함께 나서고 싶다는 제의가 와 거절하지 못했다. 주말이나 방학이면 근교 산행이나 산책으로 자연과 교감하며 보냄을 아는 이들이었다. 한 달 한 번이라도 길동무 되어준 동반자로 삼아 자연스레 어울렸다. 그들과 강가나 산기슭을 누비는 창원 근교 탐방으로 철 따라 바뀌는 풍광을 같이 완상했다.
퇴직 첫해 늦은 봄에 지기가 소개한 텃밭을 한시적으로 경작하기도 했다. 비음산을 돌아가는 25호 국도 아래 창원축구센터 곁 시청공한지에서 농사를 짓던 분이 연로해 묵혀둔 밭뙈기였다. 나는 성장기를 시골에서 보냈고 교직 수행 중에도 꽃을 가꾸어봐 텃밭 경작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잡초를 뽑고 검불을 걷어내 씨앗과 모종을 심어 농사지은 푸성귀는 이웃과도 나누었다.
고향을 지키고 계신 큰형님이 남긴 한문 문장과 칠언절구 한시들은 퇴직 직전 거제에서 틈틈이 워드 작업을 마쳐 놓았더랬다. 문집을 출간할 출판사로 입력 자료를 넘겨 교정지를 받아 형님댁을 몇 차례 찾아 상의해 문맥을 다듬고 오류를 바로잡아 ‘운강산고’를 펴냈다. 밑으로 아우들에게 배움 기회를 넘겨 초등학교가 최종 학력인 큰형님에 진 마음의 빚을 조금이나마 갚았다.
우리 집안은 코로나와 무관하게 선대 산소를 한 곳 모아 제사를 통합해 시제로 지낼 구상을 했다. 벌초 번거로움을 줄이고 제사 절차를 간소화하기 위함이다. 코로나 와중 큰형님은 일꾼을 데려 산소를 이장하고 자손들이 함께한 시제는 재작년 봄부터 시작했다. 가을에 기존 윗대 조상 시제는 그대로 유지된 채 고조부터 부모님의 기제를 한꺼번 조상 숭모 날을 정해 시제로 모셨다.
우리 집은 7남매인데 형님이 네 분이고 아래로 여동생이 둘이다. 형수와 매제를 포함하면 14명인데 가족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 첫 나들이가 재작년 5월 내가 교직 말년을 머물다 온 거제로 1박 2일 미니버스로 떠나 맛집에서 식도락을 즐기고 남녘 해안 풍광을 조망하는 시간을 함께 보냈다. 모처럼 고향 집이 아닌 아늑한 호텔에서 형제가 얘기꽃을 피우다 나란히 잠을 잤다.
내가 졸업한 초등학교는 진작 폐교되어도 친구들은 끈끈한 우정을 이어온다. 코로나로 몇 해 못 만났지만 펜데믹이 해제되어 봄이면 고향에서 총동창회가 열리고 가을에는 동기들이 전세버스로 소풍을 다녀온다. 작년 가을 반가운 남녀 얼굴들은 서해안 무안 천사대교와 목포 유달산을 찾았다. 창원권에 사는 14명은 겨울이 오기 전 베트남 남부 달랏과 나트랑으로 바깥바람도 쐬었다. 24.09.17<끝이 어딘지 모를 여정 따라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