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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8월 12일 연중 제19주간 월요일
제1독서 : 신명 10,12-22
복 음 : 마태 17,22-27
제자들이
22 갈릴래아에 모여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23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몹시 슬퍼하였다.
24 그들이 가파르나움으로 갔을 때, 성전세를 거두는 이들이 베드로에게 다가와,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세를 내지 않으십니까?”하고 물었다.
25 베드로가 “내십니다.”하고는 집에 들어갔더니 예수님께서 먼저,
“시몬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서 관세나 세금을 거두느냐?
자기 자녀들에게서냐, 아니면 남들에게서냐?”하고 물으셨다.
26 베드로가 “남들에게서입니다.”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그렇다면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
27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호수에 가서 낚시는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
하느님 중심의 찬미와 감사의 삶
-무지로부터의 해방-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어제는 참 행복한 하루의 출발이었습니다.
7.21일 “백합꽃 아침인사 받으세요!“ 꽃 인사드린 후,
거의 20일 만에 참 많은 분들에게 새벽노을 선물을 카톡으로 전송했습니다.
새벽 기도하며 산책 중 동녘 하늘의 새벽노을이 참 아름답고 신비로워 휴대폰에 담았고,
그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사진을 참 많은 분들에게 전송했습니다.
“사랑의 새벽노을 축복 인사 받으세요!”
강론을 써서 올린 후 즉시 작심한 후 약 2시간에 걸쳐 새벽노을 사진과 함께
위 사랑의 마음 가득 담아 축복인사를 전송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처럼 아름다운 새벽노을로 표현됩니다.
사랑하면 예뻐진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하느님이 아니곤 이런 아름다움을 창조할 수 있는 분은 없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은 아름다움이십니다.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하느님 추구는 바로 아름다움 추구와 직결됩니다.
역시 많은 분들로부터 답글과 함께 아름다운 사진도 받았습니다.
-“정말 아름답네요. 영안으로 구도를 잡고 찍은 거라 완성된 작품이예요.
좋은 선물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름다움을 보실줄 하는 시선은 어떤 장소에서든 빛이 납니다.
오늘 날씨를 생각하다 붉은 색마저 이 더위에 사랑스럽습니다. 고맙습니다.”-
-“이 자연을 창조하신 하느님도,
풍경을 아름답게 찍으신 프란치스코 신부님도 모두 예술가이십니다. 감사합니다.”-
받은 댓글들입니다. 모두가 공통적으로 하느님께 받은 선물이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입니다.
그러고 보니 하느님은 최고의 예술가라 할 수 있습니다.
또 어제 어느 분과 상담 고백 중 나눈 대화일부도 나누고 싶습니다.
형제님은 우선 깨달음에 대해 물었고, 다음은 자녀 교육 문제에 대해 물었습니다.
“우리의 깨달음은 하느님과 나를 아는 깨달음입니다.
단번의 깨달음이 아니라 평생 하느님과 나를 알아가는 깨달음의 여정 중에 있습니다.
하느님 은총과 우리의 노력 중에 깨달아 가면서 겸손과 온유, 지혜와 자비의 참사람이 되어 갑니다.
하여 부단한 기도와 말씀 공부는 깨달음을 위한 필수 전제 조건입니다.
이렇게 부단한 깨달음의 여정을 통해 우리의 진짜 적인 무지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요지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새삼 무지가 모든 인간 불행의 근원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 평생공부가 무지로부터의 해방을 위해 하느님과 나를 알아가는 깨달음의 공부라 할 수 있습니다.
이어 자녀 교육에 대한 조언도 드렸습니다.
“자녀 역시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하십시오.
끝까지 기다리며 자녀들의 말을 경청하며 이해하고 소통하도록 노력하십시오.
자녀들 나름대로 겪는 고통도 많을 것입니다.”
잘 귀 기울여 공경하는 마음으로 듣는 ‘경청(敬聽, 敬聽)’,
또한 우리의 신앙생활과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침묵-경청-겸손-순종이 하나로 이어질 때 성공적 영성생활입니다.
참으로 진지하고 항구한 하느님 탐구가 근원적 해결책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께 대한 갈망과 배움에 대한 사랑은 함께 갑니다.
참 행복도 하느님을 알고 나는 알아가는 배움과 깨달음의 과정 중 선물로 주어집니다.
오늘 복음에 대한 답은 제1독서 신명기가 줍니다. 모세가 소개하는 하느님입니다.
“보라, 하늘과 하늘 위의 하늘, 그리고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주 너희 하느님의 것이다.---
주 너희 하느님은 신들의 신이시고 주님들의 주님이시며,
사람을 차별 대우하지 않으시고 뇌물을 받지 않으시는 위대하고 힘세며 경외로우신 하느님이시다.
그분은 고아와 과부의 권리를 되찾아 주시고, 이방인을 사랑하시어 그에게 음식과 옷을 주시는 분이시다.”
바로 우리의 하느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참으로 이런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아갈 때
우리도 하느님을 닮아가며 참 사람이 되고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주님을 닮아가며 참 사람이 내가 되어 갑니까?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하느님 없이는 내가 누구인지 알 길이 없고 무지로부터 해방되어 참 사람인 내가 될 길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모세가 명쾌하게 밝혀 줍니다.
“주 너희 하느님을 경외하고(fear), 그분의 모든 길을 걸으며(follow),
그분을 사랑하고(love),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섬기는 것(serve),
그리고 너희가 잘 되도록 오늘 내가 명령하는 주님의 계명과 규정들을 지키는 것이다(keep).”
모든 명령이 실행의 동사입니다.
이런 하느님을 떠나 내 중심의 탐욕의 삶을 살기에 그토록 불행하고 힘든 삶입니다.
참으로 근원적 해결책은, 참 행복의 비결은 끊임없는 회개의 실천을 통해
하느님 중심의 삶을 회복하는데 있습니다.
마음에 할례를 받고 더 이상 목을 뻣뻣하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여 평생, 매일, 끊임없이 하느님 중심의 삶을 늘 새롭게 하고자
시편성무일도와 미사의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기도를 바치는 우리 수도승들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의 참 모범은, 우리의 영원한 롤모델은 오늘 복음의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의 2차 수난과 부활 예고후에 제자들은 몹시 슬퍼합니다.
바로 무지로 인한 슬픔임을 깨닫습니다.
죽음과 부활의 파스카 신비의 구원을 깨달았더라면 슬퍼하기는커녕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무지로부터 해방에 이르는 잠정적 과정의 슬픔임을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장면은 완전 기분 전환용처럼 느껴집니다.
예수님의 분별의 지혜가 돋보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 때 선물처럼 주어지는 분별의 지혜입니다.
성전세 납부는 하느님 자녀들에게는 해당되지 않지만 스캔들이 되지 않기 위해 바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에게 주어라.”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일 때 예수님처럼 이런 지혜와 여유요 너그러움입니다.
예기치 못한 삶의 기적입니다.
우리 파스카의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주님이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예화입니다.
인간 무지에 대한 답은 하느님뿐입니다. 무지의 어둠을 밝혀주는 말씀의 빛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회개한 우리 모두를 점차 무지로부터 해방시켜 주시고,
날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해주십니다.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서울에서 강의를 마치고 식사를 하러 어느 분식점에 들어갔습니다.
자리는 많이 비어 있지만 치우지 않은 그릇들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어서 어디에 앉아야 할지를 모르겠더군요.
더군다나 손님이 왔는데도 반기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직원이 하나도 없습니다.
주인으로 보이는 분께서 주방에서 열심히 음식을 만들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냥 ‘다른 곳으로 갈까?’라는 생각도 했지만, 강의를 마친 뒤라서 여유도 있었기에
‘곧 치워주겠지’ 하면서 자리에 앉았습니다.
적지 않은 손님들이 있었음에도 혼자 운영하는 모습이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우선 제자리에 놓여 있던 그릇을 정리해서 주인아주머니께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이때 음식을 주문했지요.
알고 보니 함께 일하던 분이 급하게 일이 생겨서 혼자서 하고 있는데,
오늘따라 손님이 끊이지 않고 와서 이렇게 바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미안하다며 연신 사과를 하시더군요.
저는 “바쁘면 서로 도와야지요.”라면서 미안해하실 필요 없다고 했습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 주문한 음식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서비스라고 하면서 떡볶이 한 접시까지 주시는 것이 아닙니까?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만약에 주문을 받지 않는다고, 음식이 늦게 나온다면서 화를 냈다면 어떠했을까요?
우선 기분 좋게 식사를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여기에 서비스는 전혀 기대할 수도 없겠지요.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왜 이 일을 하지 않는 거야?’라면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자신이 하면 왜 안 될까요?
그러한 모범을 통해 더 많은 사람이 만족스러운 상황에 설 수 있게 됩니다.
성전 세를 거두는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 세를 내지 않으십니까?”라고 묻습니다.
이 성전 세, 반 스타테르는 부자와 가난한 이를 막론하고 영혼과 육신의 구원을 위해
성전을 드나드는 이는 누구나 내야 한다고 율법이 규정한 액수였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굳이 내실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가 없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성전은 또한 하느님의 집, 그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집이라고도 말할 수 있기에
굳이 성전 세를 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원리 원칙을 따지지 않으며, 당신 집에 대한 당신의 특권을 내세우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매우 신중하게 물의를 일으키지 않고 필요한 세금을 마련하시려고 당신의 능력을 이용하십니다.
주님께서도 원리 원칙을 따지지도 않고 또한 자신에게 주어진 특권을 드러내지도 않습니다.
이 모범을 우리도 따라야 합니다.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 나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희생과 나눔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적절한 순서와 아량
반영억 라파엘 신부
“똥이 무서워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행동이 좋지 않은 사람은 서로 상종할 수 없으니 이쪽에서 삼가서 피하라는 뜻입니다.
물론 “전혀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나쁜 사람도 없고, 완벽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삶의 지혜가 필요하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상대가 되지 않으면 때로는 기다려야 하는 아량이 필요한 것입니다.
성전세를 거두는 이가 베드로에게 다가와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세를 내지 않으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세금은 로마 총독이 로마제국을 위해 거둬들이던 세금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자체적으로 징수하던 인두세였습니다.
스무 살 이상 성인 유다인 남자라면 누구나 해마다 영혼의 속죄를 위해서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입니다.
사실 세상의 임금들은 관세나 인두세를 남에게서 받아내지 자기 가족에게 부여하지는 않는 법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님께서 세금을 내셔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성전의 참 주인이시며 “성전보다 더 큰 분”(마태12,6)이시기 때문에
당연히 속죄 받을 필요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전세도 바치셨습니다(마태17,27).
성전의 참 주인이신 분께서 성전세를 내신 까닭이 어디 있을까요?
그야말로 요즘 표현으로 스캔들이 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 세금을 바치십니다.
그런데 예기치 않았던 돈으로 성전 세를 내십니다.
호수의 고기를 잡아 그 입안에 있던 돈으로 베드로의 몫과 주님의 몫으로 주도록 함으로써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신다.’는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시며 우리의 구원자이시라는 모습에는 손상을 입지 않으시면서,
하느님께는 영광이 드려지며 인간의 비위는 조금도 건드리지 않는 모습에 참 지혜를 만날 수 있습니다.
마음이 꼬인 사람에게는 우선은 한발 물러서는 것이 좋습니다.
원리(原理)는 소중합니다. 그러나 실천하며 살아가는 데는 적절한 순서와 아량이 필요합니다.
오늘 하루, 우리의 마음을 어디에 두고 살아야 할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일상 안에서 많은 일들을 접하면서 그때 마다 다른 사람에게
걸림돌이 되고 있지 않은지 신중히 고려해야 할 상황들이 있습니다.
아주 분명하고 명확하게 말하거나 일관되게 행동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그릇이 되지 않는데 시간을 허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더욱 비굴하게 물러서는 것 같이 보이는 때 정말 참 지혜가 필요함을 절감합니다.
때로는 비유를 들고, 때로는 비유를 해설해 주시던 예수님,
손가락에 침을 발라 눈을 닦아주시고, 귀 구멍을 열어주시던 예수님,
일어서라고 하시며 손을 잡아주시던 예수님,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리라 하시던
사랑의 예수님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내 생각을 앞세우지 않고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넉넉한 마음으로 지혜를 갈망하는 날 될 수 있길 희망하며
눈높이를 맞춰가는 가운데 기쁨과 평화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혼자 가면 빨리 가고 같이 가면 멀리 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산행 첫날 빨리 가고 싶은 마음에 먼저 길을 나섰습니다.
그러나 길을 제대로 찾지 못했고, 기다리는 일행과 합류해야 했습니다.
혼자 가는 것보다는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일행 16명 중에서 4명이 남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산장에 자리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4명이 자원했습니다.
나중에 다시 합류하였지만, 기꺼이 희생하였던 분들이 있었기에 산행은 즐거웠습니다.
산행은 많이 불편하고, 많이 힘이 듭니다. 그러나 산행은 도시에서 볼 수 없었던 것을 보여 줍니다.
작은 꽃, 흘러가는 구름, 넉넉한 산, 가끔 내리는 비, 모든 것이 새롭습니다.
또한, 산행은 느림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 줍니다.
오늘 제1 독서인 신명기는 우리가 함께 가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느냐?
그것은 주 너희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모든 길을 따라 걸으며 그분을 사랑하고,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섬기는 것,
그리고 너희가 잘되도록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님의 계명과 규정을 지키는 것이다.
그분은 고아와 과부의 권리를 되찾아 주시고,
이방인을 사랑하시어 그에게 음식과 옷을 주시는 분이시다.
너희는 이방인을 사랑해야 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다.”
교회의 성직자와 사찰의 스님에게도 세금을 걷는다고 합니다.
가톨릭은 이미 성직자들이 세금을 내고 있습니다.
종교인들이 가난한 모습으로 살았다면,
종교인들이 세상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모습으로 살았다면,
종교인들이 희생과 봉사의 모습으로 살았다면,
종교인들에게 세금을 걷을 것이 거의 없다면 종교인들에 대한 과세를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의 몸이 있는 곳에 나의 마음도 함께 있는 것입니다. 마음과 몸이 따로인 삶은 없습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는 이치입니다.
종교인들의 몸이 어디에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은 굳이 종교인들의 과세를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종교인들의 삶이 그들에게는 등대와 같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하고, 굶주린 이들을 위해서 꽃동네를 세우신 신부님이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꽃동네를 후원합니다. 그런 분에게 과세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마더 테레사 수녀님이 있습니다. 역시 병들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평생을 사셨습니다.
그분에게는 노벨 평화상도 큰 영광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충실하게 사셨을 뿐입니다.
우리 사회에 뜨거운 감동을 주었던 이태석 신부님이 있습니다.
멀리 아프리카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사랑을 전하며, 자신의 생명이 다할 때까지 살았습니다.
그런 분에게 누가 과세를 이야기하겠습니까?
종교인들이 오늘 제1 독서의 가르침대로 산다면
세상 사람들은 종교인들에게서 위로와 기쁨을 얻을 것입니다.
종교인들에게서 희망과 평화를 얻을 것입니다.
그것은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병든 이들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겸손하게 살아가며,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의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사흗날에 되살아 날 것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서 관세나 세금을 거두느냐?(마태 17,25)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가장 가까워야 할
아버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사랑의 관계 안에서
우리가
누군지를 깨닫게 됩니다.
무엇을 해야지만
사랑받는 자녀들이
결코 아닙니다.
모든
순간순간이
은총이며 축복입니다.
생명이라는
불가분의 관계 안에서
뜨거운 감사를 배웁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게 하여 주십니다.
이 모든 것은
아버지 하느님의 것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께
돌려드려야 할
사랑의 시작입니다.
사랑의 근본이
아버지 하느님께
있음을 고백하며
사랑으로 오늘을 살아갑시다.
내가 기분 좋게 끝나려면
전삼용 요셉 신부
안무가 ‘리아 킴’을 들어보셨나요?
요즘 아이들이 제일 되고 싶은 사람이 유튜버라고 합니다.
종전까지는 연예인이었는데 실제적으로 연예인이 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유튜버 중 가장 많은 구독자를 가진 사람이 누굴까요?
바로 안무가 ‘리아 킴’입니다. 그녀가 가진 구독자가 1500만이니 그 수입이 엄청나리라 예상됩니다.
그녀는 자신이 만든 춤을 100만 명이 따라하게 하고 싶은 마음으로 ‘1 Million Dance Studio’를 만들었습니다.
이는 마치 백종원 씨가 자신의 레시피를 모두 유튜브로 공개하는 것과 같은 개념입니다.
어차피 저작권을 인정받지 못할 바에야 그냥 다 공유해버리자는 생각으로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가 유튜브를 통해 자신의 춤 동작들을 나누게 된 것은 근래의 일입니다.
그녀는 그동안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는데 총력을 기울여왔습니다. 능력을 나눌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어렸을 때 왕따를 당하는 소심한 아이였습니다. 전교생으로부터도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그러던 중 중학교 때 마이클 잭슨의 춤을 보고는 춤으로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대학도 포기하고 가장 견디기 힘들다는 스승을 만나 피나는 연습을 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자신의 능력을 만인 앞에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그 결과 그녀는 참가하는 수많은 댄스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여 명실상부 한국 대표 춤꾼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세계 댄스 대회에서 우승을 할 때는 한없이 기뻤습니다.
이어 연예 엔터테인먼트에서 유명한 수많은 아이돌 가수들의 춤 선생으로 활약하였습니다.
그러나 춤으로는 돈을 벌수가 없었습니다.
대회에서 우승해봐야 기쁨이 3일 정도밖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항상 가난하였습니다.
세계에서 제일가는 춤꾼인데도 택시 탈 돈도 없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돈을 벌기 위해 댄스 경연을 하는 TV프로그램에 출연하였는데
자신이 가르친 아이돌들에 의해 심한 모욕적인 판정을 듣기도 하였습니다.
이제 그녀는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는 것에서 벗어나
자신이 만든 춤을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수강료도 매우 싼 댄스 학원을 만들고 그 학원에서 자신이 만든 춤을 유튜브로 공개하여
단 500명이라도 구독해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1500만 명의 한국 최대 채널을 소유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녀가 만족하게 된 계기는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는 것에서부터
이제 자신의 능력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의 전환 때문임을 알게 됩니다.
누군가가 필요로 하는 것을 내어주려 할 때 내가 필요한 것도 얻게 됩니다.
내가 아니라 타인을 기분 좋게 해주려 할 때 나도 기분 좋아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 죽음과 부활에 대해 예고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매우 슬퍼하였다고 말합니다.
제자들이 슬퍼한 이유는 죽음에만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부활은 ‘기쁘려면 먼저 슬퍼야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를 설명해주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카파르나움은 갈릴래아에서 가장 큰 도시였습니다.
거기에서 성전세를 걷는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 세를 내지 않으십니까?”라고 묻습니다.
베드로는 “내십니다.”하고는 집에 들어갑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어찌 아셨는지 세상 임금들이 자녀에게 세금을 걷을 수 없는 것처럼,
하느님도 당신 아들에게 세금을 걷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성전은 하느님 아버지의 집이고 그 아들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성전세를 내실 필요가 없는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
예수님 말씀대로 물고기를 잡았는데 그 입에서 돈이 나와
그것으로 성전세를 내게 되면 베드로는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요?
그러나 그렇게 순종하기까지는 ‘왜 안 내도 되는데, 자꾸 물고기를 잡아서 입을 벌려보라는 거지?’,
혹은 ‘돈이 있으면 그냥 주시면 되지 왜 물고기 잡는 고생까지 하게 하시지?’라는
불만스런 마음이 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뜻에 순종하고 나니 곧 기쁨이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십니다.
“나의 주님, 나의 주님,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며 십자가에서 부르짖으십니다.
왜 버리셨을까요? 인간을 기분 좋게 하시기 위해 그러셨습니다.
죄책감에 시달리던 인간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보며 이제 주님께 나아가도 된다는 안도감을 얻습니다.
이렇게 누군가를 기분 좋게 하기 위해서는 나는 고통을 받아야합니다.
엄청난 공포와 싸워야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기분 좋게 하고 났더니 부활의 기쁨이 오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이처럼 누군가를 기분 좋게 하기 위해 자신의 기분을 망칠수도 있는 순명의 길로 가지만
결국은 기분이 좋아지는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옳음을 드러내는 것과 상대의 기분을 놓고 볼 때,
대부분은 상대의 기분을 고려하여 옳은 말이라도 침묵하는 편이 낫습니다.
기분을 상하게 하는 말은 곧 자신을 무시하는 말로 듣기에
그런 사람에게는 어떠한 말도 받아들이려하지 않고 오히려 저항하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강의를 하다보면 듣는 분들이 이미 기분을 상하면 아무리 옳은 말을 해 주어도
그 강의는 실패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어머니가 자녀에게 옳은 말을 하지만 기분 나쁘게 할 때는
자녀는 그것을 교훈으로 여기지 않고 ‘잔소리’로 여기고 귀찮아합니다.
기분이 먼저 상하면 아무리 옳은 말을 해 주어도 쓸모없어집니다.
상대의 기분을 잡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내가 옳다고 믿는 말을 사정없이 해 주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이 살려고 하는 행위기 때문에 나중에 죽게 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기분 좋게 끝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이 옳더라도 조금 참고 상대의 기분을 좋게 해 주기 위해 노력한다면
그때는 조금 고통스러울지 몰라도 상대도 기분 좋고, 나도 기분 좋은 결과로 끝나게 됩니다.
이것이 십자가와 부활의 연관관계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 신비를 알려주려 하신 것입니다.
나를 위하는 것으로는 기분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습니다.
다른 이를 기분 좋게 해 줄 때 결국 나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입니다.
주님의 길
이종훈 마카리오 신부
연일 보도되는 일본정부와 극우인사들의 언행들에 언짢고 화난다.
보잘 것 없지만 마음만은 사뭇 간절하게 매일 밤 함께 남북화해와 일치를 위해서 기도하는데
도무지 진전이 없어 보인다.
세상에서 하늘나라의 시민으로 사는 것, 이방인과 나그네처럼 사는 게 쉽지 않다.
세상일에 무관심하게 사는 게 이방인과 나그네로 사는 것은 아닐 텐데.
그렇다고 이도저도 아니고 어정쩡한 마음으로 사는 것은 비겁하다.
득도한 도사가 아니니 모든 것을 초월해 살 수도 없다. 마음이 어수선하고 가끔은 조급해진다.
성전세를 바치라는 요구에 예수님은 원칙을 고수하지 않고
간단하게 처리하셔서 더 이상 시끄럽지 않게 하셨다.(마태 17,27)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문제도 그렇게 처리하셔서 그들이 쳐 놓은 올가미를 피해가셨다.(마태 22,21)
예수님은 비겁하셨나? 세상일에 무관심하셨나?
세상 속에서 복음을 구체적이고 실천적으로 선포하는 게 참 쉽지 않네.
누군가 쳐놓은 안전한 울타리 속에서 앵무새처럼 원론적인 이야기만 되풀이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세상일에 관심을 가지니 자꾸 그 속으로 빨려들어 가 마음이 시끄러워진다.
이러나저러나 하느님 말씀을 잘 못 듣기는 매 한 가지다.
앵무새 마음은 고요하지만 무디고, 세상일에 대한 관심은 구체적이지만 시끄럽고 어둡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은 몹시 슬퍼하였다.(마태 17,23)
되살아나신다고 했는데 그들은 왜 슬퍼했을까? 잘 못 들었나, 아니면 알아들을 수 없었나?
부활을 추억이나 기억 속에 남아있는 것 정도로 생각했었나보다.
제자들은 슬픔을 넘어 절망과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지만
부활하신 주님, 손과 발의 상처를 그대로 간직하고 계신 바로 그분을 뵙고는 기뻐하였다.(요한 20,20)
예수님은 비겁하지도 무관심하지도 않으셨다. 세상의 상처를 고스란히 다 받으셨다.
그분도 고민하고 아파하고 슬퍼하고 화도 내셨다.
하지만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신뢰를 잃지 않으셨다, 죽기까지.
예수님,
가장 아름다운 인간이신 예수님,
참되고 진지하게 살고 싶지만 바람뿐인 것 같습니다.
쉽지 않네요.
그래도 세상 안에 내어 놓으신 당신의 발자국을 잘 따라가려고 나름 노력합니다.
더디 가고 뒤뚱거려도 참아주시고 기다려주소서.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주님의 길을 잘 따라가게 도와주소서. 아멘.
수도자매일복음묵상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박 마리피앗 수녀
요즘 나를 보면 오늘 말씀처럼 살아가는 방법을 선택할 때가 많다.
예전 같으면 이치 따지고 순서 따지고
이건 잘못되었고 저건 또 어떻다느니~~
날씨 탓인지, 나이 탓인지?
완곡히 넘어가고 싶고 또 그렇게 지낸다.
굳이 불편하고 싶지 않아 돌아가기도 한다.
맞서기보다 회피를 선택하기도 한다.
관계 안에서 불편심으로 낭비하는 감정이 아깝고
소모되는 에너지가 아깝다.
예수님 안에서 진정 조금 더 너그러워지고
마음이 넓어지길 기도한다.
‘한모금’ / (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 수녀원)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