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상리마을 어머니들께서만 그랬을까마는
어린시절 우리마을 어머니들께서는 특히 더 부지런하셔 한겨울에도 찬물 빨래를 매우 자주 하셨답니다.
세탁기도 없고 시골에 수돗물도 닿지 않던 그 때, 설날이 가까워지면 더욱 많은 빨랠 하셨답니다.
가온뎃돔 중앙에 있는 서당집 앞의 우물가에서 하시는 때도 있었지만,
빨래가 많을 때는 얼굴을 온통 얼음판처럼 만들 날씨에도
똥아릴 괸 채 빨래다라를 머리에 이고 냇가까지 가셔서 하셨지요.
마을 뒷편 삼사백 미터 떨어진 곳엔
지경 소시장 근처 '댓똘'에서 상리까지 약 2키로 미터 남짓 뻗은, 폭 칠팔백 미터의 '뒷똘'이라는 냇가가 있는데
그곳에서 하셨지요.
냇가의 얼음을 방망이로 두들겨 깨고, 얼음을 휘저으며 열 식구, 아니 개구쟁이 조카들이 와 있던 방학에는
스무 식구의 빨래도 하셨지요.
고무장갑도 없었던 그때, 산더미 같은 빨래를 맨손으로요, 그것도 혼자서 말입니다.
당신께서 손수
쌀겨와 양잿물을 섞어 만드신 쑥개떡 색깔의 비누로
당신의 어린자식 목욕시킬 때 비누칠을 하듯, 빨래감에 비누칠 하시면서
또한 자식들에게 깨끗한 옷 입힐 걸 생각하시면서, 한겨울에 초가집의 굴뚝처럼 입김 내뿜으시며 하셨지요.
머리엔 긴 수건하나 둘러매 쓰시고, 냇가에 홀로 쪼그리고 앉아 갈라터져 피비치는 손 아랑곳없이
“까불지 마라, 안 지워지고는 못 바울 게다, 내 아들딸 깨끗이 입히련다, 이래도 안 지워질래? ”
독백 하시며, 방망이로 두들기고, 비비고, 쥐어짜가며 빨랠 하셨습니다.
빠알간 넝쿨장미 꽃처럼 벌겋게 된 손, 호호불면서 말입니다.
그러면, 제아무리 한겨울의 냇가물이라도 수증길 모락모락 내며 헐덕거린 채
결국 항복하고는 깨끗한 빨래가 되게 했지요.
그래서
홀태로 나락 훓기 등, 가을일 하느라 이곳저곳 갈라터진 어머님들의 손은
농한기인 이 동절기에 오히려 더욱 거칠어지셨답니다.
그렇게 냇가에서 한나절 이상 빨래를 하시면 마치게 되는데, 그러면 우리 상리마을 어머니들께서는
빨래하기 전보다 훨씬 더 무거워진 그 빨래들을 쇠다라에 되 담은 후,
그걸 머리에 이고 또다시 삼사백 미터를 걸어 집에 오셨지요.
오셔서는,
부엌처마에서 잿간처마까지 이어진 빨래줄에
벌겋게 꽁꽁 언 장미꽃 색깔의 곱아든 손으로 빨래를 일일이 털어가며 너르셨습니다.
여름이면 제비가, 겨울이면 참새가 쉬며 자기 새끼들에게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던 장대 위 빨래줄에 말입니다.
저녁때가 다 되어 빨래를 거둘 때는
마르다 말고 되 얼어버린 빨래들은
마치 내장을 모두 훑어내고 바싹 말린 간제미나 홍어처럼 굳은 채, 엉거주춤 그네를 타고 있었지요.
그래서 우리 어머님들께서는
다음날 아침에도, 또 그 다음날 아침에도,
빨래가 다 마를 때까지 몇 날이고 계속 거두고 너르시고, 거두고 너르시고를 반복하셨답니다.
그렇게 하여 그 빨래들이 모두 마르면
우리 어머님들께서는 용도에 따라 빨랠 따로따로 개어놓으셨지요.
다리미질할 빨래, 풀먹일 빨래, 꿰맬 빨래, 이렇게요.
다림질 할 빨래는
뚜껑이 없는 소 주걱 모양의 다리미에 숯불을 올려놓고는 다리미질을 하셨는데,
매운 숯불연기로 목도 쐐하고, 눈도 제대로 못 뜬 채로 누나와 함께 쌩 눈물 흘리시면서
공놀이하고 돌아온 당신 아들의 다리를 주물러주듯 다리미질을 하셨지요.
풀먹일 빨래는
물에 밀가루를 타 휘저어가며 은은한 불에 풀을 쑤시고는 그 걸 다시 체에 걸러 빨래에 먹이셨으며,
이불 호창 등, 다듬이질 할 것은 다듬이독에 옷감을 올려놓고서
그 옛날 한석봉 어머니와 당신을 번갈아 생각하시며, 밤늦게까지 양어깨가 빠지도록 다듬이질을 하셨지요.
양말 뒷금치와 겨울내복의 무릎부위 등, 꿰맬 빨래는
갈라진 손가락에 골무를 씌워 바늘머리를 눌러가며 천년된 포도주보다 훨씬 진한 향으로
닭 울도록 기우시고 기우셨습니다, 이따금 당신의 목 뒷덜미를 주무르시며 말입니다.
바늘이 잘 들어가지 않을 때는 바늘을 당신의 머리카락에 문대 갈아가며 바느질을 하셨고요.
그러한 모든 일과가 끝난 뒤에야 집에서 가장 늦게 잠자리에 드시는 어머니들께서는
주무시기 전에는 이따금 뭔가를 손과 얼굴에 바르셨답니다.
시골에
병원도, 약국도, 화장품가게도 없는 그 때 우리 어머님들께서는
5일장날 약장수한테서 사온 구루므를 보물단지처럼 여기며 손과 얼굴에 바르시곤 했지요.
아껴 쓰느라,
대삿집에 가실 때나 사둔 만나러 가실 때만 바르셨지요.
여기저기 갈라터진 손가락과 거북등이 된 손등에는
고작 맨수리다마나 빨간 아까정끼를 아끼고 아껴가며, 한 달이고 두 달이고 만병통치약처럼 바르셨고요.
그렇게 가장 늦게 주무신 우리 어머니들께선 다음날 아침 일어나시는 것도 집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셨답니다.
그리고는 부엌에 나가셔
아궁이에서 당그래로 재를 퍼내 20여 미터 떨어진 잿간에 갖다놓은 후에는 아궁이 앞에 하얀 애미 토끼처럼 앉아
사자표 성냥으로 지푸라기에 불을 붙이신 뒤,
부지깽이로 지프라기길 저어가며 가마솥에서 김이 모락모락 날 때까지 불을 지피셨습니다.
그러면 밤새 얼음처럼 차갑게만 굴던 가마솥은 끝내는 그런 어머님의 정성에 감동한 듯,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윤기가 번지르르한 밥이 되도록 협조했지요.
또한, 거의 식은 방다닥도 다시 따근해져 잠결에 요밑으로 들어가 새우처럼 자던 어린 아들은
다시 요위로 올라와 큰 대 자로 마음껏 허릴 편 채 잤고요.
살강에서 이 반찬 저 반찬 꺼내 상을 차리시다가 찬이 부족한 듯 하면
그 겨울새벽에 바위바람, 송곳바람 부는 부엌 뒷문을 조금도 주저함 없이 열으시고는
텃밭 장독 옆의 예수님 눈처럼 땅에 박힌 큰 항아리에서 여름철 아이스깨끼 같은 동침지를
고드름 된 손가락 호호불며, 까만 투가리에 가득히 꺼내오셨습니다.
국을 끓이실 땐
가마솥 아궁이에 곁들여 걸어놓은 양은솥을 이용하여 국을 끓이셨는데,
그땐 늘 아궁이에 고구마도 함께 구워 주시면서 목젖도 덩달아 따라넘어갈 시래기 국을 끓이셨답니다.
시래기국을 끓이실 때는
아궁이에 짚을 넣으시면서도 이따금 팔뚝만한 국자로 국물을 떠 "쩝쩝" 몇번이고 간을 보셨는데,
어느 때는 갑자기 "앗 뜨거! " 하시는 통에, 때로는 식구들을 간 떨어지도록 놀라게 하셨던 어머님이셨고요.
또한 그 당시 어머니께서 차려주신 밥상은 무슨 찬이 그리 많은지,
우리 어머니들께서는 모두가 밥상을 늘 무지개빛으로 차리시는 기술자들이셨지요.
아아, 그 당시는 서캐와 이도 어찌 그리 많은지,
상리 우리 어머님들께서는 겨울철이면 새로 생기는 그 일감 때문에도 겨울엔 더욱 쉴 틈이 없었답니다.
그걸 없애려면 탁구선수처럼 손과 눈의 순발력도 매우 좋아야 했지요.
장난기 있는 남자꼬마들은 "툭! " 하고 터지는 소리가 신이나 장난삼아 엄지손톱으로 풍선 터치기 작전을 썼지만,
우리 어머니들께서는 그와 함께 경륜을 살려 이음새나 골 위주로 수색작전에 들어가신 뒤
하얗게 줄지어 있는 중대나 연대를 발견하면 그걸 등잔불에 대고 쭈욱 지지는, 지지기 병법을 썼지요.
그러시다 어느 때는 당신의 앞 머리카락을 고슬린 적도 있으시고요.
또한, 밤에 머릴 긁적거리는 어린 딸을 본 엄마들은 전기불도 없는 등잔불 밑에서 참빗을 이용,
딸아이의 머리에 있는 머릿니와 서캐를 잡아주셨는데,
그때 참지 못하고 자주 움직이는 딸아이를 나무라시다가도 나중엔 안쓰러운지,
당신 자신이 고개가 아프다거나 팔이 저리시다며 긴 하품과 함께 기지개를 펴신 뒤
내일 훤한 대낮에 잡자 하시면서 다음날로 미루시기도 했지요.
그놈의 자식이란 게 뭔지, 실상 알고보면 별것 아닌 게 자식인데,
이렇게 나이 먹었어도 별로 해드린 게 없는 게 바로 자식인데
상리 우리 그 어머니들께서는 그렇게 사시다 가셨습니다.
지경 장날 사오신 생선도 당신은 가시만 드시고, 고기는 자식한테만 발라주시던
하늘보다 높으시고 높은신 그 거룩하신 어머니들께서 다시는 뵐 수 없는 곳으로 영원히 가셨습니다.
초등 2학년 어느 겨울, "왜 흐르는 물은 얼지 안나요?" 물었을 때
바가지에 물을 떠오면서까지, 서툴지만 학교선생님보다 자상히 알려주시던 어머니께서 말입니다.
첫댓글 그간 평안 하셨어요?
넵!
감사합니다
잘 계시지요, 생명님?
@향토(전북) 전 늘 언제나요*^^*
@생명(안산) 어! 지금 쉬는갑네? ㅎ
울친정엄마고향.옥구군임피대야사거리.양복점집(지금세탁소자리요)
어! 참으로 반갑습니다
지금 세탁소 자리.
대야는 세탁소 없고요. 임피는 아직 모르겠군요.
암튼 반갑습니다~~~ㅎ
고운글 속에
머물다 갑니다.