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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자(追跡者)-24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천천히 내가 하는 말을 음미하고 있었다. 나도 그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천천히 말하였다. 또박 또박. 정확한 발음으로. 그리고 나는 기다렸다. 그의 입이 열리기를. 나는 기다릴 수 있어야 했다.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었다. 기다림은 일급 내공에 속한다. 나는 그 과정을 일찍이 마스터하였다. 기다림의 달인이었다. 5 분. 10 분. 20 분. 나는 기다렸다. 지금의 그 분 들은 시간 이상으로 길었다. 그러나 기다렸다. 25 분. 30분. 참으로 긴 시간이었다. 드디어 그가 입을열었다.
“내 아버지 듀발리에 홀스는 1917 년 러시아제국을 멸망시킨 사회주의 혁명군에 대하여 1918 년 황제 옹립의 기치를 내걸고 시베리아 움스크에 반혁명정부를 세워 맞선 콜차크 제독의 심복 장교였오. 콜차크 제독은 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 세가 준 군자금 중 금괴 80 톤과 1-10 캐럿 다이아몬드가 든 상자를 야쿠츠크(yakutsk)에서 모스크바 동북쪽 시베리아 움스크까지 무사히 운반하여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맡은 부대의 지휘자였오. 혁명군이 시베리아 철도를 장악하자 그들은 바이칼 호를 건너야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을 택했오. 바이칼 호의 얼음 두께는 3 미터 정도였고, 그들은 근 400 킬로미터가 되는 호수를 건너기 시작했오. 3 월의 추위는 영하 30-40 도 였소. 절반도 못 가서 그 부대의 3 분의 2 가 동사하였오. 그 와중에 모스크바의 첩자로부터 콜차크 제독의 사망 소식을 들었소. 듀발리에는 살아있는 부하 중 몇 몇 부하만 대동한 채 움스크로 가지 않고 다시 러시아로 돌아갔오. 금괴 등 마차에 실었던 운반물을 그대로 두고 떠났오. 그러나 그의 수중에는 다이아몬드가 있었오. 그는 1923 년 People's Commissariat for State Security (NKGB)를 창설하여 위원장이 되었오. 그 후 1930 년에 캐나다로 이민하였으며, 헬리팩스에 도착 후 퀘벡을 거쳐 토론토에 최종 정착하였오. 듀발리에가 소지했던 다이아몬드는 리콜라이2 세가 하사한 군자금 중 일부였소. 그 후 1954 년 KGB 가 정식 창설되었을 때 부친인 듀발리에는 종적을 감추었소. 여기까지가 내가 내 아버지 듀발리에 홀스 즉 발리듀에 스탁톤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이요.”
놀라웠다. 1917 년에서 부터 추적이 시작되었어야 하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이런 놀라운 비밀이박인혜에게 스며 들었단 말인가.
“듀발리에는 발리듀에 스탁톤이라는 가명을 쓰기 시작하였고, 운전면허증. 은행수표 거래 등을 전혀하지 않은 채 현금으로만 생활하였오. 당신도 역시 홀스 스탁톤이라는 가명으로 생활하였고 운전면허 크래딧카드 은행거래 등 당신의 본명이 나타날 모든 증서와 서류를 일체 거절하였오. 모든 생활을 현금으로 하면서 존재하지 않은 채 존재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 현금은 당신의 아버지가 죽기 전에 다이아몬드를 처분한 것으로 당신이 그 돈들을 계속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당신의 아버지가 유언으로 말했습니다. 모든 것을 현금으로 사용하라고. 그럼 그 다이아몬드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동안 당신의 부친과 당신은 가명 위에 현금을 사용하면서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잘 지냈습니다. 당신의 부친은 계속 현금으로만 사용할것을 일찍부터 당신에게 가르쳐주었고. 그런데 뜻하지 않았던 마미의 발견이 활자화되면서 그 집이 관심으로 부상하였고 어렴풋이 느꼈던 구 KGB 들에 대한 두려움이 시작되었습니다. 당신은 모든 것을 잊고 편안하게 죽고 싶었을 겁니다. 당신은 모르고 있겠지만, 제정 러시아 시절 학대받은 유대인 정교인들이 설립한 칼림교의 최고 위원들 중 일부가 그 비밀을 알고 추적하고 있습니다.”
그는 놀라워하고 두려워하는 빛이 역력하였다. 차라리 몰랐으면 하고 바랄 수도 있었겠지만,
운명이란 그렇게 누구는 짚어 드러내고 누구는 묻어두고 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죽기 전에
결자 해지를 하여야 한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것이 그를 위한 방법일 수도 있을 것이다. 당연히 나는 알아내어야 하고.
“홀스 스탁톤씨! 이곳에 오기 전, 지금까지 20948 에서만 살아왔습니까? 아니면 다른 곳에서 산 적이 있습니까? 기억을 잘 더듬어서 분명하게 말해 주십시오.”
그는 고개를 들어 창밖 먼 하늘을 바라보며 한참을 생각하였다.
“오래된 이야기지만, 꼭 한번 발리듀에 스탁톤 내 아버님께서 어느 해 여름 두 달 정도 다른 곳에서 생활한 적이 있었소.”
“그곳이 어딘지 기억하십니까?”
“그때는 그렇게 중요하다고는 생각지 않아서 잊어버렸지만, 아마도 20948 의 담장 안이었던 걸로 기억하오.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소만.”
“집 뒤편에 있는 창고 같은 가 건물을 말합니까?”
“그때는 그곳이 사람이 살 수 있는 집이었다오.일 층과 지하실이 있었고 화장실도 있었다오. 그 작은 집 곁에는 캐네디언 파인 트리 3 그루가 높이 자라고 있어서 부친께서는 간혹 그 나무 아래에서 자리를 깔고 낮잠도 즐기셨지요. 언제인가 그 나무도 다 잘렸고, 그 집도 더 이상 손을 보지 않고 부친께서 창고로 사용하며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지요. 나도 관심이 없어 그곳에는 들어가지 않았소.”
“그때가 언제인지 기억해 보십시오.”
그는 곤혹스러워하였다. 나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며 그 창고 같은 집이 내가 잠시 머물렀던 그 간이 하우스였음을 생각했다. 4 평 남짓한 크기 였으며, 정면에 파인 트리의 Plank of wood(나무판자)로 만든 문이 있었고, 문을 열고 들어서면 우측 벽으로 일인용 침대가 있었다. 왼쪽으로는 손을 씻을 수 있는 싱크대가 놓여 있었다. 침대 머리 쪽 편으로는 약1.5m 의 공간이 있었는데, 크기가 다른 각종 의 Plank of wood 들이 쌓여 있었다. 잔디 깎는 기계 부품들도 있었고 눈 치우는 기계의 부품들도 녹슨 채 얼기 설기 모여 있었다. 특별히 관심 갈 곳은 없었다.
에드네가 이사한 후 아직 그곳은 손을 대지 않았기에 그대로 인 채 내가 며칠 기거했었던 곳이다. 그가 입을 열었다.
“아마도 제니가 없어진 후로 기억되오. 때론 혼자서 괴로운 삶을 달래듯 담배를 피우시곤 하였소. 내가 집에 돌아왔을 때 계시지 않으면, 그곳에 가서 문을 열었소. 그때 아버님은 그곳에 계셨으며 의자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소. 그때는 기척없이 문을 열었다고 화를 내기도 하였지요. 내가 기억하는 것은 그것이 다요. 그렇게 관심을 가지도록 하지 않았기 때문이요.”
그는 말을 마치자 기억의 잔인함에 치를 떨듯 몸을 추스렀다.
“제니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짐작은 하고 있습니다만, 직접 듣고 싶습니다. 내가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자면 솔직히 말해주셔야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솔직히. 내가 당신을 돕자면, 당신은 처음에 모든 것을 밝히겠다고 하였습니다.”
허리를 바로 세운 채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그의 심중이 흐트러져 있음을 놓쳐서는 안되었다. 육군 정보요원 시절 터득한 심문방법이었다. 듣기 위해서는 말해야 하는 이유를 알려 주어야 했다.
“제니에 대해서는 나도 모릅니다. 내가 모르는 일도 있다고 하였잖습니까.”
그는 당황하였다. 뭔가 쉽게 말하지 못하는 부분들이 있었다. 직감이다.
“지금 마미는 DNA 검사를 받고 있습니다. 당신의 DNA 검사를 위한 쌤플도 확보해 두었습니다. 짐작한 대로 라면… 당신의 건강상태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으로 부터 직접 듣고 싶습니다. 내가 당신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는 당신이 말해야 합니다.”
“어떻게 당신이 나를 도울 수 있겠소. 당신은 경찰이 아니라 하였잖오. 변호사도 아니요. 겨우 사립탐정이잖오. 그런데 어떻게 나를 돕겠단 말이오.”
그는 흔들리고 있었다. 말할 수 없는어떤 것에 대하여 두려워하고 있었다.
“홀스 스탁톤. 사르지에 홀스씨. 당신은 박인혜를 두 번 죽이려는 겁니까? DNA 검사로 인하여 당신의 마지막 삶을 피 토하는 후회와 죄책감에 사로잡혀 두려움에 떨며 마감하기를 원합니까? 당신의 무엇을 선택하려합니까? 끝내 밝은 햇살에 나오지 못하고 죽으려 합니까? 아니면 죽기 전에 최후의 햇살을 받고 싶습니까? 선택은 당신이 하셔야 합니다.”
“정말 나는 모르오. 마미는 내 아이로 짐작되지만, 제니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당신은 제니를 강간하였소. 제니는 양반댁 규수였소. 결코, 당신 같은 사람에게 문을 열
이유가 없었을 겁니다. 당신이 강제로 문을 연 겁니다. 맞지요?”
그는 고개를 숙였다. 눈가에 눈물이어렸다.
“레드 플라워에 대해서는 알고 계시겠지요?”
그는 젖은 눈으로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놀람과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나는 기다렸다. 본질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나는 일개 사립탐정이다. 더 깊이 파고들어야 할 이유도 없거니와 그렇게 움직여서도 안 됨을 알고 있다. 그러나 흔들리고 있음도 그에게 비춰서는 안 됨을 알고있다.
“내가 당신에게 말한 것 이상으로 그들은 알지 못하고 있소.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소. 명심하시오. 제니가 알고있소. 그들이 원하는 것을.”
“제니는 없잖습니까? 그녀는 죽었잖습니까?”
나는 격정이 끓어 오르는 것을 참아 내어야 했다.이유를 알 수 없이 눈가가 젖었다.
“그렇소. 제니는 죽었소. 그러나 제니는 비밀을 가진 채 죽어 있소. 이제 내가 염치없이 바라건대, 제니를 찾아주시오.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소. 제니에게 내가 죽기 전에 용서를 빌고 싶은 마음뿐이요.”
그의 눈을 봤다. 젖어 있는 그의 눈에서 진실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천천히 얼굴을 들고 창을 통해 어두워지고 있는 남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의 프로파일에서 의외로 많은 비밀을 간직한 채 살아 온 한 인간의 후회와 수심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면으로 된 타올 윗옷 왼쪽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눈물 가득한 눈가를 닦았다.
“그러나 나는 제니를 죽이지 않았소. 제니는 죽은 걸로 믿고 있습니다. 나는 제니를 죽이지
않았는데도… 이 점이 평생 나를 따라다니며 괴롭혀 온 것이오. 내가 내 아이를 죽였습니다. 아직 이름도 지어주지 못한 내 아이를…너무 어려 그렇게 할 정신적 내공이 쌓이지 않았었지요. 오직 두려움만 있었습니다. 내가 감당할 준비도 감당할 능력도 없이 한 생명이 나를 아버지라 불러야 하며 태어났던 게요. 듀발리에 홀스 즉 듀발리에 스탁톤은 아이를 굉장히 귀여워하였습니다. 그럴수록나는 아이를 없애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나를 구제하는 길이라 생각하였던 것이지요.”
말을 마친 그의 얼굴은 극도의 분노와 후회로 벌겋게 얼굴이 달아오르고 흥분이 점차 고조되었다. 그는 내면의 어떤 것과 싸우고 있었다. 나는 기다렸다. 그는 싸우고 있었다. 나는 기다렸다.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한참 자신과 싸우고 있었다. 내가 할 일은 없었다. 다만, 기다렸다. 그것이 그와의 싸움이라면 나는 이겨야 했다. 그래서 나는 기다렸다. 역시 기다렸다. 주변은 침묵만 있었고 누구 하나 우리의 싸움에 끼어들려고 하지는 않았다. 나는 두 손을 깍지 낀 채 탁자 위에 올려놓고 턱을 괴고 있었다. 눈은 그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그의 가슴은 흥분으로 출렁이었다. 얼굴을 가린 두 손의 손가락 사이로 눈물이 베어 흘러내렸다. 나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숨도 함부로 쉬지 않았다. 있어도 없었다. 그는 혼자가 두렵고 견디기 힘들 것이다. 나는 그의 앞에 앉아 있었지만, 없었다. 숨소리도 죽였다. 눈동자도 굴리지 않았다. 감지도 않았다. 없는 채 기다렸다. 그에게 눈을 돌리지 않고 기다렸고 또 기다렸다.
“나에게 어떤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당신에게 고백하겠소.”
그는 두 손을 내렸다가 오른손에 손수건을 다시 집어들고 눈가를 훔치며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나는 기다렸다. 처음 그 자세로. 그는 나를 흘낏 보고는 다시 한숨을 지었다.
“사람은 사람을 만나서 잠깐 같이 앉아 있어보면, 상대를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느낌이지요. 살아온 내공에 의한 느낌으로 그 사람을 신뢰하느냐 마느냐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나는 자세를 풀었다. 허리를 바로 하고 두 손을 탁자에 올려놓았다. 두 손을 탁자에 올려놓아
공개한다는 것은 서로 잘 알지 못하는 상대에게 공격에 대한 어떠한 불안도 주지않음을 뜻하고
상황에 따라서는 가장 공격하기 좋은 자세이었다. 가령, 상대가 공격을 하려 할 때 먼저 상대의 두 눈을 찌르며 공격할 수 있고, 탁자에 힘주어 몸을 튕겨 일어서며 상대의 얼굴을 가격할 수 있다. 공격전에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자세이며 이것은 짐승과 같은 본능적 순발력으로 무장된 사람에게 한하는 행동이다. 오픈되어 가장 상대를 안심하게 할 수 있으나 가장 방어를 완벽하게 할 수 있는 자세이다. 나는 그런 자세로 그를 바라보았다. 무심한 눈동자였지만, 그의 눈을 읽고 있었다.
“이제 나는 알다시피 얼마 살지는 못합니다. 가슴속에 납덩이 같은 무거운 업보를 진 채 죽기는 참 힘듭니다. 나는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까르마(Karma)를 인정합니다. Destiny. 당신을 만난 것이 내 운명입니다. 나는 운명을 받아 들였습니다. 지금부터 내 운명이 나를 또 어떻게 이끌어 마지막을 맞게 할지는 모르겠지만, 당신과의 만남을 운명으로 받아들였듯이 나의 죄를 들어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