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제복 / 이시영
양지다방에서 내려다보면 구례읍 로타리의 교통순경은
늘 그 사람이었다. 푸른색 상의에 남색 바지, 가슴과 등에
X자로 흘러내리는 흰색 벨트를 메고 챙이 짧은 경찰모에
어깨에 잎사귀 견장을 붙인 그가 원통형의 교통지휘대에
올라서서 멋진 수신호와 함께 다람쥐처럼 은빛 호각을
불어제끼면 구례읍으로 들어오는 모든 차들은 일단 멈춤을
했다가 그의 손길이 머무는 곳으로 움직였다. 하루에
대여섯 차례씩 들락거리는 광주발 부산행 시외버스나
순천발 남원행 완행버스가 전부이긴 했으나 아침 햇살을
등에 받으며 로터리를 지나 읍내 중학교로 등교할 때마다
우리는 고동색 경찰서 정문을 배경으로 들려오는 그의
간단없는 호각소리에 깜짝깜짝 놀라며 걸음을 빨리 하곤
하였으니, 키가 작달만하고 박정희처럼 뒤꼭지가 툭 튀어나온
그가 거기 서 있다는 것만으로도 장날의 우마차꾼들이나
지게꾼들에겐 큰 위협이었을 것이다. 하루는 어느 나뭇꾼이
마른 장작짐을 지고 북문 쪽으로 길을 건너다 호각소리에
혼비백산하는 것을 보았고 송아지를 달고 나온 농부의
착한 소가 놀라서 아스팔트 위에 푸른 똥을 싸는 것을 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모든 질주하는 것들의 안내자이자
길의 활달한 통제사. 로터리의 한쪽은 군청과 병원이고
다른 쪽은 학교였는데 어쩌다 하교길에 교통 지휘대에 선
그가 안 보이면 읍내 거리가 일시에 통제기능을 잃고
비틀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20년 뒤 정년퇴직할 때까지
그는 그렇게 오랫동안 구례읍의 푸른 근대의 상징이자
뒤꼭지가 툭 튀어나온 권력의 작은 집행자. 그의 호각소리가
등뒤에서 들리지 않는 날이면 사나운 개들도 무척 심심해
하였다.
- 이시영 시집 <은빛 호각> 2003
[출처] 이시영 시인 11|작성자 동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